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5,604자) · 1594년 4월 25일~27일, 흉도와 한산도

패문

이순신 · 네오

1594년 4월 25일 (음력 3월 6일) 맑음. 늦게 거제로 향하는데 바람이 거슬러 겨우 흉도(거제 사등면 앞 섬)에 이르렀다. 남해현감이 달려와 알렸다. 명나라 군사 둘과 왜놈 여덟이 패문을 가지고 들어왔기에 패문과 명나라 군사를 올려 보낸다고 했다. 가져다 보니 명나라 담 도사의 금토패문이었다. 나는 기운이 몹시 편치 않아 앉고 눕기가 불편했다. 저물어 우수백과 함께 명나라 군사를 보았다.

종이가 왔다.

이번 종이는 손바닥만 하지 않았다. 두 손으로 펼쳐야 할 만큼 넓고, 결이 곱고 빳빳한 명나라 종이였다. 명나라 군사 둘과 왜 여덟이 배 한 척에 함께 타고 영등(거제 장목면 구영리)에서 나와 남해에 내렸고, 남해현령 기효근이 그들을 받아 이리로 올려 보냈다. 명나라 군사와 왜가 한 배에 탔다. 두 해 동안 그런 배는 없었는데, 이제 생겼다.

그것은 패문이었다. 패문은 윗자리에서 아래로 내려보내는 명령의 글이다. 왜의 진영에 머물던 명나라 선유도사 담종인이 썼고, 금토패문이라는 이름대로 왜를 치지 말라는 글이었다. 나는 등잔 가까이 종이를 당겨 읽었다.

일본의 여러 장수가 마음을 기울여 귀화하지 않는 이가 없고 다 갑옷을 거두고 싸움을 쉬어 제 나라로 돌아가려 한다. 너희 각 병선은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머물러 싸움의 실마리를 일으키지 말라.

그 종이를 두 번 읽었다. 두 번 읽어도 글자는 한 자도 달라지지 않았다.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니, 그 고장이 어디냐고 종이에 물어도 종이는 답하지 않았다. 거제와 웅천(창원 진해구 웅천동)과 김해와 동래(부산 동래구)에 왜가 있고, 그 땅이 다 우리 땅이다. 우리 땅에 떠 있는 우리 배더러 일본 진영에 가까이 있다고 했다. 우리 땅이 일본 진영이 되었다는 것을, 명나라 종이가 우리보다 먼저 정해 버렸다.

기운이 몹시 편치 않아 앉고 눕기가 불편했다고 썼다. 봄부터 앓던 병이 그날 크게 덮쳐서, 식은땀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 옷깃이 축축했다. 앉으면 허리가 끊어질 듯했고 누우면 숨이 가슴에 얹혔다. 그것이 종이 때문인지 병 때문인지 나는 가르지 않았다. 가를 수 없는 것도 있다.

저물어 이억기와 함께 명나라 군사 둘을 불러 보았다. 둘 다 젊었다. 짠물에 절어 소매 끝이 해진 명나라 군복에서 낯선 기름 냄새와 왜의 진영에서 배어 온 연기 냄새가 함께 풍겼다. 왜의 진영에서 한동안 먹고 자다가 온 얼굴이었는데, 그 얼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나는 읽어 낼 수 없었다. 무엇을 물었는지는 남기지 않았다. 물을 것이 없었다. 종이가 이미 다 말했다.

*

4월 26일 (3월 7일) 맑음. 기운이 몹시 불편해 뒤척이기도 어려웠다. 패문에 답할 글을 아랫사람에게 쓰게 했더니 격식이 되지 않았다. 원 수사가 손의갑에게 지어 보내게 했으나 역시 몹시 맞지 않았다. 내가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아 글을 지어 정사립에게 쓰게 해서 보냈다. 미시(낮 한 시에서 세 시 무렵)에 배를 띄워 한산도(통영 한산면) 진에 이르렀다.

답을 써야 했다.

돌아눕기도 힘든 몸으로 답을 써야 했다. 아랫사람에게 쓰게 했더니 격식이 서지 않았다. 원균이 손의갑을 시켜 지어 보낸 글은 더욱 맞지 않았다. 무엇이 어긋났는지는 남기지 않았다. 원균의 사람이 쓴 글은 원균의 글이고, 그 글로 명나라에 답하면 그것이 곧 우리의 답이 된다. 그럴 수는 없었다.

병을 무릅쓰고 억지로 일어나 앉았다. 등뼈에서 힘이 다리까지 내려가지 않아 허리 아래가 남의 몸 같았고, 이불을 움켜쥔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그래도 앉았다. 앉아서 입으로 불렀고, 정사립이 먹을 갈아 붓을 잡았다.

