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5,633자) · 1596년 9월, 서울 · 류성룡

옥에서 죽은 장군

이순신 · 네오

1596년 9월 (음력 8월), 한양 이 무렵 이순신은 일기를 썼으나 이 일은 적지 않았다. 8월 24일 충용익호장군 김덕령이 옥에서 죽었다. 옥에 있은 지 무릇 스무 날 남짓에 형벌로 문초하기 여섯 번에 다리뼈가 이미 부러졌으나 그래도 무릎으로 걸었다.

류성룡은 옥의 문서를 읽고 있었다.

그는 영의정이었다. 반백이 된 수염 끝이 가슴께에 닿았다. 세 해 전 안주(평안남도 안주)에서 비를 맞던 좌의정이 이제 영의정이 되어 한양에 있었다. 한양은 되찾았지만 궁궐은 불타 버렸고, 그을린 주춧돌 곁에 임시로 지은 집이 서 있었다. 새로 깎은 기둥에서는 아직 송진 냄새가 났다. 그 집 마루에서 그는 옥에서 올라온 문서를 폈다. 먹이 채 마르지 않은 종이에서 옥의 눅눅한 냄새가 묻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문서 맨 앞에 김덕령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옥리의 서툰 글씨라 획이 굵고 삐뚤었으며, 이름 석 자 위에 누군가 짚은 손때가 거뭇하게 배어 있었다.

광주 사람으로, 상중에 칼을 짚고 일어난 사람이었다. 담양에서 군사 수천을 모아 원수에게 알리자 원수는 초승군이라는 석 자를 표장으로 삼게 했고, 조정은 익호장군이라는 호를 내렸다가 다시 충용장군이라는 호를 더했다. 범 두 마리를 잇달아 때려잡아 왜의 병영에 보내 자랑하며 팔았다는 이야기도 그를 따라다녔다. 그 사람이 지금 옥에 있었다.

지난해 가을 그가 한산도(통영 한산면)에 갔던 일도 류성룡은 알고 있었다. 장문포(거제 장목면)에서 곽재우와 함께 배를 타고 가 뭍에 올랐다가, 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곧 배로 내려왔다. 남쪽에서 올라온 종이는 그 일을 여덟 자로 끝냈다. 류성룡은 그 여덟 자를 읽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아끼는 것이 영의정의 예였다.

*

7월,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이 일어났다. 장마가 막 걷혀 들판의 벼가 한창 자라던 때였다.

역적이었다. 편비로 종군하다가 나라가 어렵고 위태로운 것을 보고 한현이라는 자와 함께 하늘을 쏠 꾀를 냈다. 무리를 몰아 홍주를 에워쌌지만 목사 홍가신이 성문을 굳게 닫고 버텼다. 며칠을 쳐도 들어가지 못하자 이몽학은 물러나면서, 한현이 오면 목사의 머리를 깃발 끝에 달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얼마 못 가 잡혀 죽었다.

죽은 뒤에 그의 문서를 뒤지자 김, 최, 홍 세 성이 나왔다. 한현을 잡아 물으니 그가 이름을 댔다. 김덕령, 최담령, 홍계남. 그리고 곽재우와 고언백도 우리의 심복이다.

류성룡은 그 공술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종이를 쥔 손끝이 여름 습기에 눅어 가장자리가 자꾸 말려 올라왔고, 그는 벼루 뚜껑으로 한쪽 귀를 눌러 두었다. 붙잡힌 사람이 붙잡은 사람 앞에서 어떤 이름을 대는지 그는 알았다. 이름난 이름을 대면 조정이 흔들리고, 조정이 흔들리는 동안 붙잡힌 목숨은 며칠 더 붙어 있다. 옥은 그렇게 셈을 했다.

원수가 이 공술을 갖추어 아뢰고 군관을 나누어 보내 김덕령을 잡게 했다. 그때 김덕령은 역적을 치라는 원수의 명을 받고 진주에서 운봉까지 가 있었다. 충청도가 평정되었다는 말을 듣고 광주에 다녀올 휴가를 청했으나 원수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본진으로 돌아갔고, 돌아간 그 자리에서 진주 옥에 갇혔다.

*

임금이 조정 신하들에게 의논하게 했다. 불탄 궁궐 대신 쓰는 좁은 전각이라 신하들은 어깨가 닿을 만큼 붙어 앉았고, 한여름 더위에 관복 속으로 땀이 흘러내렸다.

어떤 이가 말했다. 김덕령은 용기와 힘이 뛰어나 소홀히 할 수 없으니 사람을 체찰부에 보내 일이 있다고 핑계하여 불러다 그 자리에서 사로잡는 것이 편하다.

