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11,577자)
남은 하루를 살아가는 일
쇼펜하우어의 삶 · 네오
1860년 8월, 일흔두 살의 쇼펜하우어는 프랑크푸르트의 서재에서 책 한 권의 머리말을 썼다. 열아홉 해 전에 낸 『윤리학의 두 근본 문제』의 둘째 판이었다.[주 40-01] 그 책에는 현상 논문 두 편이 묶여 있었다. 현상 논문은 학술원이 물음을 내걸고 답을 공모해 상을 주는 글이다. 한 편은 의지의 자유를 다룬 글로, 노르웨이 학술원에서 상을 받았다. 다른 한 편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였다. 남의 고통이 어떻게 내 행동의 까닭이 되는지를 따진 글이었고, 1840년 덴마크 왕립 학술원은 그 글에 상을 주지 않았다.
머리말 첫머리에서 그는 둘째 판에 덧붙인 글이 적지 않다고 밝히고, 이렇게 썼다.
“덧붙인 것은 더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둘째 판을 살아서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고, 그래서 그동안 여기에 들어갈 생각들을 떠오르는 대로, 할 수 있는 곳에 그때그때 내려놓아야 했다.”[주 40-02]
살아서 볼지 몰랐던 책을 그는 살아서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줄부터 머리말은 다른 데로 갔다. 덴마크 학술원이 그 논문을 내치고 공개적으로 꾸짖은 일을 두고, 그는 스무 해가 지나 가장 차분하게 생각해 본 끝에 덧붙일 말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학술원 사람들에게, 다음에 현상 물음을 내걸 때는 귀리와 쭉정이를 가릴 만큼의 판단력을 먼저 마련하라고 썼다. 그들이 떠받든 철학자들의 이름이 이미 기울고 있다고 했고, 끝에는 괴테의 시 한 편을 학술원의 방명록에 바친다며 옮겨 적었다.[주 40-03] 스무 해 묵은 판정 한 장이 일흔두 살 노인의 펜끝에서 아직 타고 있었다. 머리말 끝에는 「프랑크푸르트, 1860년 8월」이라고 적었다.
*
9월 9일 아침, 폐렴이 그를 덮쳤다. 유언 집행인으로 정해 둔 법률가 빌헬름 그비너가 불려 왔다. 그비너가 뒤에 적은 바로는, 그는 이것이 자기 죽음이라고 곧바로 말했다. 그러나 고비가 지나자 며칠 만에 침대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을 만큼 기운을 되찾았고, 몸이 약해진 것을 느끼면서도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주 40-04]
9월 18일, 아침에 일어나자 다시 발작이 왔다. 그날 저녁 그비너는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는 소파에 앉아 심장이 이따금 두근거린다고 했지만, 목소리에는 평소의 힘이 그대로 있었다. 무릎에는 영국 작가 디즈레일리가 문인들의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책이 펼쳐져 있었다. 이야기는 정치와 새 책으로 흘렀다. 날이 저물자 가정부가 촛불을 켰다. 그비너가 본 그의 눈은 맑았고, 거기에는 병도 늙음도 보이지 않았다.[주 40-04]
그비너는 그를 북돋우려 했다. 그 나이에도 이토록 정정하니 더 오래 살기를 바라도 된다고 했다. 일흔 살이 넘어 덧붙인 원고도 마흔 해 전에 쓴 글만큼 싱싱하다고 했다.
