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5,981자) · 1592년 10월 6일, 가덕에서 여수까지
왼쪽 귀
이순신 · 네오
1592년 10월 6일 (음력 9월 2일) 일기를 쓰지 못했다. 9월 2일 진을 파하고 본영으로 돌아왔다. 우후 이몽구가 벤 왜의 머리 한 급은 본디 왼쪽 귀가 없었다.
아침에 가덕(부산 강서구 가덕도)에서 진을 파했다. 밤새 뱃전에 내린 이슬이 아직 마르지 않아 손을 짚으면 차가웠고, 닻줄을 감는 격군들의 입에서 허연 김이 났다.
파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했다. 어제 백 척 남짓을 깼고 사백 남짓이 남았으니, 이튿날 다시 들어가 그 소굴을 태우고 배를 다 깨고 싶은 마음이 밤새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위로 올라갔던 적이 곳곳에 가득했다. 돌아갈 길을 끊으면 저들이 다 궁한 적이 되고, 궁한 적은 백성을 어육으로 만든다. 그리고 바람과 파도에 배가 서로 부딪쳐 깨진 데가 많았고 군량도 모자랐다. 배를 고치고 군량을 채우고 뭍의 군사가 크게 밀고 내려오는 날을 기다려 물과 뭍에서 함께 친다. 그렇게 정했다. 정하는 사람이 나다.
돌아가는 배에 시신이 실려 있었다. 정운의 배에 정운이 있었고 여도(고흥 점암면) 배에 박석산이 있었고 사도(고흥 영남면) 배에 김개문이 있었다. 배마다 죽은 사람이 하나씩 둘씩 있어서,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같은 배를 타고 같은 노에 실려 여수로 갔다. 돌아가는 노는 가볍다고 격군이 말했는데 오늘은 가볍지 않았다.
*
이몽구가 벤 목을 보았다.
가덕에서였다. 장림포(부산 사하구 장림동)에서 그가 대선 한 척을 깨고 벤 것이었고, 목은 소금에 절여 조정에 올리는 것이라 절이기 전에 보았다. 늙은 왜였다. 머리가 반은 희었고 그리고 왼쪽 귀가 없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잘린 것이었다. 오래전에 잘린 자리라 귀뿌리만 남고 그 위가 없었고, 아문 지 오래된 살이 귀뿌리를 덮어 반들반들했다. 싸움에서 잘린 것이 아니었다. 싸움에서 잘린 것은 새것인데 이것은 옛것이었다.
“왼쪽 귀가 없습니다.”
이몽구가 말했다. 나도 보고 있었다.
“누가 잘랐는가?”
“모릅니다. 오래된 자리입니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보았다. 죽은 왜의 얼굴을 이렇게 오래 들여다보기는 처음이었다. 소금 자루를 풀어 놓은 자리에서 짠내와 비린내가 한데 올라왔고, 죽은 얼굴의 입가에는 마른 피가 검게 붙어 있었다. 사천에서도 당포(통영 산양읍 삼덕리)에서도 목은 종이에 적히는 수였는데 이것은 수가 아니었다. 왼쪽 귀가 없는 얼굴이었다.
그때 내 배의 격군 하나가 갑판 아래서 올라왔다. 어제 탄환에 맞아 팔을 동인 사람으로, 어젯밤에 생각나지 않던 이름이 김개동이었다. 그가 그 목을 보고 나서 갑판에 주저앉았다.
*
김개동은 그 귀를 알았다.
정해년, 다섯 해 전의 녹둔도(두만강 어귀, 지금은 러시아 땅)였다. 그는 그때 조산(함경북도 경흥 조산)의 수군이었고 녹둔도 둔전을 지키던 목책 안에 있었다. 가을, 군사들이 다 나가 벼를 베던 날이었다. 안개가 짙어 옆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낫질 소리만 들렸는데, 그 안개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먼저 오고 오랑캐 기병이 뒤에 왔다. 목책이 뚫렸다. 그는 이언세와 함께 잡혔고, 그렇게 잡혀간 것이 예순 남짓이었다.
잡아간 것은 오랑캐였는데 오랑캐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 왜가 있었다. 왜가 어떻게 두만강까지 왔는지 그는 몰랐지만 바다로 왔을 것이고, 배를 타고 동해를 돌아 올라와 오랑캐와 섞여 사람을 잡아 팔았을 것이다. 그 왜의 두목이 왼쪽 귀가 없었다. 늙었고 귀가 없었고 사람 죽이기를 즐겼는데, 즐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김개동은 그때 알았다. 죽일 까닭이 없는데 죽였다.
그 두목의 눈썹과 눈을 그는 잊지 않았다. 잊으려고 다섯 해를 썼는데 안 됐다.
그날 저녁에 조산만호가 쫓아왔다. 말을 타고 이운룡과 함께 쫓아와 예순 남짓을 되찾았고 김개동은 그렇게 돌아왔다. 돌아오면서 만호의 왼쪽 다리에 화살이 박힌 것을 보았다. 만호가 그것을 몰래 뽑았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으려고 뽑았는데 김개동이 보았고, 본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 만호가 지금 좌수사였다.
