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5,331자) · 1594년 겨울 한산도 · 1579년 충청도 병영
전통
이순신 · 네오
1579년 (선조 12년) 겨울, 충청도 병영 그해 겨울에 충청병사의 군관이 되었다. 거처하는 방 안에 한 물건도 두지 않고 오직 옷과 이불뿐이었다. 어버이를 뵈러 돌아갈 때는 반드시 남은 양식과 반찬을 적어 양식 맡은 사람을 불러 돌려주니 병사가 듣고 아끼고 공경했다.
한산도(통영 한산면)의 겨울밤에 나는 그 방을 생각했다.
열다섯 해 전 충청도 병영의 군관 방이었고, 나는 서른다섯이었다. 훈련원(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운동장 자리) 봉사 자리에서 밀려나 병영으로 내려간 해였다. 그해 병조 정랑 서익이 나를 뜰 아래 세워 두고 꾸짖었다. 그는 대청 위에 앉아 있었고 나는 흙바닥에 서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한낮에 시작된 꾸지람이 이어지는 동안 처마 그림자가 뜰을 가로질러 내 발등까지 기어 왔고, 다리가 저려 와도 나는 발을 한 번도 옮기지 않았다. 해가 저물도록 꾸짖다가 그는 끝내 제풀에 부끄러워하며 나를 보냈는데, 그때 그가 마음에 품은 것이 그해 겨울 나를 충청도로 보냈다. 보내지는 것도 누군가 정한 일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병영은 성벽이 낮고 뜰이 넓었다. 군관이 하는 일은 활터에 나가 군사들이 쏘는 것을 살피고, 병사가 부르면 가고, 문서를 들고 오가는 것이었다. 낮에는 사람 사이에 있다가 밤이 되면 그 방으로 돌아왔다.
방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았다. 옷과 이불, 그것뿐이었다. 아침이면 창호지 안쪽에 서리가 얇게 앉아 방 안이 바깥보다 더 희었고, 이불 밖으로 내민 코끝이 시려서 눈을 떴다. 윗목에 둔 자리끼 물사발에는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두지 않은 것이 아니라 둘 것이 없었다. 없어서 두지 않은 것을 사람들은 마음먹고 비워 둔 것으로 보았다. 보는 사람이 뜻을 붙인다는 것을 나는 그때 배웠다.
어버이를 뵈러 갈 때는 남은 양식을 몇 되 몇 홉까지 적어 두었다가 양식 맡은 사람을 불러 돌려주었다. 됫박으로 쌀을 되어 자루에 쏟으면 마른 낟알이 사르르 흘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양식 맡은 사람은 처음에 내 얼굴과 자루를 번갈아 보며 무슨 셈속인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두 번째부터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됫박을 받아 들었다. 돌려주는 것이 무슨 뜻인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남은 것은 남은 것이다. 가지고 가면 가져간 것이 되고 두고 가면 둔 것이 되는데, 둔 것은 본래 관가 것이니 관가에 두었을 뿐이다. 뒷날 발포(고흥 도화면)의 오동나무도 같은 이치였다. 그때는 오동나무가 아직 없었고, 오동나무보다 양식이 먼저 있었다.
병사가 그 얘기를 들은 것은 한참 뒤였다. 누가 전했는지는 모른다. 병영처럼 좁은 곳에서는 됫박 하나 오간 일도 며칠이면 모두의 귀에 들어간다. 병사가 그 얘기를 듣고 나를 아끼고 공경했다. 아끼고 공경한다는 그 두 글자가 벼슬길에서 내게 온 첫 두 글자였다. 그 뒤로 미움과 시기와 흉험이 차례로 왔다. 처음 온 것이 아끼고 공경하는 마음이었다는 것을 나는 한산도의 겨울에야 헤아려 보았다.
*
어느 날 저녁이었다.
병영 안에 술자리가 있었고, 자리가 파할 무렵 뜰에는 벌써 어둠이 내려 있었다. 처마 끝 등롱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며 언 땅 위에 빛을 이리저리 던졌다. 병사가 술에 취해 내 손을 잡고 어디로 가자고 끌었다. 술 냄새가 더운 김과 함께 얼굴에 끼쳤고, 내 손목을 쥔 손바닥이 땀으로 끈끈했다. 그가 가려는 데는 평소 가까이 두고 데려온 군관 아무개의 방이었다. 대장이 군관의 방으로 사사로이 가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았다. 대장이 찾아간 군관은 대장의 사람이 된다. 다른 군관들이 그것을 보고, 보고 나면 진이 갈린다.
