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7,724자) · 1592년 6월 10일~13일, 여수 앞바다
여도 수군 황옥천
이순신 · 네오
만 19세 이상 이용가
1592년 6월 10일 (음력 5월 1일) 흐리되 비는 오지 않고 남풍이 크게 붊. 수군이 앞바다에 모두 모였다. 진해루에 앉아 방답첨사와 흥양(고흥)현감과 녹도(고흥 도양읍 녹동)만호를 불렀다. 모두 분격하여 몸을 잊었다. 의사라 할 만하다.
바람이 남쪽에서 왔다. 남쪽에서 오는 바람은 배를 뭍으로 밀어서, 앞바다에 닻을 내린 배들이 바람을 받아 한쪽으로 기울었다가 닻줄이 팽팽해지면서 돌아오는 것을 진해루에서 하나씩 셌다. 스물넷이었다. 두 번 세었는데 두 번 다 스물넷이었다. 배는 세면 느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도 두 번 세었다.
판옥선이 스물넷이고, 협선이 열다섯이고, 고기잡이 포작선이 마흔여섯이다. 포작선은 싸우는 배가 아니라 물을 나르고 사람을 나르는 배여서, 숫자로는 여든다섯 척이라고 적을 수 있어도 조정에 올리는 종이에는 그렇게 적지 않았다. 스물넷이라고 적었다. 싸우는 배가 스물넷이면 스물넷이다.
방답첨사 이순신과 흥양현감 배흥립과 녹도만호 정운을 불렀다. 셋이 마루에 올라오는 동안 마루가 세 번 울었고, 방답첨사가 마지막으로 올라와서 앉으며 말했다.
“배가 스물넷입니다.”
“안다.”
“두 번 세셨습니까?”
“어떻게 아는가?”
“소인도 두 번 셌습니다.”
정운은 웃지 않았다. 배흥립이 조금 웃었다. 그것으로 됐다. 나는 셋에게 물었다. 부산이 떨어진 지 보름이 지났고, 경상도 바다에는 경상도 수사가 있는데 그 수사의 배가 몇 척인지 아무도 모르며, 우리 배는 스물넷이다. 어찌하겠는가.
셋이 같은 말을 했다. 말은 달랐는데 뜻이 같았다.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정운은 나가겠다고만 했고, 배흥립은 흥양의 배가 다 왔으니 나가겠다고 했고, 방답첨사는 방답(여수 돌산읍)에 남은 배 세 척이 오늘 저녁에 닿으니 그 뒤에 나가겠다고 했다. 셋 다 몸을 잊은 얼굴이었다. 몸을 잊은 얼굴은 알아보기 쉽다. 손이 가만히 있다.
내 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무릎 위에서 종이 접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종이가 없는데도 접었다. 조정에서 온 명은 있었다. 사세가 할 만하면 하라는 것이었고, 할 만한지는 전라도 안의 주장이 정하라는 것이었고, 전라도 안의 주장은 나였다. 명이 왔는데 명이 아니었다. 정하라는 명이었다.
*
6월 11일 (5월 2일) 맑음. 순변사와 우수사의 관문이 왔다.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 말했다. 남해현령과 미조항첨사와 상주포(남해 상주면), 곡포(남해 이동면), 평산포(남해 남면 평산리)가 적의 소식을 듣자마자 다 달아나 흩어졌고 군기도 남김없이 흩어졌다고 했다. 놀랍고 놀랍다. 오시(낮 열한 시에서 한 시 무렵)에 배를 타고 바다에 내려가 진을 치고 장수들과 약속했다. 모두 기꺼이 나갈 뜻이 있었는데 낙안(순천 낙안면)만은 피할 뜻이 있어 보였다. 탄식할 일이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피하려 한들 되겠는가. 저녁에 방답의 첩입선 세 척이 돌아와 앞바다에 댔다. 군호는 용호, 복병은 산수.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왔다. 남해는 경상우수영(거제 오비)과 붙어 있는 섬이고 거기 네 진이 있다. 미조항(남해 미조면), 상주포, 곡포, 평산포. 나는 그 네 진의 배가 중간에서 우리를 맞아 길을 잡아 주기를 바랐고, 그렇게 관문을 보냈고, 답을 기다리는 대신 송한련을 보냈다.
