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786자)
컷
몬스터와 출연 계약을 맺은 망한 웹예능 PD · 한빛결
방송사 12층 예능국 소회의실 모니터 속에서 길태랑이 컵라면 국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무 데나 가 봄」 열네 번째 영상이었다. 한강 둔치에서 바람을 등지고 국물을 마시려는데 바람이 방향을 바꾼 장면이었고, 태랑은 편집실에서 이 장면을 서른 번쯤 돌려 보며 서른 번 웃었다. 회의실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엄호석이 리모컨으로 화면을 멈췄다. 정지된 화면 속 태랑의 안경알에 파 건더기가 붙어 있었다.
“삼십 초.”
“네?”
“삼십 초를 봤는데 안 웃겨요. 웹예능은 삼 분 안에 웃겨야 돼요. 숏폼은 삼 초고.”
태랑은 덥수룩한 갈색 곱슬머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회의 전에 화장실 거울 앞에서 물을 묻혀 가라앉혔는데 엘리베이터 안에서 도로 일어난 머리였다. 검은 뿔테 안경이 콧등에서 반쯤 미끄러져 있었다. 3월인데 흰 반소매 티 한 장 위에 낡은 카키 촬영 조끼를 걸쳤고, 조끼 주머니마다 배터리와 핀 마이크와 편의점 영수증이 불룩했다. 등에는 검은 배낭을 멨고, 손에는 짐벌 카메라를 들었다. 출입 데스크 직원은 회의에 카메라를 들고 오는 PD는 처음 본다고 두 번 말했다.
“다음 기획이 있습니다.” 태랑은 노트북을 돌렸다. “폐던전 앞에서 라면 먹기. 봉인 공사 들어가기 전에 전국 폐던전 앞을 돌면서요.”
“폐던전은 출입 금지예요.”
“펜스 밖에서 먹습니다.”
호석은 대답 대신 턱으로 벽을 가리켰다. 회의실 한 벽에 「헌터 직진」 포스터 열 장이 시즌 순서대로 붙어 있었다. 구도는 열 장이 다 같았다. 연기 속에서 헌터 다섯이 무기를 들고 걸어 나오고, 발치에 고블린 실루엣이 쓰러져 있었다. 열 번째 포스터 아래에 금색 글씨가 박혀 있었다. 「마지막 시즌 · 폐던전 대정리」
“열다섯 해 전에 처음 문이 열렸을 때 저 사람들이 들어갔어요. 요즘은 새 문이 안 열려요. 헌터 협회 경기 북부 지부에만 헌터가 이천인데, 반이 놀아요. 폐던전 정리 하나 보고 버티는 사람들이에요.” 호석이 노트북 화면을 손가락 하나로 덮었다. “그 밥그릇 옆에서 라면 끓이지 마요.”
“국장님, 저희 구독자 삼천 명은 다 진짜 사람입니다.”
“우리 아파트 단톡방이 삼천이백 명이에요.” 호석이 휴대전화 화면을 들어 보였다. 「12단지 입주민 소통방 (3,214)」 “여기도 다 진짜 사람이에요. 하루 종일 주차 얘기만 해서 그렇지.”
회의는 거기서 끝났다. 호석은 탁자 모서리를 짚고 일어났다. 왼다리를 반 박자 늦게 끌어당기는 걸음이었다. 문손잡이를 잡은 손등에 허옇게 오그라든 흉터가 손목까지 이어져 있었다. 문을 열다 말고 호석이 돌아보았다.
“그 조끼는 촬영 나갈 때만 입어요. 회의에는 회의 옷 입고.”
“이게 제 회의 옷입니다.”
“그러니까 회의가 안 되지.”
*
상암동 뒷골목 오피스텔 7층, 외주 제작사 사무실 문에는 회사 이름 대신 「택배는 경비실에」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조연출은 편집용 모니터 두 대 앞에서 빨대를 씹고 있었다. 빨대 끝이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화면에 썸네일 시안 넉 장이 떠 있었고, 넉 장 다 노란 글씨에 빨간 화살표였다.
“선배, 퇴짜죠?”
“어떻게 알았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발소리가 퇴짜 소리였어요.” 조연출이 빨대를 뺐다. “썸네일 보세요. 노란 글씨, 빨간 화살표, 놀란 얼굴. 이것만 지키면 망한 영상도 만 회는 가요.”
“우리 영상 다 그렇게 했는데 평균 천이백이야.”
“놀란 얼굴이 약했어요. 선배는 놀라도 안경 때문에 안 놀란 얼굴이 돼요.”
대표가 김밥 두 줄을 들고 들어왔다. 은박지를 벗기기도 전에 말이 먼저 나왔다.
“「길바닥 예능」 이번 달 말로 접는다.”
참기름과 단무지 냄새가 사무실에 퍼졌다. 조연출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제 석 달 치는요?”
“접는 거랑 같이 정리해 줄게.”
“정리가 돈이에요, 말이에요?”
