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6,572자) · 1592년 7월 14일~18일, 당항포 어귀에서 여수까지
검은 기
이순신 · 네오
1592년 7월 14일 (음력 6월 6일) 맑음. 이날 새벽 방답첨사 이순신이 당항포(고성 회화면) 어귀에서 배 한 척을 잡았다.
새벽 물이 나가고 있었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제 배를 당항포 바깥 어귀에 대고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어젯밤 좌수사가 배 한 척을 남겨 두었으니 뭍으로 오른 왜가 그 배를 타고 새벽에 몰래 나올 것이고, 나오면 여기서 잡는다. 그것이 그가 맡은 일이었다. 좌수사가 그에게 맡긴 것인지 그가 스스로 맡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았는데, 새벽에 그가 자기 통선을 끌고 어귀로 나갔고 나가는 것을 좌수사가 말리지 않았다.
이름이 같은 사람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그는 늘 생각했다. 조정에서 온 문서가 방답(여수 돌산읍)으로 잘못 오는 것처럼 좌수사가 해야 할 일이 가끔 방답으로 오는데, 온 것을 돌려보내지 않고 한다. 그것이 이름이 같은 사람의 예였다.
어귀에 안개가 조금 남아 있었고 그 안개 속에서 배 한 척이 나왔다. 어제 남겨 둔 그 배였다. 사람이 가득했는데 백은 넘어 보였다.
그는 기다리지 않고 불시에 들이받았다. 지자 현자 총통을 먼저 쏘고, 한쪽에서 장편전과 철환과 질려포와 대발화를 잇달아 쏘고 던졌다. 적이 허둥지둥하다가 물러나 달아나려는 것을 갈고리로 걸어 물 가운데로 끌어냈다. 반이 넘게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그 가운데 왜장이 있었다. 스물네댓 살에 얼굴이 크고 몸이 좋았고 옷이 화려했으며, 칼을 짚고 홀로 서서 남은 여덟과 함께 지휘하며 맞서 싸웠고 끝내 두려워하지 않았다. 방답첨사는 그를 쏘았다. 한 대로 안 되어 열 대가 넘게 맞고 나서야 소리를 지르며 물에 떨어졌다. 곧 목을 베게 했다. 남은 여덟은 군관 김성옥 등이 힘을 합쳐 쏘고 베었다.
진시(아침 일곱 시에서 아홉 시 무렵)에 배를 태웠다.
태우는 동안 그는 왜장을 생각했다. 스물네댓이 열 대가 넘게 맞고 서 있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았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값이 있다. 당포(통영 산양읍 삼덕리)의 왜장도 그랬는데 그 사람은 앉아서 떨어졌고 이 사람은 서서 떨어졌다. 앉은 것과 선 것이 다른지 그는 몰랐다. 떨어진 것은 같았다.
*
배가 타는 동안 원균과 남해현령 기효근이 왔다.
뒤늦게 와서는 물에 빠져 죽은 왜를 찾아 건져 목을 베었는데 쉰 급이 넘었다. 방답첨사는 그것을 보았다. 자기가 쏘아 떨어뜨린 것을 남이 건져 벤다. 건진 사람 것이 되는 것이 종이의 법이라고 좌수사가 말한 적이 있어서 그는 그 법을 알았고,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달랐다.
왜선 머리에 따로 지은 서늘한 방이 있었고 방 안 장막이 다 사치스러웠다. 옆에 작은 궤가 있고 안에 문서가 있어서 꺼내 보니 왜인 삼천사십여 명의 분군기였다. 이름마다 그 아래에 서명하고 피를 발랐다. 피로 맹세한 글이었다. 삼천 명이 피로 맹세하고 바다를 건너왔다.
그는 그것을 좌수사에게 올렸다. 왜장의 목에 따로 표를 해서 같이 올렸다.
*
문서가 내 손에 왔다.
피가 발린 이름이 삼천사십이었다. 피는 검게 굳어 있었고 이름은 붓으로 썼고 그 아래 손톱만 한 검은 자국이 하나씩 있었으니, 삼천 개의 손가락이 이 종이에 닿았다. 나는 그것을 한 장씩 넘겼다. 종이는 바닷바람에 눅어 있어서 넘길 때마다 두 장이 붙어 올라왔고, 손끝으로 떼어 내면 굳은 피가 가루가 되어 무릎에 떨어졌다. 넘기는 것이 곧 세는 일이었다.
