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5,775자) · 1594년 4월 28일~5월 28일, 한산도
별시
이순신 · 네오
1594년 4월 28일 (음력 3월 9일) 맑음. 기운이 조금 나은 듯해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웠다. 아프기만 하고 다른 증세는 없다.
기운이 조금 돌아온 아침, 배에서 내려 따뜻한 방으로 옮겼다.
한산도(통영 한산면)에는 뭍에 지은 방이 하나 있다. 겨울에 운주당을 지으면서 그 곁에 붙여 둔 작은 방인데, 아궁이에 밀어 넣은 솔가지 불기가 장판 밑에 밤늦도록 남았다. 봉창 아래 판자 바닥에서 한 달 가까이 누워 있던 몸이 그 온기에 닿자 등부터 풀렸다. 판자 틈으로 새어 들던 갯바람이 없으니 숨도 덜 차가웠다. 아프기만 하고 다른 증세는 없다고 일기에 남겼다. 아픈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병이었다.
이튿날에는 병세가 조금 나았는데 열이 머리 쪽으로 치밀었다. 입안이 마르고 혀가 입천장에 들러붙어서, 우물에서 막 길어 온 찬물 한 사발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열 있을 때 찬 것을 마시면 안 된다고 누가 일러 준 적이 있는데 그게 누구였는지는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사발을 가져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일기에는 마시고 싶다는 것만 남았다.
그다음 날은 종일 큰비가 왔다. 빗줄기가 지붕을 두드리고 처마 끝에서 물이 굵게 떨어지는 동안, 몸 안에 들어앉아 있던 열이 조금씩 빠져나갔다. 저녁 무렵에는 이마를 짚어도 손바닥이 뜨겁지 않았다. 다행 다행, 두 번 썼다. 두 해 동안 비는 배를 포구에 묶어 두는 것이었는데 이날의 비는 열을 씻어 갔다.
*
5월 2일 (3월 13일) 맑음. 아침에 계본을 봉해 올렸다. 병이 나아 가는 듯한데 기력이 몹시 고단했다. 회와 송두남을 내보냈다.
전날 정서해 둔 장계를 아침에 봉했다.
당항포(고성 회화면)에서 태운 서른한 척과 거기 들어간 서른한 장수, 담 도사의 패문과 그에 대한 답서까지 한 묶음으로 넣었다. 붓을 오래 쥐면 손목이 떨려서 글씨는 병이 조금 덜한 날에 끝내 두었다. 봉하는 일은 손가락 몇 개로 된다. 풀 먹인 종이 끝을 겹쳐 누르고 그 위를 엄지로 천천히 쓸었는데, 기운이 고단한 사람에게 꼭 맞는 일이었다.
패문과 답서를 조정에 올리는 데는 까닭이 있었다. 조정은 명나라 종이를 늘 위에 둔다. 그걸 알면서도 싸우지 말라는 그 종이에 우리가 무엇을 되물었는지 보여야 했다. 보이지 않으면 답서는 없던 것이 되고 담 도사의 패문만 홀로 남는다. 남아야 하는 쪽은 물은 쪽이었다.
회를 내보냈다. 한 달 동안 아비 머리맡에서 약을 달이고 이마에 찬 수건을 올리던 아들이 송두남과 함께 배에 올랐다. 뱃전에서 한 번 돌아보는 것을 나는 방문 앞에 서서 보았다. 전에는 회가 본영으로 갔다고만 썼는데 이번에는 내보냈다고 썼다. 보낸 사람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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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5일 (3월 16일) 맑음. 기운이 몹시 편치 않았다. 우수백이 와서 보았다. 충청수사가 전선 아홉 척을 거느리고 진에 이르렀다.
충청수사가 왔는데 정걸이 아니었다.
정걸은 일흔을 넘겨 물러났고, 새 충청수사가 판옥선 아홉 척을 이끌고 들어왔다. 배가 물목을 돌아 하나씩 포구로 들어올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는데 아홉에서 멈췄다. 지난해 이 바다에 와 있던 충청도 배보다 적었다. 적은 것을 장계에 올리면 조정이 알기는 할 것이다. 안다고 배가 더 오지는 않는다.
기운이 몹시 편치 않았다. 이 말을 올봄에 몇 번이나 썼는지 헤아려 보려다 그만두었다. 앓는 날까지 세고 싶지는 않았다.
이억기가 와서 보았다. 문지방 안쪽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안색을 살피더니 몇 마디 묻고 곧 일어섰다. 앓는 사람 곁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앓는 사람이 도리어 예를 차려야 하는데, 그는 그걸 아는 사람이었다.
*
5월 8일 (3월 19일) 비. 우수백과 함께 이야기했다.
이억기가 비 오는 날 다시 왔다. 도롱이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문간 흙바닥이 동그랗게 검어졌다. 오래 있지 않는 것을 예로 알던 사람이 이날은 앉아서 일어나지 않았다. 빗발이 굵어 돌아갈 뱃길이 궂었고, 그는 그걸 핑계로 삼았다. 그 핑계가 그가 차릴 수 있는 예였다.
