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5,834자) · 1594년 11월 11일~19일, 장문포와 영등포
장문포
이순신 · 네오
1594년 11월 11일 (음력 9월 29일) 맑음. 배를 띄워 장문포(거제 장목면) 앞바다로 곧장 들어갔다. 적의 무리가 험한 데 웅거하고 나오지 않았다. 누각을 높이 세우고 두 봉우리에 보루를 쌓고 조금도 나와 맞서지 않았다. 선봉의 적선 두 척을 쳐 없애니 뭍으로 달아났다. 빈 배를 깨고 태웠다. 칠천량(거제 하청면 칠천도 앞)에서 밤을 지냈다.
원수의 밀서가 먼저 왔다.
뭍의 군사를 모두 거느린 도원수 권율이 밀서를 보내 스무이레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정했다고 알려 왔다. 물과 뭍이 함께 치기로 한 것은 조정과 원수가 정한 일이었고, 나는 그것을 받았다. 두 해 동안 물과 뭍이 한날 함께 친 적은 없었다. 당항포(고성 회화면)에서는 뭍의 군사가 멀리 있어서 새장에 든 적을 두고도 끝내 잡지 못했다. 이번에는 뭍이 온다고 했다. 밀서를 접어 품에 넣는데 빳빳한 종이 모서리가 가슴께를 찔렀다.
곽재우와 김덕령이 견내량(거제와 통영 사이 좁은 물목)에 왔다. 붉은 옷을 입는다는 의병장과 범을 맨손으로 잡는다는 의병장이 배를 타고 건너왔다. 박춘양을 보내 건너온 까닭을 물으니 수군과 합세하라는 원수의 전령을 받았다고 했다. 뭍의 의병이 배에 올랐다. 배를 타면 뭍의 사람도 물의 사람이 되는지는 타 봐야 안다.
스무아흐레에 떠서 장문포로 곧장 들어갔다.
장문포는 거제 북쪽 끝에 붙은 포구인데, 지난여름 이후 적이 거기 성을 쌓았다. 배로 나가 싸우지 말고 성을 지키라는 것이 태합의 명이었다. 지키는 적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웅포(창원 진해구 웅천 앞 포구)에서 한 달 동안 배웠고, 오늘 그걸 다시 보았다. 산비탈 위로 누각이 높이 솟았고 두 봉우리 꼭대기마다 돌을 쌓은 보루가 앉아 있었다. 깃발은 바람에 펄럭이는데 비탈을 내려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선봉이 적선 두 척을 치자 저들은 배를 버리고 뭍으로 달아났다. 빈 배를 깨뜨리고 불을 질렀다. 마른 판자가 타닥거리며 타는 냄새가 물 위로 낮게 번졌다. 백 척이 넘는 배가 나가서 두 척을 태운 날이었다. 그 수를 일기에 올리는 손이 무거웠다.
칠천량(거제 하청면 칠천도 앞)에서 밤을 지냈다. 거제 북쪽의 좁은 물이다. 지난봄 배가 뒤집힌 이튿날 밤을 보낸 그 물가에 다시 배를 대었다. 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얼굴로 뱃전을 핥았다.
*
11월 12일 (10월 1일) 맑음. 충청수사와 선봉 여러 장수와 함께 곧장 영등포(거제 장목면 구영리)로 들어갔다. 흉적들이 배를 물가에 매어 두고 하나도 나와 맞서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오니 사도(고흥 영남면)의 배 둘이 뭍에 걸리는 사이에 적의 작은 배가 곧장 들어와 불을 던졌다. 불이 비록 일어나지 않고 꺼졌으나 지극히 분하고 아프다. 우수사의 군관과 경상수사의 군관을 그 잘못을 조금 논했다. 사도 군관은 그 죄를 무겁게 다스렸다.
충청수사와 선봉을 거느리고 영등포로 들어갔다.
거기도 같았다. 적은 배를 물가에 줄지어 매어 두고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부딪친 배가 없었으니 셀 것도 없었다. 셈하는 사람에게 영은 제일 무거운 수다.
저물 무렵 장문포 앞바다로 돌아오는데 사도의 배 둘이 얕은 바닥에 걸렸다. 지난봄 발포(고흥 도화면)와 가리포(완도)의 배가 걸리던 것과 똑같았다. 걸린 배는 노를 아무리 저어도 뱃바닥이 모래를 긁는 소리만 날 뿐 움직이지 않는다. 그 틈에 적의 작은 배가 곧장 파고들어 불을 던졌다. 불은 붙지 않고 꺼졌다. 다행이라는 말은 쓰지 않고, 지극히 분하고 아프다고 썼다.