대표는 대답 대신 김밥 한 줄을 조연출 책상에 내려놓았다. 벽걸이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소리 없이 돌았다. 자막이 아래로 흘렀다. 「경기도, 도내 폐던전 열한 곳 5월 31일 콘크리트 봉인」 「일본 오사카 폐던전 봉인 완료 … 잔류 몬스터 정리 영상 공개」 화면 속 지도에 빨간 점 열한 개가 찍혔다. 맨 위의 점 하나가 파주 적성면이었다.
태랑은 김밥 꽁다리를 집어 먹었다.
“마지막 영상 하나 찍자. 파주.”
“국장님이 하지 말라고 했다면서요.”
“하지 말라는 걸 하는 게 웹예능이야.”
“그거 선배가 방금 지어낸 말이죠?”
“응.”
조연출은 다시 빨대를 물고 버너와 코펠을 꺼내 왔다. 가방 지퍼를 채워 주면서 한마디 보탰다.
“라면은 두 개만 사요. 하나는 찍고, 하나는 드시고. 마지막이니까.”
*
파주 적성면의 야산은 3월인데도 응달에 눈이 남아 있었다. 산길 끝 녹슨 펜스에 표지판이 매달려 있었다. 「파주 제7 폐던전 · 출입 금지 · 5월 31일 봉인 예정」 펜스 너머 비탈에 하얀 돌로 쌓은 입구가 있었다. 오래된 유적의 문틀처럼 기둥 둘이 서까래 같은 돌을 받치고 있었고, 기둥과 문틀을 덩굴이 뒤덮었다. 덩굴 사이로 드러난 돌이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한낮 햇빛이 입구 안으로 비스듬히 들어가 첫 계단 몇 개만 비추었다.
태랑은 펜스 앞 평평한 바위에 버너를 올리고 짐벌을 삼각대에 꽂았다.
“안녕하세요, 「길바닥 예능」 길태랑입니다. 오늘은 봉인 두 달 남은 폐던전 앞에서 라면을 먹어 보겠습니다.”
물이 끓었다. 면을 넣고 스프를 뜯자 매운 냄새가 바람을 타고 펜스 안으로 넘어갔다. 태랑은 면을 젓가락으로 높이 들어 올려 카메라 앞에서 후후 불었다.
펜스 아래 흙이 꿈틀거렸다.
초록 손 하나가 펜스 밑 틈으로 나와 코펠 손잡이를 잡았다. 손가락이 넷이었고 손톱이 까맸다. 태랑이 젓가락을 든 채 굳어 있는 동안 코펠이 펜스 밑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이어서 무릎 높이의 초록 몸뚱이가 틈으로 머리를 내밀더니, 삼각대째 짐벌을 끌어안고 사라졌다.
“어, 어, 그거 할부 남았어!”
태랑은 펜스를 넘었다. 넘고 나서야 표지판의 「출입 금지」를 다시 읽었다. 읽기만 했다.
입구 안은 서늘했고 젖은 돌 냄새가 났다. 비스듬한 햇빛이 끝나는 자리에 고블린 셋이 나란히 있었다. 피부가 풀물을 들인 듯 초록이었고, 귀가 머리통만 했다. 셋은 태랑을 보자마자 동시에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연습한 사람처럼 각도까지 맞춘 브이였다. 셋 가운데 하나는 머리통보다 큰 낡은 쇠 투구를 쓰고 있어서, 손을 들 때마다 투구가 눈썹까지 내려왔다. 가운데 고블린은 한 손으로 브이를 하면서 다른 손으로 코펠을 끌어안고 국물부터 마셨다. 짐벌을 훔쳐 간 작은 고블린은 붉은 두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셋 뒤에서 카메라를 태랑에게 겨누고 있었다. 화면 귀퉁이에 빨간 녹화 불이 깜박였다.
“너 녹화 버튼은 어떻게 알았어?”
작은 고블린이 이를 드러냈다.
“빨간 거 누르면 녹화. 이거 국룰.”
어둠 속에서 발소리가 났다. 돌바닥이 울릴 만큼 무거운 발소리였다. 햇빛 속으로 고블린 하나가 걸어 나왔다. 키가 태랑보다 머리 하나 컸고, 몸집은 다른 고블린들의 두 배가 넘었다. 갈색 머리를 뒤로 질끈 묶었고, 아래턱에서 엄니 두 개가 위로 솟아 있었다. 귀에서 귀걸이가 흔들렸다. 어깨에는 가시 박힌 갑옷을 얹고, 갑옷 위로 털 망토를 둘렀으며, 가슴팍에 이빨을 꿴 목걸이가 늘어져 있었다. 큰 고블린은 팔짱을 낀 채 다가왔다.
큰 고블린이 입을 열었다. 낮고 고른 목소리가 돌벽에 울렸다. 끝을 길게 내리는 품이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 같았다.
“어두운 던전에, 또 한 명의 인간이 들어왔다. 인간은 언제나, 먹을 것을 들고 온다.”
태랑은 안경을 밀어 올렸다. 고블린이 저를 남 이야기하듯 소개하고 있었다.
