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79자) · 1592년 5월 25일, 여수

손바닥만 한 종이

이순신 · 네오

만 19세 이상 이용가

1592년 5월 25일 (음력 4월 15일) 맑음. 나라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순찰사에게 보낼 답장과 별록을 손질해 역자에게 들려 보냈다. 해 질 무렵 영남우수사의 전통이 왔다. 왜선 구십여 척이 다가와 부산 앞 절영도(부산 영도)에 머문다고 했다.

해 질 무렵에 온 종이는 손바닥만 했다.

영남우수사 원균의 전통이었다. 구십여 척. 부산 앞 절영도. 그 두 마디를 읽고 나서 나는 종이를 뒤집어 보았는데,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뒤집어 본 손이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나라 제삿날이라 동헌에 나가지 않았다. 아침부터 순찰사에게 보낼 답장과 별록을 고치고, 고친 것을 역자에게 들려 보내고, 그러고 나서는 할 일이 없어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열흘 전에 사흘을 앓고 난 몸이 아직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아서, 앉아 있으면 등뼈 어디쯤이 남의 것처럼 무거웠다. 마루 아래로는 썰물이 빠져나가면서 갯벌의 비린 냄새가 올라왔다. 오후 내내 그 냄새 속에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종이를 받았다.

사흘 전에 거북선을 바다에 띄우고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았다. 포를 쏠 때 배가 물을 밀어내며 옆으로 한 뼘쯤 밀렸다가 돌아오는 것을 나는 뱃전을 잡고 느꼈고, 그 한 뼘이 사흘이 지나도록 손바닥에서 나가지 않았다. 종이를 쥔 손이 그만큼 밀렸다가 돌아왔다.

“절영도면.”

송희립이 옆에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몰랐다.

“부산진 코앞입니다.”

“안다.”

“구십 척이면 세견선이 아닙니다.”

“그것도 안다.”

가덕진 첨사가 올린 보고를 원균이 그대로 베껴 보낸 것이었다. 응봉 봉수의 감고가 그저께 신시(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무렵)에 보았다고 했다. 몇십 척인지 모르겠고 대강 구십여 척, 경상좌도 바다의 뉴이도라는 섬을 지나 부산포(부산 동구) 쪽으로 잇달아 나온다. 첨사는 그 아래에 세견선인 듯하다고 적어 놓았다. 세견선은 해마다 오는 배이고 해마다 오는 배는 구십 척이 아니어서, 첨사도 그것을 알고 그 아래에 다시 한 줄을 적어 놓았다. 그런데 구십여 척이나 되는 것은 까닭을 모르겠다.

까닭을 모르겠다는 말이 종이에서 제일 무거웠다.

역자를 불렀다. 순찰사와 병사와 우수사에게 같은 글을 보내고, 조정에는 따로 올렸다. 내가 부르고 군관이 썼다. 붓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마루 아래 물소리보다 컸고, 그 소리가 끝나기 전에 마당에서 말굽 소리가 났다.

“다시 왔습니다.”

같은 손이 같은 크기의 종이를 내밀었다. 삼백오십여 척. 부산포 건너편에 이미 닿았다.

구십 척과 삼백오십 척 사이에 한 식경이 없었다.

첫 종이를 쓴 손과 둘째 종이를 쓴 손이 같았다. 원균은 첫 종이를 봉하고 나서 둘째 종이를 받았을 것이고, 둘째 종이를 봉하면서 첫 종이를 다시 뜯을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경상감사의 관문도 잇달아 왔다. 같은 말이었는데, 다른 손으로 쓴 같은 말은 한 번 더 무거웠다.

밤에 객창에 앉았다. 아우가 이레 전에 떠난 뒤로 이 방은 혼자 쓴다.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아우 편에 부치고 나서 그날도 이 자리에 앉았었다. 그때는 방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이날은 벽이 손 닿을 데까지 와 있는 것처럼 좁았다. 삼백오십 척을 이 방에 넣으면 벽이 어디까지 밀려날지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등뼈가 다시 무거워졌다. 앓고 난 자리가 아니라 그 위쪽이었다.

*

5월 26일 (4월 16일) 이경(밤 아홉 시에서 열한 시 무렵)에 영남우수사가 관문을 보내왔다. 부산의 큰 진이 이미 함락됐다고 했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곧 급히 장계를 올리고 다시 세 도에 글을 보냈다.

이경(밤 아홉 시에서 열한 시 무렵)이었다. 등잔 심지를 돋우다가 종이를 받았다.

