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5,769자) · 1591년 3월, 정읍에서 여수까지
일곱 계단
이순신 · 네오
1591년 3월 (음력 2월), 정읍(전북 정읍)에서 여수까지 신묘년 2월 진도군수로 옮겼는데 부임하기 전에 가리포첨사가 났고, 또 부임하기 전인 그달 13일에 전라좌도 수사가 났다. 정읍에서 부임했다.
류성룡은 그 이름을 적었다.
비변사였다. 왜의 소리가 날마다 급해서 임금이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저마다 천거하라고 명했고, 대신들이 저마다 이름을 적었다. 이월 추위가 대청 마루 밑에서 올라와 버선발이 시렸고, 벼루 곁 화로의 숯은 재를 쓰고 잦아들고 있었다. 적힌 이름들은 다 아는 이름이었다. 신립과 이일, 조정에서 무장을 말하면 그 둘이 먼저 나왔다. 류성룡은 다른 이름을 적었다.
먹이 번지지 않게 붓을 세워, 이순신, 정읍현감이라고 썼다.
옆에 앉은 사람이 그 이름을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류성룡은 정읍현감이라고 답했고 그것뿐이었다. 골목과 활과 떨리던 손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천거의 이유가 안 되므로 대신 다른 것을 말했다. 조산(함경북도 경흥 조산)만호로 있을 때 배반한 오랑캐 울지내를 꾀어내 병영으로 묶어 보내 벤 사람이다. 녹둔도(두만강 어귀, 지금은 러시아 땅)에서 안개 속에 오랑캐 기병이 목책을 에워쌌을 때 문을 닫고 버들잎 화살로 수십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고, 문을 열고 홀로 말을 달려 쫓아 잡혀간 사람을 다 되찾아 온 사람이다. 그런데 조정에 밀어 주는 사람이 없어 급제한 지 십여 년에 자리를 못 얻고 이제야 정읍현감이 되었다.
옆 사람이 다시 그 사람이 지금 몇 품이냐고 물었다. 종육품이라고 했더니 옆 사람은 더 묻지 않고 붓을 내려놓았다.
*
정읍에서 이순신은 서류를 보고 있었다.
관아 마루에 앉아 문서를 넘기면 오래 묵은 종이 먼지가 창으로 든 햇빛 속에 떠올랐다. 정읍현감이 된 지 열넉 달이었고 그 사이에 태인(정읍 태인면)현감을 겸했다. 태인은 오래 수령이 비어 있어서 문서가 쌓여 있었는데, 그는 태인에 가서 그것을 흐르는 물처럼 처결해 잠깐 사이에 다 끝냈다. 백성들이 둘러서서 보다가 탄복했고, 어사에게 글을 올려 이 사람을 태인현감으로 달라고 한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 글을 그는 뒤에 보았다. 보고 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면 그 사람들이 생긴다.
정읍에는 조카들이 있었다.
두 형이 일찍 죽었다. 희신과 요신, 건천동(서울 중구 인현동) 골목에서 글을 읽던 형들이었다. 형들의 자녀가 다 어려서 어머니가 기르고 있었고, 그가 정읍에 갈 때 그 아이들이 어머니를 따라 함께 왔다. 식구를 너무 많이 데려왔다고 남솔이라고 흉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차라리 남솔의 죄를 받겠다.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을 차마 버릴 수 없다. 듣는 사람들이 옳게 여겼다.
그렇다고 흉본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흉본 사람은 그대로 있고 옳게 여기는 사람이 더 생겼을 뿐이다. 그는 조카들을 그대로 두었다. 저녁이면 관아 안채에서 아이들이 글 읽는 소리가 났는데, 목소리가 서로 엇갈려 한 줄이 두 번씩 들렸다.
그 앞에 종이가 두 번 왔다가 돌아갔다.
지난해 7월에 고사리첨사가 났는데 대간이 수령을 너무 자주 옮긴다고 말해서 그대로 정읍에 두었다. 8월에 당상으로 올려 만포첨사가 났는데 대간이 또 너무 빨리 올랐다고 말해서 고쳐서 그대로 두었다. 두 번 다 종이가 왔다가 돌아갔고 그는 두 번 다 짐을 싸지 않았다. 종이가 오면 짐을 싸는 사람이 있고 종이가 돌아가는 것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뒤쪽이었다. 기다리는 것도 정하는 것이다.
종이가 오가는 사이에 다른 종이가 하나 있었다. 도사 조대중이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고, 도사는 본도의 도사라 답하지 않을 수 없어 답을 썼다. 그 뒤에 조대중이 역모의 옥에 걸려 그 집의 글이 다 뒤져졌다. 그가 차사원으로 한양에 가는 길에 아는 금오랑을 만났는데, 금오랑이 말했다. 공의 편지도 뒤진 것 가운데 있다. 내가 공을 위해 빼내 주려는데 어떤가.
