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229자) · 서이랑 · 섣달 스무날

나라가 부른다

문지방의 계약 · 백해원

만 19세 이상 이용가

섣달 스무날 동틀 녘, 절벽 위 들에 검은 섬이 스물다섯 떠 있었다. 당산에서 켠 스무 짝과, 관아가 올려 보낸 여섯 짝 가운데 다섯이었다. 하경문은 마종술의 헛간에서 거둔 쉰둘 가운데 여섯을 먼저 내주면서 글을 붙였다. 현 적에 오른 목수에게 현이 거둔 나무를 내준다. 이랑은 그 글을 두 번 읽고 접어서 품에 넣었다. 나무는 고마웠고, 글은 무거웠다.

섬마다 사람이 있었다. 거적 대신 귀틀을 쌓기 시작한 섬도 있었다. 문턱골 장정들이 절벽 아래에서 통나무를 올려 주었고, 품값은 봄 감자로 셈하기로 했다. 한서표를 들고 섬을 하나씩 돌면 붉은 물이 스물둘, 스물셋, 스물하나에 멈췄다. 사백열이 절벽 위에 살았다. 문턱골은 백스물로 돌아가 다시 열아홉이 됐다.

목수는 서른하나였다. 보름 뒤로 열하나가 더 사흘을 섰다. 그중 넷은 절벽 위에서 불린 사람이었고, 불린 지 열흘 만에 제 짝을 놓았다. 하나가 스물을 부르고, 부른 스물 가운데 누군가 서고, 선 사람이 또 놓았다. 이랑은 그 셈을 더는 손가락으로 하지 않았다. 손가락이 모자랐다.

들 가운데에 도해가 막대를 꽂고 서 있었다. 도해는 사흘 전 얼음 계단을 두만 등에 업혀 올라왔고, 그 뒤로 내려가지 않았다. 불러 줄까 물으면 늙은이는 밖에서 재도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밤마다 옥례의 섬 가장자리에 등을 기대고 잤다. 문지방 밖이었지만 가장자리에 붙으면 등이 조금 따뜻하다고 했다.

“한 마디.”

도해가 그림자 끝의 돌을 발로 밀며 말했다.

“작년보다 또 한 마디 낮소. 해는 해마다 남쪽으로 기울어 뜨오. 그러면 첫 해가 닿는 데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조금씩 옮겨 가오. 솔재는 열 해를 못 가오. 여기 들도 서쪽 끝부터 하나씩 첫 해를 잃을 거요.”

“동쪽 끝은요?”

“동쪽 끝이 제일 오래 가오. 그다음은 저 끝 너머요. 거기가 어딘지는 나도 모르오.”

*

해가 한 뼘 오를 무렵 곰녀가 절벽 위에 올라왔다. 봉수와 두만이 양쪽에서 곰녀의 팔을 붙들고 얼음 계단을 끌어 올렸다. 곰녀는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봉수의 이름과 두만의 별명을 번갈아 부르며 욕을 했고, 마지막 계단에서 두만이 곰녀를 번쩍 들어 올려 들 위에 내려놓았다.

“두꺼비가 날 들었어.”

“두만이에요.”

“오늘은 두만이라고 해 줄게. 날 들었으니까.”

곰녀는 숨을 고르고 사방을 둘러봤다. 들이 넓었다. 검은 섬들이 눈 위에 흩어져 있었고, 섬마다 김이 오르고 연기가 올랐다. 곰녀는 한참 말이 없다가 당산 가지로 짠 의자를 찾았다. 봉수가 등에 지고 올라왔다. 곰녀는 의자를 눈 위에 내려놓고 앉았다가 벌떡 일어났다.

“영하 열여덟. 엉덩이가 그래.”

“의자에 앉으셨잖아요?”

“의자도 엉덩이야. 당산 엉덩이.”

깨금이 곰녀 곁에서 깨금발로 한 바퀴 돌았다. 옥례가 복실을 무릎에 앉히고 먹줄통 실을 감아 주고 있었다. 복실은 요즘 실 튕기는 걸 배웠다. 튕길 때마다 줄이 삐뚤게 앉았고, 옥례는 삐뚤어도 괜찮다고, 삐뚠 줄은 대패로 밀면 된다고 했다.

옥례의 섬 곁에 새 짝 하나가 누워 있었다. 두만이 놓은 짝이었다. 두만은 열이레부터 사흘을 섰고, 오늘 동틀 녘 제 짝을 놓았다. 곰녀를 끌어 올린 것도 그래서였다. 두만이 문지방 안쪽에 서서 제일 먼저 부른 사람이 곰녀였다. 곰녀는 문턱골에서는 불린 사람이었지만 두만의 자리에서는 아니었다.

