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5,977자) · 1593년 1월, 여수 좌수영
새 배
이순신 · 네오
1593년 1월 (음력 임진년 12월), 여수 일기를 쓰지 못했다. 비변사의 관문에 「근래 보니 적을 치는 데는 수전만 한 것이 없으니 전선을 넉넉히 더 지으라」 하였다. 관문이 오기 전에 이미 본영과 진포에 많이 더 짓게 했다.
겨울에 배를 짓는다.
앞바다에 배가 없다. 배는 뭍에 올라와 있고, 배를 짓는 자리는 바다가 아니라 뭍이다. 소나무를 베어 와서 켜고 말린 뒤, 판자 밑에 불을 지펴 연기를 쐬어 가며 휜다. 못은 쇠가 모자라서 나무못이다. 나무못은 물에 불면 굳고 굳으면 쇠보다 낫다고 목수가 말했다. 나은지는 바다에 띄워 봐야 안다.
아침마다 선소에 나가면 톱밥이 서리에 섞여 발밑에서 버석거렸고, 자귀 소리가 언 공기에 부딪혀 두 번씩 울렸다. 목수들은 손가락이 곱으면 불가에 손을 한 번 쬐고 다시 나무로 갔다. 짓고 있는 배를 세고, 다 지어지면 몇이 되는지 셌다. 좌수영(여수) 스물넷에 더해 얼마인데, 그 얼마를 종이에 적지 않았다. 지어지기 전의 배는 수가 아니라 뭍에 올라와 있는 나무다.
한 배에 사부와 격군을 합쳐 백서른 남짓이 탄다. 배 한 척을 더 지으면 백서른을 더 채워야 하는데 채울 데가 없다. 겨울의 셈은 늘 거기서 막혔다. 배는 나무로 짓고 사람은 나무로 못 짓는다.
*
한산도(통영 한산면)의 사백이 빠져나갔다.
그 소식이 왔을 때 나는 장계를 쓰고 있었고, 붓을 멈췄다. 8월에 한산도 앞바다에서 화살 맞은 왜 사백 남짓이 섬에 올랐다. 새장 속의 새라 열흘이 지나면 굶어 죽을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원균에게 맡겼다. 그 소속 수군으로 사면을 둘러싸 남김없이 잡으라고 했고, 나와 이억기는 진을 파하고 돌아왔다.
원균이 그 뒤에 적선이 많이 온다는 말을 잘못 듣고 포위를 풀고 갔다.
뭍에 오른 왜가 나무를 베어 뗏목을 엮어 거제로 다 건너갔다. 솥 안의 고기가 끝내 빠져나갔다. 지극히 통분하다.
그렇게 썼다. 벼루의 먹물은 방이 차서 가장자리부터 살얼음이 끼어 있었고, 붓을 담글 때마다 얼음이 끝에 걸렸다. 정운을 두고는 참혹하고 아프다고 썼고 원균을 두고는 지극히 통분하다고 썼다. 두 말이 같은 겨울에 같은 붓에서 나왔고, 둘 다 조정으로 간다.
열사흘이었다. 저들이 솔잎을 먹은 날수를 나는 몰랐는데 뒤에 알게 되었다. 열사흘 동안 열 척이 섬을 돌았고, 열사흘째에 열 척이 없어졌고, 없어진 밤에 뗏목이 떴다. 뜬 뗏목 위로 화살이 갔다고 했다. 화살을 쏜 것이 누구 배였는지 나는 몰랐지만 원균의 배였을 것이고, 열 척이 없어지기 전에 쏘았을 것이다. 없어진 뒤에는 쏠 배가 없었다.
같은 일을 다른 말로 부르지 않는다. 풀어 준 것은 풀어 준 것이다. 잘못 들은 것이 풀어 준 것과 같은 일이 되는지 나는 몰라서 잘못 들었다고 적었다. 적은 것은 남는다.
*
정운을 이대원의 사당에 넣어 달라고 청했다.