그가 통제사가 앓으면 누가 정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앓아도 정한다고, 정하는 사람이 정한다고 답했다. 그가 웃었다. 그 얼굴이 웃는 것을 오랜만에 보았다. 그러면 앓지 마십시오. 그 말을 받아 들고 어디 내려놓을 데를 찾지 못했다. 앓는 것은 내가 고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5월 23일 (4월 4일) 흐림. 원수의 군관 송홍득과 변홍달이 새 급제자의 홍패를 가지고 왔다. 경상우병사 군관 박의영이 와서 그 장수의 문안을 전했다. 아침을 먹은 뒤 삼가현감이 왔다. 늦게 사정에 올랐다. 장흥이 술과 음식을 올렸다. 종일 조용히 이야기했다.
원수의 군관 둘이 홍패를 들고 왔다.
지난겨울 진중에서 무과를 보게 해 달라고 청했다. 군사들은 싸움터에 묶여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갈 수 없다. 급제를 못 하면 벼슬이 없고, 벼슬이 없으면 두 해 넘게 목숨을 걸어 온 사람에게 남는 것이 없다. 조정이 그 청을 들어주어 허락하는 문서가 겨울에 왔고, 오늘 홍패가 왔다. 붉은 물을 들인 두꺼운 종이였고 손끝에 닿는 결이 거칠었다.
그 종이를 두 번 세었다. 몇 장인지는 여기 남기지 않는다. 수를 적으면 받지 못한 사람이 생긴다.
늦게 사정에 올랐다. 앓아누운 지 한 달 남짓 만이었다. 활 쏘는 정자 마루가 흐린 날인데도 낮 동안 데워져 버선 바닥이 따뜻했다. 활을 잡고 시위를 당길 때는 팔이 버텼는데, 놓고 난 뒤에야 떨렸다. 원래 그렇다. 원래대로 돌아온 몸을 두고 다행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다행은 이미 비에 두 번 써 버렸다.
*
5월 25일 (4월 6일) 맑음. 별시 시험장을 열었다. 시험관은 나와 우수백과 충청수사, 참시관은 장흥과 고성과 삼가와 웅천(창원 진해구 웅천동)이었다. 시험을 감독해 뽑았다.
바다 한가운데 섬에 시험장을 열었다.
나와 이억기와 충청수사가 시험관 자리에 앉았고, 장흥부사와 고성현령과 삼가현감과 웅천현감이 참시관으로 곁에 앉았다. 웅천현감은 녹둔도(두만강 어귀, 지금은 러시아 땅)의 사람 이운룡이었다. 그가 언제 급제했는지 나는 몰랐고 묻지 않았다. 시험관 자리에서 곁의 사람에게 급제한 해를 묻는 것은 그 해를 따지는 일이 된다.
군사들이 활을 쏘고 말을 달렸다. 섬이라 말 달릴 마당이 좁아서 끝에 닿을 때마다 말이 목을 비틀며 급히 돌았고, 말굽이 마른 흙을 차올리는 소리가 사정 마루까지 울려 올라왔다. 흙먼지에 말똥 냄새가 섞여 났다. 스물두 해 전 훈련원(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운동장 자리) 별과에서 말에서 떨어지던 날이 생각났다. 왼쪽 다리뼈가 부러졌고,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싸맸다. 그 자리를 손으로 짚어 보니 뼈가 두껍게 붙어 있었다. 궂은 날이 오기 전이면 거기가 먼저 쑤신다. 오늘은 맑았다.
말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있었다. 흙바닥에 어깨부터 떨어졌다가 먼지를 털지도 않고 일어나 다시 등자에 발을 걸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험관은 떨어진 사람에게 말을 거는 자리가 아니다. 그가 붙었는지는 여기 남기지 않는다. 이름을 남기면 그 사람의 낙방까지 남는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다시 모여 시험을 치렀고, 그다음 날은 기운이 편치 않았다. 식은땀이 등을 적시는 채로 사정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올랐다. 시험관 자리가 비어 있으면 시험이 서지 않는다.
*
5월 28일 (4월 9일) 맑음. 시험을 마치고 방을 냈다. 어 조방장이 세상을 버렸다. 통탄함을 어찌 말하겠는가.
시험을 마치고 방을 냈다.
급제한 사람의 이름을 한 줄씩 써서 사정 아래 벽에 붙였다. 백 명 남짓이었고, 붓을 놓고 두 번 세었다. 방 앞으로 군사들이 몰려들어 목을 빼고 제 이름을 찾았다. 찾은 사람 쪽에서는 소리가 터졌고, 못 찾은 사람은 아무 소리 없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한 마당의 한쪽은 떠들썩하고 한쪽은 조용했는데, 나는 그 둘을 사정 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영담이 죽었다.