조선 배신 삼도수군통제사 이 아무개가 삼가 황조 선유도사 대인 앞에 답합니다.

왜인이 스스로 싸움의 실마리를 열어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 우리 죄 없는 백성을 죽이고 또 한양을 범해 흉악한 짓을 끝없이 했습니다. 한 나라의 신하와 백성이 뼈에 사무치게 아파 이 적과 한 하늘을 이지 않기로 맹세했습니다. 각 도의 배를 수없이 정비해 곳곳에 주둔하고 동서로 서로 응하며 뭍의 장수들과 물과 뭍에서 함께 쳐 남은 흉적이 노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게 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 합니다.

이달 초사흗날 선봉선 이백여 척을 거느리고 곧장 거제로 들어가 소굴을 쓸어 없애려는데, 왜선 삼십여 척이 고성과 진해 지경에 함부로 들어와 마을을 불태우고 남은 백성을 죽이고 또 많이 잡아가며 기와를 나르고 대를 베어 배에 가득 실었습니다. 그 정상을 헤아리면 더욱 통분합니다. 그 배를 깨고 태우고 그 흉도를 쫓아 수군 도수부에 달려 알려 대군을 거느리고 힘을 합쳐 곧장 치려는 때에 도사 대인의 선유 패문이 뜻밖에 진에 이르렀습니다. 받들어 두 번 세 번 읽으니 간곡하고 정성스러워 지극하고 다합니다.

여기까지 부르고 숨을 골랐다. 방 안에는 먹 냄새와 약 냄새가 뒤섞여 있었고, 정사립은 붓을 벼루 위에 걸쳐 둔 채 말없이 기다렸다. 여기까지는 예를 갖추는 말이었다. 이제부터가 이 종이의 몸이었다.

다만 패문에 이르기를 일본 여러 장수가 마음을 기울여 귀화하지 않는 이가 없고 다 갑옷을 거두고 싸움을 쉬어 본국으로 돌아가려 하니 너희 각 병선은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고 일본 진영에 가까이 머물러 싸움의 실마리를 일으키지 말라 했습니다. 왜인이 웅거한 거제와 웅천과 김해와 동래 등지가 다 우리 땅인데 우리더러 일본 진영에 가까이 있다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더러 속히 제 고장으로 돌아가라 하는데 제 고장이 또한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싸움의 실마리를 일으킨 것은 우리가 아니라 왜입니다.

무엇입니까,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명나라 종이를 향해 그 두 가지를 물으면서, 이불 위에 올려 둔 내 손은 떨리지 않았다. 붓은 정사립이 잡았고 나는 입으로 부르기만 했다. 부르는 목소리가 떨렸는지는 정사립만 알았고, 그는 그것을 받아 적지 않았다.

일본 사람은 속임수가 만 가지라 예로부터 신의를 지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무리가 아직 악을 거두지 않고 바닷가에 물러나 웅거해 해가 지나도 물러가지 않고 여기저기 돼지처럼 뛰어들어 사람을 노략하는 것이 전보다 배가 되니 갑옷을 거두고 바다를 건너가려는 뜻이 과연 어디 있습니까. 지금 강화한다는 것은 실로 거짓에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인의 가르침을 감히 어기지 못해 우선 기한을 보아 국왕께 달려 아뢰겠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인은 이 뜻을 두루 아시어 거스르고 따르는 도리를 알게 해 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답합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답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정사립이 붓을 내려놓고 저린 손목을 두어 번 털었다.

*

가르침을 어기지 못한다고 적었다.

거짓에 걸리는 것이라고 해 놓고 바로 뒤에 어기지 못한다고 했으니, 두 줄이 한 종이에 나란히 있었다. 거짓인 줄 알면서 따른다. 따르는 것은 명나라가 위에 있어서고, 아는 것은 내가 여기 이 바다에 있어서다.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한 장의 종이를 채우면서야 또렷이 알았다.

이 답서는 조정에도 올라간다. 조정은 명나라를 위에 두니 이 종이를 어떻게 읽을지 알 수 없었다. 명나라 종이를 거스른 사람으로 읽을 수도 있고, 명나라 종이에 물은 사람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내 이름을 달고 간다.