그는 지금 죽는다면 딱한 일일 것이라고 말했다. 『소품과 부록』에 아직 덧붙여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했다. 일흔 살 초반이 늙음에서 가장 위험한 고비이고, 그 고비만 넘기면 다음 열 해는 수월하리라고도 했다. 그비너는 그가 예전에는 적들 때문에 오래 살아야 한다고 믿었지만, 이제는 사방에서, 먼 대륙에서까지 오는 따뜻한 인정을 쬐려고 기꺼이 살고 싶어 했다고 적었다.[주 40-04]
그의 몸이 곧 벌레에게 먹히리라는 생각은 끔찍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다만 자기 정신이 대학의 철학 교수들 손에서 어떻게 주물러질지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비너가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그는 진지하게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은 자기에게 오직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안타깝게도 그런 전망을 열어 주지 않는다. 어떻게 되든, 자기는 적어도 앎에 대해서만은 깨끗한 양심을 지녔다.[주 40-05]
두 사람은 같은 저녁을 다르게 보았다. 그비너는 한 사람이 더 살기를 바랐고, 그 바람에는 근거가 있었다. 그의 눈은 맑았고 그의 문장은 싱싱했다. 쇼펜하우어는 더 살고 싶어 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좋은 일이라 불렀고, 그 두 말을 하나로 묶지 않았다. 더 쓰고 싶었고, 더 인정받고 싶었고, 끝나기를 바랐다. 그날 저녁 그 셋은 같은 소파 위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비너가 적은 그 저녁의 그는 그가 본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 며칠 사이 그는 멀리서 온 편지 몇 통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오스트리아의 한 사관학교 생도 두 사람이 이름을 숨기고 보낸 것이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그들이 정해 준 비밀 주소로 답장을 보내, 그들이 품은 망설임 하나하나에 길게 답해 주었다.[주 40-05]
9월 20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가슴에 심한 경련이 일어 그는 바닥에 쓰러졌고 이마를 다쳤다. 낮 동안은 다시 괜찮았고, 밤도 무사히 지났다.
9월 21일 금요일 아침, 그는 여느 날처럼 일어나 찬물로 몸을 씻고 아침 식탁에 앉았다. 가정부가 아침 공기를 들이려고 창을 열었다가 방을 나갔다. 몇 분 뒤 그의 의사가 들어와, 소파 모서리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숨이 멎어 있는 그를 보았다. 얼굴은 일그러지지 않았고, 몸부림친 흔적도 없었다.[주 40-06] 그가 그 아침 마지막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록에 없다.
*
그가 남긴 것은 유언장과 그 보충서에 적혀 있었다. 1859년 2월의 보충서에서 그는 하녀 마르가레테 슈네프에게 남긴 평생 연금을 세 배로 올렸다. 까닭은 한 줄이었다.
“그녀의 길고 충실한 봉사를 생각하여.”[주 40-07]
그는 그녀가 첫 연금을 받는 날까지 날마다 먹을 값을 주라고 했고, 상복 한 벌 지을 돈 스무 굴덴을 곧바로 주라고 적었다. 자기 개는 먼저 그녀에게, 그다음에는 그비너에게, 그다음에는 상회 점원 킬처에게 맡기라고 했고, 그들이 다 마다하면 이렇게 하라고 적었다.
“내 기억을 존중하고 내 개를 데려가려는 어느 명예로운 사람에게.”[주 40-07]
그리고 그 보충서의 한 줄에서 그는 증조부의 상아 흉상과 함께 어머니의 파스텔 초상을 프랑크푸르트의 화가 룬테쉬츠에게 남겼다.[주 40-07] 그는 어머니와 화해하지 못한 채 어머니를 먼저 보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얼굴을 그린 그림을 죽을 때까지 지니고 있었다. 그 그림을 누구에게 맡길지는 정해 두었지만, 그 그림을 두고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한 줄도 적지 않았다.
그는 9월 23일 묘지의 영안실에 조용히 안치되었고, 26일 프랑크푸르트 중앙묘지에 묻혔다. 개신교 목사가 먼저 말하고 그비너가 이어서 말했다. 그비너는 그 자리에 핏줄로 그에게 이어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산 것처럼 홀로 죽었다.”[주 40-08]
*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도 내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도 삶은 받아들일 수 있다. 받아들이는 일은 해결하는 일이 아니다. 해결되지 않은 것까지 내 삶으로 셈하는 일이다.
아홉 해 전, 그는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의 마지막 장에서 늙음을 이렇게 정리해 두었다.