다섯 해 뒤에 그는 좌수사의 배에서 노를 젓고 있었다. 어제 부산에서 탄환에 맞았는데 죽지 않았고, 죽지 않고 오늘 이 목을 보았다. 왼쪽 귀가 없는 늙은 얼굴에 눈썹과 눈이 완연했다.
“이 왜입니다.”
그가 갑판에 앉은 채로 말했다.
“무엇이?”
“소인을 잡아간 왜입니다. 정해년 녹둔도에서. 왼쪽 귀가 없었습니다. 늙었고, 두목이었고, 사람을 죽였습니다. 눈썹과 눈이 이 얼굴입니다.”
*
나는 그 말을 받았다.
녹둔도라는 이름을 종이에서 다시 볼 줄 몰랐다. 다섯 해 전 안개 속에서 목책이 뚫렸고 나는 화살을 맞았고 사람을 되찾았고, 그러고 나서 병사 이일에게 잡혀 죄를 받았다. 백의종군이었고 그것이 첫 번째였다. 그 이름이 부산 앞바다에서 왼쪽 귀 없는 목으로 돌아왔다.
같은 왜가 다섯 해 사이에 두만강과 부산에 있었다. 배로 왔을 것이고, 배로 오는 것을 막는 것이 내 일이다. 다섯 해 전에는 막지 못해서 예순이 잡혀갔고 되찾았고 죄를 받았다. 오늘 그 왜의 목이 소금에 절여져 조정에 간다. 조정이 이 목을 다섯 해 전의 그 왜로 알아볼 리 없고, 알아볼 사람은 김개동과 이언세뿐이다. 그 둘의 말을 종이에 적었다. 적으면 남는다.
이언세를 불렀다. 그도 내 배의 격군이었고 그도 보았고 그도 같은 말을 했다. 눈썹과 눈이 완연하다.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하면 그것은 사실이 된다. 사실이 되는 것과 조정이 믿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래도 두 사람의 이름을 장계에 나란히 넣었다.
*
포로가 하나 더 있었다.
사량권관 이여념이 사로잡은 왜로, 오도동이라고 했다. 젊었고 어리석어 보였다. 그가 말했다. 일본 상국의 왜가 처자를 데리고 왔다. 자기가 사는 데의 왜는 다 싸움에 나가기를 싫어해 산골로 피해 들어갔는데, 6월과 7월 사이에 일본의 사자가 산을 뒤져 잡아내 배에 가득 실어 여기로 보냈다. 요즘 고려 사람이 우리 무리를 많이 죽여 오래 머물기 어려워 본토로 돌아가려던 참에 이렇게 잡혔다.
싸움에 나가기를 싫어해 산으로 피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잡아내 배에 실어 보냈고, 보내진 사람들이 부산에 있었다. 사백칠십 척 안에 그런 사람이 몇인지 나는 몰랐다.
교묘한 말이라 믿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어리고 모습이 어리석어 조금 그럴듯한 데가 있었다. 포박된 손목이 가늘었고, 말을 하는 동안 그는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말과 그럴듯하다는 말을 나란히 적었다. 어느 한쪽도 버리지 않았다.
산으로 피한 사람을 잡아내 배에 실은 것은 저들이었고, 산으로 피한 사람을 잡아내지 않으려고 배를 돌린 것은 나였다. 어제 부산에서, 그리고 안골포(창원 진해구 안골동)에서. 그 둘을 나는 같은 종이에 나란히 두지 않았다. 나란히 두면 견주게 되고, 견주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
여수에 닿았다.
닷새 만이 아니라 여드레 만이었다. 포구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넉 달 전에는 소금 굽는 여인이 동생의 손을 보러 나왔는데 오늘은 더 많이 나와 있었고, 배에 죽은 사람이 실려 온다는 것을 포구가 먼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른다. 포구는 늘 먼저 안다. 물이 빠진 갯벌에서 굴 껍데기 썩는 냄새가 올라왔고, 사람들은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정운의 시신을 내렸다. 여도의 박석산과 사도의 김개문과 내 배의 수배와 사공 김숙련을 내렸고, 나는 뱃머리에 서서 그것을 보았다. 뱃전의 판자가 젖어 미끄러워서 들것을 든 사람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들것이 기울었고, 그때마다 덮은 거적 끝이 물에 닿았다. 나는 마지막 들것이 뭍에 닿을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장수 가운데 따로 차사원을 정해 정운의 상을 지키게 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배에 실어 돌아가 장사 지내고 처자에게는 다른 예에 따라 휼전을 베풀라고 했고, 크게 다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약을 나누어 주고 온 힘을 다해 고치라고 엄히 일렀다. 그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종이에 남겼다. 남겨야 지켜진다.
정운의 자리에 다른 사람을 빨리 보내 달라고 조정에 청했다. 무재와 계려가 있는 사람으로 보내 달라고 했고, 그 사이에는 군관 윤사공을 가장으로 보냈다. 보내고 나서 알았다. 윤사공도 어제 부산에서 탄환에 맞아 죽었다. 죽은 사람을 죽은 사람의 자리에 보냈고, 종이에 적힌 이름과 배에 실린 몸이 달랐다. 나는 그 이름을 지우고 고쳐 적었다. 먹이 마르기 전에 붓끝이 한 번 떨렸다.