부산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종이를 뒤집어 보지 않았다. 부산진에는 첨사 정발이 있었다. 만난 적은 없고 이름만 아는 사람인데, 이름만 아는 사람이 지키던 성이 떨어졌다는 글을 이름만 아는 다른 사람의 손으로 받았다. 그 손이 떨렸는지 글씨가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아니면 급해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글씨가 기운 까닭을 오래 보았다. 볼 일이 아닌데 보았다.

같은 밤에 장계를 올리고 세 도에 글을 보냈다. 군관이 붓을 놓고 손을 털었다. 붓을 오래 쥐면 손가락 사이가 굳는다는 것을 나도 안다.

*

5월 27일 (4월 17일) 흐리고 비 오다가 늦게 갬. 영남우병사가 관문을 보냈다. 왜적이 부산성을 함락한 뒤 그대로 머물며 물러가지 않는다고 했다. 늦게 활 다섯 순을 쏘았다. 당번 수군과 달려온 수군이 잇달아 방비에 닿았다.

아침에 비가 왔다. 비를 맞으며 수군이 들어왔는데 당번이 아닌 자들까지 왔고, 부르지 않았는데 온 자들은 젖은 채로 마당에 서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몰라 서로를 보았다. 병방이 하나씩 이름을 불러 갈랐다. 이름이 불리면 사람이 한 걸음 나섰고, 젖은 짚신이 마당에 자국을 냈고, 그 자국이 마르기 전에 다음 자국이 났다.

비가 그치고 나서 활을 다섯 순 쏘았다.

송희립이 말없이 활을 건넸다. 부산이 떨어진 다음 날 활을 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기는 얼굴은 마당 쪽에 있었다. 젖은 수군 몇이 과녁 쪽을 보다가 내 쪽을 보다가 했다. 나는 다섯 순을 다 쏘았다. 화살은 스물다섯 대이고 몇 대가 맞았는지는 적지 않겠다. 활을 쏘면 등뼈의 무게가 팔로 내려오고, 팔로 내려온 것은 손끝으로 빠져나간다. 그래서 쏜다. 다른 까닭은 없다.

낮에 모일 수 있는 장수들이 모였다. 녹도(고흥 도양읍 녹동)만호 정운이 밤새 배를 저어 왔고, 방답첨사 이순신이 물때를 타고 왔고, 낙안군수 신호가 말을 갈아타고 왔다. 순천과 흥양(고흥)과 보성은 오지 못했다. 진해루에 자리를 깔았는데, 마루가 아침 비에 젖어 있어서 앉으면 자리 밑에서 물이 배어 나와 바지 무릎이 서서히 차가워졌고, 그 차가운 것이 회의가 끝날 때까지 올라왔다.

방답첨사와 나는 이름이 같다. 소리가 같고 글자가 다르다. 문서마다 한 번씩 헷갈려서, 지난겨울에는 조정에서 온 문서가 방답(여수 돌산읍)으로 갔다가 사흘 뒤에 내게 왔다. 방답첨사는 자리에 앉으면서 그 얘기를 먼저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왔습니다.”

“무엇이?”

“부산 소식 말입니다. 방답으로 안 가고 곧장 본영으로.”

정운이 웃지 않았다. 정운은 웃는 사람이 아니다. 나머지는 조금 웃었다. 젖은 마루에 앉아서 그만큼은 웃을 수 있었다.

내가 물었다. 왜적이 부산에 들어와 물러가지 않는다. 우리 수군은 어찌하겠는가.

먼저 나온 말은 지키자는 말이었다. 여럿이 같은 말을 했다. 전라도 수군은 전라도를 지켜야 하고, 영남의 적을 치러 가는 것은 우리 소임이 아니며, 영남에는 영남의 수사가 있다.

신호가 그 말을 받아 길게 했다. 그는 목소리가 낮고 말이 느렸다. 느린 말은 반박하기 어렵다.

“전라도가 뚫리면 곡식이 뚫립니다. 임금이 계신 곳까지 가는 곡식이 다 전라도에서 납니다. 경상도는 이미 뚫렸습니다. 뚫린 곳에 배를 보내면 배는 돌아오지 않고, 배가 안 돌아오면 전라도는 빈 땅이 됩니다. 빈 땅으로 적이 들어오면 그때는 누가 막습니까? 소인은 낙안(순천 낙안면) 한 고을을 맡았습니다. 낙안 한 고을을 비우고 경상도 바다에 나가 죽으라 하시면 나가서 죽겠습니다. 다만 그것이 옳은지는 모르겠습니다.”

옳은지 모르겠다는 말이 진해루에서 제일 무거웠다. 이틀 전 종이에서 제일 무겁던 말과 같은 무게였다.

