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544자)

고지서가 계단 아래까지 늘어지다

소림사 세무 조사 · 여무겸

가정 32년 9월 10일 아침⁠, 하남 등봉현 관아의 호방에서 노은학은 주판을 세 번 털었다⁠. 세금과 호적을 맡는 호방은 해가 들지 않는 북향 방이라⁠, 아침에도 먹 냄새와 묵은 종이 냄새가 같이 났다⁠. 알을 털 때마다 딸깍 소리가 천장까지 올라갔고⁠, 옆자리 서리 둘은 고개를 더 숙였다⁠. 오늘 아침 소림에 갈 사람이 누구인지 셋 다 알고 있었다⁠.

“⁠노 서리⁠.⁠”

문간에서 지현이 불렀다⁠. 고을 하나를 다스리는 지현은 등봉에 온 지 두 해째였고⁠, 두 해 동안 소림이라는 말만 나오면 배를 쥐고 자리를 떴다⁠. 오늘은 배를 쥘 틈이 없었다⁠. 지현 뒤에 북경에서 온 사람이 있었다⁠.

호부 원외랑 갈문형⁠. 나라 살림을 맡는 호부에서 세금을 재촉하러 내려온 관원이었다⁠. 마흔 남짓에 눈썹이 짧고 손가락이 길었는데⁠, 인사도 없이 긴 손가락으로 탁자에 공문을 펼쳤다⁠. 붉은 호부 도장 아래 글이 석 줄이었다⁠.

「⁠칙령을 받들어 무림 문파의 전토에 세를 매긴다⁠. 마지막으로 낸 해부터 거슬러 거둔다⁠. 기한은 올해 섣달 그믐⁠.⁠」

“⁠사흘 전에 시킨 일은⁠.⁠” 갈문형이 물었다⁠.

“⁠찾았습니다⁠.⁠” 은학은 품에서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관아 창고 맨 밑 궤짝에서 쥐 오줌 자국과 함께 나온 문서였다⁠. “⁠소림사가 세금을 냈다는 마지막 증빙입니다⁠. 북송 정화 3년 가을 것입니다⁠.⁠”

“⁠몇 해 전이냐⁠?⁠”

은학은 주판을 당겼다⁠. 알이 위로 올라가고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지현이 침을 삼켰다⁠.

“⁠사백사십 년입니다⁠.⁠”

“⁠사십 년은 깎아 줘라⁠.⁠” 갈문형이 공문을 접었다⁠. “⁠황은이다⁠.⁠”

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은이 사십 년이면 넉넉하지요⁠.⁠”

은학은 주판을 내려놓지 않았다⁠. “⁠원외랑 나리⁠, 칙령 원문을 한 번 볼 수 있겠습니까⁠? 거슬러 거두라는 말이 원문에 어떻게 적혔는지 봐야 고지서 문구를 맞춥니다⁠.⁠”

“⁠서리가 칙령을 볼 일은 없다⁠.⁠” 갈문형은 짧게 끊었다⁠. “⁠세 해 전 가을⁠, 몽골의 알탄 칸이 북경 성 밖을 불태웠다⁠. 대동 변방 병사들은 올겨울에도 솜옷이 없다⁠. 남쪽 바닷가에는 왜구가 들끓어서 거기도 은이 든다⁠. 북쪽 오랑캐와 남쪽 왜구에 나라 은궤가 바닥났다⁠. 변방은 지금 춥다⁠.⁠”

“⁠알겠습니다⁠.⁠”

“⁠섣달 그믐까지 못 걷으면⁠, 맡은 서리의 목으로 갚는다⁠.⁠” 갈문형이 은학의 관모를 한 번 보았다⁠. “⁠걷으면 호부에 자리 하나 만들어 주마⁠. 향시에 세 번 떨어졌다며⁠?⁠”

옆자리 서리 둘이 동시에 기침을 했다⁠. 은학은 주판 알을 한 줄 가지런히 내렸다⁠.

“⁠세 번입니다⁠. 네 번째는 안 봤습니다⁠.⁠”

갈문형이 나가자 지현이 문을 닫고 은학 앞으로 의자를 끌어왔다⁠. 의자 다리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에 서리 둘이 또 기침을 했다⁠. 지현은 목소리를 낮췄다⁠.