“곰녀 아주머니, 들어오세요.”

곰녀는 문지방 앞에서 한참 두만을 노려봤다.

“두꺼비가 날 부르네.”

“두만이에요. 안 들어오시면 다음 사람 불러요.”

곰녀는 코웃음을 치고 넘어갔다. 삐걱. 넘어가서 흙바닥에 엉덩이를 대 보더니 스물셋이라고 했다. 두만이 한서표를 빌려 와 대 보니 스물셋이었다. 두만은 그 뒤로 섬마다 돌아다니며 곰녀 엉덩이가 틀린 적이 없다고 자랑했다.

*

할아버지는 해가 한 뼘 반 올랐을 때 올라왔다. 혼자 올라왔다. 목소리가 절반쯤 돌아와 있었다. 어깨에 짝 하나를 메고 있었다. 이랑은 그 짝을 알아봤다. 관아가 올려 보낸 여섯 가운데 하나였는데, 못 자국이 넷이고 결이 유난히 촘촘했다. 할아버지가 그 짝을 제 몫으로 달라고 했다는 말을 이랑은 어제 들었다.

“할아버지.”

“동쪽 끝으로 가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들의 동쪽 끝, 섬들이 끝나는 데서 한참 더 가면 땅이 아주 조금 솟았다가 내려가는 자리가 있었다. 이랑이 한 달 전 처음 올라왔을 때 거기서도 김을 봤었다. 너무 멀어서 아무도 놓지 않은 자리였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할아버지의 걸음은 느렸고, 이랑은 할아버지보다 반걸음 뒤에 섰다. 섬들을 지날 때마다 따뜻한 공기가 뺨을 스쳤다가, 섬과 섬 사이 눈밭에 들어서면 도로 얼굴이 굳었다. 따뜻함과 추위가 걸음마다 번갈아 왔다. 마지막 섬을 지나자 추위만 남았다. 발밑의 눈이 짚신 밑에서 울었고, 할아버지 어깨의 짝에서 마른 나무 냄새가 났다. 가는 동안 할아버지가 한 번 말했다.

“네 아비가 저기 놓고 싶어 했다.”

“아버지가 여기 올라와 봤어요?”

“스물을 데리고 와서 당산 밑에 섰을 때, 저 끝을 가리켰다. 저기가 제일 먼저 해가 든다고. 나는 그때 거길 안 봤다. 네 아비 손가락만 봤다.”

동쪽 끝에 닿았다. 김이 한 뼘 높이로 일렁였다. 할아버지는 짝을 내려놓고 이랑에게 곡괭이를 내밀었다.

“파라.”

이랑이 팠다. 언 땅이 곡괭이 끝을 튕겼다. 할아버지는 이랑의 손 위에 제 손을 한 번 겹쳐 각도를 고쳐 주고 뺐다. 한 뼘을 팠다. 할아버지가 숯을 깔았다. 이랑이 짝을 눕혔다. 결이 해 쪽으로 누웠는지 둘이 번갈아 손바닥으로 쓸었다. 할아버지의 손바닥은 굳은살에 갈라져 있어서 짝 위를 쓸 때 사각 소리가 났다. 이랑은 옥례에게서 빌려 온 먹줄통 실을 당겨 튕겼다. 탁, 검은 줄이 곧게 앉았다.

“수평이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그러고 짝에서 두 걸음 물러섰다. 문지방 바깥이었다.

해가 짝의 등을 넘어 안쪽 땅에 닿았다. 눈이 투명해지고, 물이 되고, 검은 흙이 드러났다. 김이 올랐다. 이랑은 한서표를 세웠다. 스물다섯.

이랑은 짝 안에 섰다. 놓은 사람은 부름 없이 넘는다. 이 짝은 이랑의 손이 눕혔다. 할아버지는 바깥에 서 있었다. 보름 전 솔재에서처럼. 할아버지의 발은 넘어오지 않았다.

이랑은 입을 열었다. 솔재에서 혀끝에 걸렸던 이름이었다. 한 번도 소리 내 불러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서만석 님.”

할아버지의 눈썹이 한 번 움직였다.

“서만석 님, 들어오세요.”

할아버지가 발을 들었다. 문지방이 한 번 삐걱했다. 할아버지가 넘어왔다. 마흔한 해 동안 남을 부르기만 하고 한 번도 불린 적 없는 사람이, 손녀가 놓은 문지방 안쪽 흙을 밟았다.

할아버지는 한참 서 있었다. 그러다 쉰 목으로 말했다.

