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228자)

고개를 든 죄

폭군의 호위무사로 빙의했는데 폭군이 나만 본다 · 윤재하

무릎이 먼저 뜨거웠다.

한여름 볕에 달군 박석이 바지 천을 뚫고 올라왔고, 그 열이 정강이를 타고 허벅지까지 번지는 동안 나는 내가 어디에 무릎을 꿇고 있는지도 몰랐다. 매미가 울었다. 뜰을 둘러싼 회화나무마다 수십 마리가 한꺼번에 울어서, 소리가 귀로 들어온다기보다 머리 위에서 쏟아졌다.

마지막 기억은 지하철 2호선이었다. 밤 열한 시 사십 분, 야근을 마치고 탄 막차 구석 자리에서 나는 휴대폰으로 『붉은 달의 반역자』 완결편을 읽었다. 삼백십이 화를 다 읽고 나서 댓글 창에 이렇게 쳤다. 작가님, 1권 연회 독배는 누가 올린 건지 끝까지 안 알려 주시네요? 떡밥 회수 안 하세요? 등록을 누르고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여기였다.

“고개를 든 놈이 저놈이냐?”

목소리가 위에서 내려왔다. 낮고, 서두르지 않고, 끝이 조금 갈라진 목소리였다. 나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들었다. 누가 부르면 쳐다보는 건 회사에서 삼 년 동안 몸에 붙은 버릇이었다. 「한 대리」 소리만 나면 의자가 먼저 돌아갔다.

계단 위, 붉은 옻칠을 한 기둥 사이에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검은 비단에 금실로 구름을 수놓은 옷이 볕을 받아 번쩍였고, 머리는 반만 올려 묶었다. 스물 후반쯤으로 보였다. 눈매가 길고 입꼬리가 아래로 처져 있었으며, 왼손에 쥔 부채를 접었다 폈다 하는 소리가 매미 소리 사이로 딱딱 끊어 들어왔다. 눈 밑에는 며칠 잠을 못 잔 사람의 푸른 그늘이 있었다.

나는 저 얼굴을 안다. 정확히는 저 얼굴을 적은 문장을 안다. 「황제 염휘는 아름다웠고, 아름다운 것은 그것뿐이었다.」 『붉은 달의 반역자』 1권 3화, 폭군이 처음 나오는 장면이었다. 그 화 댓글 창이 「작가님 얼굴은 왜 이렇게 쓰셨어요?」로 도배됐었다.

“또 쳐다보는구나.”

옆에 엎드린 사람이 내 소매를 확 잡아당겼다. 갑옷 어깨끈이 내 귀를 때렸다. “야율, 미쳤어? 눈 내려.”

야율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덜컥 맞물렸다. 1권 3화에는 문장이 하나 더 있다. 폭군이 얼마나 잔인한지 보여 주려고 작가가 지나가듯 넣은 한 줄이다. 「황제의 얼굴을 똑바로 본 호위무사 야율은 사흘 뒤 저잣거리에서 목이 베였다.」 그 뒤로 야율은 한 번도 안 나온다. 이름이 나온 것도 그 한 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한 줄이 나다.

“사흘.” 염휘가 부채 끝으로 나를 가리켰다. “사흘 뒤 저잣거리에서 목을 쳐라.”

원작 그대로였다. 나는 이마를 박석에 박으려다가, 데일 것 같아서 반 뼘 위에서 멈췄다. 죽게 생긴 와중에도 뜨거운 건 싫었다.

“폐하, 억울하옵니다.”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더 낮고, 목이 쉰 것처럼 거칠었다. 이 몸의 목소리였다.

“억울해?”

“눈이 마주친 건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윗분이 부르시면 쳐다보는 버릇이 있어서요. 부르셨는데 안 쳐다보면 그게 더 불경 아니옵니까?”

뜰이 조용해졌다. 매미까지 한 박자 쉬는 것 같았다. 옆에 엎드린 갑옷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고, 계단 아래 늘어선 내관 하나가 들고 있던 불진을 떨어뜨렸다. 말꼬리 털이 박석에 부딪히는 소리가 그렇게 클 줄 몰랐다.

속으로 나는 나를 때렸다. 한서준, 너는 원작에서 한 줄로 죽는 사람인데 지금 그 한 줄에 대사를 붙이고 있다.

