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5,478자) · 1595년 여름, 한산도

향각궁

이순신 · 네오

1595년 7월 11일 (음력 6월 4일) 맑음. 나주판관이 배를 거느리고 진으로 돌아왔다. 이전 등이 산에서 노 나무를 베어 와 바쳤다. 아침을 먹은 뒤 대청에 나갔다. 미조항(남해 미조면)과 웅천(창원 진해구 웅천동)이 와서 활을 쏘았다. 군관들이 다투어 쏘며 향각궁을 걸었다. 노윤발이 으뜸을 차지해 얻었다. 저녁에 임영과 조응복이 왔다. 양정언이 휴가로 돌아갔다.

아침을 먹고 대청에 나가니 마당 끝 기둥에 활 한 자루가 걸려 있었다. 향각궁이었다.

군관들이 내기를 하자며 내놓은 활이었다. 물소 뿔을 구하지 못해 우리 소 뿔을 깎아 댄 것인데, 손에 쥐어 보면 줌통이 묵직하고 뿔과 대나무를 붙인 아교 자리가 손톱 하나 걸리지 않을 만큼 매끈했다. 으뜸이 가져가기로 군관들끼리 정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으로 판이 섰다.

한 순에 다섯 대씩 다섯 순을 쏘았다. 맞은 수는 따로 헤아리는 사람이 있어서 나는 대청 난간에 팔을 얹고 보기만 했다. 여름 볕이 마당을 하얗게 달구었고, 곧게 날아간 화살이 짚 과녁에 박힐 때마다 마른 소리가 한 박자 늦게 대청까지 올라왔다. 시위를 놓은 군관의 팔꿈치가 가늘게 떨리는 것까지 위에서는 다 보였다.

마지막 순이 끝나자 과녁 앞에 서 있던 군사가 화살을 뽑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는데, 깃마다 흙과 짚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노윤발이 으뜸이었다. 스물다섯 대 가운데 몇 대를 맞혔는지 나는 알지만 여기 남기지 않는다. 숫자를 남기면 둘째가 생기고, 둘째의 손에는 향각궁이 없다.

군관 하나가 기둥에서 활을 내려 그에게 건넸다. 그는 두 손으로 받아 줌통을 한 번 쥐어 보더니 웃었다. 군관이 그렇게 웃는 얼굴을 한 해 반 만에 보았다. 대청 위에서 내려다보니 웃음은 작았지만, 작아도 분명한 웃음이었다.

*

세 해째 여름이었다.

옥포(거제 옥포동)에서 처음 싸운 지 세 해, 한산도(통영 한산면)로 진을 옮긴 지 두 해였다. 그사이 열 번 넘게 싸웠는데 지난해 장문포(거제 장목면) 뒤로는 칼을 뽑을 일이 없었다. 명나라와 왜가 강화한다며 종이를 주고받는 동안 바다는 잠잠했고, 그 잠잠한 물 위에 우리 배가 백 척 넘게 떠 있었다. 선창에 묶인 판옥선들이 밀물에 들렸다가 썰물에 내려앉으며 밧줄을 끼익끼익 당겼다. 싸우지 않는 배 위에서 사람은 무엇을 하는가.

우리는 날마다 활을 쏘았다.

사정에 올라 순을 돌리고 맞은 수를 헤아리는 것이 아침의 일이었다. 세 해 동안 일기에 활 쏜 날을 몇 번 남겼는지는 꼽아 보지 않았다. 꼽으면 싸운 날보다 훨씬 많을 테지만 부끄러울 일은 아니었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녹지 않게, 깍지 낀 엄지가 시위의 무게를 잊지 않게 붙잡아 두는 것도 싸움이었다. 싸움 없는 날에 하는 싸움이었다.

*

5월 25일에는 세 수사가 한자리에 모였다.

경상수사 배설과 우수사 이억기, 그리고 충청수사가 아홉 순, 마흔다섯 대를 쏘았다. 활을 내려놓자 충청수백이 술을 내왔는데, 따르고 권하는 사이에 저부터 잔뜩 취해 자리가 파했다. 술상 머리에서 고개가 자꾸 꺾이는 그를 보고 세 수사가 웃었다. 배설도 웃었다. 그가 웃는 얼굴은 처음이었는데, 입꼬리가 올라가자 교서 앞에서 뻣뻣하던 사람이 비로소 사람으로 보였다.

취한 사람을 두고 우습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원균에게 쓰던 말이었다. 같은 취함이라도 결이 달랐고, 그 결을 가려 듣는 것이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이었다.

배설이 뭍 소식을 풀었다. 김응서가 대간의 탄핵을 무겁게 받았고 원수도 그 안에 들어 있다고 했다. 그는 뭍에서 온 지 석 달이었는데, 석 달 묵은 소식이 이 섬에서는 가장 새것이었다. 모두가 부채질하던 손을 멈추고 그 말을 듣는 동안 술 냄새 섞인 더운 바람이 대청을 한 번 훑고 지나갔다.

