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032자) · 영

문턱

두 시의 일기 · 유하람

팔월 삼십일일 월요일. 사십일 일째. 반기훈 씨가 유리창에 명도 안내를 붙인 날부터 센 날수의 마지막 날이다. 그 종이는 조정이 끝난 다음 날 반기훈 씨가 직접 와서 뗐다. 테이프 자국이 네모나게 남았다. 은오 씨 편지지는 아직 붙어 있다. 두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조용한 시간입니다. 팔월 삼십일일까지. 오늘이 그날이다.

아침 여덟 시에 나는 턱 앞에 쪼그려 앉았다. 줄자를 걸었다. 당겼다. 딸깍. 이백이십이. 줄자로 잰 것만 스물다섯 번째. 아름이의 공식 판독 스물한 번을 합치면 마흔여섯 번째. 오늘이 마지막으로 재는 날이었다. 내일부터 이 턱은 없다.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뀐다. 사장님 조건은 턱을 뜯지 말라는 것이었다. 용석 씨가 이 동네 장마를 알아서 올린 이십이 센티. 뜯으면 물이 들어온다. 그래서 뜯지 않는다. 대신 바깥에 붙인다. 보도블록에서 가게 문지방까지, 문 앞 일 미터 이십 구간에 완만한 경사로를 붙인다. 안쪽 바닥은 그대로 이십이 센티 높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발은 걸릴 데가 없다. 발을 높이 들 필요가 없다. 반기훈 씨가 건물주로서 공사를 허락했다. 보수 공사 첫 항목에 넣었다. 뒷벽 균열 보수, 이 층 장선 보강, 그리고 전면 출입구 경사로 설치. 비용은 임대인 부담. 조정안대로.

은오 씨가 여덟 시 이십 분에 왔다. 손에 봉투 두 개. 하나는 한결문구 종이컵이었다. 구 영감님은 가게를 이번 주에 정리한다. 남은 종이컵을 전부 두시에 넘겼다. 공짜로. 새 가게 개업 선물이라고. 다른 봉투에는 A5 노트가 들어 있었다. 검은색 한 권, 남색 한 권.

“영감님이 마지막 남은 거래요. 검은 거랑 남색. 하나씩.”

“노트 이제 어디서 사요.”

“몰라요. 그래서 이번 건 천천히 쓰려고요.”

은오 씨가 턱 옆에 쪼그려 앉았다. 내 줄자 끝을 잡았다. 마지막 계측.

“스물둘.”

“알아요.”

“오늘도요.”

은오 씨가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세지 않았다. 요즘은 세지 않는다. 세면 끝이 생길 것 같아서.

사장님은 열 시에 왔다. 평소보다 두 시간 일찍. 잔 스물두 개를 닦았다. 하나씩, 행주를 안으로 한 바퀴. 뽀드득. 스물두 번. 다 닦고 나서 벽의 달력 앞에 섰다. 떡집에서 준 달력. 팔월. 반기훈 씨가 첫날 손가락으로 두드렸던 그 장. 사장님은 하루 일찍 그 장을 넘겼다. 구월이 나왔다. 사장님은 구월 일일 자리에 볼펜으로 작게 적었다. 개업. 그러고는 볼펜을 내려놓고 행주를 접어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카운터에서 나왔다. 열두 해 동안 그 카운터 안쪽에 서 있던 사람이 바깥으로 나와서 손님 자리를 둘러봤다. 탁자 아홉 개. 창가 셋, 가운데 넷, 문 옆 둘.

“나는 어디 앉을까.”

“사장님 가게예요, 오늘까지.”

“내일부터는 손님이잖아. 연습해야지.”

사장님은 창가 오른쪽에 앉았다. 이 년 동안 내 자리였던 곳. 앉아서 창밖을 봤다. 그러고는 창가 왼쪽을 봤다. 은오 씨 자리였던 곳. 대각선. 이 미터 팔십.

“여기서 보니까 저쪽 옆얼굴이 딱 보이네.”

사장님이 웃었다. 은오 씨가 얼굴을 붉혔다. 나는 레이저 거리계를 가방 안에서 만지작거리다가 꺼내지 않았다. 사장님이 나를 보고 말했다. 그거 꺼내지 마요, 이제 잴 거리 없잖아, 하고. 나는 가방 지퍼를 잠갔다.

