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325자)

장판 위의 패드

경로당 게임단 코치 · 류시안

“⁠2023년 8월 14일입니다⁠.⁠”

강현의 목소리가 경기장 천장에 부딪혀 돌아왔다⁠. 대형 화면 세 개가 강현의 손바닥 위 종이를 비추었다⁠. 두 조각으로 찢어진 종이였다⁠. 레드혼 의무실 양식⁠, 날짜⁠, 부위⁠, 수신인⁠.

“⁠레드혼 팀 주치의가 감독님께 보낸 소견서입니다⁠. 왼쪽 손목 인대가 끊어지고 있으니 바로 수술하고 석 달 쉬라고요⁠. 결승은 두 달 뒤였습니다⁠. 저는 이 종이를 지난달에 처음 봤습니다⁠.⁠”

객석이 술렁였다⁠. 술렁임이 칠천 석을 한 바퀴 돌았다⁠. 레드혼 실버 코치석의 남궁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모은 채였다⁠.

“⁠감독님은 이 종이를 저한테 안 보여 주셨습니다⁠.⁠” 강현은 숨을 골랐다⁠. 마이크를 쥔 오른손이 떨렸다⁠. 왼손 위의 종이가 같이 떨렸다⁠. “⁠그리고 저는 두 달 동안 아프다고 안 했습니다⁠. 밤마다 얼음찜질을 했고⁠, 아침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았습니다⁠. 감독님은 쉬라는 말을 안 하셨고⁠, 저는 아프다는 말을 안 했습니다⁠. 그래서 반지를 얻었고⁠, 손목을 내줬습니다⁠.⁠”

강현은 고개를 돌려 레드혼 실버 부스를 보았다⁠. 총알 영감의 반깁스 위에 우체통 넥타이가 감겨 있었다⁠. 다른 선수들의 손목에도 살색 보호대가 하나씩 있었다⁠. 커튼 틈의 프로 선수 둘이 자기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건너편 부스 어르신들 손목 한 번씩만 봐 주세요⁠. 저 뒤에서 저녁 경기 준비하는 선수들 손목도요⁠. 아프다고 말하게 해 주세요⁠. 쉬라고 말해 주세요⁠.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저는 지금 선수였을 거예요⁠.⁠”

강현은 마이크를 내렸다⁠. 소견서 두 조각을 다시 겹쳐 조끼 주머니에 넣었다⁠. 박수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 객석이 한참 조용했다⁠. 맨 처음 손뼉을 친 사람은 시상대 옆의 분옥이었다⁠. 손목에 파스를 붙인 손으로 천천히⁠, 두 번 쳤다⁠. 점례가 따라 쳤다⁠. 춘봉이⁠, 진배가⁠, 화투 담요 응원단이⁠, 주무관이 쳤다⁠. 박수가 객석 뒤쪽 프로 팬들에게까지 번졌다⁠.

남궁석이 코치석에서 일어났다⁠. 무대 가운데로 걸어 나오지 않았다⁠. 코치석 앞에 그대로 선 채로⁠, 강현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오래 숙였다⁠. 금테 안경이 콧등에서 미끄러졌다⁠. 남궁석은 안경을 고쳐 쓰지 않고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무대 뒤로 걸어 나갔다⁠. 회색 양복의 등이 커튼 너머로 사라졌다⁠.

*

점례가 사회자의 손에서 마이크를 빼앗았다⁠. 사회자는 빼앗기는 줄도 모르고 빼앗겼다⁠.

“⁠상금 얘기도 해야지⁠. 천만 원⁠. 우리 넷이 정했어⁠. 언니가 오백 가져가⁠.⁠”

“⁠점례야⁠, 나 레드혼 사람이야⁠.⁠”

“⁠아직 오늘이잖아⁠. 오늘은 우리가 이겼어⁠.⁠”

분옥이 점례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두 손으로 쥐었다⁠. 객석이 다시 조용해졌다⁠.

