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5,354자)

본사 앞

전직 역도 국가대표가 택배 상하차 야간조에 들어갔다 · 성재담

엄평구의 책상 위에는 종이 상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엄평구는 이 안에 서류철과 머그잔과 탁상 달력을 넣고 있었다⁠. 상자 하나를 들어 바닥에 내려놓을 때 엄평구가 허리를 짚었다⁠. 엄평구는 상자를 팔로⁠, 허리로 들었다⁠.

“⁠배에 붙여서 드세요⁠.⁠”

내가 문간에서 말했다⁠. 엄평구는 상자를 내려놓고 허리를 편 채 한참 서 있었다⁠.

“⁠알아요⁠. 스무 해 전에 13번에서 누가 가르쳐 줬어요⁠. 잊어버렸네⁠.⁠”

이날은 십이월 이십일이었다⁠. 감독관이 다녀가고 사흘 뒤였다⁠. 본사 인사팀에서 감독관에게 직무 정지 통보를 보냈고⁠, 이날 오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광석 씨의 산재 조사는 공단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이 소식을 해미가 문자로 보냈다⁠. 문자 끝에 처음으로 웃는 얼굴 그림이 붙어 있었다⁠.

엄평구는 나를 지나쳐 상자 하나를 이번에는 배에 붙여 복도로 날랐다⁠. 끝내 내 어깨에 손을 얹지 않았다⁠. 나도 엄평구를 붙잡지 않았다⁠.

*

이 주 수요일 밤⁠, 휴게실 컨테이너에 야간조 마흔다섯 명이 다 모였다⁠. 본사에서 내려온 센터장 직무대행이 문가에 섰다⁠. 서른 후반의 남자였고⁠, 처음 보는 바닥이 낯선지 운동화 코로 자꾸 문턱을 문질렀다⁠. 이 사람은 성수기 끝날 때까지 레일 속도와 쉬는 시간과 도크별 인원을 야간조가 정해서 올리라고⁠, 시범으로 해 보자고 했다⁠.

“⁠그럼 우리가 정해도 됩니까⁠?⁠”

쉰 넘은 형님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직무대행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게실이 잠깐 조용했다⁠. 아무도 그런 걸 정해 본 적이 없었다⁠.

“⁠레일 한 칸⁠.⁠”

안경이 먼저 말했다⁠.

“⁠한 칸 내린 거요⁠. 원래 속도⁠.⁠”

“⁠13번은 넷⁠.⁠”

탄이 말했다⁠.

“⁠무거운 거 오는 날은 다섯⁠. 스티커 오 킬로라고 붙어 있어도 손으로 먼저 들어 보고 올리기⁠.⁠”

“⁠휴게 삼십 분⁠, 초시계 없이⁠.⁠”

공삼분 언니였다⁠. 언니는 재점검을 통과해 지게차 열쇠를 돌려받았다⁠. 열쇠고리를 손가락에 걸고 빙빙 돌리며 말했다⁠.

“⁠그라고 반장은 기봉이⁠.⁠”

기봉이 휴게실 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반장 조끼를 반납하고 회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나 안 해⁠. 나는 일용이야⁠.⁠”

“⁠니가 해라⁠. 대신 이거 차고⁠.⁠”

언니가 작업 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 사람에게 던졌다⁠. 기봉이 받았다⁠. 토마토 모양의 빨간 주방 타이머였는데⁠, 태엽을 감으면 째깍째깍 소리가 났다⁠.

“⁠이기 니 새 초시계다⁠. 이걸로는 사람 못 잰다⁠. 라면만 잰다⁠.⁠”

휴게실이 터졌다⁠. 대학생들이 바닥을 굴렀다⁠. 기봉은 토마토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보더니⁠, 태엽을 삼 분에 맞췄다⁠. 그리고 자기 컵라면 뚜껑 위에 올려놓았다⁠. 째깍 소리가 히터 소리 사이로 퍼졌다⁠. 사 년 만에 처음 웃는 사람처럼 어색하게 웃었다⁠.

