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5,627자) · 1594년 2월 20일~3월 12일, 여수 고음천과 한산도
고음천
이순신 · 네오
1594년 2월 20일 (음력 1월 1일) 비가 퍼붓듯 옴.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해를 더 보냈다. 이것이 난리 중의 다행이다. 늦게 전투 준비를 조련하는 일로 본영으로 돌아갔다. 비가 그치지 않았다.
새해 첫날에 어머니 곁에 있었다.
여수 고음천(여수 시전동 웅천)이었다. 진이 한산도(통영 한산면)로 옮겨 간 뒤로 아산(충남 아산)은 너무 멀어져서 어머니를 이리로 모셔 왔다. 멀면 편지 한 장 오가는 데 한 달이 걸리고, 한 달이면 사람이 죽고도 남는다. 가까이 모셔도 한산도에서 고음천까지는 뱃길로 하루였지만, 하루는 한 달보다 나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해를 더 보냈다고 쓰고, 그 끝에 난리 중의 다행이라고 붙였다. 다행이라는 말은 지난봄 배끼리 부딪쳤는데 크게 다치지 않았을 때도 썼다. 오늘은 어머니 곁에서 같은 말을 썼는데, 붓끝에 실리는 무게가 달랐다.
비가 퍼붓듯 왔다. 그 비를 뚫고 본영으로 돌아갔다. 전투 준비를 조련해야 했고, 설날이라고 적이 쉬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몇 걸음 가다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문 앞에 서 계셨다. 여든이 가까운 분이 처마 끝에서 쏟아지는 낙숫물에 치맛자락을 적시며 빗속에 그대로 서 계셨는데, 나는 손을 들지 않았다. 손을 들면 그것이 마지막 손짓이 될 것 같았다. 마지막이어서는 안 됐다.
*
3월 2일 (1월 11일) 흐리되 비는 안 옴. 아침에 어머니를 뵈러 배를 타고 바람을 따라 곧장 고음천에 이르렀다. 남의길, 윤사행, 조카 분이 함께 갔다. 어머니 앞에 나아가 뵈니 기운이 가물가물하셨다. 말씀은 틀리지 않으셨다. 적을 칠 일이 급해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열흘 만에 다시 갔다.
뒷바람이 돛을 팽팽하게 밀어서 배는 한나절도 안 걸려 고음천 앞에 닿았다. 방에 들어서자 약 달이는 냄새와 오래 불을 땐 온돌의 매캐한 냄새가 한꺼번에 코에 닿았고, 어머니는 이불 위에 가만히 누워 계셨다. 기운이 가물가물하셨다. 그 말을 저녁에 일기에 옮기는데 붓 쥔 손이 떨렸다. 활시위를 당길 때도 안 떨리고 놓을 때나 조금 떨리던 손이 붓을 쥐고 떨었으니, 종이가 먼저 알아챘다. 글자가 한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말씀은 틀리지 않으셨다는 것도 썼다. 숨은 가물가물한데 말은 한 마디도 어긋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여든 해를 그렇게 사셨다. 숨보다 말이 셌다.
조카 분이 함께 갔다. 죽은 형의 아들로, 정읍(전북 정읍)에 데려갔던 아이들 가운데 하나가 이만큼 자라서 나와 같은 배를 탔다. 분은 붓을 잘 잡았다. 뒤에 그 아이가 무엇을 쓸지 그때는 몰랐지만, 무언가를 쓸 손이었다.
적을 칠 일이 급해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급한 것은 적이 정했고, 머물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정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그것도 내 뜻이 아니었다.
*
3월 3일 (1월 12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셨다. 헤어지는 것을 조금도 탄식하지 않으셨다. 선창에 돌아오니 기운이 편치 않은 것 같아 곧장 북쪽 방으로 들어갔다.
잘 가라고 하셨다.
아침상을 물린 뒤 무릎을 꿇고 하직을 고했다. 어머니는 앉은 채로 내 얼굴을 한참 보시다가 입을 여셨다. 잘 가라. 그리고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고, 두 번 세 번 거듭 타이르셨다. 목소리는 가늘었지만 끝이 흐려지지 않았다. 헤어지는 것을 두고는 조금도 탄식하지 않으셨고, 나는 일기에 이별을 슬퍼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으셨다고 썼다.
어머니의 말을 일기에 옮긴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열아홉 달 동안 어머니 일은 평안하시다, 편지가 왔다, 그런 줄로만 남겨 왔다. 그날 처음으로 말씀을 그대로 옮겼다.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 여든 가까운 사람의 입에서, 숨이 가물가물한 사람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탄식하지 않으신 것이 어머니의 예였다. 어머니가 우시면 아들은 발을 떼지 못하고, 아들이 못 가면 배가 뜨지 않으며, 배가 안 뜨면 나라의 치욕도 씻지 못한다. 그 셈을 어머니가 하고 계셨다. 셈하는 사람이 나 말고 또 있었는데, 나를 낳은 사람이었다.