“그 이름, 오랜만에 듣는다. 네 할미가 부르던 거다.”

할아버지는 흙 위에 쪼그려 앉아 손바닥을 댔다. 이랑은 그 곁에 앉았다. 할아버지 손등에 제 손등을 대 봤다. 둘 다 거칠었다.

“내년에 사람이 또 온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알아요.”

“여기도 식는다.”

“알아요. 그럼 또 놓아요.”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짝 하나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짝 하나를 더 놓을 자리를 이 끝에서 봤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무엇을 셈하는지 이랑은 물어보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손가락이 꼽히지 않고 무릎 위에 펴져 있었다.

*

한낮에 얼음 계단 쪽이 소란해졌다. 봉수가 뛰어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관아 사람들이 올라온다고. 사또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군졸이 스물이라고.

맨 앞에 선 사내는 쉰쯤 돼 보였다. 검은 털 갖옷에 감영 도사의 띠를 둘렀고, 얼굴이 곧고 눈이 맑았다. 곁에 하경문이 섰다. 하경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뒤에 군졸 스물이 창을 세우고 섰고, 그 뒤에 목에 칼을 쓴 사내 하나가 끌려 올라왔다. 마종술이었다. 칼을 쓰고도 옷깃이 반듯했다.

사내는 섬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섬마다 멈춰서 사람 수를 셌다. 군졸 하나가 따라다니며 한지에 수를 받아 적었다. 스물여섯 자리, 사백열. 백운필은 그 수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알고 온 수를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이랑과 할아버지가 선 동쪽 끝 짝 앞에 와서 멈췄다. 문지방 한 걸음 앞이었다.

“감영 도사 백운필이오.”

목소리가 맑았다. 서두르지 않았다.

“목수 서만석, 서이랑이 누구요?”

이랑이 일어섰다. 할아버지는 앉은 채 백운필을 올려다봤다.

“감영의 명을 전하오. 솔고개현의 목수 서른하나는 정월 초하루까지 감영으로 온다. 목수의 이름은 감영 적에 올리고, 목수는 감영이 정한 곳에 놓고, 감영이 정한 사람을 부른다. 남쪽 들에 사람이 떠난 빈 자리가 이천이오. 거기에 나라 사람을 들인다. 나무는 감영이 댄다.”

백운필은 고개를 조금 돌려 마종술을 봤다.

“나무를 댈 줄 아는 자가 필요하오. 이 자의 일은 감영이 다시 셈하겠소.”

마종술이 칼 위로 웃었다. 칼을 쓴 목을 조금 기울여 이랑을 봤다.

“아가씨, 봄 약조는 감영 땅에서 지켜도 되오. 노루목이든 남쪽 들이든, 내 나무가 놓이는 데가 내 땅이오.”

하경문이 마종술 쪽으로 반걸음 나섰다가 멈췄다. 하경문은 백운필의 등 뒤에서 이랑을 봤다. 입술이 무어라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랑은 그 입 모양을 읽을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 같기도 했고, 부르지 말라는 말 같기도 했다.

이랑은 주먹을 쥐었다. 옥례가 복실을 안은 채 이랑 곁으로 왔고, 두만이 그 뒤에 섰다. 깨금이 할아버지 소매를 잡았다.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걸 나라가 모르면, 그 사람들은 나라 사람이 아니오.”

백운필이 말했다. 하경문이 밤마다 하던 그 셈이 백운필의 입에서 나왔다. 이랑은 그걸 알았다. 하경문이 백운필 뒤에서 제 털버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운필의 뒤에서 군졸들이 창 자루로 눈을 한 번씩 찍었다. 스무 개의 창 자루가 한꺼번에 눈을 찍는 소리가 들 끝까지 퍼졌다가, 섬마다 오르는 김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니 먼저 확인하겠소. 이 문지방이 정말 넘어 본 자만 놓게 하는지.”

백운필이 문지방에 한 발을 올렸다. 발이 나무 위 한 치에서 멈췄다. 백운필은 발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이랑을 봤다.

“나는 불린 적이 없소. 불러 보시오. 사흘 서면 나도 목수가 된다지요? 그러면 나라가 직접 부르겠소.”

들 위로 바람이 불었다. 섬마다 오르던 김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이랑은 문지방 안쪽에 서서 백운필의 멈춘 발을 봤다. 할아버지가 앉은 채 이랑의 등을 봤다. 부른 자만 넘는다. 한 도를 받은 자는 스물을 부른다. 누구를 부를지는 받은 자가 정한다.

이랑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셈이 먼저 나오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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