깃발 색을 생각했다.
옥포(거제 옥포동)에서는 붉은 기였고 사천에서는 흰 기였고 당포에서는 누른 기였고 당항포에서는 검은 기였다. 색이 다르면 부대가 다르다. 부대를 나누고 이름을 적고 피를 발랐으니, 오래전부터 배반할 마음을 품고 군사를 갖춘 모양이 이 종이 하나에 다 있었다. 그것을 조정에 올리기로 했다. 종이가 종이를 말하게 할 작정이었다.
그날 비가 오고 구름이 어두워 바닷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당항포 앞바다로 옮겨 진을 치고 군사를 쉬게 했다. 쉬는 동안 어깨를 한 번 더 씻었더니 앞 구멍은 붙기 시작했고 뒤 구멍은 아직이었다. 들어온 데가 먼저 붙고 나간 데가 나중에 붙는다. 그런 것이라고 했다.
저녁에 고성 땅 마을우장 바다로 나가 밤을 지냈다.
*
7월 15일 (6월 7일) 맑음. 적선을 찾아 아침에 떠나 영등(거제 장목면 구영리) 앞바다에 이르렀다. 적선이 율포(거제 장목면 율천리)에 있다고 하여 복병선을 시켜 가리키게 하니 적선 다섯 척이 우리 배를 먼저 알고 남쪽 큰 바다로 달아났다. 여러 배가 한꺼번에 쫓아 미쳐 사도첨사 김완이 한 척을 온전히 잡고, 우후 이몽구가 한 척을 온전히 잡고, 녹도(고흥 도양읍 녹동)만호 정운이 한 척을 온전히 잡았다. 왜의 머리 서른여섯 급.
아침에 웅천(창원 진해구 웅천동) 땅 증도(창원 진해구 앞 시루섬) 바다에 진을 치고 천성(부산 강서구 천성동)과 가덕(부산 강서구 가덕도) 쪽으로 망보는 배를 보냈다. 진무 이전과 토병 오수가 사시(아침 아홉 시에서 열한 시 무렵)에 급히 돌아와 말했다. 가덕 바다에서 왜인 셋이 배 한 척에 타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달아나기에 힘껏 쫓아 쏘아 다 베었는데, 셋 가운데 하나는 경상우수사의 군관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위력으로 빼앗아 갔다고 했다. 이름은 모른다고 했다.
빼앗아 갔다는 말을 듣고 나는 이전과 오수에게 따로 술을 먹였다. 먹이면서 원균의 군관 이름을 묻지 않았다. 물으면 그 사람이 생기고 생기면 종이에 적히고, 적힌 것은 원균에게 가고 원균은 그것을 읽는다. 셋 가운데 하나다. 하나를 두고 종이를 쓰지 않기로 했다.
오시(낮 열한 시에서 한 시 무렵)에 영등포(거제 장목면 구영리) 앞바다에 이르니 왜의 큰 배 다섯과 중선 둘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 쪽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맞바람이었는데, 그 바람을 안고 노를 재촉해 오 리쯤 사이를 두고 쫓아 율포 바깥 바다까지 갔더니 적이 배 안의 짐을 다 물에 던졌다. 짐 궤가 떨어질 때마다 흰 물기둥이 섰고 저들의 배가 조금씩 물 위로 떠올랐다. 가벼워져도 노 마흔여덟 척보다 빠르지 않았다.
이몽구가 큰 배 한 척을 바다 가운데서 온전히 잡고 목 일곱을 베고 또 한 척을 뭍에 내린 뒤 태웠다. 김완이 큰 배 한 척을 온전히 잡고 목 스물을 베었고, 정운이 큰 배 한 척을 온전히 잡고 목 아홉을 베었다. 어영담과 가리포첨사 구사직이 힘을 합쳐 큰 배 한 척을 뭍에 내릴 때 쫓아 태웠다. 구사직이 둘, 김인영이 하나, 소비포권관 이영남이 작은 배로 뛰어들어 둘을 베었고, 빈 배 한 척은 바다에서 태웠다. 왜인은 베이거나 빠져 하나도 남지 않았다.
장수들의 마음이 시원했다. 시원하다는 것을 그날 배마다에서 보았는데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고, 노를 놓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등이 조금 펴져 있었을 뿐이다.
목은 서른여섯이었고, 그 수는 내가 직접 세었다.