“넓게 보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삶의 처음 마흔 해는 본문을 내놓고, 그다음 서른 해는 그 본문에 주석을 단다. 그 주석이 비로소 본문의 참뜻과 앞뒤 연결을, 거기 담긴 교훈과 섬세한 대목들까지 제대로 알아보게 해 준다.”[주 40-09]
그리고 같은 장에서 그는 삶의 끝을 가면무도회가 끝날 무렵에 빗댄다. 가면을 벗으면 그동안 만난 사람들이 실제로 누구였는지 보인다. 성격은 드러났고, 행동은 열매를 맺었고, 이룬 일은 마땅한 값을 받았다. 그런 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이어서 쓴다.
“가장 이상한 것은, 사람이 자기 자신조차, 자기의 목표와 지향조차, 특히 세상과 남들에 대한 자기의 관계조차 삶이 끝나 갈 무렵에야 비로소 제대로 알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때 자기에게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낮은 자리를 매겨야 할 때가 많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때로는 더 높은 자리를 매기게 된다.”[주 40-09]
더 높은 자리를 매기게 되는 까닭도 그는 적어 두었다. 세상이 얼마나 낮은지 몰라서 목표를 세상보다 높게 잡았던 사람은, 끝에 가서야 자기 목표가 높았다는 것을 알아본다. 그리고 그는 그 이야기를, 사람은 살아가는 길에 지나가듯 자기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는 짧은 말로 맺는다. 일부러 찾아서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다가 알게 된다.[주 40-09] 그는 이 말을 쓸 때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서른 해 넘게 거의 읽히지 않은 책의 저자는 끝에 가서 자기에게 더 높은 자리를 매겼다. 그러나 그 높은 자리를 확인해 줄 사람으로 그는 끝까지 남들을 필요로 했다.
열네 살의 그는 아버지의 사무실에서, 가족의 기대를 따르면 자기 삶이 어디에 남느냐고 물었다. 일흔두 살의 그에게 그 물음은 주석이 붙은 본문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원한 상인이 되지 않았고, 아버지가 남긴 재산으로 평생 생각하며 살았다. 무덤 돌에는 그의 이름과 아버지에게서 받은 성만 남았다. 기대를 거절한 삶도 그 기대가 마련한 것 위에 서 있었다는 것을, 그는 끝에 가서 숨기지 않았다.
열여섯 살의 그는 툴롱의 감옥에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을 보고, 편안한 사람이 남의 고통까지 생각해야 하느냐는 물음을 안고 돌아왔다. 그 물음에 그가 답한 것이 덴마크 학술원이 내친 바로 그 논문이었다. 그는 거기서, 남의 아픔과 안녕이 내 아픔과 안녕처럼 곧바로 내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고, 그럴 때에만 행동이 도덕적인 값을 가진다고 썼다. 그것이 매일 볼 수 있는 연민이라는 현상이며, 정의와 인간애가 거기서 나온다고 했다.[주 40-10] 일흔두 살의 그는 그 논문의 둘째 판 머리말에서 학술원을 조롱했다. 같은 해 그는 생면부지의 생도 두 사람에게 길게 답장을 썼다. 그 한 해 전에는 오래 곁에 둔 하녀의 연금을 세 배로 올려 두었다.
그의 삶에는 세 줄기가 있었다. 자기에게 맞는 삶을 고르는 일, 남의 평가에서 거리를 두는 일,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첫째 줄기를 그는 끝까지 지켰다. 둘째 줄기에서 그는 끝까지 실패했다. 셋째 줄기에서 그는 글로는 가장 멀리 갔고, 삶으로는 몇 사람의 곁까지만 갔다. 둘째 줄기에서 그가 얼마나 멀리 실패했는지는 마지막 저녁의 한마디가 보여 준다. 자기 몸이 벌레에게 먹히는 것보다 자기 생각이 남의 손에서 주물러지는 것이 더 무섭다고 그는 말했다. 자기 몸이 썩는 일은 담담히 말할 수 있던 사람이, 남의 평가 앞에서는 끝까지 몸서리를 쳤다. 그는 셋을 다 해결하지 못했다. 마지막 저녁에 그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좋은 일이라 부르면서 더 살아 덧붙일 원고를 걱정했고, 그 둘을 화해시키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는 책에서 성자를 그렸지만,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고 쓴 적은 없었다. 그는 해결되지 않은 것을 지운 채 자기 삶을 셈하지 않았다. 그가 받아들인 것은 정돈된 삶이 아니라, 본문과 주석이 서로 어긋나는 채로 한 권인 삶이었다.
