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5,131자) · 유단 · 12월 22일 동지

돌아가지 않기로 한 밤

돌아가지 않기로 한 밤 · 서지오

만석상회 셔터는 반쯤 내려와 있었다. 유단은 허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석유 난로 하나가 타고 있었고, 한쪽 벽에 섬 사람들에게서 사들인 쌀가마가 천장까지 쌓여 있었다. 지만석은 계산대에 앉아 돋보기를 쓰고 장부를 넘기고 있었다. 대리점 도장은 계산대 위, 그의 손이 닿는 자리에 놓여 있었다. 점퍼 안주머니에서 꺼내 놓은 모양이었다.

“쌀 사러 왔으면 헛걸음이오, 안 파오.”

“안 사러 왔습니다.”

지만석이 돋보기 너머로 유단을 봤다. 유단은 쌀가마 더미를 올려다봤다. 가마마다 집 이름이 먹으로 적혀 있었다. 곽 씨네, 윤 씨네, 김 할머니네. 두 배 값에 사들인 쌀이 그 집 이름을 단 채로 여기 쌓여 있었다.

“계장님, 이 쌀은 왜 사셨습니까? 팔지도 않으실 거면서요.”

“부엌 마당 쌀독을 비우려고 샀소. 틀린 셈이었소. 쌀이 없으니 고구마를 찌더군. 고구마가 없으면 멸치 대가리로 국을 끓이겠지. 여옥이는 아홉 해 전에도 그랬소. 솥은 엎어도 사람은 안 굶겼소.”

지만석이 장부를 덮었다.

“항해사, 나는 이 섬을 서른 해 먹였소. 배가 안 오는 겨울에 외상으로 쌀을 대고, 멸치 값이 떨어지면 내가 손해를 봤소. 그걸 누가 아오? 다들 외상 장부만 기억하지. 부엌 마당 솥은 두 달 만에 넷이 됐는데, 내 가게는 서른 해가 돼도 아무도 고맙다고 안 하오.”

“아홉 해 전 추석 앞날도 계장님이 먹이신 날입니까?”

지만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난로 위 주전자가 끓어 뚜껑이 달그락거렸다. 그는 일어나서 주전자를 내려놓고, 도장을 집어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내 쌀은 안 싣소. 도장도 안 찍소. 그게 내 셈이오.”

“계장님, 무명도가 정식 기항지가 되면 만석호는 어떻게 됩니까?”

“반은 놀지. 선원 넷 가운데 둘은 내보내야 하오. 그 넷이 새벽마다 평상에서 뭘 먹었는지 나도 오늘 알았소.”

지만석이 쌀가마 더미를 올려다봤다. 가마 맨 위에 곽 씨네라고 적힌 가마가 있었다. 여옥의 집 쌀이었다. 여옥은 쌀을 판 적이 없었는데, 은지가 할머니 몰래 들고 와서 두 배 값을 받아 갔다고 했다. 할머니 솥에 불을 넣을 장작을 사려고 했다고. 지만석은 그 얘기를 하면서 처음으로 돋보기를 벗었다. 벗은 돋보기를 손에 쥔 채 한참 가만히 있었다.

유단은 고개를 숙이고 셔터 밑으로 나왔다. 나오면서 알았다. 이 사람은 지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이기는 방법을 하나밖에 몰랐다.

*

진은 배 주방 풍로 앞에 서 있었다. 선장이 문틀에 기대 있었다.

“선장님, 저는 내일 안 탑니다.”

“알고 있어요. 그 빈 종이가 진 씨 거예요.”

진이 선반을 봤다. 쌀 여섯 가마, 밀가루 두 포, 된장 독 하나, 김치 통 둘, 진포에서 받은 쌀 한 자루, 황 기관장이 빌려준 풍로, 솥 셋. 그리고 이 나간 대접이 포개지지 않고 혼자 서 있었다.

“이 배는 1월에 팔린다고 하셨습니다.”

“고철상이 주방 짐까지 통째로 가져가지요.”

“그럼 내리겠습니다. 무명도에 내린 짐으로요. 받은 쌀은 재고표에 칸이 없다고 하셨지요. 칸이 없는 쌀이면 내려도 아무도 모릅니다.”

선장이 불 안 붙인 담배를 입에서 뺐다. 그러고는 소리 내서 웃었다. 십사 년 동안 진이 들은 선장 웃음 가운데 제일 컸다.

“진 씨, 그 솥 셋 무쇠만 해도 백 킬로는 나가요.”