“⁠레드혼 계약서에 이런 게 있었어⁠. 계약금을 돌려주면 계약을 끝낼 수 있대⁠. 내가 사십 분 동안 다 읽었어⁠.⁠” 분옥이 레드혼 실버 부스의 홍보팀장을 보았다⁠. “⁠월요일에 돌려줄게⁠. 오백⁠.⁠”

홍보팀장이 무대 아래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분옥은 마이크를 점례에게 돌려주었다⁠. 점례가 마이크에 대고 크게 말했다⁠.

“⁠그럼 언니 오백은 청춘오락실 거에서 가져가는 거다⁠! 다들 들었지⁠!⁠”

객석이 웃었다⁠. 이번에는 다 같이 웃었다⁠.

*

분옥은 월요일 아침 은행에 가서 레드혼 실버의 계좌로 오백만 원을 보냈다⁠. 같은 날 오후⁠, 리그가 청춘오락실 통장에 상금을 넣었다⁠. 분옥은 오백을 받아 창구에서 바로 우람의 학교 계좌로 삼백사십을 보냈다⁠. 은행 창구 직원이 「⁠납부 완료⁠」가 찍힌 영수증을 건넸다⁠. 분옥은 영수증을 접지 않고 받아서⁠, 꽃무늬 조끼 안주머니에 반듯하게 넣었다⁠. 안주머니에 다른 종이는 없었다⁠.

나머지 백육십은 다음 학기 몫으로 두었다⁠. 우람은 할머니 집 냉장고에 붙어 있던 고지서 자리에 영수증 사본을 붙였다⁠. 사본 아래에 매직으로 한 줄을 썼다⁠. 「⁠다음 학기는 반은 제가 냅니다⁠. 과외 구했어요⁠. 밤 열 시 전에 끝나요⁠」

수요일⁠, 레드혼이 공식 입장을 냈다⁠. 경로당 텔레비전의 스포츠 뉴스가 소리 없이 자막을 흘렸다⁠.

「⁠레드혼⁠, 선수 하루 연습 상한 여섯 시간 도입 … 의무실 소견은 선수 본인에게 직접 통보 … 남궁석 단장 사임⁠」

화투판 할아버지들이 패를 쥔 채 화면을 올려다보았다⁠. 진배가 화면을 보다 한마디 했다⁠.

“⁠여섯 시간도 많아⁠. 화투도 여섯 시간 치면 허리 나가⁠.⁠”

같은 뉴스 아래쪽에 짧은 자막이 하나 더 지나갔다⁠. 「⁠모기업⁠, 레드혼 프로팀 내년 시즌 유지 결정 … 신임 감독 물색⁠」 강현은 자막을 끝까지 읽었다⁠. 열아홉 살짜리 셋을 포함한 스물이 연말에 짐을 싸지 않게 되었다⁠. 남궁석 하나만 짐을 쌌다⁠.

목요일에는 총알 영감이 경로당에 왔다⁠. 반깁스 위에 춘봉의 우체통 넥타이를 그대로 감고 있었다⁠. 넥타이를 돌려주러 왔다고 했는데⁠, 춘봉이 받지 않았다⁠.

“⁠레드혼 실버는 그대로 간대⁠. 하루 네 시간으로⁠. 새 단장은 회사에서 내려온 젊은 양반이야⁠. 숫자를 안 불러⁠. 등받이도 안 쳐⁠.⁠” 총알 영감이 진배가 내민 귤을 받아 들었다⁠. “⁠심심해⁠, 그게⁠.⁠”

“⁠남궁 감독님은요⁠?⁠” 강현이 물었다⁠.

“⁠월요일에 짐 싸셨어⁠. 책상에서 딱 두 개 가져가시더라⁠. 파스 상자 하나랑⁠, 벽에 붙은 액자 하나⁠. 코치 선생 젊을 때 사진⁠.⁠” 총알 영감이 귤껍질을 반으로 갈랐다⁠. “⁠가시면서 나한테 그러셨어⁠. 아프면 아프다고 하라고⁠. 그 말을 그 양반이 하니까 이상하더라⁠.⁠”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총알 영감은 귤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반깁스 낀 손으로 패드를 한 번 들어 보다가 내려놓았다⁠.