그는 출판권과 원고를 오랜 제자 프라우엔슈테트에게 남겼고, 그의 책은 그 뒤 그 손을 거쳐 전집으로 다시 나왔다.[주 40-11] 그의 책은 그가 죽은 뒤에도 거듭 새로 찍혔다. 그 책을 펼친 사람들 하나하나도 그처럼 남은 하루를 살았다. 아침에 찬물로 씻고, 창문을 열고, 해결하지 못한 물음 몇 개를 그대로 둔 채 식탁에 앉았다.
남은 하루를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물음의 답은 그의 책에 다 있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아침에 있었던 것은 찬물과 열린 창과 차려진 아침상이었다.
후주
[주 40-01] 『윤리학의 두 근본 문제』(Die beiden Grundprobleme der Ethik)는 1841년에 처음 나왔고, 둘째 판은 1860년에 나왔다.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생애 연표 1860년 항목(ub.uni-frankfurt.de/archive/schopenhauer_vita.html),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39~1841년 항목(schopenhauer.de/zeittafel). 의지의 자유를 다룬 논문이 노르웨이 학술원에서 상을 받고, 도덕의 기초를 다룬 논문이 1840년 덴마크 왕립 학술원에서 상을 받지 못한 것은 같은 연표들과 생애 연표(1839~1841)에 따랐다. 현상 논문의 풀이는 서술자의 말이다.
[주 40-02] 쇼펜하우어, 『윤리학의 두 근본 문제』 「둘째 판 머리말」(Vorrede zur zweiten Auflage).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 전집 제4권, 인쇄 XXXIX쪽, PDF 223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원문은 Ueberdies würden sie noch zahlreicher seyn, wenn nicht die Ungewißheit, ob ich diese zweite Auflage erleben würde, mich in der Zwischenzeit genöthigt hätte, die hieher gehörigen Gedanken, successiv, wo ich es eben konnte, einstweilen niederzulegen 이다. 한국어 의역. 생각을 내려놓은 곳으로 그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제47장과 『소품과 부록』 제2권 제8장을 든다.
[주 40-03] 같은 머리말, 인쇄 XXXIX~XLII쪽, PDF 223~226쪽. 「스무 해가 지나 가장 차분하게 생각해 본 끝에」(nach zwanzigjähriger Zeit zur kühlsten Ueberlegung), 귀리와 쭉정이(Hafer von Spreu), 괴테의 시를 방명록(Album)에 바친 것, 그들이 떠받든 철학자들의 평판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OCR로 읽은 대목의 취지를 옮긴 것이다(재확인). 날짜 「Frankfurt a. M., im August 1860.」은 PDF 226쪽을 스캔으로 대조했다.
[주 40-04] 빌헬름 폰 그비너, 『가까이에서 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1922, 제9장 「그는 어떻게 끝났는가」, 195~198쪽(인터넷 아카이브 전사본 archive.org/details/arthurschopenhau00gwin). 9월 9일 아침의 폐렴과 「이것이 내 죽음」, 회복과 손님, 9월 18일의 발작과 그날 저녁의 마지막 만남, 소파와 두근거림, 디즈레일리의 『문학의 진기한 일들』(Curiosities of literature), 정치와 새 책 이야기, 촛불, 맑은 눈, 그비너의 북돋움, 「지금 죽는다면 딱한 일」(Es wäre doch erbärmlich, sagte er, wenn er jetzt sterben sollte)과 『소품과 부록』의 덧붙임, 일흔 살 초반의 고비, 적들 때문에 살던 그가 이제 인정을 쬐려고 산다는 것은 모두 그비너의 증언이며 간접 화법으로 취지를 옮겼다. 폐렴 날짜와 마지막 대화 날짜는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60년 항목(Am 9. September Ausbruch einer Lungenentzündung / 18. September letztes Gespräch mit Wilhelm Gwinner)과 같다. 디즈레일리를 「문단의 기이한 이야기를 모은 책」으로 푼 것은 서술자의 말이다.