이대원은 여섯 해 전 녹도(고흥 도양읍 녹동)만호였다. 정해년에 왜선 열여섯 척이 흥양(고흥) 손죽도에 왔을 때 다른 진들은 겁을 먹고 물러났다. 녹도만호 이대원 혼자 나가 싸우다 죽었고 배 한 척이 가라앉았다. 그 사당이 녹도에 있다. 그 사당에 정운을 넣어 혼을 불러 같은 자리에 앉히고 제사를 올리면, 의로운 혼을 한 번 위로하고 다른 사람을 한 번 경계한다.
붓을 옮기면서 정운의 손을 생각했다. 천 밖으로 나온 손, 손가락 사이가 굳어 있던 손이 사당에 들어간다. 손은 못 들어가고 이름이 들어가는데,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그가 원했는지 나는 몰랐다. 원했을 것이다. 앞에 있는 것이 그의 법이었고 사당은 앞에 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데다.
같은 종이에 방답첨사의 일도 올렸다.
네 번 싸움에 반드시 앞장서 쳤고 당항포(고성 회화면)에서 왜장을 쏘아 베었다. 그 공이 남보다 나은데 오직 쏘아 죽이는 데 힘쓰고 목은 힘쓰지 않았다. 그것을 내가 따로 아뢰었는데 조정의 포상 글에 그 이름만 없어서 군사들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긴다. 권준과 이순신과 어영담과 배흥립과 정운, 이 다섯이 내가 믿고 함께 죽기로 한 사람들이다. 권준 아래 장수들이 다 당상에 올랐는데 이 사람만 못 올랐다.
목을 세지 않는 것을 내가 시켰고, 시킨 것을 지킨 사람이 상을 못 받았다. 상을 주는 것은 조정이고 조정은 목을 센다. 세는 것이 다르면 종이가 다르게 읽힌다. 여름에 한 번 아뢴 것을 겨울에 다시 적었다. 다시 적는 것이 세는 사람의 일이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다. 문서가 방답(여수 돌산읍)으로 잘못 갔다가 사흘 뒤에 오던 사람인데, 이번에는 문서가 아예 안 갔다. 그 사람이 진해루에서 웃던 것을 생각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왔습니다. 이번에는 안 왔다. 그것을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그 얼굴이 생기므로 대신 적었다.
*
순천 사람 정사준이 곡식을 모았다.
상중에 일어난 사람이었다. 광양 전탄에 복병장으로 보냈더니 적이 감히 지경에 못 오게 했다. 그가 순천의 뜻 있는 사람들과 각자 곡식을 모아 배 한 척에 다 싣고 행재소로 가겠다고 했다. 행재소는 임금이 있는 데, 서쪽 어딘가다. 그 어딘가로 곡식 한 배가 간다.
권준과 신호와 어영담과 배흥립이 저마다 글을 보내왔다. 군량 원수 밖에 따로 둔 것이 있다. 나라의 운이 불행하여 대가가 서쪽으로 간 지 여섯 달이라 많은 장병이 지공을 이어 가기 어렵고, 신하의 마음이 통곡을 이기지 못한다. 따로 둔 군량을 배에 실어 올려 보내겠다.
여섯 달이었다. 나는 그 달수를 세지 않았는데 그들이 세고 있었다. 세는 버릇은 옮는다.
권준이 원수 밖 군량 백 석을 냈고 정사준의 의곡과 합쳐 한 배에 실었다. 섬을 지고 선창 널을 건너는 사람들 입에서 김이 끊이지 않았고, 볏섬이 부딪치는 둔한 소리가 해 질 녘까지 이어졌다. 신호와 어영담과 배흥립이 저마다 군량과 군기를 실었고 배가 서해로 갔다. 서쪽 바다 바람이 안 맞아 정사준이 중간에서 추위에 병들어 돌아왔고, 동생 정사횡이 대신 갔다.
