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16자)
놓으려던 수
천하제일 군사, 회귀해서 판을 다시 짠다 · 정이한
무한의 무림맹 총단에 불이 붙은 것은 한밤중인 삼경이 조금 지나서였다. 스스로 바른 무림이라 일컫는 정파의 문파와 세가들이 모여 세운 연합의 심장이 그곳이었고, 그 심장 한가운데에 작전을 짜는 군사부가 있었다. 군사부 안쪽 방에서 마흔다섯의 군사 위서는 바둑판 앞에 앉아 서쪽 회랑이 타는 소리를 들었다.
정파와, 서쪽 산악에 뿌리를 둔 무림 세력 마교가 세 해째 맞붙은 정마대전은 이 밤으로 끝나고 있었다. 기둥이 터지는 소리가 났고, 기름 먹인 창호지가 한꺼번에 오그라들며 매운 연기를 방 안까지 밀어 넣었다. 위서는 소매로 입을 막지 않았다. 판 위에는 끝내지 못한 대국이 놓여 있었고, 손가락 사이에는 모서리에 작은 이가 빠진 흑돌 하나가 끼어 있었다.
“서문이 열렸습니다, 군사.”
문간에 선 사람은 부군사 하후정이었다. 하얀 장포 자락 끝이 그을려 있었고, 손에 든 검에서는 피가 한 줄로 떨어져 마루에 동그란 자국을 냈다. 그는 늘 그랬듯 웃고 있었다.
“누가 열었소?”
“제가 열었지요.”
위서는 그 대답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놀랄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 열흘 동안 군량이 세 번 엉뚱한 길로 갔고, 남궁세가는 끝내 오지 않았고, 흑석협에서 버린 미끼는 미끼로만 죽었다. 판을 다시 세어 볼 때마다 어딘가에 구멍이 있었는데, 그 구멍이 지금 문간에 서서 웃고 있었다.
“스무 해요.” 위서가 말했다. “내가 이 판을 스무 해 짰소.”
“압니다. 그래서 늘 한 수 늦으셨지요.”
하후정이 걸어 들어와 판 맞은편에 앉았다. 칼은 무릎 위에 가로놓았다. 불빛이 그의 얼굴 한쪽만 붉게 비췄다. 그는 판을 내려다보더니 백돌 하나를 집어 위서의 대마 옆에 놓았다. 대마는 크게 이어져 판의 운명을 쥐고 있는 돌 덩어리를 말한다. 그 한 수로 위서의 대마는 숨 쉴 자리를 잃었다.
“왜요?” 위서가 물었다. “맹이 무너지면 당신도 갈 데가 없을 텐데.”
“군사는 그 물음을 스무 해 동안 한 번도 안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하시니 섭섭하군요.”
하후정의 검이 올라왔다. 위서가 본 마지막 것은 칼날이 아니라 판 위였다. 손에 쥔 흑돌을 놓을 자리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 자리에 놓으면 대마가 살았다. 그는 손을 뻗었고, 손이 판에 닿기 전에 가슴이 차가워졌다.
*
돌이 판에 닿는 소리가 났다.
딱, 하고 맑게 울리는 소리였다. 불 냄새 대신 축축한 나무 냄새와 운하에서 올라오는 물 비린내가 코로 들어왔다. 처마 끝에서 빗물이 떨어져 옆 판 위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백발을 상투로 틀어 올린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눈썹이 하도 길어서 눈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그 수를 두려고 그렇게 오래 뜸을 들였냐?”
스승 노옹이었다. 소주 운하 옆에서 바둑 기원을 연 지 마흔 해가 넘은 노인이었고, 기원이란 돈을 내고 바둑을 두러 오는 집을 말한다. 위서가 기억하는 노옹은 이해 겨울에 죽었다. 장례 날 비가 왔고, 위서는 맹의 일로 가지 못했다.
위서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에 주름이 없었다. 손가락 마디가 굵어지기 전의 손이었고, 그 사이에 모서리 이가 빠진 흑돌 하나가 여전히 끼어 있었다. 판 위의 모양은 낯이 익었다. 스물다섯 해 봄, 노옹과 두던 끝내기였다.
“지금이 무슨 해요?”
“무진년이지. 너 어제 술 먹었냐?”
무진년이었다. 정마대전이 터지기 스무 해 전이었다. 위서는 판 모서리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나무가 서늘했고, 손바닥 아래로 판에 패인 오래된 칼자국 하나가 만져졌다. 노옹이 젊을 때 홧김에 낸 자국이라고 했다. 그 자국을 다시 만지게 될 줄은 몰랐다.
