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5,001자) · 봄
앞줄 맨 오른쪽
오해는 두 번 반복된다 · 유하람
2028년 오월 십사일, 매곡분관 앞마당에 현수막이 걸렸다. 「매곡분관 개관 삼십 주년.」 글씨는 김 할아버지 인쇄소 옛 직원이 뽑았다. 1998년 현수막과 같은 글꼴로 해 달라고 여름이 부탁했다. 옛 직원은 축쇄판 사진을 돋보기로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 그 글꼴이 이제 컴퓨터에 없다고 했다. 그래서 손으로 그렸다. 획이 조금씩 흔들렸다. 1998년 현수막도 그랬을 것이다.
오전 아홉 시, 여름은 현수막 아래에서 숫자를 다시 봤다. 2027년 연 이용자 삼만 육천사백십 명. 조건이던 삼만 오천을 넘었다. 넘은 것은 작년 십이월 이십사일 금요일 밤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계단참에서 민지가 계수기를 누르며 「삼만 오천!」 하고 소리쳤고, 3층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고, 담요 든 할머니가 담요를 흔들었다. 그날 밤 막차는 이 분 늦게 떠났다.
도현은 올해 일월에 다시 관장으로 왔다. 오세진이 국장으로 올라가면서 가장 먼저 결재한 인사였다. 오세진은 같은 달에 이동도서관 한 대를 매곡분관 기점으로 배정했다. 차 옆면에 「매곡에서 출발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새봄문화개발은 협약 한 줄 못 써 보고 이름을 바꿨다. 배문수는 감사 결과 징계를 받았고, 의원직은 지켰다. 여름은 그 뉴스를 끝까지 읽지 않았다.
아침 여덟 시에 둘은 마당에 의자를 날랐다. 접이식 의자 백 개. 도현이 창고에서 꺼내 오면 여름이 줄을 맞췄다. 줄 맞추는 건 여름이 빨랐다. 서가를 십 년 맞춘 손이었다. 도현은 의자를 내려놓을 때마다 여름 쪽을 한 번 봤고, 여름은 그걸 알면서 줄만 봤다. 쉰 번째쯤에서 도현이 말했다.
“오늘 사진 끝나면 3층에 잠깐 올라오십시오.”
“왜요.”
“보여 드릴 게 있습니다.”
“뭔데요.”
“찾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름은 의자를 내려놓다 말고 도현을 봤다. 이 년 전 칠월, 3층 열쇠를 달라던 날 그가 한 말이었다. 도현은 모르는 척 창고로 다시 걸어갔다. 굽 바깥쪽이 닳은 구두였다. 이 년 사이에 한 켤레를 새로 샀는데, 새 구두도 같은 자리가 닳고 있었다.
열 시가 되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정 선생이 제일 먼저 왔다. 여든 살이었다. 봄 카디건을 단추 끝까지 채우고 있었다. 지팡이를 짚고, 반납 카트 대신 손주 팔을 붙잡고 왔다. 정 선생은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여름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귓속말이 컸다.
“관장이랑 너랑 결혼한대.”
“누가요.”
“다들 그러던데.”
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옆에서 현수막 끈을 묶던 도현이 끈을 쥔 채로 정 선생을 돌아봤다.
“반쯤 맞습니다.”
정 선생이 도현을 올려다봤다. 여름이 도현을 봤다. 도현은 끈을 마저 묶었다. 매듭이 두 번 묶였다.
“반쯤이 어느 쪽이야.”
“만나고 있는 쪽입니다.”
정 선생은 그 말을 들고 한참 서 있다가, 흡족한 얼굴로 손주 팔을 붙잡고 마당 안쪽으로 걸어갔다. 한 시간 뒤 마당 전체가 그 말을 알고 있었다. 기울기 없이. 정 선생이 처음으로 들은 대로 옮긴 말이었다.
어머니는 열 시 반에 왔다. 새 블라우스를 입고, 소매를 걷어붙이고. 도현의 어머니 박순례도 왔다. 휠체어를 탔고, 요양병원 간호사가 밀었다. 박순례는 마당에 들어서서 어머니를 보자마자 손을 뻗었다.
“미숙 언니.”
“순례야.”
