53화(5,627자) · 1597년 5월 16일~27일, 서울에서 아산까지
옥문을 나와
이순신 · 네오
1597년 5월 16일 (음력 4월 1일) 맑음. 옥문을 나와 남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니 봉과 분과 울과 사행과 원경이 한방에 앉아 있었다. 오래 이야기했다. 윤 지사 자신이 와서 위로했다.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보았다. 지사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 술을 차고 다시 왔다. 기헌도 왔다. 이 영공 순신이 술병을 차고 또 왔다. 함께 취하며 정성을 다했다.
옥문을 나왔다.
넉 달 만에 잡은 붓으로 맨 먼저 그 말을 썼다. 윤간의 종의 집 선반에 굴러다니던 남의 붓이었다. 털이 닳아 끝이 갈라져 있어서 획을 그을 때마다 먹이 두 갈래로 벌어졌다. 옥에서는 서리의 손이 내 말을 받아 썼는데, 오늘은 붓대가 내 손가락 사이에 있었다. 잡을 때는 멀쩡하던 손이 붓을 내려놓을 때 떨렸다.
봉과 분이 있었다. 정읍(전북 정읍)에 데려갔던 조카들이었고, 그 옆에 둘째 아들 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사행과 원경도 한방에 있었다. 오래 이야기했지만 옥 안의 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말을 꺼내면 그 흙바닥과 매 소리가 이 방에도 들어올 것 같았다. 대신 여수 이야기를 하고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배 이야기를 했다. 배 이야기가 가장 길었다. 판옥선 뱃전의 나뭇결까지 늘어놓다가, 그 나무를 넉 달 동안 만지지 못했다는 것이 문득 손바닥에 왔다.
사람들이 왔다. 좁은 방에 등잔을 둘이나 켜서 벽의 그을음 자국까지 환했다. 그 불빛 속으로 윤자신이 들어와 손을 잡고 위로했고,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얼굴을 보고 갔다. 윤자신은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 술을 차고 다시 왔고, 기헌도 왔다. 마지막에 방답첨사 이순신이 왔다. 이름이 같은 그가 마침 한양에 있다가 술병을 옆구리에 차고 온 것이다. 문 앞에서 그가 말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왔습니다.”
“무엇이?”
“술 말입니다. 방답(여수 돌산읍)으로 안 가고 곧장.”
다섯 해 전 진해루의 젖은 마루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때 엉뚱한 데로 갔던 것은 문서였고, 오늘 곧장 온 것은 술이었다. 나는 웃었다. 옥에서 나온 첫날이었다. 그는 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그제야 병마개를 뽑았다. 그 웃음을 보려고 꺼낸 말이었다. 우리는 함께 취했다. 그날 일기 끝에 정성을 다했다고 썼는데, 정성을 다해 취하는 데도 정성이 든다는 것을 그 밤에 배웠다.
영의정과 판부사 정탁, 판서 심희수, 김명원 등이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그 이름을 하나도 빼지 않고 적었다. 풀려난 죄인에게 사람을 보낸 이름들이었다. 정탁이 보낸 사람 앞에서는 일어나 절을 했다. 그가 돌아가 무어라 전할지는 몰랐지만, 절했다는 말은 전할 것이다. 그것이면 되었다.
*
5월 18일 (4월 3일) 맑음. 일찍 남쪽 길에 올랐다. 금오랑 이사빈과 서리 이수영과 나장 한언향이 먼저 수원부에 이르렀다. 나는 인덕원에서 말을 먹였다. 저물어 수원에 들었다. 신복룡이 우연히 이르러 내 행차를 보고 술을 마련해 위로했다. 부사 유영건이 나와서 보았다.
남쪽으로 갔다.
흰 옷을 입고 원수의 막하로 가는 길이었다. 원수는 합천 땅 초계(합천 초계면)에 있었다. 금오랑과 서리와 나장, 의금부의 세 사람이 한 걸음 앞서 수원부로 갔다. 잡혀 올 때도 금부의 셋이었다. 사람 수는 같았지만 그때는 등 뒤에서 밀었고 지금은 앞에서 길을 텄다.
인덕원에서 말을 먹였다. 옥에서 나온 지 사흘째였다. 말이 여물통에 코를 박고 콩깍지를 씹었는데, 어금니가 콩을 으깨는 그 둔한 소리를 나는 한참 서서 들었다. 말 등에서 올라오는 땀내와 마른 풀 냄새가 콧속을 채웠다. 옥에는 말이 없었다.
저물어 수원에 들었다. 신복룡이 우연히 그 길에 있다가 내 행차를 알아보고 술을 마련했고, 부사 유영건도 나와 얼굴을 보았다. 우연이 술상이 되어 앞에 놓였다. 옥에서 나온 사람에게는 그런 우연이 잦았고, 나는 오는 대로 받았다.