나도 취한 척했다. 발을 한 번 헛디디는 시늉을 하고서 병사의 손을 두 손으로 받들어 잡은 채 물었다.
“사또께서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병사가 멈칫했다. 깨달은 얼굴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내가 취했다. 내가 취했다.”
두 번 말했고, 그것으로 끝났다. 뜰에는 그의 거친 숨소리와 등롱 흔들리는 소리만 남았다. 받들어 잡았던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그는 군관 방에 가지 않았다. 취한 대장을 취한 척한 군관이 막았는데, 병사가 그걸 뒤에 알았는지는 모른다. 알았을 것이다. 알고도 아무 말 하지 않은 것이 그의 예였다.
취한 척은 그날 처음 했고 그 뒤로 다시 하지 않았다. 한 번은 해도 되는 일이 있다. 두 번 하면 그 사람은 취한 척하는 사람이 된다. 한산도에서 원균이 진흙처럼 취해 망발을 늘어놓을 때도 나는 취한 척하지 않고, 대신 술상을 조금 차려 대접했다. 대접하는 것과 취한 척하는 것은 다른 일이고, 그 다른 일 사이에 열다섯 해가 있었다.
*
이듬해 가을에 발포로 갔다.
만호 자리였다. 전라도 남쪽 끝, 바다를 끼고 앉은 작은 진이었다. 거기서 처음으로 배와 물을 곁에 두고 살았고, 짠 바람에 절어 뻣뻣해진 옷을 날마다 입었다. 그 뒤의 일은 앞에 남겼다. 오동나무와 감사 손식과 수사 이용과 도사 조헌, 그리고 파직. 파직된 것은 임오년 봄이었고 나는 서른여덟이었다. 발포에서 햇수로 두 해를 보내고 물러났다.
그해 여름 서용하라는 명이 나서 다시 훈련원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봉사였다. 파직된 사람이 세 해 전 떠난 자리로 돌아간 것인데, 그게 오르는 것인지 내려가는 것인지 나는 몰랐다. 그냥 돌아가는 것이었다. 훈련원 마당은 그대로였다. 여름 볕에 흙이 하얗게 말라 발을 디딜 때마다 먼지가 일었고, 과녁 앞 모래둔덕에는 빗나간 화살 자국이 전처럼 숭숭 나 있었다.
정승 유전이 내게 좋은 전통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전통은 화살을 넣는 통이다. 내 것은 오래 손때가 묻어 가죽 겉이 반들거렸고, 통 주둥이를 두른 쇠테에는 녹 하나 없었다. 어디서 났는지는 잊었다. 정승은 활쏘기를 하는 자리에 나를 불러 그 전통을 달라고 했다.
사람이 많은 자리였다. 차일 아래 정승이 앉았고 그 곁으로 벼슬 높은 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정승의 말이 떨어지자 둘러선 사람들의 눈이 한꺼번에 내 허리춤의 전통으로 쏠렸다. 정승이 달라는 것을 봉사가 내놓는 데는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다들 그렇게 여기는 얼굴이었다. 나는 전통을 풀지 않았다.
나는 엎드려 말했다.
“전통을 바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대감께서 받으신 것을 무엇이라 하겠으며 소인이 바친 것을 또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전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이 함께 더러운 이름을 받으면 지극히 편치 않습니다.”
정승이 말했다.
“그대 말이 옳다.”
그것으로 끝났다. 정승은 더 말하지 않고 과녁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멈췄던 활터에 다시 시위 소리가 울렸다. 둘러섰던 사람들의 눈도 하나둘 과녁으로 돌아갔다. 엎드렸던 무릎에 묻은 흙을 털고 일어나니 허리춤의 전통이 여느 때처럼 무겁게 흔들렸다. 전통은 내게 남았다. 오래 지니고 다녔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른다. 어느 해 어느 길에서 잃었는지도 떠오르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까지 세지는 않았다.
정승이 옳다고 했고, 병사가 아끼고 공경했고, 감사가 무겁게 대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서익과 이용과 김우서가 있었다. 사람이 둘로 갈렸고, 그 갈림이 내 서른 줄의 열 해였다. 어느 쪽이 많았는지는 세지 않았다. 세면 한쪽이 종이 안에서 불어난다.
*
계미년에 이용이 나를 다시 불렀다.