“⁠비상 정지는요⁠?⁠”

내가 물었다⁠. 직무대행이 나를 보았다⁠.

“⁠누른 사람은 경위서 없이⁠. 누가 누르든⁠.⁠”

이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흔다섯 명이 손뼉을 쳤다⁠. 나는 손뼉을 치다 말고 허리를 짚었다⁠. 수술은 일월 두 번째 주로 잡혀 있었다⁠. 이때까지 나는 조장이 아니라 그냥 안 드는 사람으로⁠, 레일 끝 굽은 자리에서 스티커를 읽고 무거운 것에 동그라미를 쳤다⁠.

탄이 휴대폰 화면을 내 앞에 내밀었다⁠. 출입국에서 온 「⁠체류 기간 연장 허가⁠」 문자였다⁠. 파견 회사 소장이 재직 확인서를 다시 떼 주었다고 했다⁠. 감독관이 파견 회사에 다녀간 다음 날이었다⁠.

“⁠면접 일월 육일이에요⁠. 화성⁠.⁠”

“⁠붙어⁠.⁠”

“⁠붙으면 엄마 와요⁠. 국물 짠 거 언니들 다 먹어야 돼요⁠.⁠”

언니가 지게차 열쇠를 돌리며 자기가 다 먹겠다고⁠, 경상도 사람이라고 소리쳤다⁠.

*

십이월 이십팔일 화요일 저녁 여섯 시 사십 분⁠, 사물함 앞에서 휴대폰 마흔다섯 대가 한꺼번에 울렸다⁠. 같은 문자였다⁠. 파견 회사가 아니라 본사 물류운영본부 이름으로 온 문자였다⁠.

「⁠이천 동부 허브 야간 상하차 업무는 2028년 2월 1일부로 외부 협력 업체에 위탁 운영합니다⁠. 현 파견 인력의 근무는 1월 31일로 종료됩니다⁠. 협력 업체 채용 안내는 추후 공지합니다⁠.⁠」

아무도 사물함 문을 닫지 않았다⁠. 휴대폰을 쥔 손들이 사물함 앞에 그대로 멈춰 있었다⁠. 쉰 넘은 형님 하나가 문자를 소리 내어 읽다가 위탁이라는 말에서 멈췄다⁠. 안경이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애가 셋이라던 남자가 대답했다⁠.

“⁠하청⁠. 우리 다 나가라는 거⁠.⁠”

공삼분 언니가 휴대폰을 사물함 안에 던져 넣었다⁠. 금속 바닥에 휴대폰이 부딪치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노래하지 않았다⁠. 기봉의 주머니에서 토마토 타이머가 째깍거렸다⁠. 기봉은 이것을 꺼내 손바닥으로 덮었다⁠.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이날 우리는 레일 앞에 서지 않았다⁠. 우리 중 누구도 단추를 누르지 않았지만⁠, 일곱 시가 넘도록 아무도 13번 앞에 서지 않았다⁠. 레일은 혼자 돌았다⁠. 빈 레일 위로 상자 하나 없이 롤러만 굴렀다⁠. 직무대행이 와서 이것을 보았다⁠. 기봉은 말없이 열쇠를 돌려 레일을 세웠다⁠. 기봉도 이 문자를 오후에 받았다고 했다⁠. 탄은 사물함 앞에서 체류 연장 허가 문자와 본사 문자를 번갈아 열어 보았다⁠. 허가받은 기간보다 일이 먼저 끝나 있었다⁠. 이 사람은 이 둘을 다 닫고 나서도 휴대폰을 사물함에 넣지 못했다⁠.

*

다음 날 오후⁠, 나는 엄평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평구는 직무 정지 뒤로 이천 시내 원룸에 있었다⁠. 엄평구는 두 번째 신호에 받았다⁠.

“⁠문자 받았어요⁠?⁠”

엄평구는 인사도 없이 말을 꺼냈다⁠.