선창에 돌아오니 기운이 편치 않아 곧장 북쪽 방으로 들어갔다. 북쪽 방은 볕이 들지 않아 한낮에도 어둑했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무릎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그 어둠 속에 앉아 아무것도 세지 않았다. 세지 않기로 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날은 아무것도 세어지지 않았다.
*
3월 10일 (1월 19일) 흐리다가 늦게 갬. 큰바람. 아침에 떠나 당포(통영 산양읍 삼덕리) 바깥 바다에 이르러 바람을 따라 반돛으로 순식간에 한산도에 이르렀다. 사정에 앉아 여러 장수와 마주 이야기했다. 저녁에 원 수사가 왔다. 소비포(고성 하일면 동화리) 편에 영남 여러 배의 사부와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었다고 들었다. 참혹해 차마 들을 수 없다.
경상도 배의 사부와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었다.
소비포권관 이영남이 그 말을 전했다. 사부는 활 쏘는 군사고 격군은 노 젓는 군사다. 그들이 거의 다 굶어 죽었으니 배는 남았는데 노를 잡을 사람도 활을 쥘 사람도 없었다. 겨울 동안 원균의 진에서 그렇게 되었다.
참혹해 차마 들을 수 없다고 썼다. 차마 들을 수 없다면서도 끝까지 들었고, 들은 것을 종이에 옮겼다. 옮기는 동안 이를 악물고 있었다는 것을 붓을 놓고서야 알았다.
원균은 저녁에 왔다. 자기 진의 격군이 굶어 죽은 이야기는 입에 올리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남기지 않았다. 굶어 죽은 사람 이야기를 빼놓는 사람의 이야기에는 남길 것이 없었다. 배 스물다섯 척을 내보내고 일고여덟 척으로 가자고 하던 사람이었다. 그 배에서 사람이 굶어 죽었는데, 내보낸 배가 어디로 갔는지 나는 그때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군량을 구하러 갔다면 군량이 왔어야 했다. 오지 않았다.
*
3월 11일 (1월 20일) 맑으나 큰바람에 몹시 추움. 배마다 옷 없는 사람이 거북이처럼 움츠려 추위에 신음한다. 차마 들을 수 없다. 군량이 오지 않으니 이 또한 걱정이다. 병들어 죽은 사람을 거두어 묻을 차사원으로 녹도(고흥 도양읍 녹동)만호를 정해 보냈다.
우리 배도 같았다.
옷 없는 사람이 거북이처럼 움츠렸다고 썼다. 거북선을 만든 사람이 거북처럼 몸을 만 사람들을 쓰고 있었다. 등에 쇠못을 박은 배는 있는데 제 등에 걸칠 옷이 없는 사람들이 노 틈에 웅크려 있었다. 바람이 뱃전을 칠 때마다 배마다 앓는 소리가 물 위를 건너와 겹쳤고, 그 소리는 파도 소리보다 낮고 길었다. 차마 들을 수 없다고 또 썼다. 이틀 사이에 두 번이었다. 어제는 남의 진이었고 오늘은 내 진이었다.
군량은 겨울 내내 오지 않았다. 조정에 청하고 순찰사에게 청했지만 오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걱정이라고만 썼다. 걱정이라는 말은 가볍다. 무거운 말이 다 닳아서 가벼운 말을 무거운 자리에 썼다.
병들어 죽은 사람을 거두어 묻을 차사원으로 녹도만호를 정했다. 차사원은 한 가지 일을 맡겨 보내는 관원이다. 녹도만호는 정운의 자리에 온 사람이었다. 정운을 묻을 때도 차사원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정운의 뒤를 이은 사람이 병으로 죽은 군사들을 묻으러 간다. 그것을 알면서 그를 보냈다.
*
3월 12일 (1월 21일) 맑음. 아침에 본영 격군 칠백사십이 명에게 술을 먹였다. 광양이 들어왔다. 저녁에 녹도만호가 와서 병들어 죽은 시신 이백열네 구를 거두어 묻었다고 알렸다. 잡혀갔다 도망쳐 온 두 사람이 원 수사에게서 왔다. 적의 정세를 자세히 말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다.
칠백사십이 명에게 술을 먹였다.