열한 시에 계약서를 썼다. 반기훈 씨가 먼저 와서 가운데 탁자에 서류를 펼쳤다. 용석 씨가 짠 탁자 두 개를 붙인 자리. 이음매가 서류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임대차 계약서. 임차인 두 사람. 은오 씨가 먼저 썼다. 성까지. 은오 씨 성을 나는 그때 처음 봤다. 이 년 동안 몰랐고, 이 여름 동안 안 물어본 성. 은오 씨가 볼펜을 내게 넘기면서 말했다.

“이제 아셨으니까 노트에 적으셔도 돼요.”

“안 적어요. 이미 알았으니까.”

반기훈 씨가 도장을 찍었다. 인주를 너무 많이 묻혀서 도장이 번졌다. 그 사람은 번진 도장을 한참 보더니, 아버지 도장 찍는 버릇이 이랬다고 했다. 사장님이 옆에서 권리금 영수증에 이름을 썼다. 여정란. 큰 글씨. 이천. 반은 반기훈 씨가, 반은 우리가. 은오 씨가 봉투 하나를 따로 내밀었다.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가 들어 있었다. 조정 전날 스무디 먹던 아이가 준 것. 사장님이 그 동전을 꺼내 한참 보고, 카운터 금고가 아니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열두 시에 반기훈 씨가 다시 왔다. 휠체어를 밀고. 휠체어에 반 영감님이 앉아 있었다. 모자를 쓰고 담요를 무릎에 덮고. 한여름인데. 요양병원에서 외출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네 시간.

골목 입구에서 휠체어가 멈췄다. 영감님이 건물을 올려다봤다. 붉은 벽돌 삼 층. 이 층 창에 학원 간판, 삼 층 창은 비어 있었다. 세무사가 나간 자리. 영감님은 오래 봤다. 입술이 움직였다. 벽돌을 세는 것 같았다.

“아버지, 아버지가 지으신 거예요.”

반기훈 씨가 말했다. 영감님이 아들을 봤다.

“알어, 기훈아.”

그날 영감님은 아들 이름을 틀리지 않았다. 반기훈 씨가 휠체어 손잡이를 쥔 채 고개를 돌렸다. 골목 끝 편의점 쪽을 한참 봤다. 거기 볼 것은 없었다.

휠체어가 턱 앞에 섰다. 이십이 센티. 휠체어 바퀴로는 못 넘는다. 반기훈 씨가 휠체어를 뒤로 기울여 앞바퀴를 들려고 했다. 나와 은오 씨가 양쪽에서 잡았다. 셋이 들어서 넘겼다. 휠체어는 생각보다 가벼웠다. 영감님이 가벼웠다. 벽돌을 나르던 사람의 몸이 이십이 센티를 넘는 데 세 사람이 필요했다. 반기훈 씨는 휠체어를 내려놓고 한참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영감님이 들려 올라가면서 턱을 내려다봤다.

“이거 그 목수 양반이 올린 거지.”

“네.”

“잘 올렸어. 근데 휠체어는 못 넘겠네.”

“내일부터 넘어요.”

내가 말했다. 영감님이 나를 봤다.

“측량사구먼.”

“네.”

“오늘은 빈손 아니네.”

영감님은 내 손의 줄자를 가리켰다.

두 시가 됐다.

나는 셌다. 이번 한 번만 세기로 했다. 창가 셋, 가운데 넷, 문 옆 둘. 탁자 아홉 개에 의자가 모자라서 구 영감님 가게에서 접이식 의자를 가져왔다. 문구점 계산대 뒤에 사십 년 있던 의자들. 문 옆 할머니는 오늘 마지막 장을 읽고 있었다. 이 여름에 한 권을 다 읽었다. 양복 아저씨는 창밖을 봤다. 윤 원장님은 새 학원 개원 준비를 하다가 아이 다섯을 데리고 왔다. 유모차 두 대. 중학생은 그림을 다 그렸다며 사장님한테 한 장 줬다. 두시 앞 턱 그림이었다. 턱 위에 줄자를 든 사람과 줄자 끝을 쥔 사람. 아름이는 연차가 떨어져서 반차를 냈다고 했다. 강 팀장이 아름이 옆에 앉아 있었다. 소장님은 안 왔다. 대신 화분을 보냈다. 리본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기초 양호. 도상철.

반기훈 씨와 영감님. 영감님은 휠체어에 앉은 채 손을 뻗어 탁자 모서리를 쓸었다. 용석 씨가 대패로 민 모서리. 둥글었다. 영감님이 손끝으로 그 둥근 데를 몇 번 오갔다. 목수 솜씨 좋네, 하고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두 시였으니까. 사장님. 은오 씨. 나.