그가 마루 아래 서서 말했다. 말하는 동안 손에 화살 한 대를 들고 있었다.
“성 안이 비었습니다.”
“비었다는 것은.”
“관아도 집도 다 비었습니다. 연기가 없습니다. 창고 문이 열려 있고 곡식이 마당에 흩어져 있습니다. 무고도 비었습니다. 군기 바깥 행랑에 사람이 하나 있어서 물었더니, 적이 가깝다는 소리를 듣고 성 안 군졸이 먼저 흩어지고 현령과 첨사가 그 뒤를 따라 나갔다고 합니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른답니다. 쌀 한 섬을 지고 장전 한 부를 든 사람이 남문으로 뛰어가기에 붙잡아 화살 하나를 얻어 왔습니다.”
그가 화살을 내밀었다. 살대에 곡포라고 새겨져 있었다. 곡포 무고의 화살이었다. 무고의 화살을 백성이 지고 뛰었다면 무고는 열린 것이고, 무고가 열렸으면 그 진은 없는 것이다.
적을 본 사람이 없었다. 적의 소리를 들은 것뿐이었다. 소리를 듣고 네 진이 없어졌다.
나는 화살을 오래 보았다. 볼 일이 아닌데 보았다. 살대는 대나무이고 깃은 꿩 깃이었다. 촉 뒤에 곡포라는 두 글자를 새긴 칼자국이 아직 새것이어서, 이 화살을 만든 사람이 어느 겨울에 무고 마루에 앉아 하나하나 새겼을 것을 생각했다. 생각하다가 송한련에게 창고와 무고를 불태우라는 전령을 쓰게 했다. 남은 곡식은 적의 군량이 되고 남은 화살은 적의 화살이 된다. 우리 창고를 우리 손으로 태운다. 첫 번째로 더러워진 손이 그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손으로 여기지 않으려고 했다. 잘 되지 않았다.
오시(낮 열한 시에서 한 시 무렵)에 배를 탔다. 앞바다에 진을 치고 장수들을 배 위로 불렀다. 마루가 아니라 갑판이었고, 갑판은 젖지 않는 대신 흔들렸다. 흔들리는 자리에서 사람은 말이 짧아진다.
약속을 정했다. 앞장이 누구이고 뒤가 누구인지, 신호가 나면 어디로 붙는지, 밤에는 무엇이라 부르고 무엇이라 답하는지. 군호는 용호로 했다. 누가 용이라고 부르면 호라고 답하고, 복병은 산수여서 산이라고 부르면 수라고 답한다.
정운이 말했다.
“용을 부르는데 수라고 답하면 어찌합니까?”
“벤다.”
“외우기가 어렵습니다.”
“외우지 못하면 벤다.”
정운이 처음으로 입가를 움직였다. 웃은 것은 아니었다. 웃음에 가까운 것이었다. 사도첨사 김완이 옆에서 작게 용, 호, 산, 수, 하고 외웠고 다들 따라 외웠다. 갑판 위에서 장수 열둘이 소리 내어 용 호 산 수를 외우는 것을 격군들이 노 자리에서 올려다보았는데, 그 얼굴들이 조금 풀렸다. 장수가 외우는 것을 보면 격군은 안심한다. 장수도 외워야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신호가 외우지 않았다.
그는 좌부장이다. 낙안의 배를 끌고 왔고, 그가 끌고 온 배를 보니 그가 온 것은 맞았는데, 그 얼굴이 갑판에 있지 않았다. 나는 그를 뱃머리로 불렀다.
“낙안은.”
“왔습니다.”
“배가 온 것은 안다. 그대가 왔는가?”
그가 오래 있다가 답했다. 그의 말은 늘 느리고 느린 말은 반박하기 어려운데, 이번에는 느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이 안 나오는 것이 그의 답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았다.