“⁠다음 시즌에 봐⁠. 그땐 나도 기다리는 거 배워 올게⁠.⁠”

*

구청 주무관이 금요일 오후에 들러 강현에게 서류를 건넸다⁠. 「⁠시니어 디지털 일자리 사업 계약 연장 — 2028년 12월까지⁠」 주무관은 서류를 건네고 디지털카메라를 들었다⁠.

“⁠코치님⁠, 단체 사진 한 장만요⁠. 보고서에 들어가요⁠.⁠”

“⁠주무관님⁠, 사진 백 장은 찍으셨어요⁠.⁠”

“⁠이번엔 웃는 걸로요⁠. 지난번 건 다 우셔서요⁠.⁠”

금요일 밤⁠, 강현세탁에서 어머니가 노란 코치 조끼를 다렸다⁠. 결승 날 땀에 젖고 무대 바닥에 끌려 구겨진 조끼였다⁠. 스팀다리미가 쉭쉭 김을 뿜었다⁠. 어머니는 조끼 주머니를 뒤집었다⁠. 지퍼백 하나가 나왔다⁠. 안에서 반지가 굴렀다⁠.

“⁠이거 금고에 도로 넣어 줘⁠?⁠”

“⁠아니요⁠. 들고 다닐게요⁠. 줄 데가 있어요⁠.⁠”

“⁠누구⁠?⁠”

“⁠아직 안 정했어요⁠.⁠”

어머니는 지퍼백을 한참 보다가 다린 조끼 주머니에 도로 넣어 주었다⁠. 주머니 단추까지 채웠다⁠. 다리미를 조끼 등판에 대며⁠, 아들을 보지 않고 말했다⁠.

“⁠말로 했더라⁠. 텔레비전에서⁠.⁠”

“⁠네⁠.⁠”

“⁠말로 하니까 되지⁠?⁠”

강현은 웃었다⁠. 웃으며 왼손 손목을 한 번 돌려 보았다⁠. 오늘은 저리지 않았다⁠.

*

단톡방에 알림이 떴다⁠. 경로당 거실에 있던 휴대전화들이 한꺼번에 울렸다⁠.

「⁠육점례 님이 엄분옥 님을 초대했습니다⁠.⁠」

방 이름이 「⁠청춘오락실 (⁠6⁠)⁠」으로 돌아왔다⁠. 분옥이 첫 메시지를 올렸다⁠. 엄지 하나로 오래 눌러 쓴 글이었다⁠.

「⁠돌아왔다⁠. 김장은 다음 주 토요일⁠. 배추 서른 포기⁠」

점례가 바로 답했다⁠. 「⁠언니 ㅋㅋㅋ 돌아오자마자 김장 공지⁠?⁠? 배추 마흔 포기로 해 내가 손녀 것도 해야 돼⁠」 춘봉이 이어 썼다⁠. 「⁠배달 왔습니다⁠. 고무장갑 다섯 켤레⁠」 진배가 썼다⁠. 「⁠김장 날 화투 없음⁠. 회장⁠」 우람이 썼다⁠. 「⁠저도 가요⁠! 무 썰게요⁠」 강현은 휴대전화를 들고 한참 화면을 보다가 짧게 썼다⁠. 「⁠저도요⁠」

*

일주일 뒤 토요일 오전⁠, 경로당 현관 유리문이 열렸다⁠. 김장 날 아침이라 거실 한구석에 김장 대야가 쌓여 있었다⁠. 신발장 앞에 남자 하나가 멈춰 있었다⁠. 갈색 등산 점퍼에 금테 안경⁠, 손에 떡 상자를 들었다⁠. 빨간 배지도 회색 양복도 없었다⁠.

남궁석은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았다⁠. 거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창 아래 밥상과 모니터⁠, 화투 담요⁠, 벽의 빈 에어컨 모금함⁠, 김장 대야⁠. 마지막으로 창 아래에서 패드를 쥔 강현을 보았다⁠.

“⁠여기⁠, 예순다섯 넘으면 받아 줍니까⁠?⁠”

거실이 조용해졌다⁠. 점례가 휴대전화 두 대를 동시에 들었다⁠. 춘봉은 돋보기를 꺼냈다⁠. 분옥은 패드를 무릎에 내려놓고 남궁석의 손을 보았다⁠. 떡 상자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얬다⁠.