“전에 도사가 내게 편지를 보냈고 나도 답했습니다. 안부를 물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미 뒤진 것 가운데 있는데 사사로이 빼내는 것은 편치 않습니다.”
빼내지 않았다. 편지가 그대로 옥의 문서 사이에 남았고, 남은 것으로 죄가 되는지 그는 몰랐는데, 죄는 되지 않았다.
같은 길에 정언신이 옥에 있었다. 함경도에서 그를 순찰하던 사람이고,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 길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 성복하고 가라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옥에 있었고 그는 옥문 밖에서 안부를 물었다. 금오랑들이 당상에서 술을 마시며 풍악을 울리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죄가 있든 없든 한 나라의 대신이 옥에 있는데 당 위에서 풍악을 울리는 것이 편치 않습니다. 금오랑들이 낯빛을 고치고 사과했다.
그 두 종이와 그 옥문 밖이 정읍의 열넉 달 사이에 있었다. 그것을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서류를 보고 있는데 종이가 왔다. 진도군수로 옮겨 간다는 것이었다. 진도는 섬이고 정읍은 뭍인데, 뭍에서 섬으로 가는 것이 오르는 것인지 내리는 것인지 그는 몰랐다. 짐을 싸기 시작했다.
짐을 다 싸기 전에 종이가 또 왔다. 가리포첨사, 진도로 가지 말고 가리포(완도)로 가라는 것이었다. 가리포는 완도의 진이고 첨사는 군수보다 높다. 짐을 다시 쌌다. 묶었던 새끼를 풀고 다시 묶느라 손바닥이 쓸렸다.
그 짐을 풀기 전에 종이가 세 번째로 왔다.
*
2월 13일이었다.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정삼품이었다. 종육품에서 정삼품까지 일곱 계단이었고, 진도와 가리포는 그 사이에 잠깐 있었던 이름이었고, 그 이름으로는 하루도 살지 않았다. 정읍에서 곧장 여수로 갔다.
너무 빠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간원이 서너 해 사이에 너무 뛰어올랐다고 말했는데 조정은 답하지 않았다. 왜의 소리가 날마다 급했다.
류성룡도 그 말에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은 까닭을 그는 뒤에 징비록에 적었는데, 사람들이 혹 너무 빠르다고 의심했다는 그 한 줄이었다. 의심했다고 적고 그 의심이 옳았는지 그른지는 적지 않았다. 적지 않은 것이 그의 답이었다.
*
여수로 가는 길에 순천을 지났다.
순천부사 권준이 있었다. 두 해 전에 이순신이 전라순찰사 이광의 군관으로 순천에 들렀을 때 권준이 술을 마시며 말했었다. 이 고을이 아주 좋다. 그대가 나를 대신할 수 있겠는가. 자랑스럽고 뻐기는 얼굴이었고 이순신은 웃기만 했었다.
두 해 뒤에 그 사람 위로 갔다. 순천부사는 좌수사의 아랫사람이라 권준이 그를 맞으러 나왔는데, 뻐기는 얼굴이 아니라 맞는 얼굴이었다. 이순신은 그 얼굴을 보고 두 해 전 얘기를 하지 않았고, 권준도 하지 않았다. 둘은 나란히 말을 몰아 성문을 지났는데, 말굽이 돌바닥을 치는 소리만 났다.
권준이 뒤에 당포(통영 산양읍 삼덕리)에서 손이 안 떨린 채 왜장을 쏘아 떨어뜨렸다. 그 얘기를 이순신은 뒤에 들었다. 두 해 전 술자리 얘기와 같은 사람 얘기였는데, 사람은 하나인데 얘기가 둘이었고, 둘 다 그 사람이었다.
*
여수에 닿았다.
좌수영(여수)이었다. 진해루가 있고 객사가 있고 앞바다가 있고, 그 앞바다에 배가 있었다. 봄 바닷바람이 소금기와 갯내를 함께 실어 와서 누각 기둥에 밴 오래된 나무 냄새와 섞였다. 그는 배를 두 번 세었고 두 번 다 같았는데, 그 수를 종이에 적지 않았다. 적을 만한 수가 아니었다. 적을 만하게 만드는 것이 이제 그의 일이었다.
친구 하나가 꿈 얘기를 편지로 보내왔다. 그가 수사가 된 날 밤에 꾼 꿈이라고 했다. 큰 나무가 있었는데 하늘에 닿을 만큼 높고 가지가 천지 사이에 가득했고, 그 위에 몸을 맡긴 백성이 몇천 몇만인지 몰랐다. 그런데 그 나무가 뿌리째 뽑혀 넘어지려 했다. 어떤 사람이 몸으로 그것을 떠받쳤다. 보니 그 사람이 이순신이었다.
그는 그 편지를 오래 들고 있었다. 종이가 얇아서 창으로 든 봄볕이 글자 뒤로 비쳤다. 나무를 떠받치는 사람, 그 꿈이 자기 것이 아니고 친구 것이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자기 꿈이면 그 나무 아래 있어야 하고 남의 꿈이면 편지 안에 있고, 편지는 접으면 된다. 그는 편지를 두 번 접어 소매에 넣었다.
