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5,591자) · 1593년 7월 29일~8월 27일, 한산도
달이 뱃전에
이순신 · 네오
1593년 7월 29일 (음력 7월 2일) 맑음. 해가 늦어서 우수백이 와서 보았다. 선전관이 오후에 돌아갔다. 해 질 무렵 김득룡이 와서 진양이 함락되어 황명보, 최경회, 서예원, 김천일, 이종인, 김준민이 죽었다고 전했다. 놀라고 애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그러나 결코 이럴 리가 없다. 필시 미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다.
진주가 떨어졌다.
해 질 무렵, 김득룡이 소금기에 절어 뻣뻣해진 옷자락을 털지도 않고 배에 올라와 그 말을 했다. 진양이 함락되었고 황명보, 최경회, 서예원, 김천일, 이종인, 김준민이 죽었다고, 이름 하나마다 숨을 한 번씩 끊어 가며 댔다. 여섯이었다. 수를 세는 것이 내 일인데, 그 여섯은 손가락을 접으면서도 세고 싶지 않았다.
이종인은 웅천(창원 진해구 웅천동)현감이었다. 지난가을 칠내도에서 내 배에 올라와 왜의 목 서른다섯을 베었다고 말하던 사람이다. 서른다섯이라는 수를 입에 올리는 얼굴이 물 긷고 온 이야기를 하듯 아무것도 없어서,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보았다. 그 사람이 진주성 안에서 죽었다고 했다.
그날 일기에는 결코 이럴 리가 없다고, 필시 미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라고 썼다. 붓을 먹물에 적시는 동안에도 이럴 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해 6월 김시민이 지켜 낸 진주를 이번에는 십만이 에워쌌다고 들었고, 십만 앞에서 남는 성은 없다. 없다는 것을 알면서 없을 리가 없다고 썼다. 믿는 것과 쓰는 것이 한 장의 종이 위에서 서로 등을 지고 앉아 있었다.
그날 밤은 잠을 못 잤다. 선창 밖에서 물이 뱃전을 치는 소리가 밤새 같은 간격으로 들렸고, 나는 그 소리를 세다가 그만두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잠을 못 잔 것은 일기에 넣지 않았다.
*
8월 1일 (7월 5일) 맑음. 일기는 「맑음」 두 글자다. 다음 날 아침에 방답(여수 돌산읍)이 와서 보았다.
사흘 동안 진주 소식이 잇달아 왔다. 전하는 사람도 달랐고 적어 온 종이의 필체도 달랐지만 말은 다 같았으며, 다른 손으로 쓴 같은 말은 올 때마다 한 번 더 무거웠다. 성이 떨어지고 안에 있던 사람이 남녀노소 없이 다 죽었다. 육만이라는 사람이 있었고 칠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셀 사람이 남지 않아 수가 저마다 달랐다. 세던 사람도 그 안에서 죽었다.
김천일은 의병장이었고 최경회도 의병장이었다. 황진은 충청병사였다. 이름 있는 사람이 죽었고, 이름 없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많이 죽었다. 이름이 있으면 종이에 이름으로 남고 이름이 없으면 수로 남는다. 수에도 들지 못한 사람은 어디에도 남지 않는데, 그런 사람이 제일 많았다.
진주는 뭍이고, 내 배는 뭍에 오르지 못한다. 배는 뭍으로 올 수 없다고 류성룡이 안주(평안남도 안주)에서 말했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지만, 같은 말을 나도 여러 번 입에 올렸다. 그래서 진주가 떨어지는 동안 나는 바다에 있었다. 짠바람에 눈을 가늘게 뜨고 웅포(창원 진해구 웅천 앞 포구) 어귀를 지켜보았고, 적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웅포에서 꿈쩍 않던 적은 뭍길로 진주에 가 있었다. 우리가 웅포 앞에서 분하다는 말을 일기에 여섯 번 쓰는 동안 저들은 고개를 넘었다. 바다를 막으면 뭍으로 간다. 지난 열넉 달의 셈이 그랬다. 셈은 맞았고, 진주는 떨어졌다. 맞는 셈이 사람을 살리지는 않았다.
*
8월 10일 (7월 14일) 맑음. 늦게 가랑비가 내려 먼지를 적셨을 뿐이다. 몸이 몹시 불편해 종일 앓았다. 순천이 왔다. 본부의 일은 형언할 수 없다. 진을 한산도(통영 한산면) 두을포(통영 한산면 두억리)로 옮겼다.
진을 옮겼다.