*
밤에 장계를 썼다. 등잔 기름이 모자라 심지를 낮추었고, 방 안에는 먹 가는 소리와 바깥 물 소리만 있었다.
앞뒤로 네 번 나가 열 번 싸워 다 이겼다. 장수와 군사의 공을 논하면 이번 부산 싸움보다 더한 것이 없다. 전에는 적선이 많아야 일흔 남짓이었는데 이번에는 큰 적의 소굴에 사백 남짓이 대어 있는 데로 위세를 벌이고 이긴 기세로 돌진했다.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꺾이지 않고 종일 힘써 쳐서 적선 백 남짓을 깼고, 적의 마음을 꺾고 담을 떨어뜨리고 머리를 움츠리고 두려워하게 했다. 목은 못 베었으나 힘써 싸운 공은 전보다 낫다.
그 끝 줄을 쓰면서, 목은 못 베었다는 말이 조정에서 어떻게 읽힐지 짐작했다. 조정은 목을 세고 나는 배를 세는데, 세는 것이 다르면 종이가 다르게 읽힌다. 그래도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
순천 감목관 조정이 스스로 배를 마련해 종과 목자를 데리고 나와 왜를 많이 쏘아 죽인 일, 낙안군수의 군관 송여종이 네 번 다 앞장서 목을 벤 일을 차례로 올렸다. 그리고 정운을 적었다. 변고 이래 충의를 떨쳐 적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세 번 다 앞장섰고, 부산에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다가 큰 쇠 탄환이 머리를 꿰뚫어 죽었다. 지극히 참혹하고 아프다.
마음이라는 말을 넉 달 만에 일기에 쓴 지 열흘 만에, 아프다는 말을 장계에 적었다. 쓰고 나서 지우지 않았다.
붓을 놓은 군관이 손을 털었다. 손가락 사이가 굳어 있었고 나는 정운의 손을 생각했다. 생각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막으면 없던 사람이 된다.
김개동이 갑판 아래서 노를 베고 자고 있었다. 팔을 동인 채였다. 다섯 해 전에 되찾아 온 사람이 다섯 해 뒤에 내 배에서 노를 젓다가 탄환에 맞았고 죽지 않았고, 그 사람이 왼쪽 귀 없는 얼굴을 알아보았다. 바다는 넓고 세상은 좁다. 그것을 나는 종이에 적지 않았다. 적을 수 있는 것은 수뿐이다.
사료 · 9월 2일 진을 파하고 돌아온 것, 이튿날 다시 쳐서 소굴을 태우려 했으나 적의 귀로를 끊으면 궁한 적이 될 것을 염려하고 배가 부딪쳐 깨진 데가 많아 군량을 채우고 뭍의 군사를 기다리기로 한 것 ― 부산파왜병장, 이충무공전서 권2 · 이몽구가 벤 왜의 머리에 본디 왼쪽 귀가 없어 귀뿌리를 잘라 소금에 절여 올린 것, 정해년(1587)에 잡혀갔다 도망쳐 돌아온 영 수군 김개동·이언세가 「우리를 잡아간 왜가 본디 왼쪽 귀가 없었는데 지금 이 머리를 보니 눈썹과 눈이 완연하다, 이 왜는 늙었고 저희 가운데 추장으로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사람 죽이기를 즐겼다」고 한 것 ― 같은 장계. 두 사람이 이순신의 배 격군이었다는 것과 김개동이 부산에서 다쳤다는 것도 같은 장계 · 1587년 녹둔도에서 안개 속에 오랑캐가 목책을 뚫어 예순여 명이 잡혀갔고 조산만호 이순신이 이운룡 등과 쫓아가 되찾았으며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고 몰래 뽑은 것, 병사 이일에게 죄를 받아 백의종군한 것 ― 이충무공행록. 잡아간 무리에 왜가 섞여 있었다는 것은 장계의 김개동 진술을 따랐다 · 사량권관 이여념이 사로잡은 왜 오도동의 진술(일본의 사자가 산골로 피한 사람을 뒤져 배에 실어 보냈다)과 「교묘한 말이라 믿을 수 없으나 나이가 어리고 모습이 어리석어 조금 그럴듯하다」 ― 부산파왜병장 · 「앞뒤로 네 번 나가 열 번 싸워 다 이겼고 부산 싸움의 공이 제일」, 감목관 조정, 송여종, 정운의 「지극히 참혹하고 아프다」, 차사원을 정해 상을 지키게 한 것, 시신을 배에 실어 장사 지내고 처자에게 휼전을 베풀며 다친 사람에게 약을 준 것, 윤사공을 가장으로 보냈는데 그도 죽은 것 ― 같은 장계 · 김개동이 목을 보고 주저앉은 것, 목책이 뚫린 날의 기억, 포구의 사람들, 밤의 생각은 지어냈다 · 김개동의 장면은 3인칭, 나머지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이날 일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