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6,140자)
종합 감정 — 처음의 여덟 글자를 다시 읽다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사월 마지막 일요일, 미연은 공책 두 권을 공부방 책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하나는 지난가을 산 아래 문구점에서 산 얇은 공책이었다. 표지 귀퉁이가 다 닳았고, 맨 뒷장은 근거 보임과 근거 안 보임 칸, 나중 목록, 내가 뛴 것 목록으로 빽빽했다. 다른 하나는 새 공책이었다. 서울로 올라가던 날 버스 정류장에서 승수가 건네준, 같은 문구점의 같은 얇은 공책이었다. 첫 장이 아직 비어 있었다.
“새 공책 첫 장에 뭘 쓸지 몰라서요.”
승수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무릎에 찜질팩을 얹었다. 공부방 창밖으로 할머니 밭이 보였다. 감자 고랑마다 연두색 싹이 줄지어 올라와 있었다.
“그럼 처음 공책 첫 장부터 다시 읽어 봐요.”
미연은 헌 공책을 펼쳤다. 첫 장에는 지난가을 둘째 날 거북바위에서 적은 문장이 있었다. 글씨가 지금보다 크고 삐뚤었다. 생년월일시 네 기둥, 위아래 두 글자씩 여덟 글자, 천간과 지지, 음양과 오행. 그 아래 한 줄. 글자를 음양오행으로 나눈 뒤, 그 사이의 생과 극을 읽는다.
“이거 쓸 때 다리가 아팠어요.”
“계단에서 우는 소리가 바위까지 들렸지요.”
“다리가 대화를 한 거라니까요.”
승수가 웃었다. 미연은 셋째 장을 넘겼다. 정자에서 비를 맞으며 적은 풀이 순서표 일곱 줄이 있었고, 그 맨 아래에 작은 글씨로 아는 것부터 읽기, 모르는 칸은 모른다고 적기. 그 옆에 아인슈타인의 명식이 끼워져 있었다. 포스트잇 자국이 아직 남아 있었다.
“오늘은 이걸로 제 거 다시 읽을게요. 처음부터 끝까지. 세부랑 운까지 다 넣어서.”
“좋아요. 나는 근거만 물을게요.”
“선생님은 반년 동안 근거만 물으셨어요.”
“그래서 무릎이 아파요. 계속 앉아서 묻기만 해서.”
*
甲 癸 壬 丁 申 酉 子 未
미연은 이 여덟 글자를 반년 넘게 보아 왔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처음 볼 때는 암호였고, 그다음엔 일간 하나였고, 그다음엔 화살표였다. 오늘은 그 모든 것이 한꺼번에 보였다.
“첫째 줄, 일간 壬. 큰 물. 둘째 줄, 월지 酉. 가을 한가운데, 쇠가 가장 단단한 달.”
“셋째 줄, 관계와 힘. 일지 子 안에 壬하고 癸. 연지 申 안에 壬. 제 자리에 뿌리가 깊어요. 子는 壬한테 제왕 자리, 제일 센 자리예요. 申은 장생, 처음 생겨나는 자리고요. 월간 癸는 같은 물이라 겁재, 제 편. 저를 낳아 주는 쇠는 申과 酉에 가득해요. 반대로 제 힘을 빼 가는 건 연간 甲, 식신. 제가 다스리는 건 시간 丁, 정재. 저를 누르는 건 未 안의 己, 정관. 돕는 쪽이 무거워요. 신강.”
“그건 겨울에 병원 대기실에서 한 말이랑 같네요.”
“네. 그때 맞게 한 건 그대로 둬요. 고칠 건 고치고요.”
“넷째 줄, 격국과 용신. 월지 酉의 주인 글자는 辛. 천간에 안 드러났으니 정인격. 신강하고 가을이라 차가워요. 억부로 봐도 조후로 봐도 시간의 丁을 가리켜요. 용신 丁, 희신 甲, 기신 癸. 이것도 그때랑 같아요.”
미연은 거기서 펜을 바꿨다. 파란 펜에서 빨간 펜으로. 그때는 비워 두었던 줄들이었다.
“다섯째 줄, 세부. 그때는 못 배워서 비워 뒀던 거예요.”
“첫째. 일간 壬과 시간 丁이 붙어서 丁壬합. 제 용신이 저랑 바로 붙어서 묶여 있어요. 정재와 손을 잡은 모양이에요. 그런데 이건 성격이 아니라 관계예요. 한결 사장님 앞에서 망신당하고 배웠어요.”
승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연지 申과 일지 子. 申子辰의 둘, 물로 모이는 반쪽짜리 합. 辰은 없어서 완성은 아니에요. 그래도 물 쪽으로 기울어요. 넘치는 표에 물이 더 모이는 쪽이에요.”
“셋째. 일지 子와 시지 未. 子未는 원진이고 해예요. 서로 미워하는 건 아닌데 자꾸 어긋나는 사이. 제 자리랑 제 용신이 앉은 기둥이 그렇게 붙어 있어요.”
미연은 그 줄을 쓰다가 잠깐 멈췄다. 정우의 아버지와 이장이 손잡았던 위조를 두고 합이 화목이 아니라고 배웠을 때, 미연은 처음으로 자기 표의 子未를 다시 보았었다. 그때는 그 두 글자가 무서웠다. 지금은 그냥 두 글자였다.
“넷째. 공망. 壬子일은 寅과 卯가 비어요. 제 표엔 寅도 卯도 없어요. 비어 있는 자리가 원국 안에는 없어요.”