*
5월 19일 (4월 4일) 맑음. 일찍 길을 떠났다. 독성 아래 이르니 판관 조발이 술을 마련해 오산 황천상의 집에 막을 치고 기다렸다. 진위를 거쳐 가는데 황천상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내어 실어 보냈다. 고맙다고 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수탄을 거쳐 평택현 이내은손의 집에 드니 대접이 매우 은근했다.
짐이 무거웠다.
오산에서 짐 실은 말의 허리가 휘는 것을 황천상이 보았다. 옥에서 나온 사람의 짐이라야 옷 몇 벌에 종이와 붓뿐인데, 그래도 무거웠다. 황천상은 제 말을 내어 짐을 옮겨 싣게 했다. 나는 고맙다는 말을 그치지 못했다. 다섯 해 동안 그치지 않고 되뇌던 말은 통분이었다. 오늘은 그 자리에 고맙다는 말이 들어앉았다.
수탄을 지나 평택현 이내은손의 집에 들었다. 대접이 은근했다. 구들이 따뜻했고 주인은 말이 적었으며, 저녁상의 국에서 김이 오래 올랐다. 아랫목에 등을 붙이자 옥 바닥에서 배어든 한기가 조금씩 빠져나갔다. 아산(충남 아산)이 가까웠다. 어머니는 여수에 계셨고, 아산에는 아버지의 무덤이 있었다. 평택에서 하루를 더 가면 그 무덤이었다.
*
5월 20일 (4월 5일) 맑음. 해가 뜨자 길을 떠나 곧장 무덤에 이르러 절하고 곡했다. 그 길로 뇌의 집에 이르러 선묘에 절했다. 남양 아저씨가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무덤에 절하고 곡했다.
해가 뜨자마자 길을 나서 곧장 무덤으로 갔다. 열네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함경도에서 두 달 만에 부고를 받고 달려왔던 그 무덤 앞에 이번에도 흰 옷을 입고 섰다. 그때는 상복이었고 오늘은 죄인의 옷이었다. 같은 흰색인데 무게가 달랐다.
무덤의 잔디는 아직 푸르지 않았다. 사월 초의 흙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밤이슬에 젖어 차가웠다. 그 흙에 이마를 대고 곡을 했다. 옥에서도, 매 사이에서도 내지 않은 소리가 목구멍을 긁으며 올라왔다. 한참 뒤에 일어서니 무릎이 흔들렸는데, 다리가 끝내 몸을 받쳤다. 매를 맞은 다리가 제 몫을 한다는 것을 무덤 앞에서 알았다.
그 길로 조카 뇌의 집에 가서 선묘에 절했다. 윗대 어른들의 무덤을 차례로 돌며 하나하나 절하고 나니 해가 기울어 있었다.
남양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거기서 들었다. 세는 것이 내 일이었지만 이것만은 세고 싶지 않았다. 세어 보니 하나였다.
*
5월 21일 (4월 6일) 맑음. 멀고 가까운 친지가 다 와서 모였다. 오래 못 본 회포를 풀고 갔다.
친지가 왔다.
아침부터 마당에 신발이 늘어나더니 저녁에는 마루 끝까지 사람이 앉았다. 멀고 가까운 아산 사람들이 옥에서 나온 사람의 얼굴을 보러 왔다. 누구는 말없이 손을 잡았고 누구는 내 등을 쓸었는데, 매 자국 위로 손이 지나갈 때마다 나는 웃는 얼굴을 지켰다. 다들 오래 못 본 회포를 풀고 돌아갔다. 옥에서 굳은 어깨가 그 손들 아래서 조금 풀렸다.
이레부터 아흐레까지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금오랑이 아산현에서 왔고 홍 찰방과 이 별좌와 윤효원이 왔다. 남양 아저씨 상에는 자리를 차려 곡했다. 동네 사람들은 저마다 술병을 차고 와서 먼 길을 위로했고, 그 정을 물리칠 수 없어 극도로 취하고서야 자리가 끝났다. 옥에서 나온 지 여드레에 두 번을 그렇게 취했다. 도사는 술이 세어서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 잡혀갈 때는 금부 사람이 술을 잘 마신다는 것을 몰랐다.
*
5월 26일 (4월 11일) 맑음. 새벽 꿈이 몹시 번거로웠다. 마음이 극도로 나빴다. 병드신 어버이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종을 보내 소식을 알아 오게 했다. 도사가 온양으로 갔다.
새벽 꿈이 번거로웠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쓰지 않았다. 깨어 보니 요가 식은땀에 젖어 있었고 창호지 밖은 아직 검었다. 마음이 극도로 나빴다. 며칠 전 술자리에 붙였던 극도로라는 말을 이번에는 마음에 붙였다.