[주 40-05] 같은 책 196·198~199쪽. 벌레와 철학 교수들(Dass seinen Leib nun bald die Würmer zernagen würden, sei ihm kein arger Gedanke: dagegen denke er mit Grauen daran, wie sein Geist unter den Händen der „Philosophieprofessoren“ zugerichtet werden würde), 마지막 말(es würde für ihn nur eine Wohltat sein, zum absoluten Nichts zu gelangen; aber der Tod eröffne leider keine Aussicht darauf. Allein, es gehe wie es wolle, er habe zum wenigsten ein reines intellektuelles Gewissen), 따뜻하고 부드러워진 모습, 오스트리아 사관학교 생도 두 사람의 익명 편지와 답장은 그비너의 증언이며 간접 화법으로 옮겼다. 그비너는 이 말을 「진지하게」(Ernsthaft) 했다고 적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비너가 들은 마지막 말이다.
[주 40-06] 같은 책 199~200쪽. 9월 20일의 경련과 이마의 상처, 21일 아침의 찬물 세수와 아침 식탁, 가정부가 창을 열고 나간 것, 몇 분 뒤 의사가 소파 모서리에 기대 앉은 그를 발견한 것(fand ihn tot, auf den Rücken gelehnt in der Ecke des Sofas sitzend),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은 것은 그비너의 서술이다. 「금요일 아침」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60년 항목(Freitag, den 21. September, morgens), 집에서 죽었다는 것은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연표 1860년 항목(stirbt am 21. September in seiner Wohnung). 「몇 분 뒤」는 그비너의 Einige Augenblicke später를 옮긴 것이다.
[주 40-07] 1859년 2월 4일 자 유언 보충서. 루트비히 셰만 편, 『쇼펜하우어 서한집』(라이프치히: 브로크하우스, 1893), 인쇄 554~555쪽, PDF 622~623쪽. 스캔으로 대조했다. 연금을 세 배로 올린 까닭(in Folge ihrer langen und treuen Dienste)과 개를 맡길 사람(irgend einem Ehrenmanne, der mein Andenken ehrt und meinen Hund zu sich nehmen will)은 한국어 의역이다. 날마다 먹을 값(täglich Ein Gulden Kostgeld)과 상복 값(sogleich zwanzig Gulden, zu einem Trauerkleide), 개를 맡길 순서(Schnepp, Gwinner, Kielzer, Commis bei de Neufville & Co), 화가 룬테쉬츠에게 남긴 증조부의 상아 흉상과 어머니의 파스텔 초상(die elfenbeinerne Büste meines Urgroßvaters und das Porträt meiner Mutter in Pastell)은 취지를 옮긴 것이다. 룬테쉬츠가 프랑크푸르트의 화가라는 것은 보충서의 hierselbst와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55년 항목(룬테쉬츠의 초상 연작)에 따랐다. 어머니와 화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생애 연표과 1838년 어머니의 죽음(쇼펜하우어 협회 연표 1838~1841년 항목)에 기댄 서술자의 정리다.
[주 40-08] 그비너 같은 책 200~201쪽. 9월 23일 묘지 영안실 안치, 26일 장례, 개신교 목사(Pfarrer Dr. Basse)에 이어 그비너가 추도사를 한 것은 그비너의 서술이며, 26일 장례와 중앙묘지는 쇼펜하우어 협회 연표와 프랑크푸르트 대학 도서관 연표 1860년 항목(Am 26. September wird er auf dem Frankfurter Hauptfriedhof beigesetzt)과 같다. 인용은 추도사의 Keiner steht hier, der ihm durch die innigen Bande des Bluts angehörte; einsam, wie er gelebt, ist er gestorben 의 뒤 절을 의역한 것이다.