왜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그는 알았다.
본영과 소속 진의 싸움 기구를 다 손질했고 쇠사슬을 만들어 앞바다를 가로질러 걸었다. 그리고 배를 하나 새로 만들었다. 판옥선만 한데 위를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니게 하고, 나머지에는 칼과 송곳을 꽂아 발 디딜 데를 없앴다. 앞에 용머리를 두고 입을 총구멍으로 삼았고 뒤는 거북 꼬리였고 꼬리 아래에도 총구멍이 있었고 좌우에 각각 여섯이었다. 대개 거북 모양이라 거북선이라고 불렀다.
나대용이 그 배를 만드는 일에 있었다. 누가 처음 생각했는지는 뒤에 사람들이 저마다 다르게 말했는데 그는 그것을 가리지 않았다. 배는 배고, 뜨면 된다.
*
조정에서 종이가 왔다.
신립의 말이었다. 수군을 없애고 뭍의 싸움에만 힘쓰자, 배는 쓸데가 없다. 신립은 이 나라 제일의 장수였고 그 말이 조정을 움직여 수군을 파하자는 데까지 갔다.
이순신은 장계를 썼다. 진해루 아래로 밀물이 들어와 돌축대를 치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렸고, 그는 먹을 오래 갈지 않고 붓을 들었다.
바다의 적을 막는 데는 수군만 한 것이 없다. 물과 뭍의 싸움은 어느 하나를 폐할 수 없다.
두 줄이었다. 두 줄을 쓰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고, 오래 걸린 것은 그 두 줄이 조정에 가는 시간이었다. 조정이 그 말을 옳다고 했다. 수군이 남았다.
수군이 남았다는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남은 것으로 무엇을 하는가가 일이었고, 그는 앞바다의 배를 다시 세었다. 열넉 달 뒤에 스물넷이 될 수였다.
신립은 이듬해 충주에서 죽었다. 그 소식이 여수에 왔을 때 이순신은 오래 말이 없었다. 수군을 없애자던 사람이 뭍에서 죽고 수군은 바다에 있었다. 그는 그 둘을 견주는 말을 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사료 · 1591년 2월 진도군수로 옮겼다가 부임 전에 가리포첨사가 나고, 또 부임 전인 2월 13일 전라좌도 수사가 나서 정읍에서 곧장 부임한 것 ― 이분, 이충무공행록 · 왜의 소리가 급해 임금이 비변사에 장수감을 천거하라 하자 류성룡이 이순신을 천거해 정읍현감에서 뛰어올라 수사가 되었고 「사람들이 혹 너무 빠르다고 의심했다」 ― 류성룡, 징비록. 류성룡이 비변사에서 한 말은 징비록의 조산·녹둔도 대목을 옮긴 것이고 옆 사람의 물음은 지어냈다 · 태인현감을 겸해 쌓인 문서를 흐르는 물처럼 처결하니 백성이 탄복해 어사에게 글을 올린 것, 죽은 두 형의 자녀를 어머니와 함께 데려가 남솔이라 흉보자 「차라리 남솔의 죄를 받겠다」 한 것 ― 행록 · 1589년 전라순찰사 이광의 군관으로 순천에 들렀을 때 부사 권준이 「이 고을이 좋으니 그대가 나를 대신하겠는가」 하고 뻐긴 것과 이순신이 웃기만 한 것 ― 행록 · 1590년 고사리첨사와 만포첨사가 났다가 대간의 말로 정읍에 그대로 둔 것, 도사 조대중의 편지를 금오랑이 빼내 주려 하자 「이미 뒤진 것 가운데 있는데 사사로이 빼내는 것은 편치 않다」고 한 것, 옥에 있는 정언신에게 옥문 밖에서 문안하고 당 위에서 풍악을 울리는 금오랑들을 나무란 것 ― 행록 · 친구가 꾼 큰 나무 꿈, 쇠사슬을 앞바다에 건 것, 거북선의 생김(판자 위 십자 길·칼과 송곳·용머리 총구멍·거북 꼬리·좌우 여섯 총구멍) ― 행록. 나대용이 거북선 건조에 관여했다는 것은 후대의 전승이라 「가리지 않았다」고 썼다 · 조정이 신립의 아룀으로 수군을 없애려 하자 「바다의 적을 막는 데는 수군만 한 것이 없다, 물과 뭍의 싸움은 하나를 폐할 수 없다」고 장계해 조정이 옳다고 한 것 ― 행록 · 「일곱 계단」은 종육품에서 정삼품까지의 품계 수다. 사간원의 말은 선조실록에 기대야 하는데 아직 받지 못했다 · 이 회차는 류성룡과 이순신의 3인칭이다. 1591년에는 일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