“⁠노 서리⁠, 자네 혹시 무공 배운 적 있나⁠?⁠”

“⁠없습니다⁠. 주판은 배웠습니다⁠.⁠”

“⁠주판으로 곤봉을 막을 수 있나⁠?⁠”

“⁠알이 튀어서 안 됩니다⁠.⁠”

지현이 이마를 짚었다⁠. “⁠소림에 가서 세금 달라고 했다가 살아 돌아온 관원은 내가 들은 바로는 없네⁠. 애초에 달라고 간 사람이 없으니 당연하지만⁠. 자네 목이 날아가면 다음은 누구 목이겠나⁠?⁠”

“⁠지현 나리 목은 아닐 겁니다⁠. 공문에 맡은 서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렇지⁠.⁠” 지현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가⁠, 체면이 생각났는지 도로 어두워졌다⁠. “⁠그래도 몸조심하게⁠. 고지서는 몇 자나 되나⁠?⁠”

“⁠사백 년 치라 펼치면 스무 걸음쯤 됩니다⁠.⁠”

“⁠스무 걸음⁠.⁠” 지현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재다가 그만두었다⁠. “⁠소림 계단이 백 몇 칸이라던데⁠, 모자라겠군⁠.⁠”

“⁠아래까지는 닿습니다⁠. 위까지 올라가는 건 제 발로 해야지요⁠.⁠”

*

등봉현에서 숭산 소실산 아래 소림사까지는 삼십 리 길이었다⁠. 은학은 두루마리를 등에 메고 걸었다⁠. 사흘 밤을 새워 이은 종이라 둘둘 말아도 통이 수박만 했다⁠. 다른 서리들은 소림 무승이 맨손으로 바위를 깨고 손가락 하나로 사람을 세운다며 몸을 사렸다⁠. 은학이 아는 소림은 조금 달랐다⁠. 소림은 맨손으로 찾아온 관원을 치지 않는다⁠. 계율이 그랬다⁠. 은학은 이 계율을 책에서 배우지 않았다⁠.

산길 양옆에서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잎이 동전처럼 떨어져 관모 챙에 얹혔다⁠. 숭산이라는 글자를 새긴 돌 표지를 지나자 길가에 사람들이 줄지어 있었다⁠. 대부분 맨발이었고 손에 사발을 들었다⁠. 줄은 산문 쪽으로 가지 않고 담을 따라 뒤로 돌아갔다⁠. 담 너머에서 조죽 끓는 냄새가 넘어왔다⁠. 좁쌀이 퍼지는 냄새였다⁠. 은학은 냄새를 맡자마자 걸음이 느려졌다가⁠, 일부러 다시 빨라졌다⁠.

줄 중간에서 노인 하나가 은학의 관복을 보더니 사발을 가슴에 끌어안았다⁠. 등이 굽었고 한쪽 짚신 끈이 끊어져 새끼줄로 동여매 있었다⁠.

“⁠또 왔소⁠?⁠”

“⁠처음 뵙습니다⁠.⁠”

“⁠옷이 같소⁠. 봄에 우리 이장 따라왔던 사람도 그 남색 옷이었소⁠.⁠” 노인이 사발 쥔 손을 떨었다⁠. “⁠우리 갑에 빈 세금이 있다고⁠, 이장이 우리 소를 끌고 갔소⁠. 열한 해 키운 누렁이를⁠. 이제 내 밭은 내가 소 노릇을 하오⁠.⁠”

“⁠빈 세금은 누구 몫이었습니까⁠?⁠”

“⁠그걸 내가 어찌 아오⁠? 나는 내 몫을 냈소⁠.⁠”

“⁠장 영감님⁠, 그만하셔요⁠.⁠” 노인 뒤에 선 아낙이 노인의 소매를 당겼다⁠. 관원하고 말 섞지 말라는 손짓이었다⁠.

은학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걸었다⁠. 등 뒤에서 노인이 침 뱉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지 않고 장 영감과 누렁이를 입속으로 한 번 외웠다⁠. 빈 세금이 어디서 왔는지 은학은 짐작이 갔고⁠, 짐작이 맞으면 오늘 펼칠 종이가 더 무거워질 참이었다⁠.

