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492자)

D-30

길드장 들어간 게임 방송 스트리머 · 한빛결

컵라면 뚜껑 틈으로 김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마이크에 들어갔다⁠. 나채후는 나무젓가락을 입에 물고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새벽 한 시 오십팔 분⁠, 신림동 원룸의 불은 모니터 두 대뿐이었다⁠. 왼쪽 모니터에는 「⁠잿빛 왕관⁠」의 바람언덕 성 마당이⁠, 오른쪽 모니터에는 채팅창이 떠 있었다⁠. 시청자 수는 백두 명이었다⁠. 어제보다 셋이 많았다⁠.

“⁠자⁠, 여러분⁠. 지금 채후 선수⁠, 라면을 삼 분 불리는 동안 마지막으로 성을 한 바퀴 돕니다⁠.⁠”

캐릭터가 마당을 걸었다⁠. 부스스한 갈색 머리에 은색 갑옷⁠, 붉은 망토⁠, 허리에 장검⁠. 여덟 해 전 열여섯 살의 채후가 자기 얼굴을 흉내 내 만든 길드장이었다⁠. 마당 우물가에서는 용병 일곱이 정해진 동선대로 서성였다⁠. 대장장이는 망치를 들었다 놓았고⁠, 견습 마법사는 꺼진 화덕 앞에 쪼그려 앉았고⁠, 부길드장 칭호를 붙여 준 검사는 성벽 위를 오갔다⁠.

후원 알림이 울렸다⁠. 기계 목소리가 헤드셋 안에서 또박또박 읽었다⁠.

「⁠천 원 후원⁠. 채후야 길드원 다 용병인 거 아직도 웃김⁠」

“⁠웃지 마세요⁠. 진짜 길드원들은 다 군대 가고 취업하고 결혼했어요⁠. 남은 건 저랑 이분들이에요⁠. 월급도 꼬박꼬박 드려요⁠, 금화로⁠.⁠”

채팅이 「⁠ㅋㅋㅋㅋ⁠」로 한 줄 내려갔다⁠. 채후는 라면 뚜껑을 열고 화면을 하늘로 돌렸다⁠. 하늘 한가운데 금빛 숫자가 떠 있었다⁠. 「⁠D-31⁠」 「⁠잿빛 왕관⁠」 서비스 종료 이벤트였다⁠. 일주일 전 공지가 뜬 뒤로 채후는 매일 밤 이 숫자를 켜 두고 방송했다⁠.

“⁠두 시 되면 서른으로 바뀝니다⁠. 다 같이 세 볼까요⁠? 열⁠, 아홉⁠.⁠”

채후는 장난으로 한마디를 보탰다⁠.

“⁠솔직히 이 게임 안에서 살고 싶다⁠. 진짜로⁠.⁠”

숫자가 영에 닿았다⁠. 금빛이 하늘 끝까지 번졌다⁠. 모니터 빛이 채후의 눈을 덮었고⁠, 나무젓가락이 책상에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렸다⁠.

*

차가운 돌이 뺨에 닿았다⁠. 채후는 먼저 귀로 알았다⁠. 바람이 깃발 천을 때리는 소리⁠, 멀리서 우물 도르래가 삐걱이는 소리⁠, 쇠를 두드리던 망치가 멈추는 소리⁠. 키보드도 냉장고 모터도 들리지 않았다⁠.

눈을 뜨자 하늘이 너무 파랬다⁠. 몸을 일으키는데 어깨가 무거웠다⁠. 내려다보니 은색 갑옷이었다⁠. 붉은 망토가 돌바닥에 흘러 있었고⁠, 허리춤에서 장검 칼집이 바닥을 긁었다⁠. 목덜미에 익숙한 무게가 있어 손을 올렸다⁠. 방에서 쓰던 검은 헤드셋이 갑옷 위에 어울리지 않게 얹혀 있었다⁠.

“⁠지금 채후 선수⁠, 상황 파악이 안 됩니다⁠.⁠”

자기 목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대답처럼 목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칼끝이었다⁠. 칼을 쥔 사람은 부길드장이었다⁠. 짧게 자른 검은 머리를 뒤로 묶고 낡은 기사 외투를 입은 여자였다⁠. 채후가 여덟 해 동안 보아 온 얼굴이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숨 쉬는 것은 처음 보았다⁠. 눈썹 끝에 오래된 흉터가 있었다⁠. 게임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던 흉터였다⁠.