“군법이 있다.”
“압니다.”
“피하려 한들 될 일이 아니다.”
“압니다.”
“그러면 외워라.”
그가 용 호 산 수를 외웠다. 소리가 작았다. 소리가 작은 것은 보아 넘겼다. 외운 것으로 됐다. 나는 그가 옳은지 모르겠다고 한 말을 아직 진해루에 두고 있었고, 그 말이 옳은지는 나도 몰랐고, 모르면서 베겠다고 했다. 벤다는 말을 한 번 더 하기 싫어서 외우라고 했다.
저녁에 방답의 배 세 척이 돌아왔다. 첩입선이다. 안쪽에 들여보냈던 배다. 이제 스물넷이 다 있다. 저녁 바람에 스물네 척의 돛대가 같은 쪽으로 기울었다.
*
6월 12일 (5월 3일) 아침 내내 가랑비. 경상우수사의 답장이 새벽에 돌아왔다. 오후에 광양과 흥양을 불러 이야기하는 사이에 다들 분개했다. 방답의 판옥선이 첩입군을 싣고 오는 것을 우수사가 오는 것으로 알고 기뻐서 군관을 보내 물으니 방답의 배였다. 놀라움을 이기지 못했다. 얼마 뒤 녹도만호가 뵙기를 청했다. 우수사는 오지 않고 적은 기전에 가까워지니 통분하다. 약속한 때를 놓치면 뒤에 뉘우쳐도 소용없다. 그래서 곧 중위장을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나기로 약속했다. 곧 장계를 써서 보냈다. 이날 여도 수군 황옥천이 적의 소리를 듣고 제 집으로 달아났다. 잡아다 목을 베어 매달았다.
새벽에 종이가 왔다. 손바닥만 했다. 원균의 답이었고, 당포(통영 산양읍 삼덕리) 앞바다로 오라는 것이었고, 자기 배는 몇 척인지 적혀 있지 않았다. 나는 종이를 뒤집어 보았다. 뒷면은 비어 있었다. 이 사람의 종이는 뒷면이 늘 비어 있다.
비가 가늘게 왔다. 가는 비는 갑판을 적시지 않고 옷을 적신다. 오후에 광양현감 어영담과 흥양현감 배흥립을 불렀다. 어영담은 물길을 아는 사람이다. 경상도 바다를 손바닥에 그렸다. 왼손을 펴고 오른손 검지로 손바닥을 그으면서 여기가 노량(남해 설천면과 하동 사이 물목)이고 여기가 사천이고 여기가 당포라고 하는 동안 손바닥의 금이 물길이 되었다. 어느 금이 좁고 어느 금이 넓은지, 어디서 물이 뒤집히는지를 그는 손금 보듯 말했다.
“당포 앞은 넓습니다. 판옥선이 나란히 설 수 있습니다.”
“가는 길은.”
“미조항을 지나 소비포(고성 하일면 동화리) 앞에서 하룻밤. 그다음 날 당포입니다. 물이 맞으면 하루 반입니다. 안 맞으면 이틀입니다.”
“맞추게.”
“물은 사람이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 말을 하고 손바닥을 접었다. 접힌 손바닥 안에 경상도 바다가 들어갔다. 배흥립이 그것을 보고 있다가, 저 손바닥을 빌리면 우리 배가 다 들어가겠다고 했다. 어영담은 그 말에 답하지 않고 손을 소매에 넣었다.
그때 바다 쪽에서 소리가 났다. 판옥선 한 척이 들어오고 있었다. 큰 배였고 사람을 가득 실었고, 나는 일어섰다. 이억기가 온 줄 알았다.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그믐날 배를 띄운다고 글을 보내왔었고, 그 배들이 온 줄 알았고, 군관을 보내 물었다.
방답의 배였다. 첩입군을 싣고 오는 방답의 판옥선이었다.
앉았다. 앉으니 등뼈가 다시 무거웠다. 어영담과 배흥립이 나를 보지 않았다. 안 보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예였다.