밤 열 시, 동진 3호 주방이 부두로 내려갔다. 황 기관장이 기관실 체인 블록으로 솥을 달아 내렸고, 박과 윤이 쌀가마를 받았다. 소하가 부두 창고 저울 앞에 서서 하나씩 달았다. 된장 독이 저울에 올라가자 구수하고 짠 냄새가 창고 안에 퍼졌다. 마지막으로 진이 솥 하나를 제 손으로 안고 내려왔다. 배에서 십사 년 동안 아홉을 폈던 솥이었다. 솥 안에는 이 나간 대접이 들어 있었다. 사다리를 한 칸씩 내려올 때마다 대접이 솥 안에서 굴러 무쇠에 부딪혔고, 그 소리가 맑게 울렸다. 부두에 발이 닿자 진은 솥을 내려놓지 않고 한참 안고 서 있었다. 무쇠는 차가운데 솥 바닥 한가운데만 아직 저녁 불기가 남아 미지근했다. 그 미지근한 자리가 배를 가슴에 안은 것 같았다. 소하가 저울 눈금을 읽었다.

“육백오십 킬로요. 서른 톤 오십 킬로.”

부두에 선 사람들이 서로 얼굴을 봤다. 누가 먼저 소리를 지를지 몰라서 다들 가만히 있었다. 은지가 두 번 세고 나서 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부두가 터졌다.

*

소하가 무선전화 수화기를 들었을 때는 밤 열한 시였다. 발전기가 꺼지기 직전이었다. 동진해운 본사 야간 당직실을 불렀는데, 수화기를 받은 건 권오섭이 아니라 공태만이었다. 연말 결산 때문에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유단이 수화기를 받았다.

“부장님, 무명도 서른 톤 오십 킬로입니다. 대리점이 확인 도장을 안 찍습니다.”

수화기 너머가 한참 조용했다. 지직거리는 소리만 났다.

“되면 남긴다고 했소. 됐으면 남기오. 나는 숫자로 말한 사람이오.”

공태만이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회사 절차에 도장을 안 찍는 대리점은 대리점이 아니오. 지금 이 시각부로 무명도 대리점 계약을 해지하고, 동진해운 무명도 출장소를 두겠소. 거기 회사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찍으시오. 항해사, 거기 우리 회사 사람이 누가 있소?”

유단은 수화기를 쥔 채로 소하를 봤다. 소하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접니다.”

“새 배 일항사 자리는 이제 없소. 출장소 봉급은 일항사의 반이오. 면허 정지 석 달도 그대로 가오.”

“압니다.”

“그럼 찍으시오. 도장은 알아서 파시오. 규정에 도장 모양은 없소.”

전화가 끊기고 섬의 발전기가 꺼졌다. 섬이 까매졌다. 부두 끝 동진 3호 선실에 불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오늘 밤 그 방은 비어 있었다.

석대호가 헛간에서 남포등을 켜고 삼나무 토막에 글자를 팠다. 동진해운 무명도 출장소. 한 번은 글자를 바로 파서 찍으면 거꾸로 나왔다. 석대근이 옆에서 그것도 모르느냐고 놀렸고, 석대호는 형은 밸브도 거꾸로 돌리지 않았느냐고 받았다. 두 번째 도장은 새벽 세 시에 나왔다.

*

소하가 남포등을 들고 부두까지 유단을 배웅했다. 배웅이라고 하기엔 이상했다. 유단은 배로 가지 않았다. 둘은 부두 끝에 서서 동진 3호를 봤다. 선실 창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는데, 그 방 주인이 부두에 서 있었다.

“불 끄러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늘은 켜 두겠습니다. 선장님이 보시라고요. 빈방이라는 거.”

“그건 이유 같네요.”

소하가 남포등을 들어 유단의 얼굴을 비췄다. 유단은 눈이 부셔서 얼굴을 찡그렸고, 소하는 그 얼굴을 보고 웃었다.

“주무실 데는 있어요?”

“여옥 아주머니가 윗방을 치워 두셨답니다. 거절하면 내일 팥죽을 안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가셔야죠. 동지 팥죽은 안 먹으면 한 살을 못 먹어요.”

“그럼 저는 올해 서른넷에서 멈추는 겁니까?”

“항해사님은 여기 한 살 늦게 오셨으니까 딱 맞아요.”

유단은 그 셈이 맞는지 따져 보다가 그만뒀다. 섬에서는 셈이 늘 조금씩 안 맞았고, 안 맞는 채로 다들 잘 먹고 잘 잤다.

