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5,870자) · 1597년 5월, 서울 · 우의정 정탁

신구차

이순신 · 네오

1597년 5월 (음력 3월 말~4월 초), 한양 이 무렵 이순신은 옥에 있어 일기를 쓰지 못했다. 우의정 정탁이 차자를 올렸다. 엎드려 생각건대 이 아무개는 몸소 큰 죄를 범하여 죄명이 매우 엄한데 성명께서 곧 죽이지 않으시고 처음 문초한 뒤에 또 엄히 국문하기를 허락하셨으니, 이는 성상께서 어질음을 몸으로 하시는 한 생각으로 기어이 그 실상을 알아내어 혹 살 길을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정탁은 일흔둘이었다.

일흔둘의 우의정이 밤에 붓을 잡았다. 촛불 하나를 책상 왼쪽에 두고 벼루에 물을 조금만 부었는데, 먹 가는 소리가 빈 방에서 오래 났다. 그는 그 소리가 그치기 전에는 첫 줄을 쓰지 않았다. 차자는 정승이 임금에게 올리는 짧은 글이지만, 이번 차자는 길어야 했다.

먹이 진해질수록 방 안에 송연 냄새가 찼다. 삼월 말의 밤은 아직 차서 문풍지가 바람결에 한 번씩 떨었고, 그는 무릎에 덮은 솜옷을 끌어올리며 늙은 손가락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마디가 굳어 있었다. 먹을 찍기 전에 손부터 풀어야 하는 나이였다.

그 사람에 대해 정탁이 들은 이야기가 둘 있었다. 열세 해 전 함경도 순찰사 정언신이 조산(함경북도 경흥 조산)의 젊은 만호가 아버지 상을 당해 달려간다는 말을 듣고 길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성복하고 가라고 일렀는데, 그 젊은이는 한시도 늦출 수 없다며 말을 몰아 집에 이르러서야 상복을 입었다고 했다.

기축년에는 그 정언신이 옥에 갇혔다. 모두가 몸을 사리던 때 옥문 밖에 와서 안부를 묻고 간 사람이 그였고, 금오랑들이 당 위에서 풍악을 울리자 죄가 있든 없든 나라의 대신이 옥에 있는데 이럴 수 있느냐고 나무란 사람도 그였다. 옥문 밖에 서 있던 사람이 지금은 옥 안에 있었다. 정탁은 먹을 찍었다.

*

먼저 형신을 말했다.

신이 일찍이 관원을 맡아 죄인을 국문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무릇 죄인이 한 번 형신을 겪으면 죽는 자가 많습니다. 그 사이에 비록 논할 만한 사정이 있어도 먼저 목숨이 끊어지면 이미 미칠 수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것을 가만히 민망히 여겼습니다. 지금 이 아무개가 이미 한 차례 형신을 겪었는데 만약 또 형을 가하면 엄한 국문 아래 반드시 산다고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성상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본뜻을 상할까 두렵습니다.

한 차례 형신을 겪었다는 대목에서 붓끝이 떨렸다. 떨림이 획 하나를 옆으로 밀어 놓았는데, 그는 그 글자를 긁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나이 탓인지 다른 탓인지 스스로도 가리지 못했다. 먹을 다시 찍는 동안에야 알았다. 매를 한 번 맞은 몸이 지금 옥 바닥에 누워 있다. 한 번 더 맞으면 죽고, 죽은 사람의 사정은 아무도 논하지 못한다.

매를 치는 방을 그는 알았다. 국문을 맡아 여러 번 앉아 본 자리였다. 형장이 살을 치는 소리는 둔하고 짧았고, 몇 대가 지나면 죄인은 더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 조용함 끝에 숨이 끊긴 자를 그는 여럿 보았다.

논할 사정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는 굳은 손가락을 입김으로 녹이고 다음 장을 폈다. 종이가 책상 위에서 사각거렸다.

*

붓은 임진년으로 넘어갔다.

임진년에 왜의 배가 바다를 덮고 적의 형세가 하늘에 닿던 날, 땅을 지키는 신하 가운데 성을 버린 자가 많고 진을 맡은 장수 가운데 군사를 온전히 한 자가 적어 조정의 명이 거의 사방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 아무개가 수군을 거느리고 앞장서 원균과 함께 흉한 칼날을 꺾으니 나라 안 인심이 조금 살 뜻이 생기고, 의병을 일으킨 자가 기운을 더하고, 적에게 붙었던 자가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 공이 만으로 커서 조정이 크게 가상히 여겨 높은 벼슬을 더하고 통제사의 이름을 내린 것이 마땅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균과 함께라는 말을 쓰고 나서 그는 붓을 잠시 허공에 들고 있었다. 지금 조정은 원균을 믿었다. 원균을 빼고 이 아무개만 높이면 임금은 첫 장에서 글을 덮을 것이다. 일흔둘이 되도록 조정의 종이를 만져 온 사람은 그런 법을 알았다. 남쪽 사람의 일기는 원균을 두고 앞도 뒤도 없다고, 세 척뿐이라고 했지만, 그 일기를 본 적 없는 정탁은 원균을 넣었다. 살리려면 넣어야 했다.