적이 우리 배에 불을 던졌다. 두 해 반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옥포(거제 옥포동)에서, 사천에서, 당포(통영 산양읍 삼덕리)에서, 당항포에서, 한산도(통영 한산면)에서 불을 던진 것은 늘 우리였다. 저들은 두 해 반 동안 그걸 보고 배웠고 오늘 처음 써먹었다. 이번에는 꺼졌다. 다음에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우수사의 군관과 경상수사의 군관은 가볍게 따지고, 사도 군관은 무겁게 다스렸다. 걸린 배가 사도 배였기 때문이다. 사도첨사 김완은 옥포에서 신기전을 쏘아 적을 알렸고 한산도에서 열여섯 급을 벤 사람이다. 제 진의 군관이 다스림을 받는 동안 김완은 곁에 서서 끝까지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그가 차리는 예였다.
*
11월 13일 (10월 2일) 맑음. 선봉선 서른 척을 보내 장문포의 적 형세를 보고 오게 했다.
선봉선 서른 척이 종일 노를 저어 장문포를 보고 돌아왔다. 어제와 같다고 했다. 같은 것을 보려고 서른 척을 띄운 것도 내 판단이었고, 그 판단이 같은 소식을 싣고 돌아왔다. 노꾼들의 손바닥이 물집으로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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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4일 (10월 3일) 맑음. 친히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일찍 장문포로 가서 종일 맞섰다. 적의 무리가 두려워 나와 맞서지 않았다. 해가 저물어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일찍 장문포로 가서 종일 맞섰다.
성 아래에 배를 늘어세우고 종일 포를 쏘았다. 포가 울릴 때마다 뱃바닥이 발밑에서 퉁겨 올랐고, 귀가 먹먹해 옆 사람의 말이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뭉개졌다. 성은 배와 달라서 포를 맞아도 깨지지 않았다. 깨지지 않는 것을 향해 종일 쏘는 동안 화약 연기가 바람에 밀려 성벽 아래 골짜기에 오래 고였다. 저들이 두려워 나오지 않았다고 썼다. 두려워하는 적은 과녁이라고 두 해 전에는 생각했다. 지난봄에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알았고, 오늘 세 번째로 알았다. 성 안에 숨은 두려움은 과녁이 되어 주지 않는다.
해가 저물어 칠천량으로 돌아왔다. 노꾼들이 젓는 노가 물을 무겁게 끌었다. 이기지도 지지도 않은 날의 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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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5일 (10월 4일) 맑음. 곽재우와 김덕령 등과 약속해 군사 수백을 뽑아 뭍에 내려 산에 오르게 했다. 선봉을 먼저 장문포로 보내 드나들며 싸움을 걸게 했다. 늦게 중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다그쳐 물과 뭍이 서로 응하니 적의 무리가 허둥지둥 형세를 잃고 동서로 달아났다. 뭍의 군사가 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곧 배로 내려왔다. 칠천량으로 돌아와 진을 쳤다. 선전관 이계명이 표신과 선유 교서를 가지고 왔다. 담비 가죽을 내리셨다.
이날 처음으로 물과 뭍이 함께 쳤다.
곽재우와 김덕령과 약속하고 군사 수백을 뽑아 뭍에 내렸다. 그들이 산을 오르는 것을 배 위에서 올려다보았다. 잎이 진 잿빛 잡목 사이로 붉은 옷 하나가 먼저 보였는데, 곽재우였다. 그 붉은 점 뒤로 수백이 줄지어 비탈을 탔다. 선봉을 장문포로 보내 드나들며 싸움을 걸게 하고, 늦게 중군을 이끌고 나아가 다그쳤다. 물에서 다그치고 뭍에서 다그쳤다.
그게 먹혔다. 적이 허둥지둥 형세를 잃고 동서로 흩어졌다. 두 해 반 만에 처음으로 물과 뭍이 함께 조여 성 안의 적이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뭍의 군사가 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곧 배로 내려왔다.
일기에는 그 대목을 여덟 자로 남겼다. 그 여덟 자 안에 다 있었다. 수백이 산에 올랐고, 적이 칼을 휘둘렀고, 수백이 내려왔다. 적은 칼을 휘둘렀을 뿐이다. 서너 자 되는 그 긴 칼을, 벽제(고양 벽제)에서 명나라 기병이 보았던 그 칼을 뭍의 군사는 알고 있었다. 알아서 내려왔다.
붉은 옷이 비탈을 내려오고 범을 잡는다는 사람이 그 뒤를 따라 내려오는 것을 나는 뱃전에서 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할 말은 없었다. 대신 일기에 여덟 자를 남겼는데, 그 여덟 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보다 무거웠다.
칠천량으로 돌아오니 선전관 이계명이 와 있었다. 임금이 타이르는 선유 교서와 함께 추위에 쓰라고 담비 가죽을 내려 보냈다. 가죽을 손으로 쓸어 보니 털이 손바닥 아래서 결대로 눕고, 거꾸로 쓸면 따뜻한 속털이 일어섰다. 지난겨울 옷 없는 군사들이 거북처럼 움츠리고 떨던 것이 생각났다. 몇 장인지 세었지만 그 수는 남기지 않는다. 수를 적으면 안 받은 사람이 생기는데, 안 받은 사람이 백 척 넘는 배에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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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10월 6일) 맑음. 일찍 선봉을 장문포의 적 소굴로 보냈더니 왜인이 패문을 땅에 꽂아 두었다. 그 글에 일본이 대명과 바야흐로 화목하니 서로 싸울 수 없다고 했다. 왜놈 하나가 칠천 산기슭에 와서 항복하려 하기에 곤양군수가 불러 항복을 받아 배에 싣고 물으니 영등(거제 장목면 구영리)의 왜였다. 흉도(거제 사등면 앞 섬)로 진을 옮겼다.