“저기, 혹시 대장님이세요?”
“우두머리는, 대장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작은 고블린이 카메라 뒤에서 킥킥거렸다. 우두머리가 손바닥을 들었다.
“막내. 컷.”
막내가 빨간 불을 껐다. 브이를 그리던 셋이 일제히 손을 내렸다. 태랑은 카메라 뒤에서 여섯 해를 일하며 「컷」을 수천 번 외쳤지만, 남이 외친 「컷」에 제 손이 멈추기는 처음이었다.
“라면은 드셔도 되는데요, 카메라만 돌려주시면.”
“인간. 무엇을 찍으러 왔나?”
“라면 먹는 거요. 근데 방금 더 좋은 게 찍혔어요.” 태랑은 막내가 끌어안은 짐벌을 가리켰다. “여러분 브이 하는 거요. 이거 올리면 사람들이 봐요. 여러분 사는 모습을 찍게 해 주세요. 던전 생활 브이로그.”
“보는 인간은, 몇인가?”
태랑은 잠깐 망설였다. “삼천.”
“적다.”
막내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리얼 적음.”
우두머리가 털 망토 안쪽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누렇게 바래고 접힌 자리가 닳은 종이였다. 맨 위에 「출연 동의서」라고 인쇄돼 있었고, 오른쪽 위 모서리가 찢겨 나가 있었다. 무언가 찍혀 있던 자리였다.
“인간들은, 찍기 전에 이것을 쓴다. 우두머리는 안다.”
태랑은 종이를 뒤집었다. 뒷면은 깨끗했다. 조끼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무릎에 대고 썼다. 「출연 계약서. 「길바닥 예능」은 파주 제7 폐던전 고블린 무리의 생활을 찍는다. 고블린 무리는 출연한다. 출연료는」 볼펜이 멈췄다.
“출연료는 뭘로 드릴까요? 라면 한 박스?”
“출연료는, 나중에 정한다.” 우두머리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글자를 따라 읽는 눈이었다. “보는 인간이 몇인지 보고.”
“계약을 아시네요.”
“우두머리는, 계약을 해 본 적이 있다.”
우두머리가 코펠 바닥에 남은 라면 국물에 엄지를 찍어 종이에 눌렀다. 빨간 국물 지문이 초록 엄지 모양대로 번졌다. 태랑도 엄지에 국물을 찍었다. 손끝이 따끔했다.
막내가 짐벌을 돌려주며 한마디 보탰다.
“구독 좋아요 알림 설정까지.”
“그건 또 어디서 배웠어?”
“인간들 다 그렇게 끝냄.”
*
새벽 두 시 십 분, 조연출이 업로드 단추를 눌렀다. 썸네일은 역시 노란 글씨에 빨간 화살표였다. 「폐던전에서 라면 끓였더니 고블린이 뺏어 감 (실화)」 화살표 끝에서 우두머리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놀란 얼굴은 어디 갔어?”
“선배 얼굴 빼고 고블린 브이를 넣었어요. 셋이 선배보다 놀란 얼굴을 잘해요.”
태랑은 사무실 소파에서 조끼를 덮고 잤다. 베개 밑에서 휴대전화가 쉬지 않고 떨었다. 일곱 시에 눈을 떴을 때 화면에 알림이 백 개 넘게 쌓여 있었다.
「조회수 412,880회」
「구독자 63,017명」
댓글이 화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고블린이 국물부터 마시는 거 찐이다」 「브이 각도 보소 연습했네」 「우두머리 목소리 성우임? 다큐 틀어 놓은 줄」 「from Brazil — goblin ramen king」 「출연료 나중에 정한다는 거 개무서움ㅋㅋㅋ 이 고블린 협상 해 봤다」
조연출이 의자를 굴려 편집실에서 나왔다. 빨대를 문 채 휴대전화를 태랑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선배. 망한 채널이 하룻밤에 살아나는 소리 들려요?”
“무슨 소리가 나는데?”
“알림 소리요. 계속 나잖아요.”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대표가 잠옷 위에 점퍼만 걸치고 서 있었다. 손에 김밥 대신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접는 거 취소.”
“제 석 달 치는요?”
“그것도 취소.” 대표가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그건 준다. 준다고. 광고 문의가 세 군데야. 라면 회사가 둘이고 버너 회사가 하나.”
조연출이 빨대를 뺐다. “버너는 왜요?”
“고블린이 코펠 들고 튀었잖아. 버너는 남았고.”
메시지 함에 새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보낸 계정 옆에 방송사 로고가 붙어 있었다.
「방송사 예능국 엄호석입니다. 어제 뵌 길 PD님 맞으시죠. 파주 영상 원본, 얼마면 파시겠습니까?」
태랑은 메시지를 두 번 읽었다. 어제 삼십 초 만에 화면을 멈춘 사람이었다. 읽는 동안 메시지 아래에 한 줄이 더 올라왔다.
「그리고 거기, 다시 들어가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