산문 앞 돌 물확에 물이 고여 있었다⁠. 은학은 허리를 숙여 얼굴을 비춰 보았다⁠. 마른 몸에 단정히 틀어 묶은 상투⁠, 상투 위에 검은 관모⁠. 가는 눈⁠, 남색 관복⁠, 허리에 매단 주판⁠. 물 위로 은행잎 하나가 떨어져 관모 자리에 동그랗게 퍼졌다⁠. 은학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고 관모를 바로 썼다⁠.

“⁠좋다⁠. 관원처럼 보인다⁠.⁠”

물확 옆에서 빗자루질하던 사미승 하나가 은학을 보더니 빗자루를 든 채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위에서 종이 한 번 울렸다⁠.

*

산문은 붉은 기둥에 검은 현판이었다⁠. 「⁠少林寺⁠」 석 자 아래로 돌계단이 길게 내려왔다⁠. 은학은 계단 맨 아래 칸에 두루마리 끝을 대고⁠, 두 손으로 위쪽 막대를 쥐고 펼쳤다⁠. 종이가 사르륵 풀리며 계단 아래 바닥까지 늘어졌다⁠. 맨 위에 붓으로 큼직하게 쓴 글자가 햇빛을 받았다⁠.

「⁠사백 년 체납 세금 고지서⁠」

계단 위에 늙은 승려 하나가 나와 있었다⁠. 흰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왔고⁠, 붉은 가사와 노란 가사를 겹쳐 둘렀고⁠, 목에 굵은 염주를 걸었다⁠. 염주 알 하나가 은학의 주먹만 했다⁠. 양옆에 곤봉을 든 무승 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림 방장 혜공 대사⁠. 일흔이라는 나이를 은학은 관아 문서로 알았고⁠, 문서보다 훨씬 전에 공양간 뒷마당에서 얼굴로 알았다⁠.

“⁠등봉현 관아 호방 서리 노은학이 고지 절차를 시작하겠습니다⁠.⁠” 은학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고지 절차 하나⁠, 납세 대상의 확인⁠. 이곳이 숭산 소실산 아래 소림사가 맞습니까⁠?⁠”

“⁠이곳이 어디인가⁠?⁠” 혜공이 되물었다⁠.

“⁠소림사입니다⁠. 현판에 그렇게 쓰여 있습니다⁠.⁠”

“⁠현판이 절인가⁠, 절이 현판인가⁠?⁠”

은학은 주판 알 하나를 올렸다⁠. “⁠확인된 것으로 하겠습니다⁠. 고지 절차 둘⁠, 체납 내역의 낭독⁠. 북송 정화 3년부터 올해까지⁠, 사십 년을 황은으로 깎아 사백 년⁠. 소림사 전토에 대한 가을 세금과 여름 세금 체납입니다⁠.⁠”

“⁠세금은 어디서 오는가⁠?⁠”

“⁠땅에서 옵니다⁠. 땅이 곡식을 내면 곡식의 일부가 나라로 갑니다⁠.⁠”

“⁠그 땅은 누구의 것인가⁠?⁠”

“⁠관아 기록으로는 소림사 것입니다⁠.⁠”

“⁠부처님의 것이다⁠.⁠” 혜공이 염주를 한 알 굴렸다⁠. “⁠부처님 땅에서 세금을 걷는 법은 없네⁠.⁠”

은학은 품에서 붓을 꺼냈다⁠. “⁠그러시면 고지서 받는 분을 고쳐 쓰겠습니다⁠. 성함이 석가모니 맞으십니까⁠? 사시는 곳은 서천으로 적겠습니다⁠.⁠”

곤봉을 든 무승 하나가 웃음을 참느라 어깨가 들썩였다⁠. 혜공은 웃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담 너머를 가리켰다⁠. 죽 냄새가 바람을 타고 계단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저 뒷마당에서 날마다 삼천이 죽을 먹네⁠. 메뚜기 떼가 지나간 마을에서 오고⁠, 이장이 소를 팔아 간 집에서 오고⁠, 아비가 변방에 끌려간 집에서 오지⁠. 자네가 들고 온 종이를 내가 받으면⁠, 내일 아침 솥 하나가 식는다⁠. 다음 달에는 솥 둘이 식겠지⁠.⁠”

“⁠압니다⁠.⁠”

“⁠아는가⁠?⁠”

“⁠솥이 몇 개인지도 압니다⁠. 여섯입니다⁠.⁠”

혜공의 흰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열여섯 살 겨울⁠, 은학은 아홉 살 동생 손을 잡고 저 담 뒤에서 솥을 세었다⁠. 줄이 길어 발가락이 얼었고⁠, 셀 것이 솥밖에 없었다⁠. 여섯 번째 솥 앞에서 받은 죽은 바닥까지 좁쌀이 가라앉아 있었는데⁠, 동생이 먼저 먹고 은학은 사발 가장자리에 붙은 것만 혀로 훑었다⁠. 은학은 고지서 위쪽 막대를 고쳐 쥐었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막대가 미끄러웠다⁠.