류성룡이 지난봄 기패에 절하지 않았다는 말을 나는 들었다. 기패는 명나라 장수의 명을 담아 세우는 깃발과 패다. 적을 죽이지 말라는 패문 앞에서는 더욱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파주에서 물리친 것과 같은 종이가 이번에는 흉도 앞바다로 왔다. 뭍에서 바다로 건너온 종이 앞에서 그는 절하지 않았고 나는 물었다. 절하지 않는 것과 묻는 것이 같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같은 편에 서는 일이었다.

미시에 배를 띄워 한산도로 돌아갔다. 격군들이 누운 나를 흔들지 않으려고 노를 평소보다 느리게 저었다. 돌아가는 배 위에 누우니 돌아눕기가 어려웠다. 어려운 것을 애써 하지 않고 반듯이 누운 채 하늘을 보았다. 뜸 사이로 보이는 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비어 있었고, 뱃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물결의 흔들림이 등에 느리게 전해졌다. 그 하늘에는 종이도 패문도 답서도 없었다. 종이가 아닌 것을 그렇게 오래 올려다본 것은 그 봄에 처음이었다.

*

4월 27일 (3월 8일) 맑음. 병세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 기운이 또 고단했다. 종일 아팠다.

한산도에 돌아와 누웠다. 병세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날이 가장 길다. 더하면 끝이 오고 덜하면 일어나는데, 그 사이에 걸려 있으면 하루가 하루 그대로 길다. 창호지로 들어오는 볕이 방바닥을 한 뼘씩 건너가는 것을 누운 채 지켜보았다.

종일 아팠다고 썼다. 아프다는 말을 일기에 몇 번째 쓰는지는 세지 않았다. 세면 아픈 것이 는다.

어영담이 앓는 나를 보러 왔다. 그도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당항포(고성 회화면)에서 서른한 장수를 거느리고 들어가 서른한 척을 태우고 돌아온 사람이, 입술이 마르고 눈 밑이 거뭇했다. 그대도 앓는가 물으니 아니라고 했다. 아니라고 하는 것이 그의 예였고, 나는 그 예를 받으면서 알았다. 그의 아니라는 말은 아니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손바닥을 펴지 않았다. 물길을 말할 때마다 늘 펴서 손금 위에 물목을 그어 보이던 손을 소매 속에 넣은 채, 물길 이야기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패문 답서를 보았습니다.”

“정사립이 썼다.”

“제 고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있었다.”

“제 고장은 여기입니다.”

그는 그 말만 하고 돌아갔다. 문지방을 넘는 그의 발소리가 평소보다 느렸다. 여기, 한산도였다. 광양에서 나서 물길을 익힌 사람이 제 고장을 광양이 아니라 여기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받아 가슴에 넣어 두었다. 받아 둔 말은 언젠가 쓸 데가 생긴다. 열이틀 뒤에 그 말을 썼다. 그때 그는 없었다.

사료 · 3월 6일 흉도에서 남해현감이 명나라 군사 둘과 왜 여덟이 가져온 담 도사의 금토패문을 올려 보낸 것, 「기운이 몹시 편치 않아 앉고 눕기가 불편했다」, 저물어 우수백과 명나라 군사를 본 것 ― 난중일기 갑오년 3월 6일(전서본) · 3월 7일 「뒤척이기도 어려웠다」, 아랫사람과 원균의 손의갑이 지은 답서가 격식에 맞지 않아 병을 무릅쓰고 일어나 앉아 글을 지어 정사립에게 쓰게 해 보낸 것, 미시에 한산도로 돌아온 것 ― 난중일기 3월 7일 · 답서의 내용(왜가 스스로 실마리를 열어 죄 없는 백성을 죽이고 한양을 범한 것, 한 하늘을 이지 않기로 맹세한 것, 초사흗날 선봉선 이백여 척, 왜선 삼십여 척이 기와를 나르고 대를 벤 것, 「거제·웅천·김해·동래가 다 우리 땅인데 일본 진영에 가까이 있다 함은 무엇인가, 제 고장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실마리를 일으킨 것은 왜다」, 「지금 강화는 거짓에 걸리는 것이나 대인의 가르침을 감히 어기지 못해 기한을 보아 국왕께 아뢰겠다」, 「죽음을 무릅쓰고 답한다」) ―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 이충무공전서 권1 · 3월 8일 「병세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종일 아팠다」 ― 난중일기 3월 8일 · 류성룡이 지난봄 파주에서 기패와 「적을 죽이지 말라」는 패문에 절하지 않은 것 ― 징비록 권2. 이순신이 그것을 들었다는 것은 지어냈다 · 명나라 군사 둘의 얼굴, 배 위에서 하늘을 본 것, 어영담이 와서 「제 고장은 여기」라고 한 것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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