곡식이 서쪽으로 갔다. 여기서는 먹일 입이 이백이 늘었는데 곡식이 서쪽으로 갔고, 그것이 옳은지 나는 몰랐다. 임금이 굶으면 나라가 없고, 나라가 없으면 배가 없다. 배가 없으면 이백을 데려온 것도 없던 일이 된다. 그래서 보냈다.
*
일족을 침해하지 말라는 명이 왔다.
도망친 군사의 일족과 이웃에게 죄를 묻지 말라는 명이었다. 임금의 뜻이었고 옳은 뜻이었다. 일족의 폐단이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 제일 심하다는 것을 나도 안다. 도망친 하나 때문에 그 집과 옆집이 끌려가 대신 방비하는 것을 나도 보았다. 명은 그것을 그만두라고 했다.
그 명이 온 뒤로 지난달 열 명이 방비하러 오던 고을에서 이달에는 서넛이 왔다. 어제 열 명이 남아 있던 데가 오늘은 네댓이 안 되고, 한 달이 안 되어 방비가 날마다 빈다. 진장이 손을 놓고 계책이 없다. 배를 타고 적을 치는 것을 무엇에 기대어 하는가. 성을 지키고 막는 것을 무엇에 기대어 하는가.
일족을 다 면제하면 성을 지키고 배를 저을 사람이 백에 하나도 없다. 명대로 따르면 변방을 지킬 사람이 없고 명을 거스르면 임금의 뜻을 어긴다.
나는 붓을 오래 들고 있었다. 붓끝에 모인 먹이 한 방울 종이에 떨어져 번지는 동안에도 손이 내려가지 않았고, 화로의 숯이 사그라드는 소리만 방 안에 있었다.
여름에 황옥천의 목을 베었다. 노를 놓고 집으로 간 여도(고흥 점암면) 수군이었고, 그 목을 장대에 걸어 스물네 척이 보게 했다. 보이는 데서 베면 스물네 척에 닿는다고 했다. 이제 그 장대가 없고 대신 명이 왔다. 도망친 사람의 집을 건드리지 말라. 옳은 명이다. 옳은 명이 오면 노 자리가 빈다.
번진 자리를 긁어내고 다시 썼다. 일족의 일은 당분간 전대로 시행하되 조금씩 가려내어 백성의 원망을 풀어 주는 것이 지금의 급한 일이다. 엎드려 바라건대 조정은 다시 헤아려 일족을 침해하지 말라는 명을 잠시 멈추고 남쪽의 회복하는 터전을 길이 온전하게 하여 주시라.
임금의 명을 멈추어 달라고 적었다. 그 줄을 적는 데 등뼈가 다리로 내려갔고 다리가 견뎠다. 옳은 명을 멈추어 달라는 사람이 나고, 옳지 않은 것을 하겠다는 사람이 나다. 이 줄이 통하면 누가 곤란해지는지 나는 알았다. 도망친 사람의 집이 곤란해진다. 알고도 적었다. 알고 하는 것이 정하는 것이다.
체찰사에게도 같은 뜻을 보냈더니 답이 왔다. 일족의 폐단이 백성을 병들게 하는 것이 제일 심하다는 임금의 뜻은 따르지 않을 수 없으나 보고한 사연도 이치가 있다. 적을 막는 것과 백성을 어루만지는 것 두 가지에 다 편한 길을 찾으라. 각 고을의 아주 죽어 없어진 집은 우선 명부에서 빼라.
두 가지에 다 편한 길, 그런 길이 있는지 나는 몰랐다. 없을 것이다. 없는 길을 찾으라는 것이 조정이 하는 말이고 찾는 척하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
밤에 뭍에 올라온 배를 보러 갔다.
짓다 만 배라 뼈대만 섰고 소나무 뼈대가 달빛에 희었다. 갓 켠 나무에서 송진 냄새가 나고 손을 대면 낮의 볕이 아직 조금 남아 있어서, 밤인데도 나무가 미지근했다. 배의 뼈대는 사람 뼈대와 달라서 사람은 등뼈가 하나인데 배는 용골이 하나고 늑골이 여럿이다. 늑골 사이로 달이 보였다. 판자를 붙이면 안 보일 것이고, 안 보이게 하려고 짓는다.