진배가 화투 담요 앞에서 일어났다⁠.

“⁠받아 주긴 하는데⁠, 화투부터 배워야 돼⁠. 숫자만 세는 사람은 우리 경로당에서 못 버텨⁠.⁠”

“⁠배우겠습니다⁠.⁠”

“⁠광 파는 법도⁠.⁠”

“⁠그것도요⁠.⁠”

남궁석이 떡 상자를 진배에게 건넸다⁠. 진배가 뚜껑을 열었다⁠. 꿀떡이었다⁠. 첫날 남궁석이 두고 갔던 것과 같은 떡집의 꿀떡이었다⁠. 진배는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강현을 보았다⁠. 정하는 건 코치라는 얼굴이었다⁠.

강현은 밥상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패드 하나를 집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분옥이 손잡이에 다시 감아 둔 꽃무늬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하루 한 시간이에요⁠.⁠”

남궁석이 강현을 내려다보았다⁠.

“⁠한 시간이면 손이 안 는다⁠.⁠”

“⁠안 늘어도 돼요⁠.⁠”

“⁠안 늘면 못 이긴다⁠.⁠”

“⁠그럼 먼저 가 계시면 돼요⁠.⁠”

남궁석이 한참 말이 없었다⁠. 숫자를 말하던 입이 다물려 있었다⁠. 남궁석은 밥상 앞으로 걸어와 장판에 무릎을 꿇었다⁠. 예순여섯의 무릎이 장판 위에서 뚝 소리를 냈다⁠. 분옥이 방석을 하나 밀어 주었다⁠. 남궁석은 방석 위에 앉았다⁠.

강현은 조끼 주머니에서 지퍼백을 꺼냈다⁠. 반지를 꺼내 손바닥 위에 한 번 굴렸다⁠. 옆면의 글씨가 햇빛을 받았다⁠. 태산⁠. 강현은 일어나 벽의 에어컨 모금함 앞으로 걸어갔다⁠. 모금함 투입구에 반지를 밀어 넣었다⁠. 반지가 빈 저금통 바닥에 떨어지며 맑은 소리를 냈다⁠. 진배가 떡을 씹다 멈췄다⁠.

“⁠그거 금이야⁠?⁠”

“⁠도금이요⁠. 그래도 사는 사람은 있대요⁠.⁠”

“⁠내년 여름 에어컨 수리비 됐다⁠.⁠” 진배가 모금함에 붙은 종이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내년 여름까지 손대지 말 것 · 회장⁠」

남궁석은 모금함을 보지 않았다⁠. 무릎 위의 패드만 보고 있었다⁠.

*

강현은 남궁석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른손을 내밀어 패드 쥐는 손 모양을 보였다⁠. 엄지 둘은 막대 위에⁠, 검지 둘은 위쪽 단추에⁠, 나머지 손가락은 손잡이를 감싸게⁠. 남궁석이 따라 했다⁠. 손가락이 마르고 길었다⁠. 네 해 전 의자 등받이를 치던 손이었고⁠, 파스를 반만 벗겨 안쪽부터 붙이던 손이었다⁠. 패드를 쥐자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엄지가 막대 위에서 떨렸다⁠.

“⁠힘 빼세요⁠, 감독님⁠.⁠”

강현은 왼손을 뻗어 남궁석의 손등 위에 얹었다⁠. 검은 보호대가 남궁석의 손목에 닿았다⁠. 강현의 손목 안쪽이 찌릿했다⁠. 강현은 손을 떼지 않았다⁠.

“⁠쥐는 게 아니라 얹는 거예요⁠.⁠”

창으로 들어온 낮 햇빛이 장판 위에 길게 누웠다⁠. 햇빛이 끝나는 자리에 화투 담요가 깔려 있었고⁠, 담요 위에는 김장 대야가 엎어져 있었다⁠. 분옥이 꽃무늬 조끼 단추를 하나 풀고 남궁석의 패드를 넘겨다보았다⁠. 점례의 휴대전화 두 대가 위와 옆에서 두 손을 찍었다⁠. 남궁석의 엄지가 막대 위에서 한 번 더 떨리다가⁠, 강현의 손바닥 밑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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