유단은 그 밤을 섬에서 잤다. 여옥의 집 윗방이었다. 한 해에서 제일 긴 밤이었는데, 그는 눕자마자 잠들었다. 배에서는 기관이 멈춘 밤에도 선체가 물에 밀리는 소리가 났다. 여기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온돌 바닥이 등을 밀어 올리는 온기와 아궁이에서 넘어오는 장작 냄새 속에서, 그는 무서워할 틈도 없이 잠들었다. 새벽에 문틈으로 쌀 씻는 소리가 들어왔을 때 눈을 떴다. 열이틀 동안 배에서 깰 때 들리던 건 계류줄이 삐걱이는 소리였다.

동짓날 새벽 다섯 시 반, 부두에서 주성택이 서류를 받았다. 하선 신청서 일곱 장. 선장 하경철의 서명, 그리고 삼나무 도장. 일곱째 장 이름 칸에는 진의 이름이 선장 글씨로 들어가 있었다. 주성택은 도장 자국을 손끝으로 쓸어 봤다. 나뭇결이 인주에 찍혀 나와 있었다.

“규정에 도장 모양은 없습니다.”

그가 서류 가방을 닫았다. 지만석은 부두 끝에 서 있다가, 그 말을 듣고 돌아서서 가게로 올라갔다. 소하는 따라가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가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부두에 서 있다가, 그 소리가 나자 가게 쪽으로 걸어갔다. 쫓아가는 걸음이 아니라 늘 가던 걸음이었다.

여섯 시 사십 분 물때가 다가왔다. 박이 갑판에 있었다. 그물 열두 장을 다 끝냈으니 이제 다음 끝낼 일을 찾으러 간다고 했다. 하선 신청서에 이름을 올려 두었으니, 다시 오면 이번에는 내리는 거지 도망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사다리를 걷기 전에 선장이 부두로 내려와 유단 앞에 섰다. 모자를 벗었다가 도로 썼다.

“열두 해 전엔 조타실에서 안 내려왔어. 여덟 해 전에도. 오늘은 내려왔으니 한마디만 하지. 자네 방 불, 내가 끄고 가네.”

“선장님이 끄시면 누가 켭니까?”

“새 배 사람이 켜겠지. 켜는 사람이 생기면 그 배도 여기 서.”

선장이 사다리를 올라갔다. 주방이 빈 배라 진포까지는 윤이 싸 준 찐빵 스무 개로 버티기로 했는데, 윤은 이번에는 스무 개가 다 익었다고 세 번이나 말했다. 황 기관장이 기관에 시동을 걸었고, 석대호가 부두 끝에서 그 소리를 듣더니 헤드 개스킷이 멀쩡하다고 중얼거렸다. 계류줄이 풀리고 동진 3호가 부두를 밀고 나갔다. 선장이 조타실 창을 열고 불 안 붙인 담배를 흔들었다. 유단은 부두에서 손을 들었다. 두 달 전 조타실에서 섬을 보던 그가, 이번에는 부두에서 배를 봤다.

*

동짓날 저녁, 부엌 마당 다섯째 아궁이에 동진 3호의 솥이 걸렸다. 석대근이 굴뚝을 한 번 더 뚫었고, 진이 솥 밑을 돌에 맞게 앉혔다. 무쇠가 돌에 닿는 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첫 불에는 밥을 안 짓소.”

여옥의 말로는, 새 솥은 첫 불로 물을 끓이고, 이튿날 죽을 쑤고, 사흘째에 밥을 짓는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은 동지요. 죽부터 쑤오.”

팥이 끓으면서 붉은 김이 그물 차양에 걸렸다가 빠져나갔다. 은지가 새알심을 빚다가 그릇 수를 셌다. 백열둘이었다. 두 번 셌는데 두 번 다 백열둘이었다.

진은 다섯째 솥 앞에 앉아 국자를 들고 아홉을 잡았다. 그리고 손이 나가는 대로 두었다.

유단은 줄 끝에 섰다. 소하가 그 뒤에 섰다. 여옥이 국자를 들고 줄 끝을 봤다.

“항해사 양반, 이유는 찾았소?”

“찾았습니다.”

“말해 보시오.”

“내일 아침에도 이 줄에 서고 싶습니다.”

여옥이 대답 대신 국자를 솥에 깊이 넣었다. 다섯째 솥에서 김이 올라와 담을 넘어갔다. 아궁이는 다섯, 솥도 다섯이었다. 진은 벌써 여섯째 국자를 깎을 나무를 골라 두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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