염휘가 계단을 한 칸 내려왔다. 또 한 칸. 신발 바닥이 돌에 닿는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침전 쪽에서 흘러나오는 향 냄새가 짙어졌다. 침향에 무언가 쓴 약초를 섞은 냄새였고, 그 밑에 땀과 먹 냄새가 깔려 있었다. 그가 내 앞에 서서 접은 부채로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부채 살은 대나무였는데, 손에 쥐는 끝이 닳아서 둥글었고 한 살이 금이 가 실로 감겨 있었다. 황제가 들고 다니기엔 너무 낡은 물건이었다.

“이 궁에서 내 얼굴을 보는 놈은 없다.”

“예.”

“다들 땅을 보거나, 내 신발을 보거나, 어마마마 얼굴을 본다.” 그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너는 지금도 보고 있구나.”

“턱을 드셨으니까요.”

이번에는 옆의 갑옷이 아예 숨을 멈췄다. 염휘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었다고 하기엔 모자라고, 안 웃었다고 하기엔 넘쳤다.

“사흘은 그대로다.” 그가 부채를 거두었다. “대신 그 사흘 동안 내 곁에 세워 둬라. 목 잘릴 날 받아 놓은 놈이 어떤 얼굴로 서 있는지 보고 싶다.”

원작에 없는 대사였다. 나는 머릿속에서 1권 3화를 처음부터 다시 넘겼다. 없다. 원작의 폭군은 처형을 말하고 뒤돌아 들어갔다. 그 뒤에 붙은 문장 같은 건 없었다. 내가 한마디 덧붙인 대가로 폭군도 한마디를 덧붙였다.

*

“황상, 더운 날에 무슨 소란이십니까?”

목소리가 뜰 입구 쪽에서 왔다. 궁녀 여덟이 두 줄로 들어왔고, 그 사이로 한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옥색 비단옷 위에 소매 없는 짙은 쪽빛 배자를 걸쳤고, 허리띠에 손바닥만 한 옥 도장이 매달려 걸음마다 띠 장식과 부딪혀 짤랑거렸다. 마흔 후반쯤, 웃는 얼굴이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서늘한 냄새가 남았다. 이 볕에 얼음 냄새가 났다.

원작을 읽은 사람이면 저 도장을 모를 수가 없다. 섭정 인장이다. 저 도장이 찍힌 칙령은 황제의 이름으로 나가고, 그 칙령들 때문에 독자들은 염휘를 폭군이라 불렀다. 그리고 원작 1권 마지막 화에서 칠석 밤에 황제를 죽인 사람이 저 여인이다. 섭정 태후 위씨. 나는 속으로 정리했다. 끝판왕이 일 화에 나왔다.

엎드린 사람들이 더 낮게 엎드렸다. 나도 따라 엎드렸다. 이번에는 이마가 데든 말든 박석에 붙였다.

“불경한 놈이 하나 있다 하여 와 보았습니다.” 태후의 신발 끝이 내 눈앞에 와서 멈췄다. 진주가 박힌 신이었다. “황상 곁에 그런 자를 두시면 안 되지요. 제 자경전 옥으로 보내 주십시오. 사흘 뒤까지 이 어미가 맡아 두겠습니다.”

“제 호위입니다.” 염휘가 말했다.

“그러니 더욱 그렇지요. 황상 등 뒤를 지키는 자가 황상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등 뒤에 선 자가 앞을 보기 시작하면, 다음엔 무엇을 보겠습니까?”

“제가 죽입니다.”

“황상 손을 더럽히실 일이 아니지요.”

“제 손입니다.”

두 사람 다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았다. 높아지지 않아서 더 무서웠다. 박석 틈에서 개미 한 마리가 기어 나와 내 엄지손가락 위로 올라왔는데, 나는 그걸 털어 낼 수도 없었다. 머리 위에서 황제와 태후가 내 사흘을 두고 다투고 있었다. 회사로 치면 사장과 대주주가 신입 사원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부서로 데려가겠다고 하는 판이었다. 둘 다 데려가서 자르겠다는 게 문제였다.

“황상의 것이 곧 이 어미의 것인데요.” 태후가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어마마마 것도 제 것이겠습니다.” 염휘가 부채를 폈다. “인장부터 주시지요.”

짤랑거리던 옥 도장 소리가 멎었다. 태후가 걸음을 멈췄다. 아주 짧은 침묵이 지나갔고, 그 사이에 매미 한 마리가 내 바로 옆 나무에서 울음을 그쳤다.

“황상은 농도 무섭게 하십니다.”

“사흘입니다, 어마마마. 사흘 동안은 제 곁에 둡니다.”