어떤 이가 말했다. 불가하다. 김덕령은 한낱 미친 자니 염려할 것이 없고, 하물며 간사한 꾀를 써서야 어찌 아랫사람을 통제하겠는가. 법대로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보내어 잡아오라.

류성룡이 어느 쪽에 섰는지는 그 자신이 뒤에 남기지 않았다. 남기지 않은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이 이야기도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데까지만 말하고,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는 지어 붙이지 않는다.

김덕령은 한양으로 끌려와 옥에 들어갔다. 진주에서 한양까지 수백 리 길을 금부도사에게 끌려 올라왔고, 옥문이 그의 등 뒤에서 무겁게 닫혔다.

*

문초는 여섯 번이었다.

류성룡은 그 횟수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았다. 남쪽 사람에게서 옮은 버릇이었다. 형벌로 여섯 번 문초하는 동안 다리뼈가 부러졌고, 김덕령은 부러진 다리 대신 무릎으로 바닥을 짚으며 걸었다. 곤장으로 볼기를 쳤는데도 목숨이 붙어 있었고 몸가짐이 평상시와 같았다고 문서에 적혀 있었다. 그 줄을 쓴 사람은 옥리였을 것이다. 범을 때려잡던 사람의 평상시를 옥리가 어떻게 알았는지, 류성룡은 그 대목에서 한참 손을 멈추었다.

문서에 따르면 김덕령은 조용히 스스로 변명했다.

신이 만약 다른 뜻을 품었다면 어찌 당초에 원수의 명령을 받고 운봉까지 갔으며 또 명령을 받고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갔겠습니까. 다만 신이 만 번 죽어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는 것은 계사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삼년상의 애통을 잊고 원수를 갚으려고 분발하여 상복을 벗고 칼을 들고 일어나 여러 해 종군하여도 조그마한 공도 세우지 못하여 충성도 펴지 못하고 효도에도 어겼으니, 죄가 이에 이르니 만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하겠습니다.

류성룡은 그 대목을 두 번 읽었다. 두 번 다 글자는 같았다. 마당에서 매미가 한꺼번에 울다가 한꺼번에 그쳤고, 그친 자리에 먹 냄새만 남았다.

역모를 따지는 자리에서 그는 역모를 입에 올리지 않고 어머니를 말했다. 계사년에 어머니를 여의고도 상복을 벗고 칼을 든 것, 그것이 만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했다. 그가 스스로 댄 죄는 역모가 아니라 벗어 던진 상복이었다.

남쪽 사람이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의 일도 류성룡은 들어서 알았다. 함경도 순찰사가 길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성복하고 가라고 했으나, 그는 한시도 늦출 수 없다며 집에 이르러서야 상복을 입었다. 한 사람은 상복을 입었고 한 사람은 벗었다. 입은 사람은 바다에 있고 벗은 사람은 옥에 있었다. 그러나 두 사람을 가른 것은 상복이 아니었다. 무엇이 갈랐는지 류성룡은 알았고, 알면서도 종이에 옮기지 않았다.

*

당국자들은 다 김덕령을 시기했다.

구하려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 그 이름이 나오면 다들 부채를 펴 얼굴을 가리거나 앞에 놓인 문서로 눈을 떨구었다. 뒤에 난중잡록은 그 무렵 오간 말을 이렇게 옮긴다. 김덕령이 사람 죽이기를 삼 베듯 했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고, 또 반역할 골상이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골상은 얼굴의 뼈다. 뼈 생김새를 보고 반역을 안다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은 그렇게 돌아갔다.

누군가 몰래 옥리를 사주하여 속히 죽이게 했다는 말도 있다. 누가 사주했는지는 어디에도 없다. 이름이 없다고 해서 일까지 없던 것은 아니다.

류성룡은 구했는가. 그 물음은 그해 여름 그가 앉은 마루 위에도 떠 있었다.

그는 뒤에 그 일을 남기지 않았다. 징비록에는 김덕령의 옥이 없고, 그 빈자리가 어느 대목보다 무거웠다. 구했다는 기록이 없으니 이 이야기는 그가 구하지 않았다고 적는다. 틀렸다면 틀린 채로 둔다. 적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

*

곽재우도 잡혀 왔다. 같은 옥, 같은 문초 마당이었다.

붉은 옷을 입고 싸움터에 나서던 그 사람도 한현이 댄 이름 안에 있었다. 그는 잡혀 와 문초를 받고 풀려났다. 류성룡은 풀려났다는 줄을 문서에서 찾아 손끝으로 눌러 보았다. 같은 공술 안에 들어 있던 두 이름이 거기서 갈라져, 하나는 풀리고 하나는 죽었다. 곽재우가 상복을 벗지 않아서도, 범을 잡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시기하는 사람이 어느 쪽에 더 많았느냐가 둘을 갈랐다. 그는 그것도 남기지 않았다. 남기면 시기한 사람들이 종이 안에서 오래 살아남을 것이었고, 그러지 않게 한 것이 도리어 그들을 살려 주었다.

