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5,337자) · 1587년 가을 녹둔도 · 격군 김개동

목책

이순신 · 네오

1587년 (선조 20년) 가을, 녹둔도(두만강 어귀, 지금은 러시아 땅) 정해년에 잡혀갔다가 도망쳐 돌아온 영 수군 김개동과 이언세의 진술. 소인들을 잡아간 왜는 본디 왼쪽 귀가 없었는데 지금 왜의 머리를 보니 눈썹과 눈이 완연합니다.

김개동은 낫을 들고 있었다.

벼를 베는 낫이었다. 녹둔도 둔전의 벼가 익은 가을이었고, 목책 안 군사가 다 나와 베고 있었다. 벼 이삭이 무거워 고개를 숙였고, 논둑의 풀에 맺힌 이슬이 짚신을 적셨다. 그도 조산(함경북도 경흥 조산) 수군이었는데, 배가 없는 데서 수군은 벼를 벤다.

안개가 짙어 지척이 안 보였고 안 보이는 데서 베었다. 이슬에 젖은 벼 포기를 왼손으로 한 줌 모아 쥐면 손바닥이 금세 차가워졌고, 낫이 밑동을 끊을 때마다 풋내와 흙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옆 사람의 낫 소리로 옆에 사람이 있는 것을 알았다. 같은 조산 사람이고 같은 스무 살인 이언세였다. 이언세는 낫질이 느려서 늘 한 두둑 뒤처졌고, 김개동이 제 두둑을 끝내면 돌아가 그쪽을 거들곤 했다.

말발굽 소리가 났다.

안개 속에서 사방에서 났다. 낫을 놓고 뛰었는데 어디로 뛰는지 몰랐다. 목책 쪽이라고 생각했지만 안개 속에서 목책 쪽이 어느 쪽인지 몰랐고, 모르는 채로 뛰다가 붙들렸다.

붙든 것은 말 위의 크고 거친 손이었다. 그 손이 그를 말 위로 끌어올려 엎었고, 엎어진 채로 갔다. 배가 안장 앞에 걸려 말이 뛸 때마다 숨이 빠져나갔고, 거꾸로 매달린 머리로 피가 몰려 귀가 먹먹했다. 말의 땀에서 누린내가 났고 그 냄새가 옷에 배었다. 안개 밖으로 나오니 잡힌 사람들이 보였다. 예순쯤 되는 사람이 말마다 하나씩 엎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 이언세가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그가 마주쳤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

잡은 사람 가운데 왜가 있었다.

오랑캐가 아니었다. 옷이 달랐고 말이 달랐고 칼이 달랐다. 서너 자 칼을 찬 사람이 넷쯤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두목이었다. 늙어서 머리가 반은 희었고, 그 사람한테서는 오랑캐의 누린내와 다른, 쇠에 기름 먹인 냄새가 났다. 그리고 왼쪽 귀가 없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잘린 것이었다. 오래된 자리라 귀뿌리만 남고 그 위가 없었는데, 잘린 자리의 살이 번들번들하게 아물어 쭈글쭈글한 주름으로 모여 있었다. 김개동은 그것을 말 위에 엎어진 채로 올려다보았다. 귀가 없는 자리가 하늘 아래 있었고, 그날 그가 제일 오래 본 것이 그 자리였다.

그 사람이 죽일 필요가 없는 사람을 죽였다. 잡힌 사람 가운데 하나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쳐 못 걸었다. 못 걷는 사람은 데려갈 수 없고 데려갈 수 없으면 두고 가면 되는데, 두목이 말에서 내려 그 사람을 베고 다시 말에 타면서 웃었다. 즐기는 얼굴이었다.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김개동은 그때 알았다. 죽일 필요가 없는데 죽이는 것, 그리고 웃는 것.

그 얼굴을 잊으려고 다섯 해를 썼지만 안 됐다.

*

그날 저녁에 만호가 왔다.

이번에는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났다. 둘이 크게 소리치며 왔다. 조산만호 이순신과 이운룡이었고, 열 남짓 가운데 둘이 말을 타고 나온 것이라고 뒤에 들었다. 그때는 소리만 들었다. 우리 말, 우리 소리였고, 그 소리를 듣고 오랑캐가 달아나면서 잡은 것을 말에서 떨어뜨렸다. 김개동은 땅에 떨어졌고, 살아 있었다. 벤 벼 그루터기가 뺨을 긁었고 입 안에 흙이 들어왔는데, 그 흙을 뱉지 않고 한참 엎드려 있었다.