얼마 뒤에 정운이 뵙기를 청했다. 갑판에 올라와서 앉지 않고 선 채로 말했다.
“우수사는 안 옵니다.”
“모른다.”
“안 옵니다. 그믐에 띄운다는 배가 사흘째 안 보입니다. 오늘 온다 해도 내일 온다 해도 저희는 그만큼 늦습니다. 적은 이미 기전에 가깝습니다. 부산에서 한양까지 스무 날이 안 걸렸다고 합니다. 저희가 여기서 이틀을 더 기다리면 그 이틀은 어디로 갑니까?”
“어디로 가는가?”
“한양으로 갑니다.”
그는 바다 쪽을 보고 말했다. 갑판에서는 바다가 보였다. 그래서 보는 것이 맞았다.
약속한 때를 놓치면 뒤에 뉘우쳐도 소용없다. 그 말이 내 안에서 났는지 그의 말이 그렇게 들렸는지 모르겠다. 중위장 방답첨사를 불러 내일 새벽에 떠난다고 약속했고, 그 자리에서 장계를 썼다. 군관이 붓을 잡았다. 우수사가 오지 않아 먼저 떠난다는 말을 종이에 적으니 그것이 죄가 되는지 공이 되는지 나는 몰랐고, 모르는 채로 봉했다.
봉하고 나서 여도권관 김인영이 올라왔다.
“수군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어디로.”
“집으로 갔습니다. 여도 사람입니다. 황옥천이라고 합니다. 어젯밤 적이 남해까지 왔다는 소리를 듣고 노를 놓고 갔습니다. 아침에 집에서 잡아 왔습니다.”
“노를 놓고 갔다고 했는가?”
“노 자리에 노가 있었습니다. 노는 놓고 사람만 갔습니다.”
그것을 물은 까닭을 나도 모르겠다. 노를 가져갔으면 달랐을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를 끌고 오라고 했다.
그는 젖어 있었다. 가는 비를 밤새 맞은 것인지 아침에 끌려오며 바다에 빠진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서른쯤 되어 보였고, 손이 격군의 손이었다. 손바닥이 두꺼웠다. 그 두꺼운 손바닥이 갑판에 닿아 있었고 무릎이 닿고 손이 닿았는데 이마는 닿지 않았다. 이마는 들고 있었다. 나를 보지는 않았다. 갑판의 나무 결을 보고 있었다.
“어디로 갔는가?”
“집입니다.”
“왜?”
그가 답하지 않았다. 답이 없는 것이 답이었다. 집에 누가 있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물으면 그 사람이 생기고, 이 갑판에 그 사람이 생기면 안 된다.
군법을 읽게 했다. 김인영이 읽었고 읽는 소리가 가는 비에 눌렸다. 다 읽고 나서 나는 베라고 했다.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를 하는 데 등뼈가 다리로 내려갔고 다리가 견뎠다. 그 앞에서 스물네 척의 격군이 노 자리에서 올려다보고 있었고, 나는 그들이 보는 자리에서 베게 했다. 안 보이는 데서 베면 벤 것이 아니다. 보이는 데서 베면 그것은 스물네 척에 다 닿는다. 그러라고 베는 것이다.
소리는 하나였다. 짧았다.
이경(밤 아홉 시에서 열한 시 무렵)에 나는 객창에 앉지 않았다. 배에 있었다. 배에서는 벽이 없어서 삼백오십 척을 넣을 데가 없었고, 대신 뱃전 너머에 장대가 하나 서 있었고, 장대 위에 그것이 있었다. 비가 그쳤는데 장대는 젖어 있었다. 아침까지 마르지 않을 것이다.
노 자리에 노가 있었다고 했다. 사람이 없는 노 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혔을 것이다. 누구를 앉혔는지 나는 묻지 않았다.
*
6월 13일 (5월 4일) 맑음. 동틀 무렵 배를 띄웠다. 곧장 미조항 앞바다에 닿아 다시 약속했다.