[주 40-09] 쇼펜하우어, 『소품과 부록』 제1권 「인생의 지혜를 위한 아포리즘」 제6장 「인생의 여러 시기의 차이에 관하여」. 프로젝트 구텐베르크 47406번. 첫 인용은 Im weitern Sinne kann man auch sagen: die ersten vierzig Jahre unsers Lebens liefern den Text, die folgenden dreißig den Kommentar dazu, der uns den wahren Sinn und Zusammenhang des Textes, nebst der Moral und allen Feinheiten desselben, erst recht verstehn lehrt. 의 한국어 의역. 가면무도회 대목(Gegen das Ende des Lebens nun gar geht es wie gegen das Ende eines Maskenballs …)은 취지를 옮겼고, 둘째 인용은 같은 문단의 Das Seltsamste aber ist, daß man sogar sich selbst, sein eigenes Ziel und Zwecke, erst gegen das Ende des Lebens eigentlich erkennt und versteht, zumal in seinem Verhältnis zur Welt, zu den andern. Zwar oft, aber nicht immer, wird man dabei sich eine niedrigere Stelle anzuweisen haben, als man früher vermeint hatte; sondern bisweilen auch eine höhere 의 한국어 의역이다. 더 높은 자리의 까닭(welches dann daher kommt, daß man von der Niedrigkeit der Welt keine ausreichende Vorstellung gehabt hatte und demnach sein Ziel höher steckte als sie)과 맺음말(Man erfährt beiläufig, was an einem ist)은 취지를 옮긴 것이다. 『소품과 부록』은 1851년에 나왔다.
[주 40-10] 쇼펜하우어,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 §16. 1891년판 전집 제4권, 인쇄 205~211쪽 부근(PDF 431~437쪽). 남의 안녕과 아픔이 곧바로 내 의지의 동기가 되는 일, 그것이 매일 보는 연민의 현상이며 정의와 인간애가 거기서 나온다는 것은 이 절의 취지를 옮긴 것으로 직접 인용하지 않았고, 스캔 대조는 하지 않았다(재확인). 하녀를 「오래 곁에 둔」이라고 한 것은 보충서의 「길고 충실한 봉사」에 근거했다. 생도들에게 답장한 것과 하녀의 연금을 올린 것을 「같은 해」로 묶지 않고, 연금은 1859년 2월의 일로 두었다.
[주 40-11] 1852년 유언장 덧붙임(서한집 인쇄 551쪽, OCR)에서 그는 프라우엔슈테트에게 앞으로 낼 모든 판의 출판권(das Verlagsrecht zu allen ferneren Auflagen aller meiner Schriften)을, 유언장 VI항(인쇄 550쪽)에서 학문적 원고를 남겼다(재확인). 그의 책이 프라우엔슈테트의 편집으로 전집이 되어 다시 나왔다는 것은 이 소설이 쓰는 1891년 브로크하우스판 표제지(프라우엔슈테트 편 전집 「제2판」)에 따랐다.
사료에 근거한 것은 1860년 8월의 둘째 판 머리말, 9월 9일의 폐렴, 9월 18일 그비너와의 마지막 저녁(그비너의 증언), 9월 20일의 경련, 9월 21일 금요일 아침의 죽음(그비너의 증언과 두 연표), 23일 안치와 26일 장례, 그비너의 추도사, 1859년 보충서의 하녀 연금·상복 값·개·어머니의 초상, 프라우엔슈테트에게 남긴 출판권이다. 그비너가 전하는 말은 모두 간접 화법으로 옮겼고, 그 밖의 말을 그의 입에 넣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유언이나 임종의 말, 화해 장면은 쓰지 않았다. 마지막 아침의 찬물·창·식탁은 그비너의 서술이고, 그것을 「남은 하루」로 읽은 것은 서술자의 몫이다. 1851년의 『아포리즘』과 1841년의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는 그가 앞서 쓴 글로 비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