마흔하나.

두 시부터 여섯 시까지, 마흔한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두 가는 소리, 에어컨 소리, 잔이 받침에 닿는 소리, 책장 넘기는 소리, 유모차에서 아기가 한 번 칭얼대다 그치는 소리. 사장님은 커피를 내리지 않았다. 은오 씨가 내렸다. 아메리카노는 은오 씨가, 라테는 내가. 우유 먼저, 샷 나중. 사장님이 창가 오른쪽에서 우리를 봤다. 손님 자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 시쯤 영감님이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했다. 은오 씨가 내 갔다. 영감님이 첫 모금을 마셨다. 얼굴이 찡그려졌다. 쓰다. 은오 씨가 영감님 옆에 쪼그려 앉아 속삭였다. 두 번째부터요. 영감님이 두 번째 모금을 마셨다. 얼굴이 풀렸다. 풀리는 속도가 아들과 같았다.

여섯 시 십오 분에 아이들이 계단을 굴러 내려왔다. 딸기 스무디. 딸기 스무디. 저는 초코. 조용한 시간이 끝났다. 마흔한 사람이 한꺼번에 입을 열었다. 가게가 시끄러워졌다. 이 년 동안 들어 본 적 없는 시끄러움이었다. 아는 사람들끼리 떠드는 소리. 양복 아저씨가 문 옆 할머니한테 무슨 책이냐고 묻는 소리. 할머니가 창밖에 뭐가 그렇게 있냐고 되묻는 소리. 여름 내내 같은 가게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서로에게 묻는 소리.

사장님이 일어섰다. 카운터로 가지 않고 은오 씨 편지지 앞으로 갔다. 유리창에서 편지지를 뗐다. 테이프가 편지지 모서리를 조금 찢었다. 사장님은 그 편지지를 접었다. 반으로, 또 반으로. 행주처럼. 그러고는 은오 씨 손에 쥐여 주었다.

“내일부터는 너희 규칙이야.”

구 영감님은 여섯 시 반에 한결문구 간판을 내렸다. 사다리에 올라간 것은 아들이었다. 영감님은 밑에서 사다리를 잡고 있었다. 간판이 내려오자 영감님은 그 뒤에 사십 년 동안 가려져 있던 벽을 봤다. 벽돌 색이 거기만 진했다. 햇빛을 안 받은 자리. 영감님이 부채를 은오 씨한테 줬다. 두시는 에어컨이 있지만 정전은 있다고. 그러고는 아들 차를 타고 떠났다. 골목에서 한결문구 자리만 어두웠다.

그날 밤 경사로 공사가 시작됐다. 가게 문을 닫고, 골목에 가로등이 켜지고. 반기훈 씨가 부른 업자 두 사람과 나와 은오 씨와 아름이. 거푸집을 대고 레미탈을 부었다. 문지방에서 보도블록까지 일 미터 이십. 경사는 일 대 오 조금 넘게. 휠체어가 혼자 오를 수 있는 기울기. 용석 씨가 올린 턱은 그 밑에 그대로 있다. 안 보이게. 물은 여전히 막는다.

레미탈은 시멘트 냄새가 났다. 젖은 모래와 석회의 냄새. 은오 씨는 흙손을 처음 잡았다. 업자 아저씨가 가르쳐 주는 대로 표면을 문질렀다. 한 번 문지를 때마다 회색 면이 조금씩 반들거렸다. 은오 씨 손등에 회색이 튀었다. 은오 씨는 그걸 닦지 않았다. 아름이가 사진을 찍으려다 휴대폰에 시멘트를 묻혔다. 강 팀장한테 빌린 휴대폰이었다. 자정이 넘어 레미탈이 굳기 시작했다. 나는 줄자를 꺼냈다. 은오 씨가 끝을 잡았다. 문지방 끝에 줄자를 대고, 경사로 끝과의 단차를 쟀다.

딸깍.

은오 씨가 눈금을 읽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한참 읽었다. 그러고는 나를 봤다.

“영이에요.”

나는 노트를 폈다. 구 영감님이 마지막으로 넘긴 남색 노트. 첫 장. 날짜를 쓰고, 그 아래 이름을 썼다. 이 년 동안 한 번도 안 쓴 이름. 창가 왼쪽 사람이 아니라.

9월 1일. 은오. 문턱, 오늘은 영.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1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문턱 · 두 시의 일기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