병드신 어버이가 걸렸다. 아들이 풀려나 아산으로 온다는 말을 들으시고 여든셋의 어머니가 여수에서 배를 타셨다. 남해를 돌아 서해로 올라 안흥까지 오는 뱃길이었다. 늙은 몸이 흔들리는 배 바닥에 누워 계실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떨어졌다. 새해 첫날 촛불 아래서 떨어진 눈물은 나라 일 때문이었다. 오늘은 어머니였다.
종을 보내 소식을 알아 오게 했다. 도사가 온양으로 떠나고 마당이 조용해지자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기다리는 것도 지키는 것이라고 이억기는 말했다. 이날의 나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그냥 기다렸다.
*
5월 27일 (4월 12일) 맑음. 종 태문이 안흥량에서 들어와 편지를 전했다. 초아흐렛날 어머니와 위아래 사람이 무사히 안흥에 닿아 배를 대었다고 했다. 아들 울을 먼저 해정으로 보냈다.
태문이 왔다.
종 태문이 안흥량에서 어머니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짚신 끝이 해져 발가락이 비어져 나와 있었고 종아리까지 흙이 말라붙어 있었다. 초아흐렛날 안흥에 무사히 닿았다고 했다. 무사라는 두 글자를 두 번 읽었다. 두 번 다 같았고, 다행이었다. 다행은 어머니에게 쓰는 말이다.
편지를 뒤집어 보았다. 뒷면은 비어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는 늘 뒷면이 비어 있었는데, 나는 그 빈 종이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배에서 쓰신 편지라 소금기에 한 번 눅었다가 마른 자리가 손끝에 까슬하게 걸렸다.
안흥은 태안 앞바다, 서해다. 거기서 아산까지는 배로 이틀이니 이틀 뒤면 어머니가 오신다. 고음천(여수 시전동 웅천)에서 잘 가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 하신 뒤로 두 번을 더 뵈었다. 이번이 세 번째였고, 흰 옷을 입고 뵙게 되었다.
울을 해정으로 보냈다. 아들이 바닷가로 할머니를 마중 나갔고 나는 가지 않았다. 금오랑이 아직 곁에 있었다. 금오랑이 있는 동안 죄인은 제 발로 마중을 나서지 못했다. 흰 옷의 법이었다. 법은 고칠 수 없다고 누가 말했는가. 내가 말했다.
*
밤에 앉았다.
아산의 밤, 흥백의 집이었다. 서랍을 열자 열네 해 전에 두고 간 붓이 그대로 있었다. 붓털이 뻣뻣하게 굳어 있어서 물에 적신 뒤 손끝으로 한참 풀어 주어야 했다. 그 붓으로 오늘 일을 쓰고, 옥문을 나온 날부터 열이틀 치를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술이 몇 번이고 절이 몇 번이고 눈물이 몇 번인지 손가락을 꼽았다. 눈물은 한 번이었다. 세는 버릇이 돌아와 있었다.
이틀 뒤였다. 세지 않아도 아는 수를 손가락으로 다시 꼽았다. 등잔 심지가 타들어 가며 작게 탁 소리를 냈고, 마당 건너 외양간에서 소가 한 번 몸을 뒤척였다. 그 밤의 나는 이틀이 어떤 이틀이 될지 몰랐다. 몰라서 그 밤은 잠이 왔다.
사료 · 4월 1일 옥문을 나와 윤간의 종의 집에서 봉·분·울·사행·원경과 이야기하고 윤자신·이순지·기헌·이순신이 술을 차고 와 함께 취한 것, 영의정·정탁·심희수·김명원 등이 문안한 것, 3일 남쪽 길에 올라 인덕원에서 말을 먹이고 수원에서 신복룡이 우연히 술을 마련한 것, 4일 독성에서 조발이 막을 치고 기다리고 황천상이 짐이 무겁다고 말을 낸 것, 평택 이내은손의 은근한 대접, 5일 무덤에 절하고 곡하고 뇌의 집에서 선묘에 절하고 남양 아저씨의 부고를 들은 것, 6~9일 친지가 모이고 동네 사람들의 술에 극도로 취한 것, 11일 새벽 꿈이 번거롭고 「병드신 어버이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져」 종을 보낸 것, 12일 종 태문이 안흥량에서 와서 초아흐렛날 어머니가 무사히 닿았다는 편지를 전하고 울을 해정으로 보낸 것 ―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12일(전서본) · 방답첨사의 「이번에는 제대로 왔습니다」, 어머니 편지의 뒷면, 금오랑이 있어 마중을 못 간 까닭, 밤에 센 것은 지어냈다. 어머니의 나이 여든셋은 1515년생으로 센 것이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