박순례는 오늘 2028년에 있었다. 가끔 그랬다. 도현은 휠체어 옆에 쪼그려 앉아 어머니 무릎 담요를 여몄다.
박순례는 어머니 뒤에 선 여름을 올려다봤다. 한참 봤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여름을 가리켰다.
“너 여름이지. 할머니 등에서 울던.”
여름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른네 살 먹고 울던 아이로 불리는 게 이상하게 싫지 않았다.
“너 울 때마다 우리 도현이가 쳐다봤어. 앞줄에서. 쟤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는 게 그래서야. 너 보느라고.”
도현이 담요를 여미던 손을 멈췄다. 어머니가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박순례는 그 말을 하고 만족한 얼굴로 마당을 둘러보더니, 금방 다시 1998년으로 돌아가 「미숙 언니, 서명 몇 명 받았어」 하고 물었다. 여름은 도현을 봤다. 도현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지 않으려고 목에 힘을 주고 있었다.
김 할아버지, 박 여사, 윤 기사님이 같이 왔다. 윤 기사님은 구 사장을 데려왔다. 구 사장은 볼펜 세 자루를 셔츠 주머니에 꽂고, 마당 한쪽에서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막차 연장 그거 내가 해 준 거여」 하고 말했다. 박 여사는 1974년 졸업생을 일곱 명 데려왔다. 그중 하나는 미국에서 왔다고 했다.
열한 시, 사진을 찍을 차례였다.
1998년 사진처럼 서자고 여름이 말했다. 축쇄판 사진을 크게 뽑아 사진사 옆 이젤에 세워 두었다.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면서 자기 자리를 찾았다. 1998년에 앞줄 왼쪽에 섰던 할머니의 딸이 그 자리에 섰다. 현수막을 들었던 청년의 동생이 현수막 기둥 옆에 섰다. 뒷줄 가운데 안경 쓴 김용택 씨는 이번에도 뒷줄 가운데에 섰다. 안경만 바뀌었다.
그때 마당 입구에 검은 승합차가 섰다. 장애인 주차 칸이었다.
배문수가 내렸다. 회색 양복, 뒤로 넘긴 머리. 이번에는 비서가 하나뿐이었다. 그는 꽃다발을 들고 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사진사 쪽으로 곧장.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아이고, 삼십 주년이면 축하해야지. 우리 동네 도서관인데.”
배문수는 앞줄 가운데로 가려고 했다. 사람들이 조금씩 비켜 섰다. 비켜 서는 사람도 있었고, 안 비켜 서는 사람도 있었다. 박 여사는 안 비켜 섰다.
여름이 앞으로 나갔다. 배문수 앞에 섰다. 꽃다발 향이 났다. 백합이었다.
“위원장님.”
“이제 위원장 아니에요.”
“의원님. 이 사진은 1998년 사진대로 섭니다.”
“그러니까 나도 서야지. 이 동네 사람인데.”
“1998년 사진에 의원님은 안 계셨습니다.”
배문수는 웃었다. 이가 보였다.
“그때 내가 바빴지.”
“아니요. 대문 안에 계셨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두드렸는데 안 열어 주셨죠. 도서관 생기면 땅값 떨어진다고.”
마당이 조용해졌다. 휠체어의 박순례가 「미숙 언니, 저 사람 누구야」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름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팔 년 동안, 아니 십 년 동안, 카운터에서 쓰던 목소리였다. 반납일을 알려 주는 목소리.
“이 사진에 서실 자리는 없습니다. 앞줄에도, 뒷줄에도요. 꽃다발은 받겠습니다. 3층에 두겠습니다. 향토자료실에요. 오늘 오신 걸 목록에 올려 두겠습니다.”
배문수는 꽃다발을 든 채 여름을 한참 봤다. 그러다 꽃다발을 여름에게 떠넘기듯 건네고, 돌아서서 승합차로 걸어갔다. 차가 떠났다. 백합 향이 여름 손에 남았다. 여름은 꽃다발을 민지에게 넘겼다. 민지가 그걸 들고 3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발소리가 마당까지 들렸다.
사진사가 다시 자리를 정리했다.