일어나서 보니 만호가 말 위에 있었다. 마흔쯤 되는 사람이 갑옷을 입고 활을 들고 달아나는 오랑캐를 보고 있었다. 쫓지 않았다. 쫓으면 열 남짓이 비고 열 남짓이 비면 목책이 빈다. 김개동은 그것을 뒤에 알았고, 그때는 만호가 왜 안 쫓는지 몰랐다.

만호의 왼쪽 다리에 화살이 박혀 있었다.

김개동이 그것을 보았다. 허벅지에 오랑캐 화살이었다. 만호가 그것을 보지 못하게 몸을 돌렸고, 돌리는 것을 김개동이 보았다. 돌린 뒤에서 뽑았다. 살이 화살을 놓는 작은 소리가 났고, 그 소리를 김개동은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무 살 수군이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었다.

뽑은 화살을 만호가 두만강에 던졌다. 화살이 물에 떨어져 떠내려가는 것을 김개동은 보았다. 화살은 잠깐 물 위에 비스듬히 떴다가 물살에 돌며 가라앉았고, 강물이 흙빛이라 가라앉은 뒤로는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강은 그것을 적지 않는다.

*

만호가 잡혀갔다.

병사 이일이 잡아갔다. 목책이 뚫린 죄를 만호에게 씌우려 했다고 뒤에 들었고, 만호가 술도 물도 안 마시고 들어갔다고 들었고, 초본을 대고 낯빛을 안 바꿨다고 들었다. 그리고 흰 옷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 말들은 목책 안 부엌에서, 우물가에서, 밤에 덮은 거적 밑에서 조금씩 건너왔고 건너올 때마다 조금씩 달라졌다.

김개동은 그것을 다 들었는데 들은 것을 어디 둘 데가 없었다. 자기를 되찾은 사람이 자기를 되찾은 죄로 흰 옷이 되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스무 살은 몰랐다. 모르는 채로 두만강의 겨울을 났다. 강바람이 목책 틈으로 들어와 손등을 트게 했고, 튼 자리가 갈라져 피가 나면 그 피가 그대로 얼었다. 흰 옷을 입은 만호가 눈밭을 걷는 것을 멀리서 보았다. 흰 옷이 눈과 같은 색이라 눈 위에 흰 옷이 있으면 사람이 안 보이고, 안 보이는 사람이 걸어갔다.

이듬해 만호가 남쪽으로 갔다. 갔다는 것만 들었고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남쪽은 넓고, 넓은 데로 갔다.

*

이언세가 말 위에서 울었다.

잡혀가는 동안 엎어진 채로 소리를 안 내고 울었고, 우는 것을 김개동이 옆 말 위에서 보았다. 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말을 하면 오랑캐가 듣고 들으면 친다. 그래서 눈으로만 보았고, 눈으로 보는 것이 그날 둘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언세의 눈물이 거꾸로 흘러 이마로 갔고, 이마에서 말의 옆구리로 떨어졌다.

두만강을 건너는 줄 알았다. 건너면 그쪽 땅이고, 그쪽 땅에 가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스무 살도 알아서 울었다. 우는 것은 아는 것이다. 모르면 안 운다. 김개동은 울지 않았는데, 몰라서였는지 알아서였는지는 뒤에도 알 수 없었다. 입 안에 쓴 침이 고였고 그것을 삼키면 목이 따가웠다.

건너지 않고 강 이쪽에서 멈췄다. 목책에서 화살이 날아와 수십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오랑캐가 물러난 것이라고 뒤에 들었다. 물러나는 동안 김개동은 말 위에 있었고 말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데서는 다리가 버틴다는 것을 그는 뒤에 배 위에서 다시 배웠다.

*

그날 밤 목책 안에서 밥을 먹었다.

되찾은 예순 남짓이 목책 안에 앉아서 밥을 먹었다. 낮에 베던 벼가 아니라 목책 안에 남은 묵은 쌀이었고, 그것을 만호가 다 내놓았다. 오래 묵은 쌀이라 밥에서 곳간 냄새가 났고 낱알이 푸석하게 부서졌는데, 그래도 뜨거웠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내려가자 그제야 손이 떨렸다. 다 내놓으면 내일이 없다는 것을 만호도 알았을 것이다. 오늘 밤 이 사람들이 밥을 먹어야 내일이 있었다.

만호는 먹지 않고 목책 위에 서 있었다. 안개가 걷힌 밤이라 달이 있었고, 달빛 아래 서 있는 사람이 다리를 절었다. 저는 것을 감추려고 기둥에 기대 있었고, 기댄 것을 김개동이 밥을 먹으면서 보았다.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넘어가지 않는 것을 억지로 넘겼다. 넘기는 것이 되찾아진 사람의 예였다.