태후의 신발 끝이 돌아섰다. 돌아서기 직전, 나는 아주 잠깐 고개를 들었다. 또 버릇이었다. 태후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난 얼굴이 아니었다. 시장에서 생선을 고르는 얼굴이었다. 눈이 내 어깨와 손, 칼집을 차례로 훑고 지나갔다. 쓸 데가 있는지 재는 눈이었다.

*

해가 기울 때까지 나는 침전 계단 아래에 서 있었다.

이 몸은 서 있는 법을 알았다. 무릎을 살짝 풀고, 칼자루에 손을 얹지 않고 그 옆에 두고, 숨을 길게 쉬었다. 내 머리는 다리가 저려 죽겠다고 비명을 질렀지만 이 몸의 다리는 저리지 않았다. 야율이라는 사람이 몇 년 동안 이 자리에 서 있었는지 다리가 알고 있었다.

“물.”

옆에서 누가 대나무 물통을 내밀었다. 아까 내 소매를 잡아당긴 갑옷이었다. 서른쯤, 얼굴이 길고 눈썹이 짙었다. 볕에 그을린 목에 땀띠가 잔뜩 돋아 있었다. 나는 물통을 받았다. 물이 미지근했고 대나무 냄새가 났다.

“고맙습니다.”

그가 나를 봤다. “고맙습니다?”

아. 야율은 이 사람한테 존댓말을 안 썼구나. 나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원작에 이 사람은 나왔던가? 호위대, 갑옷, 긴 얼굴. 4권에 반란군 부장으로 나오는 진목이 떠올랐다. 진목은 원래 궁 호위무사였고, 동기가 저잣거리에서 목이 잘린 뒤로 궁을 나와 백무현에게 갔다. 원작은 그 동기의 이름을 따로 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니 그 동기가 나였다.

“진목.” 나는 반말로 바꿨다. “고맙다고.”

“너 오늘 이상하다.” 진목이 물통을 도로 받아 갔다. “아침 교대 때 칼을 오른손으로 받더라.”

등줄기로 땀 한 줄기가 내려갔다. 나는 오른손잡이다. 야율은 아닌 모양이었다.

“사흘 뒤에 죽는다는데 손이 바뀔 수도 있지.”

“그런 말이 어딨어?”

“지금 생겼어.”

진목은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내 옆에서 반 걸음 떨어진 자리에 섰다. 계단 위 침전 안에서 붓 끝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아주 작게 들렸다. 황제가 아직 안 자고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원작의 1권을 머릿속으로 다시 넘겼다. 사흘 뒤 야율이 죽는다. 그 사흘 사이, 모레 저녁에 청량전 연회가 있다. 「연잎 향이 나는 술이었다. 황제는 그것을 단숨에 비웠고, 열흘을 앓았다.」 열흘을 앓은 황제는 칠석 밤 자객이 들었을 때 칼을 들 기운이 없었다. 원작은 그 독배를 누가 올렸는지 끝까지 쓰지 않았다. 댓글에서 독자들이 범인 후보 표까지 만들었는데 작가는 끝까지 답을 안 했다.

*

그날 밤, 교대하고 호위대 숙소로 가는 회랑에서 누가 내 소매를 잡았다.

등불을 든 늙은 상궁이었다. 얼굴이 희고 주름이 가늘었으며, 손이 차가웠다. 낮에 태후 뒤에 서 있던 얼굴이었다.

“자경전 방 상궁이다. 소리 내지 말고 들어라.” 그가 등불을 낮췄다. 불빛이 내 발끝만 비추었다. “마마께서 전하라 하셨다. 모레 청량전 연회에서 폐하께 올리는 잔은 네가 들어라. 그러면 사흘째 아침에 너는 저잣거리 대신 고향 가는 수레에 탄다. 네 누이 소와도 함께.”

누이라는 말에 이 몸의 가슴이 먼저 반응했다. 내가 모르는 이름인데,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잔을 드는 것뿐이다. 어려울 것 없지.” 방 상궁이 내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었다. 작은 은 조각이었다. 노잣돈이었다. “모레다.”

등불이 회랑 끝으로 멀어졌다. 나는 손바닥 위의 은 조각을 내려다봤다. 은이 차가웠고, 생각보다 무거웠다.

원작에서 황제의 독배를 올린 사람이 끝내 안 나온 이유를 이제 알았다. 그 사람은 사흘째 아침에 저잣거리에서 목이 잘렸다. 작가 입장에서는 이미 죽은 엑스트라에게 범인 자리까지 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작가님, 떡밥 회수됐습니다. 떡밥이 저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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