*
율포에서 정운이 잡은 배에 아이가 있었다.
천성 수군 정달망, 열넷이었다. 변고가 난 뒤 부모를 따라 산에 들어갔다가 굶주림에 몰려 6월 초에 천성 가까운 들에 보리 이삭을 주우러 내려왔다가 잡혔다고 했다. 당일 영등 근처 기슭에 배를 대고 왜인들이 빼앗은 물건을 볕에 널어 말리고 있는데 우리 배가 뜻밖에 들이닥쳤고, 왜인들이 엎어지고 넘어지며 닻줄을 끊고 배에 올라 바깥 바다로 달아나다가 힘이 다해 잡혔다고 했다.
보리 이삭 몇 줌 때문에 아이는 배 밑에 갇혔다.
당항포 바깥 바다에서 정운이 잡은 아이도 있었다. 동래(부산 동래구) 사노 억만, 열셋이었다. 머리를 깎여 왜인 모양이었다. 동래성이 떨어지던 날 부모를 따라 성에 들어갔는데, 적이 성을 다섯 겹으로 두르고 갑옷 입고 큰 칼을 든 백여 명이 대나무 사다리를 옆으로 세워 곳곳으로 넘어 들어왔다고 했다. 성이 떨어지고 죽이는 것이 극에 달했다. 형을 잃고 하늘을 우러러 울다가 왜 하나에게 붙들려 부산으로 끌려갔고, 배 밑에 감춰졌다가 오늘 아침 진해 선창에서 뭍의 우리 군사 수천이 들이닥치자 왜가 소리 지르며 배로 달아났다고 했다. 바다 가운데서 다시 우리 배가 서쪽 바다를 덮은 것을 보고 큰 배를 버리고 작은 배로 옮겨 타면서, 자기와 어제 잡힌 진해 절 종 나근내를 큰 배에 버리고 갔다고 했다.
왜인들의 아침저녁 밥이 반은 모래였다고 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삼천사십 명이 피로 맹세하고 바다를 건너와 모래 섞인 밥을 먹는다.
두 아이를 내 배에 두었다. 포로를 찾아 살려 오는 것은 왜를 베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배를 태울 때 따로 잘 찾고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장수들에게 다시 일렀다. 그 말을 종이에도 남겼다. 남겨야 지켜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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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6월 8일) 맑음. 우수사와 함께 바다 가운데 머물렀다.
마산포와 안골포(창원 진해구 안골동)와 제포(창원 진해구 제덕동)와 웅천으로 망보는 배를 보냈더니 저녁에 돌아와 적의 자취가 없다고 했다. 송진포(거제 장목면 송진포리)에서 밤을 지냈다.
7월 17일 (6월 9일) 맑음. 곧장 천성과 가덕에 이르니 적선이 한 척도 없었다. 두세 번 뒤져 보고 배를 돌려 당포로 돌아와 밤을 지냈다. 새벽이 되기 전에 배를 띄워 미조항(남해 미조면) 앞바다에 이르러 우수사와 이야기했다.
부산으로 갈 것인가.
가덕을 뒤지는 날 그 생각을 했다. 부산까지 가서 그 씨를 없앤다. 그런데 큰 적을 잇달아 만나 바다 위에서 싸움을 굴렸고, 군량이 다 떨어졌고, 사졸이 지쳤고, 다친 사람이 많았다. 우리의 지친 것으로 저들의 편안한 것을 치는 것은 병가의 좋은 계책이 아니다. 게다가 양산강(낙동강 물금 쪽)은 좁아서 배 하나가 겨우 들어가는데 적선이 잇달아 대어 있어 험한 데를 이미 차지했다. 우리가 싸우려 하면 저들은 안 나오고, 우리가 물러나면 약한 것을 보이게 된다. 부산으로 가면 양산의 적이 뒤를 감싼다. 남의 도에 온 손님 군사가 깊이 들어가 앞뒤로 적을 받는 것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다.
이억기와 의논해 가덕 근처 섬을 다시 뒤지고 자취가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돌아가기로 정했다. 그 정함이 옳은지는 조정이 볼 것이고, 조정은 서쪽 어딘가에 있다.
미조항 앞바다에서 이억기와 원균과 진을 풀고 각자 돌아갔다. 이억기의 스물다섯이 서쪽으로 갔고 원균의 셋이 동쪽으로 갔고 나의 스물셋이 여수로 갔다. 새벽 물빛이 아직 검푸를 때라 배마다 고물에 단 등불이 먼저 멀어져 갔는데, 갈리는 자리에서 그 등불이 세 갈래로 갈렸다.