붓은 한 걸음 더 나갔다. 진격하여 적을 치던 처음에 돌진해 먼저 오르는 용기는 원균에 미치지 못했다고 사람들이 혹 의심하는데 그것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원균이 거느린 배가 마침 그때 조정의 지휘를 잘못 받들어 많이 태우고 가라앉혔으니 이 아무개의 온전한 군사가 없었으면 형세를 만들어 기이한 공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원균은 수군의 일에 재주가 한쪽으로 뛰어나고 천성이 충실하고 일을 당해 피하지 않고 돌격을 잘합니다. 두 장수가 마음을 합쳐 힘을 다하면 적을 물리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신이 매번 임금 앞에서 이 일을 아뢰었습니다.

원균이 충실하고 피하지 않으며 돌격을 잘한다고 쓰는 사이에 촛농이 한 줄 흘러내려 촛대에 굳었다. 남쪽의 일기가 원균에게 붙인 말은 여섯이었다. 흉험, 흉휼, 가소, 흉, 놀랍다, 흉패. 그 일기는 한산도(통영 한산면)에 있었고 정탁은 그 여섯 마디를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도 그는 이 줄을 썼을 것이다. 사람을 구하는 글은 미운 사람을 칭찬하고, 곧게 서지 않는다. 곧으면 못 구한다.

그 줄을 쓰고 나서 그는 한참 창 쪽을 보았다. 창호지 위에서 촛불 그림자가 흔들렸다. 첫닭이 울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었다.

*

그다음이 이 글의 몸이었다.

어떤 이는 이 아무개가 한 번 공을 세운 뒤에 다시 적을 만한 공이 없다고 하여 가볍게 여깁니다.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네다섯 해 동안 명나라 장수가 강화를 주장하고 명나라 조정의 동쪽 봉하는 일이 또 일어나 우리나라 크고 작은 장수가 그 사이에 손을 쓸 수 없었으니, 이 아무개가 다시 힘을 펴지 못한 것은 그의 죄가 아닙니다.

근일 왜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들어온 것에 이 아무개가 미처 두루 하지 못한 데에도 논할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대개 지금 변방 장수의 한 번 움직임은 반드시 조정의 명을 기다려야 하고 다시는 장군이 진 밖에서 홀로 처리하는 일이 없습니다. 왜가 바다를 건너기 전에 조정이 비밀히 내린 교서가 제때 닿았는지 알 수 없고, 바다의 바람이 순한지 거스르는지, 노와 돛이 편한지도 알 수 없습니다. 수군이 번을 나눈 것도 부득이한 일로 도체찰사가 스스로 탄핵한 장계에 밝게 실려 있습니다. 수군이 급한 때에 힘을 다하지 못한 것은 사세가 또한 그러하니 이것을 전부 이 아무개에게 돌릴 수는 없을 듯합니다.

전부 돌릴 수는 없을 듯하다. 정탁은 없다고 쓰지 않고 없을 듯하다고 썼다. 곧게 밀어붙이면 임금이 노하고, 노한 임금은 끝까지 읽지 않는다. 듯하다는 반걸음 물러서는 말이어서, 읽는 사람이 제 걸음으로 따라와 그 자리에 서게 해 주었다. 일흔둘의 붓은 그 반걸음을 알았다. 남쪽 사람이 이 글을 읽는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고마운 자리에서 늘 말이 없었다.

바깥에서 순라가 딱따기를 치며 지나갔다. 그 소리가 골목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는 다음 줄을 쓰지 않고 먹을 한 번 더 갈았다. 벼루 바닥이 드러날 만큼 먹물이 줄어 있었다. 물을 몇 방울 더 떨어뜨리자 먹 가는 소리가 다시 빈 방을 채웠고, 그 소리가 고르게 이어지는 동안 손도 조금씩 풀렸다.

*

밤이 깊었다.

정탁은 붓을 내려놓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초가 짧아져 글자 위로 그림자가 길게 누웠고, 그는 종이를 불 쪽으로 당겨 한 번 더 읽었다. 두 번 다 같은 글이었다. 고칠 데가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 사람이 다행이라는 말을 비와 어머니에게만 쓴다는 것을 정탁은 몰랐다.

글이 길어서 임금이 끝까지 읽을지 알 수 없었다.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었다. 형신을 맨 앞에 둔 까닭이 거기 있었다. 또 형을 가하면 죽는다는 그 몇 줄만 읽히면 되었고, 나머지는 사람이 살아난 다음에 읽어도 늦지 않았다. 그는 종이를 접어 문갑 위에 올려놓고 촛불을 불어 껐다. 어둠 속에서 먹 냄새가 한동안 남아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올렸다.