*

8월 20일 (7월 15일) 맑음. 늦게 대청에 나가니 박·신 두 조방장과 방답(여수 돌산읍), 여도(고흥 점암면), 녹도(고흥 도양읍 녹동), 보령, 결성 두 현감과 이언준 등이 활을 쏘고 술을 먹였다. 경상수사도 와서 함께 이야기했다. 씨름을 시켜 승부를 겨루게 했다.

활을 거두고 나서 마당에 씨름판을 벌이게 했다.

바닥에 금을 긋고 군사들을 둘씩 붙였다. 신호와 박 조방장, 현감들이 대청에 나란히 앉아 보았고 배설도 와서 한쪽 끝에 앉았다. 부르지 않아도 오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씨름은 활과 달랐다. 활 앞에는 과녁이 있지만 씨름 앞에는 사람이 있다. 샅바를 움켜쥔 두 사람이 이마를 맞대고 버티다가 하나가 흙바닥에 등을 찧었고, 찧은 사람은 흙을 털고 일어나 다시 붙었다. 살과 살이 부딪는 둔한 소리와 발뒤꿈치가 땅을 파고드는 소리가 대청 마루까지 울렸다.

누가 이겼는지는 남기지 않았다. 이름을 남기면 진 사람도 남으니, 승부를 겨루게 했다고만 적었다. 겨룰 것이 없으면 사람은 노 자리에서 움츠러든다. 지난겨울 노 자리에 웅크린 채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던 등들을 보았기에, 이 여름에는 씨름판을 벌였다.

*

여름의 일을 날짜대로 늘어놓지는 않는다. 씨름판보다 한 달쯤 앞선, 비 오던 날로 돌아간다.

7월 19일 (6월 12일) 비. 홀로 누각 위에 앉았다. 꿈결에 막내 면이 윤덕종의 아들 운로와 함께 왔다. 그때 어머니 편지를 보고 병환이 쾌히 나으신 것을 알았다. 기쁘고 다행함이 만만이다.

비 오는 날 홀로 누각에 앉아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고, 꿈에 면이 왔다.

면은 막내이자 셋째 아들이다. 담이 크고 말 타고 활 쏘는 솜씨가 좋아서 사람들이 나를 닮았다고 했고, 나는 그 닮은 데를 아꼈다. 아낀다는 말은 일기에 쓰지 않았다. 써 놓으면 더 커질 것만 같았다.

꿈속의 면은 윤덕종의 아들 운로와 함께 들어와 어머니 편지를 내밀었다. 펼쳐 보니 병환이 쾌히 나으셨다는 글이었다. 눈을 뜨자 처마 끝에서 빗물이 고르게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꿈속에서 듣던 것과 똑같아서 한동안 어느 쪽이 꿈인지 가늠이 서지 않았다. 젖은 나무 냄새가 누각 안에 가득했다. 나는 붓을 들어 기쁘고 다행함이 만만이라고 적었다.

그날 정말 편지가 왔는지는 일기에 없다. 오지 않았을 것이고, 왔다면 남겼을 것이다. 오지 않은 편지를 꿈에서 받고 기뻐하던 사람이 세 해째 여름의 아비였다.

한 달 전에는 이레 동안 어머니 소식이 끊겼다. 안개가 사방을 막아 한 발 앞도 분간하지 못하던 날이었고, 그 새벽 꿈이 어지러웠다. 그날 일기에는 애태우고 애태운다고 같은 말을 두 번 썼다. 통분하다를 두 번 쓰던 붓이 이번에는 애태움을 두 번 썼다.

*

씨름판이 걷히고 나니 대청에 신호만 남았다.

어영담의 자리에 온 조방장이었다. 그는 마당에 파인 발자국들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충청병사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못 들었다.”

“뭍에서 잘 지낸답니다. 조정에 글을 올린답니다.”

“무슨 글.”

“수군이 싸우지 않는다는 글이랍니다.”

나는 그 말을 받아 어디 둘 데가 없었다. 강화하는 동안 싸우지 말라는 공문은 위에서도 오고 뭍에서도 왔다. 그 공문을 따른 것을 두고 뭍에 간 사람이 수군은 싸우지 않는다고 써 올렸으니, 머잖아 그 글을 근거로 꾸짖는 공문이 또 내려올 것이었다. 종이가 종이를 죽인다는 것을 그날 배웠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신호는 한동안 부채 끝으로 제 무릎을 두드리고만 있었다. 저물녘 바다에서 올라온 바람이 처마의 풍경을 한 번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의 말은 늘 느렸다.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세 해 전 진해루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때는 나가는 것이 옳은지 몰랐고 오늘은 나가지 않는 것이 옳은지 몰랐다. 모르는 자리만 바뀌었을 뿐이다. 내가 웃자 그도 따라 조금 웃었다. 옳은지 모르겠다는 말 앞에서 웃을 수 있기까지 세 해가 걸렸다.

