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5,555자) · 1592년 10월 5일, 부산포

부산포

이순신 · 네오

1592년 10월 5일 (음력 9월 1일) 일기를 쓰지 못했다. 9월 1일 닭이 울 때 배를 띄웠다. 진시(아침 일곱 시에서 아홉 시 무렵)에 몰운대(부산 사하구 다대동)를 지나는데 동풍이 갑자기 일고 파도가 사나워 배를 겨우 다루었다.

닭이 울 때 닻을 올렸다.

일흔네 척이 어둠 속에서 떴다. 닻줄 감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났는데, 물레 도는 소리처럼 저마다 빠르기가 달랐다. 늦게 뜨는 배가 어느 배인지 나는 굳이 헤아리지 않았다. 오늘만은 늦는 배가 없기를 바랐다.

진시(아침 일곱 시에서 아홉 시 무렵)에 몰운대를 지나는데 동풍이 갑자기 일어 바다가 뒤집혔다. 파도가 뱃전을 넘어 갑판에 쏟아지자 격군들의 바짓가랑이가 한꺼번에 젖었고, 크다는 판옥선도 옆으로 누웠다. 격군이 노를 깊이 박아 물을 잡으면 배가 다시 일어섰다. 그 일을 일흔네 척이 한꺼번에 해냈다. 배와 배가 몇 번이나 부딪칠 듯 가까워졌다가 끝내 부딪치지 않았다. 입 안에 짠물이 들어와 침을 뱉어도 짠맛이 가시지 않았다.

화준구미(부산 사하구 다대동)에서 왜 대선 다섯을 만났다. 다대포(부산 사하구) 앞바다에서 여덟, 서평포(부산 사하구 구평동) 앞바다에서 아홉, 절영도(부산 영도)에서 둘을 더 만났다. 모두 기슭에 줄지어 대어 있었고, 세 도의 장수와 정걸이 힘을 합쳐 남김없이 깼다. 배에 실린 물건과 무기는 뒤지지 말라고 일렀다. 뒤지는 동안 적이 숨을 돌린다. 불이 옮겨붙자 기름 먹인 돛이 먼저 타올랐고, 왜는 우리를 보고 산으로 올라가 버려 목은 하나도 베지 못했다.

부산에 닿기 전에 이미 스물넷을 깼다. 넉 달 전 우리 배가 꼭 스물넷이었다.

절영도 안팎을 다 뒤졌으나 더는 적이 없었다. 작은 배 하나를 부산포(부산 동구) 앞바다로 보내 살피게 했다.

작은 배가 돌아와, 대략 오백 척 남짓이 선창 동쪽 산기슭 아래 줄지어 대어 있고 선봉 대선 네 척이 초량목(부산 동구 초량)으로 나오고 있다고 했다. 노를 젓고 온 군사는 숨이 턱에 닿아 말을 두 번이나 끊었다. 제 눈으로 보고 온 오백이었다. 원균이 보지도 않고 말한 오백과 같은 수였는데, 무게가 달랐다.

*

원균과 이억기를 불러 뱃전 너머로 말했다.

“우리 위세로 지금 치지 않고 돌아가면 적이 반드시 업신여기는 마음을 낸다.”

두 사람은 망설이지 않았다. 밤새 뱃전을 맞대고 나눈 말이 이미 거기까지 가 있었다. 나오면 치고, 나오지 않으면 들어가서 친다. 뒤가 뚫리면 뚫린 쪽으로 나온다.

깃발을 들어 독려하자 북채를 쥔 군사의 팔뚝에 힘줄이 불거졌다.

우부장 녹도(고흥 도양읍 녹동)만호 정운, 거북선 돌격장 군관 이언량, 전부장 방답첨사 이순신,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 좌부장 낙안군수 신호가 먼저 올라가 곧장 나아갔다. 맨 앞은 정운이었다. 넉 달 동안 세 번 나가 세 번 다 그가 맨 앞이었다. 맨 앞은 가장 먼저 닿고 가장 먼저 맞는 자리다.

선봉 대선 네 척을 먼저 깨고 불을 질렀다. 배에 탔던 적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쳐 뭍으로 올랐다.

뒤에 있던 배들이 그 기세를 탔다. 깃발을 올리고 북을 울리며 긴 뱀처럼 줄지어 나아가니, 부산진성 동쪽 산 오 리쯤의 기슭 아래 세 곳에 배가 대어 있었다. 대선과 중선과 소선을 합쳐 사백칠십 척 남짓이었다. 돛대가 어찌나 빽빽한지 산기슭이 겨울 갈대밭처럼 보였다.

나는 세다가 그만두었다. 그 앞에서는 눈이 먼저 지쳤다. 김천손이 연기를 세다가 그만두었다던 일이 떠올랐다. 대신 저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보았다. 사백칠십 척이 기슭에 붙은 채 한 척도 나오지 않았다. 일흔네 척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

정운은 뱃머리에 서 있었다.