새벽에 관복을 갖추는 동안 종이 차자를 싼 보자기를 두 손으로 받들고 서 있었다. 궐로 가는 가마 안에서 그는 보자기를 무릎에 올려놓고 한 번도 풀어 보지 않았다. 고칠 것이 없는 글은 다시 펴 보지 않았다.

답은 며칠 뒤에 왔다. 사면하되 백의로 원수 막하에서 공을 세우게 한다. 벼슬을 떼고 흰 옷 차림으로 군중을 따르게 하는 백의종군이었다. 열 해 전 녹둔도(두만강 어귀, 지금은 러시아 땅)의 일로 한 번 입었던 흰 옷을 그 사람은 다시 입게 되었다. 그 흰 옷을 누가 만들었는지 정탁은 따지지 않았다. 여럿이 손을 보탰을 것이다. 밤에 먹을 갈던 늙은 손도 그 여럿 가운데 하나였다.

*

옥문이 열렸다.

음력 4월 초하루, 넉 달 만에 옥의 흙냄새를 옷에 묻힌 채 그는 원문을 나와 남문 밖 윤간의 종의 집으로 갔다. 조카 봉과 분, 아들 울이 기다리고 있었고 사행과 원경도 함께였다. 한방에 둘러앉아 오래 이야기했다. 윤자신이 와서 위로하고 돌아갔다가 저녁을 먹은 뒤 술을 차고 다시 왔다. 비변랑 이순지가 와서 얼굴을 보았고 기헌도 왔다. 이름이 같은 방답첨사 이순신도 마침 한양에 있다가 술병을 차고 왔다. 좁은 방에서 다들 함께 취하며 정성을 다했다.

정탁은 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 우의정이 풀려난 죄인의 술자리에 앉을 수는 없었다. 대신 사람을 보냈고, 그 사람이 밤늦게 돌아와 전했다. 판부사 영감의 안부를 전하니 오래 있다가 절을 하셨습니다. 정탁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촛대만 보았다. 기축년에 옥문 밖에서 남의 안부를 묻던 사람이 이제 옥문을 나와 그에게 절을 했다.

그날 남쪽 사람의 일기가 넉 달 만에 다시 시작되었다. 4월 초하루, 맑음, 옥문을 나왔다. 그 짧은 말이 첫 줄이었다. 정탁은 그 일기를 끝내 보지 못했다. 그래도 제 긴 차자 끝에 그 짧은 한 줄이 이어 붙었다는 것만은 알았을 것이다. 사람을 구하는 글은 그렇게 값을 치렀다.

사료 · 정탁의 신구차 — 「엎드려 생각건대 이 아무개는 큰 죄를 범하여 죄명이 엄한데 성명께서 곧 죽이지 않으시고…」로 시작해, 「죄인이 한 번 형신을 겪으면 죽는 자가 많으니 또 형을 가하면 산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임진년의 공과 「원균과 함께 흉한 칼날을 꺾은」 것, 「돌진해 먼저 오르는 용기는 원균에 미치지 못했다고 의심하나 원균의 배가 조정의 지휘를 잘못 받들어 많이 태우고 가라앉혔으니 이 아무개의 온전한 군사가 없었으면 공을 이룰 수 없었다」, 「원균은 천성이 충실하고 피하지 않고 돌격을 잘하니 두 장수가 힘을 합치면 적을 물리치기 어렵지 않다」, 「명나라가 강화를 주장하는 네다섯 해 동안 힘을 펴지 못한 것은 그의 죄가 아니다」, 「변방 장수의 움직임은 조정의 명을 기다려야 하고 교서가 제때 닿았는지, 바람이 순했는지 알 수 없으니 전부 돌릴 수는 없을 듯하다」 ― 이충무공전서 권12 부록, 신구차(우의정 정탁) · 함경도 순찰사 정언신이 이순신의 아버지 상에 길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성복하고 가기를 청한 것, 기축년 우의정 정언신이 옥에 있을 때 이순신이 옥문 밖에서 안부를 묻고 당 위에서 풍악을 울리는 금오랑을 나무란 것 ― 이분, 이충무공행록. 정탁이 이 이야기를 들어 알았다는 것은 지어냈다 · 4월 1일 사면되어 백의로 원수 막하에서 공을 세우게 한 것 ― 행록. 4월 1일 「옥문을 나와 남문 밖 윤간의 종의 집에 이르러 봉·분·울·사행·원경과 한방에 앉아 오래 이야기하고, 윤자신·이순지·기헌·이순신 영공이 술을 차고 와서 함께 취했으며, 영의정과 판부사 정탁·심희수 등이 사람을 보내 문안했다」 ― 난중일기 정유년 4월 1일(전서본) · 정탁의 나이 일흔둘은 1526년생으로 센 것이다. 밤에 붓을 잡은 것, 떨린 손, 원균을 넣은 까닭, 「듯하다」를 쓴 까닭, 보낸 사람이 전한 절은 지어냈다. 신구차를 올린 날짜는 전서에 없어 3월 말로 잡았다 · 이 회차는 정탁의 3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정유년 4월 1일은 양력 5월 16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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