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5,144자) · 하윤 · 팔월 열여드레

네 빚만 갚아라

내가 벤 놈의 고통이 전부 나한테 온다 · 한도윤

나흘째 아침, 형문 서쪽 산길 중턱에서 오른 손목 안쪽이 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쐐기풀에 쓸린 것처럼 가렵다가, 한 식경쯤 지나자 누가 달군 쇠젓가락을 살 속에 눕혀 놓은 것처럼 뜨거워졌다. 하윤은 걸음을 멈추고 소매를 걷었다. 살은 멀쩡했다. 붉지도 붓지도 않았고, 핏줄 두 가닥이 늘 그렇듯 푸르게 비쳤다. 갈칠이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뜻이고, 그의 아픔이 강을 건너 산을 올라 여기까지 온 셈이다.

하윤은 손목을 쥐었다가 놓았다. 쥐어도 안 줄고 놓아도 안 늘었다. 스물넷째 자리는 그렇게 몸에 들어앉았다.

무영문 산문은 기와가 반쯤 내려앉아 있었다. 문루 처마 끝에 풀이 자랐고, 연무장 박석 틈마다 질경이가 올라와 발에 밟혔다. 열두 해 전에는 제자 열둘이 이 마당에서 새벽마다 칼을 뽑았다고 들었다. 지금 마당에는 막내 소달이 혼자 짚단 앞에 서 있었다.

“사형! 오셨습니까?”

소달이 목검을 내던지고 뛰어왔다. 열넷인데 키는 하윤 어깨까지 왔고, 목소리는 아직 반쯤 아이였다.

“몇 번째입니까?”

“스물넷.”

“또요? 이번엔 누굽니까? 셌습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하윤은 대답 대신 손목을 보여 줬다. 소달이 그 손목을 한참 들여다보고 코를 대 냄새까지 맡더니, 아무것도 없다고 실망한 얼굴을 했다.

부엌 쪽에서 셋째 사형 장우가 나왔다. 서른넷이고,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약초는?”

“강에 세 뿌리 빠졌습니다.”

“세 뿌리.”

장우가 손가락 셋을 펴 보였다.

“천마 세 뿌리면 쌀 한 되다. 네가 한 되를 강에 먹였다. 강이 배부르겠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저녁에 네 밥을 한 숟가락 덜어라. 내가 먹겠다.”

장우는 늘 이런 식이었다. 불평을 하나 하고, 그 불평을 스스로 수습하고, 일은 다 했다. 문파에 남은 넷 가운데 부엌과 장작과 빨래가 다 장우 손에서 돌았다. 장우 몸에는 서른하나가 아프다.

소달은 하윤을 연무장 짚단 앞으로 끌고 갔다. 짚단은 굵은 볏짚을 사람 허리만 하게 묶어 말뚝에 세운 것인데, 윗부분이 이미 여러 번 잘려 나가 머리가 없는 허수아비 같았다.

“보십시오. 석 달째 이럽니다.”

소달이 칼을 뽑아 평사로 그었다. 짚단 윗머리가 한 줌 잘려 땅에 떨어졌다. 소달이 다시 그었고, 또 한 줌이 떨어졌다.

“자르지 말고 지나가라고 하시는데 자꾸 잘립니다.”

“손목을 반 치 풀어라.”

“풀었습니다.”

“날이 짚에 닿는 순간에 풀어야 한다. 닿기 전에 풀면 칼이 안 들어가고, 닿고 나서 풀면 늦는다.”

하윤이 소달의 칼을 받아 쥐고 천천히 그었다. 날이 짚단 가운데를 지나갔고, 짚단은 그대로 서 있었다. 소달이 달려가 짚을 헤집어 봤다. 한 올도 안 끊어져 있었다. 소달이 입을 벌린 채 하윤을 돌아봤다.

“이러면 짚단도 사흘 앓습니까?”

“짚단은 안 앓는다. 사람만 앓는다.”

“그럼 왜 짚으로 배웁니까?”

하윤은 그 물음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자신도 일곱 해 전 같은 것을 물었고, 스승은 대답 대신 짚단을 하나 더 세워 줬다.

“사형, 저는 언제 벱니까?”

소달의 눈이 반짝였다. 하윤은 칼을 돌려주다가 그 손을 잠깐 멈췄다. 일곱 해 전 하윤이 똑같이 물었을 때 스승은 곧 벤다고 했다.

“안 베면 좋겠다.”

“배웠는데요?”

“배운 걸 안 쓰는 법은 아직 아무도 안 가르쳐 줬다.”

소달은 그 말을 농담으로 들었는지 웃으며 짚단 머리를 또 한 줌 잘라 떨어뜨렸다.