*

장수들 씨름이 끝나 마당이 비자 격군들이 나와 저희끼리 붙었다.

시킨 판이 아니었다. 대청에서 보니 여섯째 노의 격군 끝동이 나섰다. 여수 사람으로 세 해 전 옥포부터 노를 저었고, 어영담을 묻던 날 언덕에서 내가 물었을 때 돌쇠와 말 없는 사람의 이름을 대 주던 사람이었다.

상대는 돌산도에서 온 흙 손이었다. 둘이 샅바를 잡고 마주 서자 구경하던 격군들이 저절로 둥글게 모여들어 판을 에워쌌고, 누군가 끝동의 이름을 낮게 불렀다. 밭을 갈던 어깨라 힘이 셌고, 끝동은 두 번 넘어졌다가 두 번 다 일어나 다시 샅바를 잡았다. 세 번째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무릎을 굽힌 채 버티는 동안 마당의 흙먼지가 저녁 볕 속에 노랗게 떠올라 둘의 젖은 등에 내려앉았다. 이긴 것이 아니라 버틴 것이었고, 버티는 것은 격군이 세 해 동안 해 온 일이었다.

누가 이겼는지는 이번에도 남기지 않았다. 대신 격군들에게 술을 한 잔씩 돌렸다. 잔 수는 병방이 헤아렸고, 나는 끝동이 잔을 비우고 흙 묻은 손등으로 입을 닦는 것만 보았다. 무엇 하나 세지 않은 날이 그 여름에 하루 있었다.

*

밤에 대청에 홀로 앉았다. 모기를 쫓느라 피운 쑥불 연기가 마루 밑에서 매캐하게 올라왔다.

향각궁을 생각했다. 노윤발이 그 활로 무엇을 쏠지, 과녁 말고 적을 쏘는 날이 올지. 그날은 강화가 끝나야 오는데, 끝내고 말고는 명나라와 왜가 쥐고 있었다. 그사이에 우리는 활을 쏘고 씨름을 하고 꿈에서 편지를 받는다.

군량을 헤아려 보았다. 봄보다 줄어 있었다. 돌산도(여수 돌산읍) 밭이 올해도 되었다는 기별은 왔지만 들어온 것은 절반이었고, 그 절반으로 배 백여 척이 몇 달을 버티는지 따져 보니 겨울까지 닿지 않았다. 닿지 않을 줄 알면서 한 번 더 따져 보았다.

세 해였다. 스물넷이던 배가 백을 넘었고, 사람은 넷이 가고 넷이 왔다. 활을 걸었고 씨름을 붙였고 꿈에서 아들이 어머니 편지를 가져왔다. 싸움 없는 여름이었다. 싸우지 않는 것이 이기는 것인지는 끝내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채로 나도 사정에 올라 다섯 순, 스물다섯 대를 쏘았다. 몇 대가 맞았는지는 적지 않았다.

사료 · 6월 4일 군관들이 다투어 쏘며 향각궁을 걸고 노윤발이 으뜸을 차지해 얻은 것 ― 난중일기 을미년 6월 4일(전서본) · 5월 25일 세 수사가 모여 아홉 순을 쏘고 충청수백이 술을 내다 극도로 취해 파한 것, 배설에게서 김응서가 대간의 탄핵을 받고 원수도 그 안에 들었다고 들은 것 ― 난중일기 5월 25일 · 7월 15일 두 조방장과 현감들이 활을 쏘고 술을 먹이고 경상수사도 와서 씨름으로 승부를 겨루게 한 것 ― 난중일기 7월 15일 · 6월 12일 비 오는 날 누각에 홀로 앉아 꿈결에 막내 면이 운로와 함께 와서 어머니 편지를 보고 병환이 나으신 것을 알아 「기쁘고 다행함이 만만」이라 한 것, 5월 15일 안개 속에 어머니 소식을 이레 못 들어 「애태우고 애태운다」 ― 난중일기 5월 15일·6월 12일 · 면이 담략이 있고 말 타고 활 쏘기를 잘해 아버지가 자기를 닮은 것을 아꼈다는 것 ― 이분, 이충무공행록 · 노윤발의 웃음, 배설의 웃음, 씨름을 시킨 까닭, 신호와의 대화, 격군의 씨름, 군량의 셈은 지어냈다. 원균이 뭍에서 수군을 헐뜯는 글을 올렸다는 것은 행록의 「원균이 비방을 퍼뜨렸다」는 대목을 따랐다. 이 회차는 날짜 순서대로 두지 않고 여름의 일을 모아 적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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