발포에서 나를 미워하던 사람이 남병사가 되어 나를 군관으로 청했다. 뉘우쳐서였고, 나는 그 뉘우침을 받아 함경도로 올라갔다. 북쪽으로 갈수록 바람이 칼날처럼 얇아졌다. 말 콧김이 수염에 얼어붙고, 눈밭에 비친 햇빛이 눈을 찔러 한낮에도 실눈을 뜨고 걸었다. 서문으로 군사를 낸 일과 건원보(함경북도 경원)와 울지내의 일은 그것도 앞에 남겼다.
앞에 쓴 것을 다시 쓰지는 않는다. 다시 쓰면 는다. 느는 것이 적는 일의 값이라고 삼백 년 뒤 어느 미국 사람이 말하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몰랐지만, 몰라도 같은 것을 알았다. 쓰면 늘고, 늘어도 쓴다. 안 쓰면 없던 일이 된다.
*
한산도의 운주당에 밤이 깊었다.
장수들이 다 제 배로 돌아가고 나니 바깥에서는 물결이 선창 돌을 치는 소리만 났다. 멀리 정박한 배들 사이로 순라 도는 군사의 딱따기 소리가 두어 번 건너왔다가 끊겼다. 혼자 앉아 열다섯 해를 세었다. 충청도 병영의 빈방과 발포의 오동나무, 훈련원의 전통과 함경도의 눈밭이 차례로 지나갔다. 그 넷이 이어져 스물네 척이 되고 백 척 넘는 배가 되기까지 열다섯 해가 걸렸다. 그 열다섯 해를 하나씩 짚어 보는 밤이었다.
방에 아무것도 없었다. 촛불 하나가 종이 위에 노란 테를 둘렀고, 그 테 바깥으로는 바다에서 올라온 찬 기운이 판자 틈을 비집고 들어와 등을 눌렀다. 촛농이 한 방울씩 흘러내려 촛대 받침에 하얗게 굳었다. 운주당은 계책을 짜는 집인데 여기에도 옷과 이불뿐이었고, 거기에 종이가 더 있었다. 열다섯 해 전에는 종이가 없었다. 만호의 일기는 없고 군관의 일기는 더더욱 없다. 지금은 종이가 있어서 쓰고, 써서 남긴다.
빈방에서 시작해 빈방에 와 있었다. 두 빈방 사이에 배가 백 척 넘게 있지만 배는 밖에 있고, 방 안에는 옷과 이불과 종이뿐이다. 그 병사가 이 방을 보았다면 또 아끼고 공경했을 것이다. 그는 죽었고, 나는 그 이름을 잊었다. 아끼고 공경해 준 사람의 이름은 잊고 미워한 사람의 이름은 잊지 않았다. 사람이 그렇다. 그런 줄 알면서 그 사람을 종이에 적었다. 아끼고 공경한 사람이라고만, 이름 없이 남겼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비친 내 그림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손을 뻗어 불꽃 가까이 대 보았다. 손끝은 금세 따뜻해졌는데 손등은 여전히 찼다.
내일 원균이 온다고 했다. 와서 보고 돌아갈 것이고, 나는 그것을 일곱 자로 적을 것이다. 일곱 자 안에 열다섯 해는 들어가지 않는다. 들어가지 않는 줄 알면서 적는다. 아는 것과 적는 것은 다른 일이고, 나는 그 다른 일을 같은 밤에 한다.
사료 · 1579년 겨울 충청병사의 군관이 되어 방 안에 옷과 이불만 두고 어버이를 뵈러 갈 때 남은 양식을 적어 돌려주니 병사가 아끼고 공경한 것, 취한 병사가 손을 잡고 군관의 방으로 가려 하자 취한 척하고 손을 받들어 「사또께서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 하니 병사가 「내가 취했다」 하고 주저앉은 것 ― 이분, 이충무공행록 · 1582년 여름 서용되어 훈련원에 다시 들어갔을 때 정승 유전이 전통을 달라 하자 「전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이 함께 더러운 이름을 받으면 편치 않다」 하니 「그대 말이 옳다」 한 것 ― 같은 행록 · 서익의 일, 발포, 손식·이용·조헌, 파직, 이용이 남병사로 다시 부른 것 ― 같은 행록과 징비록. 앞 회차에 적었다 · 충청병사의 이름은 행록에 없다. 전통을 잃어버렸다는 것, 운주당의 밤은 지어냈다. 나이는 1545년생으로 센 것이다 · 이 회차는 한산도의 1인칭과 열다섯 해 전의 1인칭이다. 옛날 대목도 이순신이 돌아보는 눈으로 썼다 · 양력 날짜 ― 1579년의 일은 달까지만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