“⁠처음부터 알았어요⁠. 본사는 올봄에 이미 안을 만들어 놨어요⁠. 처리량 모자라는 센터부터 야간조를 협력 업체로 넘긴다고⁠. 나는 숫자를 맞추면 이천은 뒤로 밀릴 줄 알았어요⁠. 성수기만 넘기면 한 해는 버틸 줄⁠. 그래서 레일을 올렸고⁠, 노광석 씨를 못 보냈고⁠, 119를 막았어요⁠.⁠”

수화기 너머에서 엄평구가 숨을 쉬었다⁠. 담배를 피우는 숨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미룰 이유가 없죠⁠. 사고 난 센터 야간조를 통째로 하청에 넘기면⁠, 다음에 누가 쓰러져도 본사 이름은 거기 없어요⁠. 협력 업체 사람이 쓰러지는 거니까⁠. 본사가 이번 일로 배운 게 그거예요⁠.⁠”

“⁠그걸 왜 저한테 말씀하세요⁠?⁠”

“⁠지숙 씨가 이겼으니까요⁠.⁠”

이 사람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지만 부드럽지는 않았다⁠.

“⁠이긴 사람은 다음 판을 알아야죠⁠. 결정은 서울 본사 물류운영본부장이 해요⁠. 잠실 그 유리 건물 십구 층⁠. 나는 거기 한 번도 못 올라가 봤어요⁠. 스무 해 동안⁠.⁠”

전화가 끊겼다⁠. 나는 사물함 앞에 서서 휴대폰을 오래 보았다⁠. 엄평구는 사과하지 않았다⁠. 나도 사과를 바라지 않았다⁠. 엄평구가 마지막으로 건넨 것은 손이 아니라 층수였다⁠.

*

십이월 삼십일 목요일 아침 아홉 시⁠, 이천역 셔틀 정류장에 야간조 마흔다섯 명과 광석 씨까지 마흔여섯 명이 모였다⁠. 해미가 광석 씨의 오른팔을 받쳤다⁠. 경비 반장님이 비번 날이라며 모자를 쓰고 나왔다⁠. 공삼분 언니의 아들도 헤드셋 없이 따라 나왔다⁠.

셔틀버스가 왔다⁠. 운전석에 매일 밤 우리를 실어 나르던 기사가 앉아 있었다⁠. 언니는 문을 열고 말했다⁠.

“⁠오늘 비번인데 버스 회사 사장님한테 하루 빌렸어요⁠. 기름값은 공 기사님이 낸대요⁠.⁠”

“⁠내가 언제⁠?⁠”

“⁠어제 정류장에서 그러셨잖아요⁠. 서울 가는 차 있으면 기름값은 내가 낸다고⁠.⁠”

“⁠그건 노래였다⁠.⁠”

버스 안이 웃음으로 찼다⁠. 언니는 투덜대며 맨 앞자리에 앉았고⁠,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마이크 대신 손바닥을 입에 대고 노래를 뽑았다⁠. “⁠서울 가자 서울 가자⁠, 십구 층에 올라가자⁠.⁠” 탄이 박자를 셌다⁠. 기봉이 토마토 타이머를 감았다⁠. 광석 씨가 창밖을 보며 입꼬리를 한쪽만 올렸다⁠.

나는 가죽 벨트를 찼다⁠. 수술 전이라 허리를 받쳐 줄 것이 이것뿐이었다⁠. 버스가 고속도로에 올라섰을 때 왼다리가 다섯 걸음이 아니라 일곱 걸음에 한 번 끌렸다⁠. 옆자리의 탄이 입 모양으로 이 숫자를 셌다⁠. 나는 이것을 보고 웃었다⁠.

*

잠실의 본사 건물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정문 회전문 앞에 검은 정장을 입은 보안 요원 넷이 섰다⁠. 우리 마흔여섯 명은 회전문 앞 광장에 섰다⁠. 아무도 소리치지 않았다⁠. 손팻말도 없었다⁠. 다들 야간조 회색 조끼를 입고 있었다⁠. 형광 줄이 겨울 햇빛에 번쩍였다⁠. 지나가던 회사원들이 커피를 들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보안 요원 하나가 우리 앞으로 걸어왔다⁠. 서른쯤 되어 보였고 귀에 투명한 이어폰 줄이 감겨 있었다⁠.