패문이 땅에 꽂혀 있었다.
이번에는 명나라 종이가 아니라 왜의 종이였고, 흙에 꽂아 세워 두었다. 일본이 대명과 바야흐로 화목하니 서로 싸울 수 없다. 선봉이 그것을 뽑아 왔을 때 종이에는 밤이슬이 배어 먹이 조금 번져 있었다.
두 번 읽었다. 두 번 다 같은 말이었다. 지난봄 명나라 사람이 왜의 진에서 써 보낸 패문과 오늘 왜가 땅에 꽂은 패문이 같은 말을 했다. 싸우지 말라. 명나라 종이는 위에서 내려왔고 왜의 종이는 땅에서 솟았다. 위와 땅이 한목소리를 내는 그 가운데에 우리 배가 떠 있었다.
답하지 않았다. 땅에 꽂힌 종이에는 답을 보낼 데가 없다. 대신 그 종이를 배에 실어 두었다. 조정에 올릴 것이다. 조정이 그것을 읽으면 명나라가 화목하려 하니 싸우지 말라고 하리라는 것을 알면서 올린다. 올리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된다.
왜 하나가 칠천 산기슭에 내려와 항복했다. 곤양군수가 불러 배에 실었는데, 영등포 성 안에서 도망쳐 나온 자였다. 맨발이 가시덤불에 긁혀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고, 뱃바닥에 앉혀 놓자 한동안 어깨를 떨었다. 성 안 형편을 물었고 그가 답했다. 그 말은 일기에 올리지 않고 영등의 왜라는 것만 남겼다. 성 안에서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그 성의 형편이었다. 우리 배에서도 도망치는 사람이 있다. 같은 일을 다른 말로 부르지 않는다. 도망은 도망이다.
흉도로 진을 옮겼다.
이튿날 선병사와 곽재우와 김덕령이 뭍으로 돌아갔다. 붉은 옷이 배에서 내려 모래를 밟고 멀어졌다. 배를 타면 물의 사람이 되는지 타 봐야 안다고 했는데, 타 보았고 되지 않았다. 그 말은 일기에 올리지 않고 대신 띠를 베게 했다. 겨울에 배를 덮을 띠를 첫날 백여든세 동, 이튿날 이백예순 동 베었다. 낫질하는 소리가 비탈마다 사각거렸고, 베어 눕힌 풀에서 마른 흙냄새가 올라왔다. 물과 뭍이 함께 친 이레 동안 손에 남은 것은 띠 사백사십삼 동이었다. 세는 것이 내 일이다. 셀 것이 띠뿐인 날도 있다.
한산도로 돌아왔다. 밤 삼경(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무렵)이었다.
사료 · 9월 22일 원수의 밀서(27일에 군사를 일으킴), 26일 곽재우·김덕령이 견내량에 와서 수군과 합세하라는 원수의 전령을 전한 것, 29일 장문포로 들어가니 적이 누각을 세우고 두 봉우리에 보루를 쌓고 나오지 않아 선봉 두 척만 태운 것 ― 난중일기 갑오년 9월 22~29일(전서본) · 10월 1일 영등포의 적이 하나도 나오지 않은 것, 사도의 배 둘이 뭍에 걸려 적의 작은 배가 불을 던졌으나 꺼진 것, 「지극히 분하고 아프다」, 사도 군관을 무겁게 다스린 것 ― 난중일기 10월 1일 · 10월 2일 선봉 서른 척, 3일 종일 맞섰으나 적이 두려워 나오지 않은 것, 4일 곽재우·김덕령과 약속해 수백을 뭍에 내려 물과 뭍이 함께 다그치니 적이 허둥지둥 달아났으나 「뭍의 군사가 적이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고 곧 배로 내려온」 것, 선전관 이계명이 선유 교서와 담비 가죽을 가져온 것 ― 난중일기 10월 4일 · 10월 6일 왜가 땅에 꽂은 「일본이 대명과 화목하니 싸울 수 없다」는 패문, 영등의 왜 하나가 항복한 것, 흉도로 옮긴 것, 7일 선병사·곽재우·김덕령이 나가고 띠 백여든세 동을 벤 것, 8일 이백예순 동을 베고 밤 삼경에 한산도에 돌아온 것 ― 난중일기 10월 6~8일 · 곽재우가 붉은 옷을 입고 김덕령이 범을 잡는다는 것 ― 난중잡록. 산을 오르는 붉은 옷, 담비 가죽의 수, 항복한 왜의 말, 김완의 얼굴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