*

스승 곽문도는 서쪽 방에 있었다. 창을 반쯤 열어 놓고 붓으로 무엇을 적고 있다가, 하윤이 들어서자 붓을 벼루에 걸쳤다. 예순셋이고, 머리는 희었으나 허리는 곧았다.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는데 그 손이 쉬지 않고 가늘게 떨렸다. 떨리는 손목에 삼베가 감겨 있었다.

하윤은 나루에서 있었던 일을 차례대로 말했다. 도겸, 여만복, 갈칠, 통보전장, 마종곤, 은 한 냥과 마비산, 그리고 갈칠의 사흘 일이 추심이라는 것까지. 스승은 끝까지 한 마디도 끼지 않았다. 마종곤의 이름이 나왔을 때 떨리던 손이 한 번 멎었을 뿐이다.

“여만복의 배는 왜 저었느냐?”

“사형이 안 할 것 같아서요.”

“도겸의 빚이다.”

“예.”

“그런데 네가 했다.”

“예.”

스승이 창밖을 봤다. 연무장에서 소달이 다시 짚단을 치는 소리가 났다.

“하윤아. 네 빚만 갚아라.”

“사형은 서른 자리가 넘게 아프답니다.”

“그러니까 더 손대지 마라. 남의 빚에 손대면 그 사람 셈이 틀린다. 도겸은 제가 벤 것을 제가 세어야 한다. 네가 대신 갚아 주면 도겸은 또 벤다. 안 아프니까.”

“마비산을 먹으면 어차피 안 아픕니다.”

스승이 하윤을 봤다. 그 눈을 하윤은 오래 마주하지 못했다.

“통보전장 일에는 끼지 마라. 그것도 명이다.”

“마종곤은 제 손으로 한 번도 안 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도 안 아프다. 아픈 건 도겸이 지고, 앓는 건 여만복이 지고, 은은 마종곤이 먹는다. 그 셈은 네가 끼어든다고 안 바뀐다.”

“마종곤이 스승님을 압니다. 손이 떨리느냐고 물었습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벼루에 걸친 붓에서 먹 한 방울이 떨어져 종이에 번졌다. 스승은 그 번진 자리를 한참 보다가 일어섰다.

“목검을 가져와라.”

*

연무장 한가운데서 스승은 목검을 왼손에 쥐었다. 떨리는 오른손은 뒷짐을 졌다. 소달이 짚단 뒤로 숨었고, 장우가 부엌 문턱에 앉아 콩을 까면서 구경했다.

“나를 한 번이라도 치면 통보전장 일은 네 마음대로 해라.”

하윤은 목검을 오른손에 쥐었다. 손목 안쪽이 쥘 때마다 화끈거렸다. 스승은 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칼끝을 하윤의 눈높이에 두었는데, 왼손잡이 자세가 어색한 데 없이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하윤이 먼저 나갔다. 무영검법 둘째 초식 역린(逆鱗)은 아래에서 위로 비늘을 거슬러 올려 벤다. 상대가 칼을 내리면 그 칼 안쪽으로 파고들어 겨드랑이를 노린다. 스승은 칼을 내리지 않았다. 반 보 비켜서며 목검 등으로 하윤의 칼을 옆으로 쓸었고, 쓸린 힘이 하윤의 몸을 한 바퀴 반쯤 돌려 놓았다. 돌아서는 동안 스승의 목검 끝이 하윤의 오른 손목 안쪽을 정확히 두드렸다.

하윤은 목검을 떨어뜨렸다. 갈칠의 자리였다. 거기를 맞으니 팔꿈치까지 불이 뛰었다. 스승의 왼손은 한 번도 떨리지 않았다. 떨리는 오른손으로는 이제 붓만 쥐었는데, 칼을 언제부터 왼손으로 바꿔 쥐었는지 하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시.”

두 번째는 셋째 초식 낙엽이었다. 칼을 위에서 흔들며 떨어뜨려 어디를 벨지 모르게 하는 수다. 스승은 떨어지는 칼을 보지도 않고 하윤의 앞발 무릎을 발바닥으로 밀었다. 하윤은 엉덩방아를 찧었고, 스승의 목검이 또 손목 안쪽에 와 닿았다. 이번엔 두드리지 않고 그냥 얹었다.

“네가 벤 자리는 네 약점이다. 벤 만큼 약해진다. 도겸은 서른 군데가 약하다. 마비산을 먹으면 그걸 모르고 싸운다. 모르고 싸우는 사람은 오래 못 간다.”

부엌 문턱에서 장우가 콩깍지를 던지며 말했다.

“스승님, 한 번만 져 주시면 안 됩니까? 저 녀석 밥 한 숟가락 덜기로 했는데 이러다 두 숟가락 덜게 생겼습니다.”