그는 일어나려다가 반사적으로 허리를 짚었다.
“아이고, 허리야.”
노옹의 긴 눈썹이 꿈틀했다. “스물다섯 먹은 놈이 무슨 허리 타령이냐?”
“허허, 젊은 사람은 모르오. 나이가 들면 허리가…….”
말하다 말고 위서는 입을 다물었다. 허리가 아프지 않았다. 무릎도 멀쩡했고, 눈은 판 끝의 먼지까지 또렷하게 보였다. 스무 해 동안 달고 살던 옆구리의 묵은 상처가 없었다. 몸이 가벼워서 오히려 어지러웠다.
노옹이 혀를 찼다. “판이나 마저 둬라. 지면 오늘 국수는 네가 산다.”
*
그때 아래층에서 의자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계단을 두 개씩 밟고 올라오는 발소리가 이어졌고, 문이 벌컥 열렸다.
“서야! 서야, 나 좀 살려 줘!”
담우였다. 소매가 한쪽 찢어져 있었고, 머리끈이 풀려 앞머리가 이마에 붙어 있었다. 위서와 같은 해에 이 기원에 들어와 같은 해에 바둑을 배웠는데, 위서는 판을 읽었고 담우는 판을 걸었다. 걸어서 이긴 적은 거의 없었다.
위서는 그 얼굴을 보고 숨을 멈췄다.
흑석협에서 미끼 부대를 내보내던 새벽이 떠올랐다. 마교 본대를 골짜기로 끌어들이려면 누군가 먼저 들어가 무너지는 척해야 했다. 위서는 그 자리에 담우의 부대를 골랐다.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가장 그럴듯하게 무너진다. 그 판단은 맞았다. 마교 본대는 골짜기로 들어왔고, 담우는 나오지 못했다. 시신은 찾지 못했고, 위서는 그날 저녁 군사부에서 다음 판을 짰다.
그 담우가 지금 숨을 헐떡이며 문간에 서 있었다.
“왜 그렇게 봐? 귀신 봤어?”
“……그래, 비슷한 걸 봤네.”
“아무튼 아래에 왕 씨네 사람들이 와 있어. 내가 어제 석 냥을 걸었는데, 아니, 걸었다기보다는 그냥 판이 흘러가다 보니…….”
계단 아래에서 굵은 목소리가 올라왔다. “담우, 이놈! 오늘은 돈 아니면 손가락이다!”
노옹이 판을 내려다본 채 말했다. “서야, 네 친구다.”
위서는 일어났다. 무릎이 소리 없이 펴졌다. 그 사실 하나가 우스워서 그는 혼자 웃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아래층 판 사이에 덩치 큰 사내 둘이 서 있었다. 왕 씨네 전당포 일꾼들이었다. 하나는 팔뚝에 붉은 잉어 문신을 했고, 다른 하나는 이쑤시개를 물고 있었다.
“석 냥 빚이면 한 판으로 정리합시다.” 위서가 말했다. “내가 지면 여섯 냥을 내고, 이기면 빚은 없던 걸로 하고.”
“네가 누군데?”
“그 사람 친구요. 아주 오래된.”
잉어 문신이 판 앞에 앉았다. 소주에서 내기 바둑을 둔다는 사람치고 판을 못 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실력이 꽤 있었다. 그러나 위서는 이 사내가 스무 해 뒤 소주 기원 서른 곳을 돌며 내기를 걸다가 어디서 지는지까지 알고 있었다. 오른쪽 귀를 만지면 무리한 수를 두는 버릇이 있었다.
차 한 주전자가 식을 만큼 지나 사내가 오른쪽 귀를 만졌다. 위서는 그 수를 받지 않고 다른 곳을 막았다. 사내의 돌이 판 가운데서 한 덩어리째 숨이 막혔다.
“허허, 젊은이. 귀를 너무 만지면 귀가 닳소.”
사내가 판을 내려다보다가 위서를 보았다. 이쑤시개를 문 쪽이 킬킬 웃었다. “형님, 저 사람 말투가 우리 할아버지 같은데요.”
“닥쳐.”
잉어 문신은 돌을 쓸어 담고 일어섰다. 나가는 길에 문지방에 걸려 휘청했고, 담우가 그 뒤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살펴 가십시오! 다음에 또 오세요, 아니 다음엔 오지 마세요!”