아무도 곧바로 받지 못했다. 자리 밑에서 물이 배어 나오는 것을 다들 느끼고 있었다.

송희립이 받았다. 그는 군관이고 고을을 맡은 사람이 아니어서, 자리가 낮은 만큼 말이 먼저 나올 수 있었다.

“큰 적이 지경을 누르고 있습니다. 그 기세가 그대로 밀고 올라갑니다. 외딴 성을 지키고 앉아서 혼자 온전할 도리는 없습니다. 나가서 싸우는 것만 못합니다. 다행히 이기면 적의 기세를 꺾고, 불행히 죽어도 신하의 의리에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정운이 그 뒤를 받았다. 그는 자리에 앉은 채로 말했는데 앉은 키가 다른 사람의 선 키만 했다.

“신하가 평소에 은혜를 받고 녹을 먹었습니다. 이런 때에 죽기를 다하지 않고 감히 앉아서 보겠습니까?”

나는 세 사람을 차례로 보았다. 신호는 자리를 보고 있었고, 송희립은 나를 보고 있었고, 정운은 바다 쪽을 보고 있었다. 진해루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데도 그쪽을 보고 있었다.

일어섰다. 일어서니 등뼈의 무게가 다리로 내려갔다. 다리는 견뎠다.

“적의 형세가 올빼미 날개처럼 퍼졌다. 나라가 위태롭다. 경상도 장수가 아니라고 미루고 제 지경만 지키고 물러앉을 수 있겠는가?”

목소리를 높였다. 높인 소리는 젖은 마루에 눌려 멀리 가지 않았고,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내가 물은 것은 그대들의 뜻을 보려 한 것이다. 오늘의 일은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뿐이다. 나갈 수 없다고 감히 말하는 자는 베겠다.”

자리에서 소리가 났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소리가 났다. 무릎이 자리를 누르는 소리였다.

신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 얼굴에 겁이 없었고, 겁이 없는 얼굴로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숙인 고개는 알겠다는 뜻이었고, 천천히 숙인 것은 옳은지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둘 다 받았다. 둘 다 받아야 했다. 이 사람은 낙안으로 돌아가 배를 끌고 와야 한다.

방답첨사가 끝에 말했다.

“나가는 문서는 이름을 두 번 확인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정운도 입가가 움직였다.

장수들이 흩어진 뒤에 진해루에 혼자 남았다. 자리를 걷으니 마루에 사람 모양으로 마른 자리와 젖은 자리가 남아 있었다. 앉았던 자리만 말라 있는 것은 사람이 앉아서 물을 막았기 때문이다. 일어나면 그 자리도 다시 젖는다.

배는 스물넷이다. 삼백오십 척은 부산에 있다. 그 사이의 물길을 아는 사람은 광양현감 어영담이어서 그를 부르라고 일렀다. 그리고 조정에서 명이 올 때까지 이 배들은 앞바다에 있어야 한다. 명이 없이 경상도 바다로 넘어가면 그것은 나가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과 같은 죄가 된다.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자는 베겠다고 했는데, 나갈 수 없게 하는 것이 조정이면 누구를 베는가.

그 물음은 진해루에 두고 나왔다.

사료 · 왜선 구십여 척·삼백오십여 척 전통과 경상감사의 관문 ― 난중일기 임진년 4월 15일(이충무공전서본). 가덕첨사와 응봉 봉수 감고의 보고, 「세견선인 듯하나 까닭을 모르겠다」는 대목 ― 인왜경대변장(因倭警待變狀), 임진장초 · 부산 함락 소식이 이경에 온 것, 「분하고 원통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 난중일기 4월 16일 · 활 다섯 순, 당번 수군과 달려온 수군이 잇달아 닿은 것, 아침 비 ― 난중일기 4월 17일 · 거북선에서 지자포·현자포를 쏜 것 ― 난중일기 4월 12일. 4월 초 사흘을 앓은 것 ― 4월 2~4일. 아우 여필이 떠나고 혼자 객창에 앉은 것 ― 4월 8일 · 회의에서 송희립·정운·장군이 한 말 ― 이분, 이충무공행록. 행록은 이 회의를 4월 16일에 둔다. 여기서는 17일에 두었다 · 낙안군수 신호가 피할 뜻이 있어 보였다는 것 ― 난중일기 5월 2일. 그가 회의에서 한 말은 지어냈다 ·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은 실제 인물이며 이름이 같다. 문서가 잘못 간 일화는 지어냈다 · 전선 스물네 척 ― 이충무공행록 5월 1일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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