“⁠길드장님 얼굴인데⁠, 눈이 달라요⁠.⁠”

“⁠세르바 씨⁠?⁠”

“⁠이름은 아네요⁠. 대답해요⁠. 어디서 왔어요⁠?⁠”

채후는 칼끝을 내려다보았다⁠. 세르바의 대사는 「⁠길드장님⁠, 오늘도 무사하시길⁠」 하나뿐이었다⁠. 여덟 해 동안 이 한마디만 들었다⁠.

“⁠신림동요⁠.⁠”

세르바의 칼이 조금 더 들어왔다⁠. 갑옷 목가리개가 끽 소리를 냈다⁠. 헤드셋에서 알림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천 원 후원⁠. 와 이거 무슨 콘텐츠임⁠? 그래픽 왜 이렇게 좋아짐⁠」

「⁠ㅋㅋㅋ 연기 미쳤다⁠」

「⁠부길드장 성우 섭외함⁠?⁠」

방송이 켜져 있었다⁠. 채후가 보는 것이 그대로 화면으로 나가고 있었다⁠. 세르바가 칼을 쥔 채 채후의 귀 옆을 노려보았다⁠.

“⁠지금 그 안에서 누가 말했어요⁠?⁠”

“⁠이거요⁠? 시청자분들요⁠. 백두 명⁠. 아⁠, 지금 좀 늘었나⁠.⁠”

“⁠시청자가 뭐예요⁠?⁠”

채후가 대답을 고르는 사이 우물가에서 견습 마법사가 달려왔다⁠. 붉은 곱슬머리에 손끝이 새까맣게 그을린 청년이었다⁠. 엘무였다⁠. 화덕 앞에 쪼그려 앉는 동작만 하던 용병이 지금은 숨을 헐떡이며 채후의 헤드셋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여기서 사람 목소리 났어요⁠! 작은 사람 목소리⁠! 길드장님 귀에 사람이 살아요⁠!⁠”

「⁠ㅋㅋㅋㅋ 귀에 사람이 살아요⁠」

「⁠마법사 애드리브 천재네⁠」

채후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서 둘 다 조금씩 했다⁠. 세르바가 엘무의 뒷덜미를 잡아 뒤로 물리고 칼을 거두었다⁠. 거두기만 했지 칼집에 넣지는 않았다⁠.

“⁠길드장님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어요⁠. 하늘이 바뀌던 순간에⁠.⁠”

“⁠네⁠. 저도 방금 알았어요⁠.⁠”

“⁠그럼 아는 대로 말해요⁠. 하늘이 닫히면 우린 어떻게 돼요⁠?⁠”

채후는 고개를 들었다⁠. 금빛 숫자가 「⁠D-30⁠」으로 바뀌어 있었다⁠.

“⁠닫히면이라뇨⁠?⁠”

세르바는 대답 대신 성 안을 둘러보았다⁠. 대장장이가 망치를 내려놓고 이리 오고 있었다⁠. 부엌 문에서 요리사 할멈이 국자를 쥔 채 내다보았다⁠. 일곱 사람이 다 채후를 보고 있었다⁠. 정해진 동선은 아무도 걷지 않았다⁠.

“⁠저 숫자가 처음 뜬 날부터 왕도 사람들이 다 알아요⁠. 영이 되면 하늘이 닫혀요⁠. 닫히면 우리는 없어요⁠. 바람도 우물도 저 마을 빵 냄새도⁠.⁠”

요리사 할멈이 국자로 바닥을 탁 쳤다⁠.

“⁠없어지기 전에 밥은 먹고 없어져야지⁠. 길드장⁠, 아니 길드장 안에 든 양반⁠. 라면이 뭐요⁠? 아까부터 라면⁠, 라면 하던데⁠.⁠”

「⁠할머니 NPC가 라면을 모름 ㅋㅋㅋㅋ⁠」

채후는 헤드셋을 손으로 눌렀다⁠. 귓바퀴에 닿는 쿠션의 감촉이 방에서와 똑같았다⁠.

“⁠메뉴⁠, 메뉴창⁠. 손가락을 이렇게 하면 떴는데⁠.⁠”

채후는 허공에 대고 손가락 두 개를 튕겼다⁠.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손바닥을 펴 보고⁠, 주먹을 쥐어 보고⁠,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엘무가 옆에서 똑같이 손가락을 튕겼다⁠. 엘무의 손끝에서 불티가 하나 튀었다가 꺼졌다⁠.