본영의 격군들이었다. 칠백사십이를 두 번 세었고 두 번 다 같았다. 그 수대로 한 잔씩 술을 돌렸다. 텁텁한 탁주 한 잔이 추위를 막아 주지는 못한다. 한 잔이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하나하나 이름이 불리고 한 잔씩 받는 동안, 격군들은 자기가 셈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안다. 장군이 이름을 외우는 것을 보면 격군은 마음을 놓는다고 끝동이라는 아이가 말했다는 이야기를 뒤에 들었다. 셈에 드는 것도 그와 같다.
저녁에 녹도만호가 와서 이백열네 구를 묻었다고 알렸다. 그의 옷자락과 손톱 밑에 언 흙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이백열넷을 일기에 넣으면서 아침의 칠백사십이를 떠올렸다. 아침에 술을 받은 수와 저녁에 묻힌 수, 두 수가 같은 날 같은 종이에 나란히 놓였다. 산 사람을 세고 죽은 사람을 센다. 세는 손은 같은데 수가 다르다.
이백열넷이면 배 하나 반을 채운다. 배 한 척에 백서른이 타니, 겨울 동안 배 하나 반이 병으로 죽었다. 적이 죽인 것이 아니라 겨울이 죽였다. 겨울을 두고 분하다고 쓸 수는 없었고, 쓸 데가 없었다.
잡혀갔다 도망쳐 온 두 사람이 원균에게서 와서 적의 정세를 자세히 말했다. 믿을 수 없다고 썼다. 원균 쪽에서 온 말은 다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는 것과 거짓인 것은 다르다. 그 다른 것을 알면서도 나는 믿지 않았다.
*
밤에 북쪽 방에 앉았다.
한산도의 북쪽 방은 등잔을 켜도 구석까지 빛이 닿지 않았다. 그 어둑한 데서 칠백사십이와 이백열넷과 어머니의 가물가물한 숨과 나라의 치욕이 뒤섞여 머릿속을 돌았다. 섞이는 것을 막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을 다시 떠올렸다.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 씻으려면 배가 떠야 하고, 배가 뜨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며, 사람이 있으려면 먹어야 한다.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둔전을 청했다. 둔전은 군사와 백성이 갈아 군량을 대는 밭이다. 돌산도(여수 돌산읍)에 피난민을 들여 밭을 갈게 해 달라고 청했고, 조정이 허락했다. 허락은 종이로 왔고, 종이는 쌀이 아니었다. 봄이 와야 갈고 가을이 와야 거두는데, 그 사이의 겨울에 이백열넷이 죽었다.
봄까지 며칠이 남았는지 손가락으로 짚어 본 뒤 북쪽 방을 나섰다. 문을 열자 바닷바람이 얼굴을 쳤고, 옷을 입고 있어서 그것이 차다는 것을 알았다. 옷이 없는 사람은 차가운 것을 지나 다른 데에 가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 나는 몰랐다. 이백열넷이 아는 곳이었다.
사료 · 1월 1일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한 해를 더 보냈다. 난리 중의 다행이다」, 비 속에 조련하러 본영으로 돌아간 것 ― 난중일기 갑오년 1월 1일(전서본) · 1월 11일 남의길·윤사행·조카 분과 고음천에 가서 어머니를 뵈니 「기운이 가물가물하시나 말씀은 틀리지 않으셨다」, 12일 하직하니 「잘 가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으라」 두 번 세 번 타이르시고 헤어짐을 조금도 탄식하지 않으신 것, 선창에 돌아와 북쪽 방으로 들어간 것 ― 난중일기 1월 11~12일 · 1월 19일 소비포 편에 영남 여러 배의 사부와 격군이 거의 다 굶어 죽었다고 듣고 「참혹해 차마 들을 수 없다」, 20일 「배마다 옷 없는 사람이 거북이처럼 움츠려 추위에 신음한다, 군량이 오지 않는다」, 병사한 사람을 묻을 차사원으로 녹도만호를 정한 것, 21일 본영 격군 칠백사십이 명에게 술을 먹인 것과 녹도만호가 병시 이백열네 구를 묻었다고 알린 것, 원균에게서 온 두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다」 ― 난중일기 1월 19~21일 · 돌산도에 피난민을 넣어 밭을 갈게 해 달라고 청한 것 ― 청령유민입접돌산도경종장(請令流民入接突山島耕種狀), 이충무공전서 권3. 둔전을 청한 것 ― 청설둔전장(請設屯田狀) · 어머니가 문 앞에 서 계신 것, 붓이 떨린 것, 이백열넷을 배 하나 반으로 센 것, 끝동의 말은 지어냈다. 어머니를 여수 고음천으로 모셔 온 시기는 일기의 정황으로 잡았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