좌수영(여수) 앞바다를 떠나, 지난여름 사백이 솔잎을 뜯어 먹으며 버티던 그 섬으로 옮겼다. 견내량(거제와 통영 사이 좁은 물목) 바로 앞이고, 부산에서 서해로 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물목이다. 길목에 진을 두어야 남해 물길이 막히고, 남해 물길을 막는 것이 이 배들이 하는 일이다. 여수는 그 길목에서 너무 멀었다. 나가는 데 이틀, 돌아오는 데 이틀이 들던 그 나흘을 이번에 없앴다.
두을포에 배를 댔다. 뱃머리가 포구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에서 불던 바람이 뚝 끊기고, 잔잔해진 물 위로 솔숲 냄새가 낮게 깔렸다. 포구는 깊고 입이 좁아서, 밖에서 들여다보면 산자락이 겹겹이 막아 안이 보이지 않았다. 안 보이는 데 배를 두면 밖에서는 모른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 삼백 년 뒤에 누군가 같은 것을 알게 되리라는 것은 몰랐다.
그날 몸이 몹시 불편해 종일 앓았다. 이마는 불덩이 같은데 등은 식은땀에 젖어 저고리가 살에 들러붙었고, 닻을 내리라는 말 한마디에도 숨이 가빴다. 진을 옮기는 것은 내가 정했고 앓는 것은 몸이 정했다. 두 가지가 한날에 왔다.
순천부사 권준이 와서 순천 본부의 일을 말했다. 형언할 수 없다고만 썼고 무슨 일인지는 쓰지 않았다. 군량이 모자라고, 군사가 도망가고, 남은 사람이 굶는다. 형언할 수 없는 것은 늘 같은 것이어서 굳이 말로 옮기지 않았다.
*
8월 11일 (7월 15일) 맑음. 늦게 사량(통영 사량도)의 수토선과 여도(고흥 점암면)의 김인영과 순천의 김대복이 들어왔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홀로 봉창 아래 앉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이 뱃전에 들어오니 정신이 맑고 서늘하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닭이 벌써 울었다.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왔다.
일기에는 그렇게 짧게 남겼다. 가을이 바다에 들어온다는 것이 무엇인지 뭍에 사는 사람은 모른다. 바람에서 비린내가 조금 가시고 마른 풀 냄새가 섞여 들며, 한낮에도 물빛이 한 겹 짙어진다. 밤에 뱃전에 앉아 있으면 소매 속으로 파고드는 바람의 결이 여름과 다르다.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고도 썼다. 여수를 떠나 한산도에 왔으니 나그네다. 하지만 여수도 내 집은 아니었다. 내 집은 어머니가 계신 아산(충남 아산)이니, 나는 열넉 달 내내 나그네였는데 오늘 처음 그 말을 꺼냈다. 그전에 없던 말이 아니었다. 그동안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홀로 봉창 아래 앉았다. 지난봄 비 오는 날,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오늘은 비가 없었고, 달이 뱃전을 넘어 들어왔다. 물에 비쳐 흔들리는 달이 아니라, 뱃전 위로 곧장 넘어와 이슬 먹은 판자에 하얗게 깔리는 달빛이었다. 그 빛이 정신을 맑고 서늘하게 했다.
열넉 달 동안 일기에 쓴 것은 날씨와 배와 사람, 분한 일과 다행한 일이었다. 오늘은 맑고 서늘하다는 말을 넣었는데, 마음이 번거롭다고 쓴 바로 다음 줄이었다. 번거로운 것과 맑은 것이 같은 밤, 같은 붓 끝에서 나왔다. 사람들은 한 사람 안에 그 둘이 같이 사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 밤에 읽고 낮에 여덟이 오던 그 아이도 그랬다.
잠을 못 잤는데, 닭이 울었다.
진주가 떨어진 지 열이레였다. 이종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른다섯을 베었다고 말하면서도 아무것도 없던 그 얼굴이 성 안에서 마지막에 어땠는지, 나는 모른다. 모르는 것을 달빛 아래 그냥 두었다. 달빛은 모르는 것을 밝혀 주지 않고 비추기만 했다.
*
8월 17일 (7월 21일) 맑음. 경상우수사와 정 수사가 함께 왔다. 적을 칠 일을 함께 의논했다. 원 수사가 하는 말은 지극히 흉하고 간사하고 형편없었다. 이렇게 하고도 같이 일하면 뒷걱정이 없겠는가. 초경(밤 일곱 시에서 아홉 시 무렵)에 오수 등이 거제에서 망보고 와서 영등(거제 장목면 구영리)의 적선이 아직 머물며 횡포하다고 알렸다.
원균과 정걸이 왔다. 정걸은 충청수사가 되어 있었다. 일흔이 넘은 사람이 충청도 배를 끌고 여기까지 내려와, 굽은 허리를 한 손으로 받치며 한산도 선창에 올랐다. 셋이 둘러앉아 적을 칠 일을 의논했다.