*

김덕령은 8월 24일에 죽었다. 그날 아침도 한양 하늘은 흐리고 무더웠다.

옥에 든 지 스무 날 남짓, 나이 서른이었다. 한여름 옥 안은 낮에도 어둡고 후텁지근했으며, 부러진 다리의 상처가 그 더위 속에서 어떻게 되어 갔을지 류성룡은 굳이 헤아리지 않으려 했다. 남쪽 사람은 처음 옥포(거제 옥포동)로 나갈 때 마흔여덟이었는데 이 사람은 서른에 옥에서 끝났다. 옥에 있은 스무 날, 문초 여섯 번, 부러진 다리 하나. 수로 놓으면 그만큼이었다. 수 바깥에 남은 것을 류성룡은 끝내 글로 옮기지 못했다.

문서 끝에는 김덕령이 전에는 비록 죄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죄가 아니었다는 말이 붙어 있었다. 전의 죄란 두치(하동 두치진)의 복병장으로 군사를 일으킨 지 세 해가 되도록 한 치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잔혹한 짓만 일삼아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인 일이었다. 있는 죄로는 죽지 않고 없는 죄로 죽었다. 옥은 그런 곳이었다.

류성룡은 문서를 덮었다. 묶은 끈을 다시 매려는데 손가락이 매듭을 두 번이나 놓쳤다.

덮고 나서 남쪽 사람을 생각했다. 상복을 입은 그 사람도 조정이 미워한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원균이 뭍으로 가서 남쪽 사람이 싸우지 않는다고 말하고 다녔고, 강화하는 동안 싸우지 않은 것이 죄가 되는 날이 올 것이었다. 그날이 오는 것은 보였지만 막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등 뒤에서 서리가 문서 궤를 여닫는 소리가 났고,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김덕령도 못 막은 사람이 다음을 막을 수 있는가. 그는 그 물음을 문서 위에 올려놓았다. 문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물녘이 되자 지붕 위로 굵은 비가 듣기 시작했다. 서둘러 올린 임시 집의 지붕이라 새는 데가 있었고, 빗물이 서까래를 타고 내려와 마룻바닥에 한 방울씩 어두운 점을 찍었다. 젖은 흙과 삭은 짚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새는 자리 아래 두었던 문서를 집어 마른 쪽으로 옮겼다. 그날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그것뿐이었다.

사료 · 김덕령이 광주 상인으로 담양에서 군사 수천을 모아 초승군의 표장을 받은 것, 익호장군과 충용장군의 호, 범 두 마리를 때려잡아 왜의 병영에 자랑하며 판 것 ― 조경남, 난중잡록 · 1596년 7월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이 한현과 일어나 홍주를 에워쌌다가 물러나며 「한현이 오면 목사의 머리를 깃발 끝에 달 것」이라 한 것, 잡혀 죽은 뒤 문서에서 김·최·홍 세 성이 나오고 한현이 「김덕령·최담령·홍계남, 곽재우·고언백도 심복」이라 공술한 것, 원수가 아뢰어 김덕령을 잡게 한 것, 운봉과 휴가와 진주 옥, 조정의 두 갈래 의논 ― 난중잡록 · 8월 24일 옥에서 죽은 것, 스무 날 남짓에 문초 여섯 번, 다리뼈가 부러졌으나 무릎으로 걸은 것, 「신이 다른 뜻을 품었다면 어찌 운봉까지 갔으며 군사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갔겠습니까, 다만 계사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상복을 벗고 칼을 든 것이 만 번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죄」, 당국자들이 시기해 구하는 이가 없었고 「반역할 골상」이라 모함하고 옥리를 사주한 것, 「전에는 죄가 있었으나 이번에는 죄가 아니었다」 ― 난중잡록 · 지난해 장문포에서 곽재우·김덕령의 군사가 「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곧 배로 내려온」 것 ― 난중일기 갑오년 10월 4일 · 곽재우가 함께 잡혀 왔다가 풀려난 것 ― 난중잡록. 무엇이 둘을 갈랐는지는 지어냈다 · 징비록에는 김덕령의 옥이 없다. 류성룡이 문서를 읽었다는 것, 조정 의논에서 어느 쪽이었는지, 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어냈다. 김덕령의 나이 서른은 1567년생으로 센 것이다 · 이 회차는 류성룡의 3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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