축시(새벽 한 시에서 세 시 무렵)에 닻을 올렸다. 닭이 처음 울 때였다. 어둠 속에서 닻줄이 감기는 소리가 스물네 번 났는데 다 같지 않아서, 어떤 배는 빨랐고 어떤 배는 느렸다. 느린 배를 나는 세지 않았다. 세면 이름이 남는다.
남풍은 그쳤다. 바람이 없어서 노로 나갔다. 노 소리가 물소리보다 컸고, 노 소리를 들으면 몇 사람이 젓는지 알 수 있는데, 다 젓고 있었다. 빈 노 자리는 없었다.
배가 앞바다를 빠져나가는 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장대가 보인다. 장대는 본영이 거둘 것이다. 사흘 뒤에 거두라고 일렀다. 사흘은 내가 정했다. 하루면 짧고 열흘이면 길어서 그 사이의 사흘로 정한 것인데, 그것도 내가 정한 것이다. 정하는 사람이 나다.
동이 텄을 때 미조항 앞바다였다. 남해의 성은 여기서 보이지 않았고 연기도 보이지 않아서, 송한련이 태우라고 한 창고가 탔는지 안 탔는지 알 수 없었다. 어영담이 뱃머리에서 손바닥을 폈다. 오른손 검지가 손바닥의 금 하나를 짚었다.
“여기입니다.”
“다음은.”
“소비포. 해 지기 전에 닿습니다.”
나는 배를 세지 않았다. 스물넷이다. 세지 않아도 안다.
사료 · 5월 1일 앞바다에 배가 모인 것, 남풍, 방답첨사·흥양현감·녹도만호를 불러 「모두 분격하여 몸을 잊었다」 ― 난중일기 임진년 5월 1일(초고본·전서본) · 전선 스물네 척, 협선 열다섯 척, 포작선 마흔여섯 척 ― 옥포파왜병장, 이충무공전서 권2. 「스물네 척」은 이분의 행록 5월 1일에도 있다 · 「사세가 할 만하면 하라, 조정은 멀리서 통제할 수 없다」는 유지 ― 부원경상도장(赴援慶尙道狀), 전서 권2 · 송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 보고한 것 ― 난중일기 5월 2일. 창고와 곡식과 무고가 비고 곡포 화살을 든 사람을 만난 것, 창고와 무고를 태우라고 전령한 것 ― 부원경상도장(二) · 오시에 바다에 진을 치고 약속한 것, 낙안(신호)이 피할 뜻이 있어 보인 것, 「군법이 있으니 피하려 한들 되겠는가」, 군호 용호·복병 산수 ― 난중일기 5월 2일. 초고본은 복병을 「수산」으로 적는다. 여기서는 전서본을 따랐다. 군호를 외우는 장면은 지어냈다 · 5월 3일 원균의 답장이 새벽에 온 것, 광양·흥양을 부른 것, 방답 판옥선을 우수사 배로 잘못 안 것, 정운이 뵙기를 청해 「약속한 때를 놓치면 뒤에 뉘우쳐도 소용없다」, 중위장을 불러 새벽 출발을 약속하고 장계를 올린 것 ― 난중일기 5월 3일(초고본) ·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4월 30일 배를 띄운다고 글을 보낸 것 ― 부원경상도장(三) · 여도 수군 황옥천이 적의 소리를 듣고 집으로 달아났다가 잡혀 참수·효시된 것 ― 난중일기 5월 3일(초고본·전서본), 행록 5월 1일. 그의 나이·손·노를 놓고 간 것·장대를 사흘 뒤 거두라고 한 것은 지어냈다 · 5월 4일 출발 시각 ― 난중일기는 「동틀 무렵(質明)」, 옥포파왜병장은 「축시」, 부원경상도장(三)은 「닭이 처음 울 때」. 여기서는 셋을 다 두었다 · 어영담이 경상도 물길을 아는 광양현감으로 중부장이었던 것 ― 부원경상도장(二). 손바닥에 물길을 그린 것은 지어냈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