원균이 말을 했다. 무슨 말이었는지는 일기에 옮기지 않았고, 지극히 흉하고 간사하고 형편없다고만 썼다. 지난봄에는 흉하고 험하다고 썼는데 오늘은 흉하고 간사하다고 썼다. 험한 것이 간사한 것으로, 한 계절에 한 글자씩 바뀌어 갔다.
이렇게 하고도 같이 일하면 뒷걱정이 없겠는가? 그 줄은 물음으로 남겼다. 답은 있었다. 뒷걱정이 있다는 답이었다. 답을 알면서도 물음으로 둔 것은 답을 쓰면 그 답이 종이 안에서 살아 버리기 때문이었다.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정걸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릎 위에 두 손을 포갠 채, 원균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눈꺼풀을 반쯤 내렸다. 일흔이 넘으면 아무 말도 안 하는 법을 안다. 마흔아홉인 나는 아직 그 법을 몰랐다.
*
8월 27일 (8월 1일) 맑음. 새벽 꿈에 큰 대궐에 갔는데 모양이 한양 같았다. 영상과 마주 앉아 어가가 파천한 일을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탄식했다.
꿈에 류성룡을 보았다.
한양을 닮은 큰 대궐에서 영의정과 마주 앉았다. 어가가 서쪽으로 간 일을 말하다가 둘이 함께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적의 형세는 이미 그쳤다고 했다. 서로 일을 말하는 사이 좌우로 사람이 구름처럼 수없이 모여들었고, 그 웅성거림 한가운데서 깼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고 썼다. 모른다고 쓰는 것이 가장 정직했다.
류성룡은 건천동(서울 중구 인현동) 골목에서 같이 자란 세 살 위였다. 정읍(전북 정읍)에 있던 나를 일곱 계단 올려 준 사람이다. 그가 지금 어디 있는지 나는 몰랐다. 안주에 있다고 들은 뒤로 소식이 끊겼는데, 소식이 끊긴 그 사람이 꿈에 왔다. 꿈이 보여 준 것이 맞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꿈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일기에 넣었다. 꿈에서 흘린 눈물은 써도 된다. 깨어서 흘린 것은 쓰지 않는다. 나는 그 둘을 갈랐고, 가르는 것도 내가 정했다.
닭이 울기 전이었다. 초하루라 하늘에 달이 없었고, 밤이슬에 젖은 뱃전이 손바닥에 차갑게 닿았다. 그 뱃전에 오래 앉아 두을포에 댄 배를 하나하나 세었다. 세 도를 합쳐 백이 넘었다. 두 번 다시 세었고 두 번 다 같았다. 진주는 떨어졌고 배는 백이 넘었다. 두 수가 같은 새벽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사료 · 7월 2일 해 질 무렵 김득룡이 진주 함락과 황명보·최경회·서예원·김천일·이종인·김준민의 죽음을 전한 것, 「결코 이럴 리가 없다, 필시 미친 사람이 잘못 전한 것」 ― 난중일기 계사년 7월 2일(전서본). 진주성이 6월 말에 떨어지고 성 안의 사람이 다 죽은 것 ― 징비록 · 7월 14일 몸이 불편해 종일 앓으며 진을 한산도 두을포로 옮긴 것, 순천이 와서 본부의 일이 「형언할 수 없다」 ― 난중일기 7월 14일 · 7월 15일 「가을 기운이 바다에 들어오니 나그네 회포가 어지럽다. 홀로 봉창 아래 앉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이 뱃전에 들어오니 정신이 맑고 서늘하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데 닭이 벌써 울었다」 ― 난중일기 7월 15일 · 7월 21일 원균·정걸과 의논하며 「원 수사의 말은 지극히 흉하고 간사하고 형편없다. 이렇게 하고도 같이 일하면 뒷걱정이 없겠는가」 ― 난중일기 7월 21일. 정걸이 충청수사로 온 것도 같은 일기 · 8월 1일 새벽 꿈에 큰 대궐에서 영상과 마주 앉아 어가가 파천한 일을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탄식한 것,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 난중일기 8월 1일 · 이종인이 지난가을 칠내도에서 목 서른다섯을 베었다고 한 것 ― 난중일기 임진년 8월 27일 · 웅포의 적이 뭍으로 진주에 갔다는 셈, 두을포가 삼백 년 뒤 누군가 알게 될 자리라는 것, 백이 넘는 배를 두 번 센 것은 지어냈다. 이순신의 나이 마흔아홉은 1545년생으로 센 것이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