“⁠켜졌다⁠! 방금 봤어요⁠? 켜졌어요⁠!⁠”

“⁠제 메뉴는 안 켜졌어요⁠.⁠”

「⁠채후 지금 로그아웃 못 하는 연기 중⁠」

「⁠게임에 갇히는 애니 그거냐고⁠」

「⁠이천 원 후원⁠. 진짜면 112 불러 드림⁠?⁠」

“⁠112는 여기 못 와요⁠. 아마⁠.⁠”

채후는 헤드셋을 벗어 손에 들었다⁠. 쿠션 안쪽에서 알림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세르바가 한 걸음 다가와 헤드셋을 들여다보았다⁠. 칼을 쥔 손은 풀지 않았다⁠.

“⁠이걸로 바깥 사람들 말을 들어요⁠?⁠”

“⁠네⁠. 저는 못 보고 듣기만 해요⁠. 제가 보는 건 시청자분들이 다 보고요⁠.⁠”

“⁠지금도요⁠?⁠”

“⁠지금도요⁠. 세르바 씨 얼굴 지금 이백 명이 보고 있어요⁠.⁠”

세르바가 손바닥으로 채후의 눈을 덮었다⁠. 굳은살 박인 손이 차가웠다⁠.

「⁠화면 까매짐 ㅋㅋㅋㅋㅋ⁠」

「⁠부길드장 방송 사고 냄⁠」

“⁠이러면 안 보여요⁠?⁠”

“⁠안 보이네요⁠. 근데 제가 아무것도 못 봐요⁠.⁠”

세르바는 한참 있다가 손을 뗐다⁠. 손을 떼면서 얼굴을 돌렸다⁠. 성벽 위 깃발이 다시 바람에 펄럭였다⁠.

*

반석주는 새벽 세 시 사 분에 판교 회색달 게임즈 사무실의 자동문을 지났다⁠. 경비실 불만 켜진 로비를 지나 운영팀 칸에 들어서자 막내 변누리가 서버실 유리문 앞에서 컵라면을 든 채 돌아보았다⁠.

“⁠팀장님⁠, 이상 접속이 하나 있어요⁠. 바람언덕 길드장 계정이요⁠. 세션을 끊어도 안 끊겨요⁠. 서버에서는 접속 중인데 로그인 기록이 두 시에서 멈춰 있어요⁠.⁠”

“⁠보낸 메일 봤어요⁠. 방송도 켜져 있다면서요⁠.⁠”

“⁠네⁠. 시청자가 이백 명 넘었어요⁠. 지금 길드원 NPC들이랑 대화를 해요⁠. 대사 목록에 없는 말로요⁠.⁠”

석주는 외투를 벗지 않고 자리에 앉아 보온병 뚜껑을 열었다⁠. 보리차 김이 모니터 아래로 퍼졌다⁠. 운영 도구를 켜고 운영자 캐릭터를 골랐다⁠. 흰 로브에 금빛 이름표 「⁠GM석주⁠」 여덟 해 전 직접 고른 옷이었다⁠.

“⁠누리 씨⁠, 그 NPC들 로그 따 둬요⁠. 지우지 말고⁠.⁠”

“⁠지금 서버 내릴까요⁠?⁠”

“⁠종료 서른 날 남은 게임을 새벽에 내리면 내일 기사가 나요⁠. 내가 들어가서 내보낼게요⁠.⁠”

석주는 보리차를 한 모금 마시고 접속 버튼을 눌렀다⁠. 모니터 구석에 회사 단체방 알림이 떴다⁠. 「⁠[기사] 회색달⁠, 대형사에 매각 막바지⁠… 거목게임즈 도세혁 본부장 실사 착수⁠」 석주는 알림을 밀어 지웠다⁠.

*

채후가 처음 들은 것은 종소리였다⁠. 성문 밖에서 운영자가 나타날 때 울리는 맑은 효과음이었다⁠. 세르바의 손이 칼자루로 갔다⁠. 길드원들이 한 걸음씩 물러나 채후 뒤에 모였다⁠.