세상을 버렸다. 통탄함을 어찌 말하겠는가. 그 사람에게 남긴 것은 그 열 자였다.
물길을 아는 사람이었다. 손바닥을 펴 놓고 손가락으로 선을 그으며 여기가 노량(남해 설천면과 하동 사이 물목)이고 여기가 사천이고 여기가 당포(통영 산양읍 삼덕리)라고 짚어 주던 사람이었다. 물은 사람이 맞추는 것이 아니라고 세 번 말했다. 견내량(거제와 통영 사이 좁은 물목)의 좁은 목과 한산도 앞 넓은 바다를 처음 짚은 것도 그였다. 올봄에는 서른한 장수를 이끌고 당항포로 들어가 서른한 척을 태웠다. 제 고장은 여기라고 하던 사람이었다.
역병이었다. 겨울에 이백열넷을 데려간 그 병이 봄에 그를 데려갔다. 적은 두 해 동안 열 번 넘게 맞붙고도 그를 죽이지 못했는데 병은 소리도 없이 해냈다. 병을 두고 분하다고 쓸 수는 없어서 통탄이라고 썼다. 분하다는 말은 적에게 쓴다.
방을 낸 날이었다. 백 명 남짓이 급제한 날에 물길을 아는 사람 하나가 갔고, 한 장의 일기에 그 둘이 나란히 들어갔다. 어느 쪽이 더 큰 수인지 나는 알았다. 조정이 어느 쪽을 크게 볼지도 알았다. 알면서 둘 다 남겼다.
*
밤에 따뜻한 방에 누웠다.
아궁이 불이 사그라들어 장판의 온기가 발끝부터 식어 갔다. 누운 채 왼손 손바닥을 펴고 오른손 검지로 그어 보았다. 여기가 노량, 여기가 사천, 여기가 당포. 손금은 거기 그대로 있는데 물길이 되지 않았고, 손가락이 손바닥 위에서 헛돌기만 했다. 물길이 되는 손바닥은 그 사람의 것이었다. 그 손이 오늘 접혔다.
두 해 전 배흥립이 웃으며 한 말이 있다. 저 사람이 손을 접으면 경상도 바다가 그 안에 들어간다고. 그때는 나도 따라 웃었다. 오늘 밤 그 말은 농이 아니었다. 바다가 접힌 손 안으로 들어가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제 물길은 내가 배워야 했다. 두 해를 배웠고 얼마나 배웠는지는 몰라도 그 사람만큼은 아니었다. 그만큼 아는 사람을 어디서 찾는가. 찾아서 그 자리에 앉히는 것도 내 일인데, 오늘 밤은 아무 이름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하지 못하는 밤도 있다.
조정에 또 종이를 써야 한다. 지지난해에는 광양현감 자리에 그대로 두어 달라고 썼고, 지난겨울에는 조방장으로 보내 달라고 썼다. 세 번째 종이는 그가 죽었다는 종이다. 세 장이 한 사람을 담는다. 써도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적는 것은 남기는 것이지 돌리는 것이 아니라고 정운 때 말했고, 오늘 밤 또 했다. 같은 말을 두 번 하면 닳는다. 닳은 말밖에 없었다.
사료 · 3월 9일 따뜻한 방으로 옮겨 누운 것과 「아프기만 하고 다른 증세는 없다」, 10일 열이 치솟아 찬 것을 마시고 싶은 것, 11일 큰비에 병세가 크게 덜한 것, 12일 계문을 정서하고 13일 봉해 올리며 회와 송두남을 내보낸 것, 16일 충청수사가 전선 아홉 척으로 온 것 ― 난중일기 갑오년 3월 9~16일(전서본) · 4월 4일 원수 군관 송홍득·변홍달이 새 급제자의 홍패를 가져온 것, 6일 별시를 열어 이순신·이억기·충청수사가 시험관, 장흥·고성·삼가·웅천이 참시관이 된 것, 7일 모여 시험을 받고 8일 기운이 편치 않은데 시험장에 오른 것, 9일 「시험을 마치고 방을 냈다. 어 조방장이 세상을 버렸다. 통탄함을 어찌 말하겠는가」 ― 난중일기 4월 4~9일 · 진중에서 무과를 보게 해 달라고 청한 것 ― 청어진중시재장(請於陣中試才狀), 이충무공전서 권3 · 어영담을 광양현감에 그대로 두어 달라 청하고 조방장으로 청한 것 ― 청광양현감어영담잉임장·청이어영담위조방장장, 이충무공전서 권3 · 3월 19일 비 오는 날 우수백과 이야기한 것 ― 난중일기 3월 19일. 그 대화는 지어냈다 · 급제자의 수, 말에서 떨어진 사람, 손바닥을 그어 본 것, 정걸이 물러난 까닭, 어영담이 역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사료에 없거나 지어냈다. 일기는 그가 「세상을 버렸다」고만 적는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