“⁠대사님⁠, 소림이 안 낸 세금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등봉현이 해마다 나라에 바칠 몫은 정해져 있어서⁠, 누군가 안 내면 그 몫이 다른 집으로 갑니다⁠. 백십 호를 한 이(⁠里⁠)로 묶고 이장이 돌아가며 걷는데⁠, 빈 몫은 이장이 메웁니다⁠. 이장은 소를 팝니다⁠. 소를 판 집 아이들이 저 줄에 섭니다⁠.⁠”

“⁠그러니 솥을 식히겠다⁠?⁠”

“⁠그러니 고지서를 드리겠다는 겁니다⁠. 고지 절차 셋⁠, 수령 확인⁠. 받으셨다는 수결을 여기 해 주십시오⁠.⁠”

은학이 붓을 내밀었다⁠. 혜공은 붓을 보지 않고 은학의 관모를 보았다⁠. 은행잎 한 장이 아직 챙에 얹혀 있었다⁠.

“⁠세금을 받으려면 위로 올라오게⁠.⁠”

“⁠올라가겠습니다⁠.⁠”

“⁠올라오려면 나한진을 지나야 하네⁠.⁠”

혜공이 염주를 한 번 크게 굴렸다⁠. 산문 안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한 사람의 발소리처럼 들렸는데⁠, 계단 위로 나온 것은 열여덟이었다⁠.

*

나한진은 부처의 제자 열여덟 나한의 자리를 본떠 무승 열여덟이 짜는 진이었다⁠. 소림 사람들은 산문 앞에서 진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오늘 일은 끝났다고들 했다⁠. 무승들은 회색 승복에 다리를 흰 천으로 감았고⁠, 모두 곤봉을 세워 들었다⁠. 맨 앞의 덩치 큰 무승이 곤봉 끝으로 돌계단을 한 번 쳤다⁠. 돌에서 흰 가루가 일었다⁠.

“⁠나한당 수좌 원진이오⁠.⁠” 덩치가 말했다⁠. “⁠막을 뿐 치지 않소⁠.⁠”

“⁠치지 않으시면 지나가겠습니다⁠.⁠”

“⁠지나가는 것은 발인가⁠, 마음인가⁠?⁠”

“⁠지금은 발입니다⁠. 마음은 아까부터 위에 가 있습니다⁠.⁠”

원진이 곤봉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열여덟이 한꺼번에 계단을 내려왔다⁠. 발소리가 계단 돌마다 맞아 떨어졌고⁠, 은행잎이 발밑에서 바스러졌다⁠. 은학은 고지서를 다시 말지 않았다⁠. 바닥까지 늘어진 종이 위로 무승들이 한 줄씩 내려와 멈췄다⁠. 종이를 밟지 않으려고 발을 들었다 놓는 무승도 있었다⁠.

은학은 진의 맨 끝줄을 보았다⁠. 거기만 승복이 아니었다⁠. 무릎까지 오는 무명 저고리에 공양간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는 깎지 않고 뒤로 질끈 묶었다⁠. 곤봉 대신 죽 젓는 나무 주걱을 들었다⁠. 주걱 끝에 좁쌀 몇 알이 아직 붙어 있었다⁠.

소림에는 머리를 깎지 않고 무공을 배우는 속가제자가 몇 있었다⁠. 속가제자 하나가 공양간에서 날마다 솥 여섯을 젓는다는 것을⁠, 은학은 관아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형⁠.⁠”

노은결이 주걱을 쥔 채 말했다⁠. 스물둘이었고⁠, 어깨가 은학보다 한 뼘 넓었다⁠.

“⁠돌아가⁠.⁠”

은학은 고지서 막대를 놓지 않았다⁠. 은결이 한 발 내려오자 진 전체가 한 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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