성문 철창 너머 풀밭 위에 흰 로브가 떠 있었다⁠. 발이 땅에서 한 뼘쯤 떨어져 있었고⁠, 머리 위에 금빛 이름표가 돌았다⁠. 채후는 철창을 붙잡았다⁠. 문을 열려고 하자 눈앞에 글자가 떴다⁠. 「⁠운영자 GM석주가 입장을 요청합니다⁠. 허락하시겠습니까⁠?⁠」

“⁠안 열어도 돼요⁠?⁠”

흰 로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흔쯤 된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공손했다⁠.

“⁠길드 성은 길드장이 허락해야 들어갑니다⁠. 저는 「⁠잿빛 왕관⁠」 운영팀장 반석주입니다⁠. 나채후 님⁠, 계정에 이상이 있어요⁠. 지금 로그아웃해 주세요⁠.⁠”

“⁠버튼이 없어요⁠. 메뉴창이 안 떠요⁠. 그리고 팀장님⁠, 저 지금 방에 없어요⁠. 여기 있어요⁠. 몸이 여기 있다고요⁠.⁠”

“⁠방송 화면은 저희도 보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콘텐츠라면 지금 멈춰 주세요⁠. 운영 정책 위반이에요⁠.⁠”

「⁠운영자 등판 ㅋㅋㅋ 이것도 대본이지⁠?⁠」

「⁠채후 섭외력 무엇⁠」

채후는 뒤를 돌아보았다⁠. 세르바가 칼을 반쯤 뽑은 채 철창 너머를 노려보고 있었다⁠. 엘무는 요리사 할멈의 치마 뒤에 숨었다⁠.

“⁠대본 아니에요⁠. 팀장님⁠, 이분들 살아 있어요⁠. 하늘 시계가 뭔지 알아요⁠. 영이 되면 없어진다는 것도 알아요⁠.⁠”

석주가 잠깐 말을 멈췄다⁠. 흰 로브의 소매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았다⁠. 운영자 캐릭터에는 바람이 닿지 않았다⁠.

“⁠NPC는 대화 엔진으로 움직입니다⁠. 학습을 오래 하면 그럴듯한 말을 해요⁠. 살아 있는 게 아니에요⁠.⁠”

세르바가 철창 사이로 칼끝을 내밀었다⁠. 칼끝이 흰 로브를 그대로 통과했다⁠.

“⁠그럴듯한 말이 칼도 들어요⁠?⁠”

석주는 칼끝을 내려다보았다가 채후를 보았다⁠.

“⁠나채후 님⁠. 서른 날 뒤 1월 9일 자정에 서버를 끕니다⁠. 날짜는 못 바꿔요⁠. 적자가 열 달째예요⁠. 저희 팀 열두 명이 이 게임 하나에 매여 있습니다⁠. 지금 나가시지 않으면 계정을 정지하고 방송도 신고합니다⁠.⁠”

“⁠정지하면 저는 어떻게 되는데요⁠? 몸이 여기 있는데⁠.⁠”

석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못 한 사람의 침묵이었다⁠. 채후는 침묵 속에서 숨을 한 번 골랐다⁠. 여덟 해 동안 버튼으로만 움직이던 다리가 지금은 철창 앞에서 떨렸다⁠.

“⁠지금 채후 선수⁠, 운영팀장님께 정면으로 말합니다⁠. 안 나가요⁠. 못 나가는 게 아니라 안 나가요⁠. 이분들 두고는요⁠.⁠”

「⁠오 멋있어⁠」

「⁠삼천 원 후원⁠. 채후 처음으로 멋있음⁠」

“⁠처음 아니거든요⁠.⁠”

석주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채후는 가르지 못했다⁠.

“⁠성 밖으로 나오시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흰 로브가 종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풀밭에는 눌린 자국도 남지 않았다⁠.

채후가 철창에서 손을 떼는 순간 하늘이 바뀌었다⁠. 금빛 「⁠D-30⁠」 아래로 붉은 글자가 한 줄 흘렀다⁠.

「⁠긴급 점검 안내 · 오늘 04⁠:00 ~ 06⁠:00⁠」

세르바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칼을 칼집에 꽂고 엘무의 팔을 잡아끌었다⁠.

“⁠점검이다⁠. 다들 지하로⁠. 할멈⁠, 화덕 불 꺼요⁠. 엘무⁠, 울지 말고 걸어⁠.⁠”

“⁠점검이 뭐가 무서운데요⁠?⁠”

채후가 묻자 세르바가 지하 창고 문고리를 쥔 채 돌아보았다⁠.

“⁠점검 날 밖에 있으면 새로 찍혀요⁠. 같은 얼굴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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