목수가 봄에 띄운다고 말했다. 봄에 띄우면 백서른을 채워야 하는데 채울 데가 없고, 채울 데를 만드는 것이 겨울의 일이었다. 일족의 명을 멈추어 달라고 쓴 것이 그 일이었고 곡식을 서쪽으로 보낸 것도 그 일이었다. 정운을 사당에 넣은 것도, 방답첨사의 이름을 다시 올린 것도 그 일이었다. 다 같은 일이었다. 봄에 배를 띄우는 일.
배는 나무로 짓고 사람은 나무로 못 짓는다. 그것을 나는 배 뼈대 앞에서 한 번 더 생각했다. 생각하는 것은 세는 것이 아니고, 세는 것을 그만두고 생각만 하는 밤이 있는데 이 밤이 그랬다.
한산도의 사백은 거제에 있을 것이다. 거제에 성을 쌓는다고 했는데 쌓는 소리가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다. 봄에 배를 띄우면 그 소리 나는 데까지 간다. 가서 셀 것이다.
사료 · 비변사의 관문에 「적을 치는 데는 수전만 한 것이 없으니 전선을 넉넉히 더 지으라」 한 것과 관문이 오기 전에 이미 더 짓게 한 것, 한 배에 사부와 격군 백삼십여 명이 타는데 채울 데가 없다는 것 ― 청반한일족물침지명장(請反汗一族勿侵之命狀), 이충무공전서 권2 · 한산도에 오른 왜 사백여 명을 「새장 속의 새」라 하여 원균에게 사면을 둘러싸 잡게 하고 돌아왔는데, 원균이 적선이 많이 온다는 말을 잘못 듣고 포위를 풀어 왜가 뗏목을 엮어 거제로 다 건너간 것, 「솥 안의 고기가 끝내 빠져나갔다, 지극히 통분하다」 ― 피위왜병도환장(被圍倭兵逃還狀). 열사흘과 뗏목과 화살은 일본 쪽 기록 협판가전기 · 정운을 녹도의 이대원 사당에 배향해 「의로운 혼을 위로하고 다른 사람을 경계」하자고 청한 것, 방답첨사 이순신이 「쏘아 죽이는 데 힘쓰고 목은 힘쓰지 않아」 따로 아뢰었는데 포상 글에 그 이름만 빠져 군사들이 놀란 것, 권준·이순신·어영담·배흥립·정운 다섯을 「믿고 함께 죽기로 한 사람」이라 한 것 ― 청정운추배이대원사장(請鄭運追配李大源祠狀). 이대원이 1587년 손죽도에서 혼자 싸우다 죽은 것 ― 정한위략이 인용한 조선 쪽 기록 · 정사준이 순천의 뜻 있는 사람들과 곡식을 모아 행재소로 보낸 것, 권준 등 네 수령이 「대가가 서쪽으로 간 지 여섯 달, 신하의 마음이 통곡을 이기지 못한다」며 따로 둔 군량을 올려 보낸 것, 정사준이 병들어 동생 정사횡이 대신 간 것 ― 장송전곡장(裝送戰穀狀)·장송전곡급방물장 · 일족을 침해하지 말라는 명이 온 뒤 방비하러 오는 군사가 열에서 서넛으로 준 것, 「명대로 하면 변방을 지킬 사람이 없고 명을 거스르면 임금의 뜻을 어긴다」, 명을 잠시 멈추어 달라고 청한 것, 체찰사의 답(두 가지에 다 편한 길을 찾으라, 아주 없어진 집은 명부에서 빼라) ― 청반한일족물침지명장 · 나무못과 목수의 말, 밤에 배 뼈대를 보러 간 것, 방답첨사의 웃음을 떠올린 것은 지어냈다 · 이 회차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이 무렵 일기는 없다(전서본 임진년 8월 29일 이후 계사년 정월까지 결락)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장계들의 날짜는 전서에 없어 1592년 12월 무렵으로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