스승은 목검을 장우 쪽으로 던졌다. 장우가 콩 바구니를 안은 채 몸을 비틀어 피했고, 목검은 부엌 문기둥에 맞고 떨어졌다. 소달이 짚단 뒤에서 킥킥거리다가 스승과 눈이 마주쳐 입을 막았다.

*

해 질 녘에 산문 아래서 누가 소리를 질렀다. 장우가 내려갔다가 사내 하나를 데리고 올라왔다. 갈칠이었다. 오른 손목을 연신 돌려 보이며 웃고 있었다.

“이제 하나도 안 아파. 신기하네. 네가 아프지?”

하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갈칠이 품에서 봉투를 꺼내 장우에게 건넸다. 통보전장의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장우가 소리 내어 읽었다. 노가촌 윗마을 여섯 집의 빚이 합해서 은 서른 냥이다. 갈칠이 사흘 동안 받아 오기로 한 은이다. 하윤이 그 사흘 일을 하지 않으면, 달이 바뀌기 전에 도겸이 윗마을에 올라가 여섯 집을 차례로 벤다.

하윤이 갈칠에게 물었다.

“윗마을 여섯 집은 왜 은이 없습니까?”

갈칠이 그런 걸 왜 묻느냐는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그러다 산길을 올라오느라 목이 말랐는지 장우가 떠 준 물을 단숨에 비우고 나서 대답했다.

“물이 없으니까. 사내들이 아침에 반나절씩 아랫마을 우물에서 물을 지고 올라가. 그러고 나면 밭 맬 사람이 없지. 밭을 못 매니 곡식이 덜 나고, 곡식이 덜 나니 세량 낼 은이 없고, 은이 없으니 우리한테 꾸고. 나는 그걸 받으러 가는 거고.”

“그건 받아도 또 없습니다.”

“그러니까 또 꿔 주지. 우리 주인은 그게 좋은 거래. 한 번 꾼 집은 안 떨어진다고.”

갈칠이 빈 사발을 장우에게 돌려주며 덧붙였다.

“물맛 좋네. 이 산은 물이 있어서 좋겠다.”

장우가 봉투를 접었다.

“서른 냥이면 우리 쌀독을 열 번 채운다.”

“쌀독은 누가 채웁니까?”

하윤이 물었다. 도겸이 골목에서 물은 것이 그제야 생각났다. 장우가 대답하지 않고 갈칠을 산문 밖으로 밀어냈다.

“내려가. 우리 막내가 너 정강이 맞은 얘기 듣고 싶어 한다. 한 번 더 맞기 전에 가라.”

저녁상은 조밥에 장국이었다. 장우가 하윤의 사발에서 조밥 한 숟가락을 떠서 자기 사발에 옮겼고, 그러고 나서 한참 생각하더니 반을 도로 돌려줬다. 부엌 구석에 쌀독이 있었다. 장우가 뚜껑을 열어 보여 줬는데, 쌀이 독의 절반 조금 아래까지 차 있었다.

“이게 겨울까지 간다. 딱 거기까지.”

“누가 채웁니까?”

“달마다 사시에서 배꾼이 쌀 두 말하고 은 두어 냥을 올려 보낸다. 누가 보내는지는 묻지 말라 하셨다.”

“스승님이요?”

“스승님이.”

장우가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서른하나가 아픈 손이었다. 손마디가 굵었고, 엄지 밑에 칼 쥐는 굳은살이 아니라 도끼 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하윤아, 나는 참는 게 셋째로 많은 사람이다. 첫째는 스승님, 둘째는 일곱째. 너는 아직 한참 멀었다. 그러니 궁금한 것도 좀 참아라.”

그날 밤 하윤은 손목이 뜨거워 잠을 못 잤다. 삼경쯤 문이 열리더니 스승이 들어왔다. 등잔도 없이 들어와 하윤 곁에 앉았고, 우물물에 적신 삼베를 꺼내 하윤의 손목에 감았다. 오른손이 떨려서 매듭을 두 번 놓쳤다. 세 번째에 매듭이 지어졌고, 찬 물기가 살에 스며들자 불이 조금 가라앉았다.

스승은 일어서면서 한 마디를 했다.

“노가촌 윗마을은 물이 없다. 사내들이 반나절씩 물을 지고 오르내린다.”

문이 닫혔다. 하윤은 손목의 삼베를 만져 봤다. 스승 손목에 감긴 것과 같은 삼베였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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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곱줄2026.04.28· 2화

    같은 출발점에서 나온 다른 작품도 읽고 왔는데 완전히 달라서 신기했어요.

    • 한도윤작가2026.04.29

      같은 출발점이라도 붙잡는 자리가 다르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두 작품을 같이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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