“⁠여기 회사 땅입니다⁠. 집회 신고 안 하셨으면 광장 밖으로 나가 주세요⁠.⁠”

“⁠집회 아닌데요⁠.⁠”

공삼분 언니가 말했다⁠.

“⁠우리는 서 있는 기다⁠. 서 있는 것도 신고하나⁠? 그라믄 저 앞에 커피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은 다 신고했나⁠?⁠”

보안 요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커피를 든 회사원 셋이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대학생 안경이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떨었다⁠. 보안 요원은 다시 우리를 보았다⁠. 이번에는 광석 씨의 지팡이와 해미의 의원 근무복과 경비 반장님의 모자를 차례로 보았다⁠.

“⁠그럼 길은 막지 말아 주세요⁠. 출입문 쪽은 비워 주시고요⁠.⁠”

기봉이 앞으로 나섰다⁠. 토마토 타이머를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숙였다⁠.

“⁠네⁠, 비우겠습니다⁠. 저희가 줄 서는 거는 잘해요⁠. 날마다 레일 앞에 서는 사람들이라서요⁠.⁠”

기봉은 뒤를 돌아 손짓했다⁠. 마흔다섯 명이 회전문 쪽을 비우고 광장 가장자리를 따라⁠, 도크 앞에 서듯이 반듯하게 두 줄로 섰다⁠. 앞사람 뒤통수와 뒷사람 코끝 사이가 한 팔 간격이었다⁠. 언니가 내 옆에서 중얼거렸다⁠. “⁠기봉이 저거⁠, 반장은 반장이다⁠.⁠”

보안 요원은 이 줄을 한참 보다가 무전기에 대고 무언가를 말했다⁠. 이 무전기는 채널이 몇 개인지 나는 몰랐다⁠.

이십 분쯤 지나서 회전문이 돌았다⁠. 오십 대 중반의 남자가 나왔다⁠. 짙은 회색 코트를 입었고⁠, 구두가 광장 돌바닥 위에서 또각 소리를 냈다⁠. 보안 요원들이 이 사람에게 길을 비켰다⁠. 물류운영본부장이라고 탄이 속삭였다⁠. 탄은 사원증 목걸이의 글씨를 읽고 있었다⁠.

본부장은 우리 앞 세 걸음 거리에 섰다⁠. 탄은 마흔여섯 명을 한 번 훑어보았다⁠. 지팡이를 짚은 광석 씨에게서 눈이 잠깐 멈췄다가 지나갔다⁠.

“⁠사정은 압니다⁠. 이천 일은 보고받았어요⁠.⁠”

이 사람은 낮고 정중하게 말했다⁠. 엄평구와 다른 목소리였다⁠. 손을 내밀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렇게 많이 올라오시면 이야기가 안 됩니다⁠. 대표 한 사람만 들어오세요⁠. 십구 층에서 듣겠습니다⁠.⁠”

마흔다섯 명의 눈이 나에게 왔다⁠. 공삼분 언니가 아들 등짝을 칠 때처럼 세게 내 등을 손바닥으로 한 번 쳤다⁠.

나는 벨트 버클을 풀었다⁠. 허리에서 가죽이 떨어져 나가자 수술 자국 위로 찬바람이 닿았다⁠. 허리가 저절로 굽으려 했다⁠. 나는 숨을 배꼽 밑에 눌러 담고 벨트를 반으로 접어 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인두로 지진 머리글자 두 개가 탄의 손바닥에 닿았다⁠.

“⁠들고 있어⁠.⁠”

“⁠누나⁠, 허리⁠.⁠”

“⁠안 들고 갈 거야⁠. 이번엔⁠.⁠”

나는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본부장이 회전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뒤를 따라 걸었다⁠. 다섯 걸음째에 왼다리가 끌렸고⁠, 등 뒤에서 탄이 소리 내어 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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