녹도의 배가 맨 앞이었고, 그 앞에 부산이 있었다. 부산진성과 그 동쪽 산, 산 아래 빽빽한 돛대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사백칠십이라고들 했지만 그는 세지 않았다. 세는 것은 좌수사의 일이고, 그의 일은 앞에 있는 것이었다. 바닷바람에 섞여 부산 쪽에서 비린 갯내와 무언가 타는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넉 달 전 진해루의 젖은 마루에서 그는 말했다. 신하가 평소에 은혜를 받고 녹을 먹었는데, 이런 때에 죽기를 다하지 않고 감히 앉아서 보겠는가? 그 말을 한 뒤로 그는 한 번도 앉아서 보지 않았다. 옥포(거제 옥포동)에서도 사천에서도 당포(통영 산양읍 삼덕리)에서도 앞에 있었고, 한산도(통영 한산면)에서는 층각 대선 두 척을 깼다. 앞에 서는 것이 그의 법이었다. 법은 고칠 수 없다는 말을 좌수사가 훈련원(서울 중구 을지로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있을 때 했다고, 그도 뒤에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배가 곧장 저들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배 안과 성 안과 산 위 굴 속에 있던 적이 총통과 활을 들고 모두 산으로 올라가 여섯 곳에 나뉘어 섰고, 거기서 아래로 쏘았다. 탄환과 화살이 비처럼, 우박처럼 쏟아졌다. 화살이 돛폭을 뚫을 때마다 마른 북 가죽을 찢는 소리가 났다.

날아온 것 가운데 우리 편전(통에 넣어 쏘는 짧은 화살)이 섞여 있었다. 끌려간 우리 사람이 쏘는 것인지 빼앗은 활로 저들이 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우리 화살이 우리 배의 판자에 박혀 부르르 떨었다. 정운은 그것을 보고 제 활을 당겼다. 당길 때도 풀 때도 손이 떨리지 않았다. 좌수사와 다른 점이 그것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몰랐다.

큰 쇠 탄환이 날아왔다. 모과만 한 것이었다. 물에 닳아 둥글어진, 사발만 한 돌도 날아왔다. 그것들이 우리 배에 많이 맞았다. 맞은 자리의 판자가 쪼개지며 나뭇조각이 튀었고, 그 판자 아래에는 노를 잡은 격군들이 있었다. 정운은 그것을 알면서도 배를 뒤로 물리지 않았다. 그가 물러서면 뒤의 배가 맨 앞이 된다.

장수들이 더욱 분해 죽음을 무릅쓰고 앞다투어 돌진했다. 천자·지자 총통의 장군전과 피령전과 장편전과 철환이 한꺼번에 나가며 종일 싸웠다. 화약 연기가 기슭까지 자욱하게 깔려 산 위 적의 얼굴이 보였다 가려지기를 되풀이했다. 적의 기세가 크게 꺾였다.

*

모과만 한 쇠 탄환이 정운의 머리를 뚫었다.

한 번이었고, 그 소리는 다른 포 소리에 섞여 따로 들리지 않았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그가 사라졌고, 녹도 배의 뱃머리가 텅 비었다. 옆 배에서 그것을 본 사람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배에서 배로 건너와 내게 닿았다.

녹도만호가 맞았다는 외침이었다.

나는 깃발을 내리지 않았다. 깃발이 내려가면 앞이 멈추고, 앞이 멈추면 뒤가 무너진다. 맨 앞은 그의 자리였다. 그 빈 자리에 다른 배를 넣었다. 누구의 배였는지는 뒤에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종일 싸워 백 척 남짓을 깼다. 화살 맞아 죽은 왜를 저들이 토굴로 끌고 들어가서 몇인지 알 수 없었다. 배를 깨는 것이 급해 목은 베지 못했다.

뭍에 오를까 했다. 용감한 사부를 뽑아 내려보내 남은 적을 쓸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성 안팎 예닐곱 곳에 말 탄 왜가 많이 서서 날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말이 없었다. 말 없는 외로운 군사를 가볍게 뭍에 올리는 것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었고, 해도 저물고 있었다. 적의 소굴에 머물면 앞뒤로 적을 받게 된다.

배를 돌리라고 일렀다. 그 말을 한 것은 나였다.

삼경(밤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무렵)에 가덕(부산 강서구 가덕도)으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돌아오는 뱃길 내내 격군들은 말이 없었고, 노 소리만 어둠 속에서 고르게 이어졌다.

*

밤에 녹도의 배로 건너갔다.