모닥불에서 젖은 장작이 연기를 뿜어 눈이 매웠고, 예순 남짓의 젖은 옷에서 올라오는 쉰내가 밥 냄새와 섞였다. 이언세가 옆에서 말했다.

“살았다.”

“살았다.”

“내일은.”

“몰라.”

둘이 같은 말을 했다. 스무 살 둘이 목책 안에서 모른다고 했는데, 모르는 것을 아는 사람이 위에 서 있었다. 그 사람도 몰랐을 것이다. 몰라도 서 있었다. 예순 남짓이 그 사람을 올려다보다가 목책 안에서 낫을 베고 잤다. 노가 아니라 낫이었다. 그때는 노를 몰랐다. 낫자루는 짧고 가벼워서 베고 누우면 목이 자꾸 한쪽으로 꺾였다.

*

다섯 해 뒤에 김개동은 남쪽에 있었다.

여수 좌수영(여수)이었다. 어떻게 왔는지는 길어서 여기 다 말하지 않는다. 조산의 수군이 여수의 수군이 되어 배를 탔고 격군으로 노를 저었다. 노 자리는 어둡고 좁아서 무릎이 앞사람 등에 닿았고, 판자에 밴 송진과 땀 냄새가 여름이면 숨을 막았다. 노를 젓는 배의 뱃머리에 마흔여덟 살 사람이 갑옷을 입고 활을 들고 서 있었다. 당길 때 안 떨리고 풀 때 떨리는 손, 그 사람이 좌수사였다. 김개동이 그 사람을 알아보았고 그 사람은 김개동을 알아보지 못했다. 예순 남짓 가운데 하나를 어떻게 알아보는가. 김개동은 그것을 서운해하지 않았다. 알아보는 것은 잡혔던 사람의 일이고 잡혔던 사람을 못 알아보는 것은 되찾은 사람의 일이었다. 되찾은 사람은 수를 센다. 하나하나를 세지 않는다.

부산 앞바다에서 팔에 탄환을 맞았다. 들어간 자리는 처음엔 뜨겁기만 하다가 한나절이 지나자 팔 전체가 부어 소매가 끼었다. 죽지 않고 가덕(부산 강서구 가덕도)에서 목을 보았다. 왼쪽 귀 없는 목, 늙은 얼굴, 눈썹과 눈. 다섯 해 동안 잊으려 한 얼굴이 소금에 절여지기 전에 갑판 위에 있었다. 갑판 판자에 핏물이 배어 검었고, 그 위에 놓인 목의 귀뿌리에 녹둔도에서 올려다본 번들번들한 흉이 그대로 있었다.

주저앉아서 말했다. 이 왜입니다. 소인을 잡아간 왜입니다.

좌수사가 그를 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김개동을 예순 남짓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하나로 보았고, 김개동은 그 얼굴을 다섯 해 만에 받았다. 받은 것을 이번에는 둘 데가 있었다. 팔이 아팠고, 아픈 데에 두었다.

좌수사가 물었다. 그때 다리를 보았느냐. 김개동이 답했다. 보았습니다, 강에 던지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좌수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예였다. 김개동은 그 예를 받고 노 자리로 내려가서 노를 잡았다. 팔이 아파서 한 손으로 잡았다. 한 손으로 잡아도 노는 노다.

사료 · 정해년(1587)에 잡혀갔다 도망쳐 돌아온 영 수군 김개동·이언세가 부산 앞바다에서 이몽구가 벤 왜의 머리를 보고 「소인들을 잡아간 왜는 본디 왼쪽 귀가 없었는데 눈썹과 눈이 완연하다, 이 왜는 늙었고 추장으로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사람 죽이기를 즐겼다」고 한 것 ― 부산파왜병장, 이충무공전서 권2 · 녹둔도에서 안개 속에 군사가 벼를 베다 기병에게 잡혀가고 조산만호가 이운룡과 쫓아 예순여 명을 되찾은 것, 왼쪽 다리의 화살을 몰래 뽑은 것, 이일에게 잡혀 백의종군한 것 ― 이충무공행록·징비록 · 김개동이 그날 어떻게 잡혔고 무엇을 보았는지는 사료에 없다. 낫, 안개, 말 위에서 본 귀, 다리 다친 사람을 벤 것, 화살을 강에 던진 것, 흰 옷이 눈밭을 걷는 것, 목책 안의 밥과 이언세와의 말, 여수로 온 길, 좌수사와의 마지막 대화는 지어냈다. 김개동·이언세가 조산 수군이었는지도 사료에 없다 · 이 회차는 김개동의 3인칭이다. 앞 회차와 같은 날을 맞은편 눈으로 본다 · 양력 날짜 ― 1587년의 일은 달까지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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