앞줄 맨 오른쪽은 비어 있었다. 1998년에 여덟 살 도현이 섰던 자리. 도현이 그 자리로 가려다가 멈췄다. 어머니가 여름의 등을 떠밀었다.
“네 자리야. 원래.”
“그건 관장님 자리잖아.”
“그때 내가 거기 세울 애를 잘못 골랐어.”
어머니는 그 말을 하고, 도현을 한 번 보고, 웃었다. 도현도 웃었다. 도현이 한 칸 옆으로 비켜 섰다.
여름은 앞줄 맨 오른쪽에 섰다. 도현이 그 옆에 섰다. 어머니는 여름 뒤, 뒷줄에 섰다. 1998년에 할머니가 여름을 업고 섰던 자리 쪽이었다. 그리고 여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있었다. 사진사가 셋을 세는 동안 그 손이 여름 어깨를 두 번 꽉 쥐었다.
찰칵.
사진사가 한 장 더 찍자고 했다. 두 번째 셋을 세는 동안 도현이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이번에는 참지 않았다. 기울어진 쪽에 여름이 있었다. 사진사가 셔터를 누르고 나서 액정을 들여다보더니, 이젤 위 1998년 사진과 번갈아 보며 「어, 똑같이 기울었네」 하고 중얼거렸다. 뒷줄에서 박 여사가 「저 집은 고개가 원래 저래」 하고 거들었다. 마당에 웃음이 한 번 돌았다.
점심은 마당에서 짜장면이었다. 윤 기사님이 매곡시장 중국집에 백 그릇을 시켰는데 배달부가 오토바이로 세 번 왔다. 세 번째 배달 때 구 사장이 「이거 버스로 날랐으면 한 번에 끝났어」 하고 말해서 박 여사가 웃다가 사레가 들렸다. 정 선생은 짜장면을 반 그릇 먹고, 남은 반 그릇을 손주에게 밀어 주면서 여름을 불렀다.
“여름아.”
“네.”
“나 이제 말 안 옮긴다.”
“왜요.”
“오늘 처음으로 들은 대로 옮겼는데, 재미가 없더라.”
여름은 웃었다. 정 선생 입가에 묻은 짜장을 휴지로 닦아 드렸다.
오후 네 시,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여름은 3층에 올라갔다. 복도 벽에 사진 마흔 장이 여전히 걸려 있었다. 이름이 이백열두 개 붙어 있었다. 오늘 오후에 서른 개가 더 붙었다.
향토자료실 창가 자리에 도현이 앉아 있었다. 기운 의자에. 그런데 의자가 기울지 않았다. 짧은 다리 밑에 무언가 새로 괴어져 있었다. 접은 종이였다. 흰 종이.
여름은 쪼그려 앉아 그 받침을 봤다. 여러 번 접힌 흰 봉투였다. 접힌 자리 사이로 글씨 두 글자가 보였다. 결정.
“그거요.”
도현이 말했다.
“제 안주머니에 일 년 반 있었습니다. 버릴 수는 없고, 가지고 다니기엔 무겁고. 여기가 제일 맞는 자리 같아서요.”
여름은 받침을 빼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한 번 눌러 보았다. 의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석 달 동안 서랍에 있었고, 일 년 반 동안 안주머니에 있었던 봉투였다. 이제 의자 다리 밑에서 누가 앉든 그 자리를 반듯하게 받칠 것이다.
그리고 의자 바닥 판을 들여다봤다. 1998년 연필 자국 옆에 새 연필 자국이 있었다. 어른 글씨였다. 획이 반듯하고, 받침이 작았다.
한여름. 2028. 봄.
“언제 쓰셨어요.”
“오늘 아침에요. 현수막 끈 묶기 전에. 연필은 민지 선생님 걸 빌렸습니다. 아직 안 돌려드렸고요.”
여름은 그 글씨를 오래 봤다. 여름이라는 이름 옆에 봄이 적혀 있었다. 계절이 하나 앞으로 당겨져 있었다.
창밖으로 마을버스 7번이 정류장에 섰다. 일요일 오후라 사람이 여럿 내렸다. 두 사람이 분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책을 반납하러 오는 걸음이었다. 여름은 일어섰다. 카운터에 내려가야 했다. 반납함에 책이 떨어지는 소리가 곧 날 것이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