*
이층으로 돌아오자 노옹은 판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비가 그쳐 가고 있었다. 창밖 운하 위로 짐배 하나가 지나가면서 물살이 기원 아래 돌계단을 찰싹찰싹 때렸다.
“판이 달라졌다.” 노옹이 말했다.
“무슨 판 말이오?”
“네 판. 어제까지 너는 다음 수를 봤다. 아까 아래층에서 너는 저놈이 스무 수 뒤에 뭘 할지 보고 있었어. 그런 눈은 바둑판에서 생기지 않는다.”
위서는 노옹 맞은편에 앉았다. 노옹의 손등에 검버섯이 여섯 개 있었다. 위서는 그 검버섯 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장례 날 관 속의 손에도 여섯 개였다.
“스승님, 저는 무한으로 가겠습니다. 무림맹 군사부로.”
노옹의 손이 멈췄다. “맹?”
“올가을에 군사부 정원을 뽑습니다. 그 자리를 다른 사람이 앉기 전에 먼저 앉아야 합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맹은 아직 아무 공고도 안 냈다.”
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옹이 흑돌 하나를 집어 판 바깥, 나무 테두리 위에 내려놓았다.
“판 안에서는 돌이 죽는다. 판 밖에서는 사람이 죽어. 너는 판 안에서 사람을 너무 쉽게 버린다. 그 버릇을 가지고 맹에 들어가면 너는 이기고, 네 옆 사람은 다 죽는다.”
위서는 숨을 들이쉬었다. 노옹이 지난 생에도 이 말을 했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지난 생의 스물다섯은 이 방에서 무슨 말을 들었든 듣지 않았다.
“그래서 가는 겁니다. 이번에는 안 버리려고.”
“이번?”
“말이 헛나왔습니다.”
노옹은 한참 위서의 얼굴을 보다가 턱으로 판을 가리켰다. 아까 두다 만 끝내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끝내기는 판의 경계를 마지막으로 다투어 집을 한두 칸씩 주고받는 단계를 말한다.
“그럼 이 판이 어떻게 끝나는지 말해 봐라. 돌은 만지지 말고.”
위서는 판을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흑이 반 집 집니다. 아래쪽 귀에서 제가 한 수를 늦게 두어서 그렇습니다. 그 한 수만 빨랐으면 제가 한 집 반 이겼습니다.”
노옹이 손가락으로 집을 셌다. 아래쪽 귀를 두 번 세고, 위쪽 변을 한 번 세고, 다시 아래쪽 귀를 셌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대답이었다.
노옹이 판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흑돌과 백돌이 뒤섞여 통 속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비 그친 방 안에 길게 울렸다.
“가려면 가라. 다만 기원 문을 나가는 날, 내 제자 노릇도 거기서 끝이다.”
위서는 일어나 절을 했다. 노옹은 받지 않고 창밖을 보았다. 둘 사이에 놓인 판이 텅 비어 있었다.
*
해가 지자 담우가 국수 두 그릇을 들고 올라왔다. 내기에서 이긴 쪽이 국수를 얻어먹는 것이 이 기원의 법이었으니, 오늘은 담우가 사는 날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돈으로 사 왔다고 우겼다. 어디서 났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서야,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어디가?”
“국수 먹으면서 ‘이 집 간이 예전만 못하구먼’ 했잖아. 너 이 집 처음 온 거 지난달이야.”
위서는 젓가락을 멈추고 웃었다. 국물에서 파 냄새와 멸치 냄새가 올라왔다. 담우는 제 그릇을 다 비우고 위서 그릇의 고명까지 건져 먹더니,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쳤다.
“아, 그거 들었어? 남궁세가 소가주가 소주에 와 있대. 단가 표국 딸이랑 혼례를 올린다더라. 딱 한 달 뒤에.”
위서의 손에서 젓가락이 내려왔다.
한 달 뒤, 남궁세가의 혼례 밤에 가주가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쓰러질 것이다. 신부는 그 밤 해를 입을 것이고, 남궁세가는 그 일로 맹을 등질 것이다. 스무 해 뒤 남궁세가가 정마대전에 오지 않은 까닭은 이 밤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담우야.”
“응?”
“남궁 소가주가 어디 묵는지 아나?”
“알지. 왜? 너 거기 가서 축의금이라도 내게? 너 돈 없잖아.”
위서는 소매 안에서 흑돌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모서리 이가 빠진 자리가 등잔불을 받아 반짝였다. 놓으려던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