넉 달 동안 나는 남의 배로 건너가지 않았다. 오늘 밤은 건너가야 했다. 두 배 사이에 널을 걸치자 발밑에서 널이 휘청 휘었고, 그 아래 검은 물이 출렁였다.

그는 갑판에 누워 있었다. 몸 위에 천이 덮여 있었고, 머리 쪽 천이 검게 젖어 있었다. 나는 천을 걷지 않았다. 대신 천 밖으로 나온 손을 보았다. 활 잡던 손이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굳은살이 박여 있었고, 엄지와 검지 사이가 활을 쥔 모양 그대로 굳어 있었다. 붓을 오래 쥔 손이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활을 오래 쥔 손도 그렇게 된다는 것은 그 밤에 처음 알았다. 갑판 판자에서 비린 쇠 냄새가 올라왔다.

녹도 군관이 곁에 서 있다가, 맞고 나서 아무 말도 안 하셨다고 했다. 말할 틈이 없었을 것이다. 그는 평소에도 말이 짧은 사람이었다.

나는 오래 서 있었다. 등잔 심지가 타들어 가 군관이 두 번 새로 돋울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넉 달 전 젖은 마루에서 그가 한 말이 있었다. 감히 앉아서 보겠는가? 그는 앉아서 보지 않았다. 서서 보다가 맞았다. 그를 앞에 세운 것도 나였고, 나가라고 한 것도, 깃발을 내리지 않은 것도 나였다. 장계에 그의 이름을 쓸 것이다. 써도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의 배에는 죽은 사람이 더 있었다. 여도(고흥 점암면)의 배에도, 사도(고흥 영남면)의 배에도, 방답(여수 돌산읍)의 배에도 있었다. 군관이 이름을 하나씩 불렀다. 김천회, 박석산, 김개문, 수배, 김숙련, 윤사공. 나는 부르는 대로 한 사람씩 받아 적었다. 다친 사람은 더 많았고, 그 이름들도 빠짐없이 받아 두었다.

내 배에도 다친 사람이 있었다. 격군 장개세와 김억부와 김개동이 탄환에 맞았으나 죽지는 않았다. 그 가운데 김개동이라는 이름이 유난히 귀에 익었는데, 어디서 들었는지는 그 밤 내내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어내지 않았다.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다.

녹도의 배에서 내 배로 건너왔다. 발밑의 물이 검었고, 그 위에 일흔네 척의 등불이 떠 있었다. 오늘 아침과 같은 수였다. 배는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사람을 잃었다. 배와 사람은 다른 수인데, 장계에는 같은 종이에 나란히 올라간다. 둘이 다른 수라는 것을 조정이 알지는 모르겠다.

어깨가 아팠는데, 종일 활을 당긴 탓이었다. 탄환이 지나간 두꺼운 살이 욱신거렸지만 비가 오려는 것은 아니었고, 하늘에는 별이 촘촘했다. 그냥 아팠다. 그렇게 까닭 없이 아픈 것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 밤에 처음 알았다.

사료 · 9월 1일 닭이 울 때 떠나 진시 몰운대에서 동풍과 파도로 배를 겨우 다룬 것, 화준구미 다섯·다대포 여덟·서평포 아홉·절영도 두 척을 깬 것, 작은 배로 살펴 「대략 오백 척 남짓이 선창 동쪽 산기슭에 대어 있고 선봉 대선 넷이 초량목으로 나온다」고 한 것, 「지금 치지 않고 돌아가면 적이 업신여긴다」, 정운·이언량·이순신·권준·신호가 먼저 나간 것, 사백칠십여 척, 적이 산 여섯 곳에서 편전과 모과만 한 큰 쇠 탄환과 사발만 한 돌을 쏜 것, 종일 싸워 백여 척을 깬 것, 말 탄 왜가 많아 뭍에 오르지 않은 것, 삼경에 가덕에 돌아온 것 ― 부산파왜병장, 이충무공전서 권2 · 정운이 「변고 이후 충의를 떨쳐 적과 함께 죽기를 맹세하고 세 번 다 앞장섰으며 부산에서 큰 쇠 탄환이 머리를 꿰뚫어 죽었다」 ― 같은 장계 · 전사자 김천회·박석산·김개문·노비 수배·김숙련과 가장 윤사공, 부상자 장개세·김억부·김개동 등의 이름 ― 같은 장계. 시신을 배에 실어 돌아가 장사 지내고 처자에게 휼전을 베풀라고 한 것도 같은 장계 · 정운이 진해루에서 한 말 ― 이충무공행록 · 정운의 손과 풀 때 안 떨렸다는 것, 밤에 녹도 배로 건너간 것, 천 밖으로 나온 손, 녹도 군관의 말은 지어냈다 · 정운의 장면은 3인칭, 나머지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이날 일기는 없다(전서본 8월 29일 이후 이듬해 정월까지 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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