*
돌아오는 길에 남해 동쪽 웅천까지 일고여덟 고을의 늙은이와 아이와 아낙이 산골짜기에서 우리 배를 보고 나와 적의 오고 감을 말해 주었다. 지난번처럼 실을 수 없어서 대신 왜선에서 얻은 쌀과 베를 나누어 주고 편히 살라고 했다. 그 가운데 향화인과 포작들이 어버이를 업고 식구를 이끌고 이웃과 함께 본영으로 들어오겠다고 한 사람이 잇달아 앞뒤로 이백 명이 넘었다. 여수 가까운 장생포(여수 신월동) 같은 데 풀이 넉넉하고 사람 사는 집이 많은 곳에 나누어 두고 지키기로 했다.
배는 스물셋인데 사람이 이백 넘게 늘었으니 늘어나는 것은 배만이 아니었다. 먹일 입이 늘면 군량이 줄고 군량이 줄면 배가 못 나간다. 그것도 셈이다. 세는 것이 내 일이다.
여수에 닿아 장계를 썼다. 사천 열셋, 당포 스물하나, 당항포 스물여섯, 당항포 어귀 하나, 율포 일곱. 목은 다시 세지 않고 받은 대로 올렸다. 깃발 색 넷과 피로 맹세한 종이를 함께 넣었고, 정달망과 억만의 말은 그대로 옮기면서 보리 이삭과 모래 섞인 밥도 빼지 않았다. 조정이 그것을 읽을지는 몰랐다. 읽으라고 적었다.
어깨는 앞이 붙고 뒤가 붙는 중이었다. 등뼈는 반만 무거웠고 반은 서쪽으로 간 스물다섯 척에 실려 갔다. 그 배들이 다음에 언제 올지 몰랐다. 그래도 올 것이다. 늦은 사람은 많이 온다.
사료 · 6월 6일 새벽 방답첨사 이순신이 당항포 어귀에서 남겨 둔 배를 불시에 쳐 백여 명을 죽이고, 스물네댓 살의 칼을 짚고 홀로 선 왜장을 열 대 넘게 쏘아 떨어뜨려 벤 것, 군관 김성옥 등이 남은 여덟을 벤 것 ― 당포파왜병장, 이충무공전서 권2 · 원균과 기효근이 뒤따라 와 물에 빠진 왜를 건져 쉰 급 넘게 벤 것, 배 안 궤에서 왜인 삼천사십여 명이 피를 바른 분군기가 나온 것, 깃발 색이 옥포 붉은 기·사천 흰 기·당포 누른 기·당항포 검은 기로 달랐던 것 ― 같은 장계 · 6월 7일 이전·오수가 가덕에서 왜 셋을 베었는데 하나를 원균의 군관이 위력으로 빼앗아 간 것, 율포에서 이몽구·김완·정운·어영담·구사직·김인영·이영남이 배 일곱 척을 잡거나 태운 것, 「장수들의 마음이 시원했다」 ― 같은 장계. 난중일기 6월 7일은 「왜의 머리 서른여섯 급」 · 천성 수군 정달망(열넷)이 보리 이삭을 주우러 내려왔다가 잡힌 것, 동래 사노 억만(열셋)이 동래성 함락과 대나무 사다리와 배 밑에 감춰진 일과 「밥이 반은 모래였다」고 진술한 것 ― 같은 장계 · 부산으로 가지 않은 까닭(군량이 다하고 사졸이 지치고 양산강이 좁고 앞뒤로 적을 받음)과 6월 10일 미조항에서 진을 푼 것 ― 같은 장계. 난중일기 6월 8~10일 · 일고여덟 고을 피난민에게 쌀과 베를 나눠 준 것, 향화인과 포작 이백여 명이 본영으로 들어와 장생포 등에 나누어 둔 것, 「포로를 살려 오는 것은 왜를 베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장수들에게 이른 것 ― 같은 장계 · 방답첨사의 생각, 이전·오수에게 원균 군관의 이름을 묻지 않은 것, 어깨가 붙는 순서, 세 갈래 등불은 지어냈다 · 방답첨사의 장면은 3인칭, 나머지는 이순신의 1인칭이다 · 양력 날짜 ― 한국천문연구원 음양력 변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