“다섯째. 운성. 申은 장생, 酉는 목욕, 子는 제왕, 未는 양. 이름은 그냥 이름이에요. 목욕이라고 제가 씻기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요.”
승수가 처음으로 끼어들었다.
“씻기 좋아해요?”
“……네. 근데 그건 근거 아니에요.”
“알아요. 그냥 궁금했어요.”
미연은 웃음을 참고 여섯째 줄로 넘어갔다.
“여섯째 줄, 운. 지금 대운은 辛未. 열아홉 무렵부터 스물여덟 무렵까지. 辛은 정인, 쇠라서 물을 더 낳아요. 기신 쪽 힘을 보태는 글자예요. 그런데 未는 정관이고, 未 안에 丁이 들어 있어요. 제 용신이 땅속에 숨어서 와 있어요.”
“그다음은.”
“스물아홉 무렵부터 庚午. 庚은 편인, 또 쇠. 그런데 午는 정재, 불이에요. 용신 쪽 글자가 지지로 와요. 그리고 午는 제 일지 子랑 子午충이에요. 제 자리를 정면으로 흔드는 대운이에요.”
미연은 거기서 펜을 멈췄다. 이 줄은 처음 써 보는 줄이었다. 스물아홉이면 칠 년 뒤였다. 칠 년 뒤의 자기를 글자로 읽는 일은, 남의 미래를 읽는 것보다 이상하게 더 무서웠다.
“그리고 올해, 2027년은 丁未예요. 丁이 천간에 떠요. 제 용신이 하늘에 뜨는 해예요. 정재고, 제 일간이랑 丁壬합을 해요. 엄마도 똑같은 합을 하는 해라고 했어요.”
“좋아요. 일곱째 줄.”
미연은 새 공책을 펼쳤다. 첫 장이었다. 거기에 쓰기 시작했다. 반년 동안 남의 표로만 써 온 일곱째 줄을, 처음으로 자기한테.
다 쓰고 나서 미연은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가을 한가운데 태어난 큰 물이다. 쇠가 나를 낳아 주는 달에, 내 자리에 깊은 뿌리를 두고 태어났다. 그래서 넘치는 쪽이다. 넘치는 물은 흘려보낼 데가 있어야 한다. 내 표에서 그 길은 등불 丁이다. 내가 다스리는 것, 내가 붙잡고 있는 것, 그리고 나를 데우는 것. 그 등불은 내 바로 옆에 붙어 있다. 올해 그 등불이 하늘에도 뜬다. 칠 년 뒤에는 그 불이 내 자리를 정면으로 흔들러 온다. 무엇으로 올지는 모른다. 모르는 칸은 모른다고 적는다.”
미연은 거기서 멈추고 마지막 한 줄을 더 읽었다.
“그리고 이건 글자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나는 지난가을 이 산에 왔을 때 끈기의 사람이라고 자기소개서에 썼는데, 세 걸음 만에 멈췄다. 지금은 그 문장을 지웠다. 끈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근거를 찾을 때까지는 멈추지 않았다.”
승수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찜질팩이 식어 가는지 무릎 위에서 손으로 몇 번 눌렀다.
“근거는?”
“마지막 줄은 근거가 이 공책이에요.”
미연은 헌 공책을 들어 보였다. 두 쪽이 된 내가 뛴 것 목록, 근거 안 보임 셋, 줄이 그어진 나중 목록. 그리고 맨 마지막 장에 끼워 둔 노량진 학원 영수증 반쪽.
승수가 그 공책을 받아 들고 처음부터 넘겼다. 한 장씩, 오래. 미연은 그걸 지켜보며 처음으로 자기 공책이 남에게 읽히는 걸 견뎠다. 승수는 마지막 장까지 넘기고 공책을 덮었다.
“근거 보임.”
*
승수가 공책을 돌려주며 말했다.
“나도 할 말이 있어요. 오늘 미연 씨가 자기 거 다 읽으면 하려고 했어요.”
“뭔데요?”
“다음 주에 서울 가요. 그 어머니 만나러.”
미연은 공책을 쥔 채 굳었다.
“그 아이 어머니요?”
“지난주에 연락이 닿았어요. 회관 일이 지역 신문에 나고, 그 기사가 어떻게 그분한테까지 갔더라고요. 윤 기자가 이름은 안 썼는데, 내가 거기서 한 말이 그대로 실렸어요. 그분이 신문사로 전화를 했대요. 만나고 싶다고.”
“가지 마세요.”
미연은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승수가 미연을 보았다.
“그분이 선생님 만나서 뭘 하실지 몰라요. 소리를 지르실 수도 있고, 선생님을 고소하실 수도 있고. 십삼 년 동안 안 찾으셨는데 왜 지금 찾으시는지도 모르고요. 선생님 무릎도 이렇고요.”
“그분이 소리를 지르시면 들으면 돼요.”
“그래도.”
“미연 씨.” 승수가 찜질팩을 내려놓았다. “그건 미연 씨가 정할 일이 아니에요. 그리고 내가 정할 일도 아니에요. 만날지 말지는 그분이 정했어요. 나는 가기만 하면 돼요.”
미연은 입을 다물었다. 반년 전 거북바위에서 날짜를 달라고 했을 때 승수가 했던 말이었다. 미연 씨 일은 미연 씨 손에 있어야 한다고. 그 말이 이번에는 승수 자신에게로 돌아가 있었다.
“그럼 같이 가요. 운전은 선생님이 하시고, 저는 차에 있을게요. 안 들어가요. 그냥 차에.”
“왜요?”
“선생님 무릎으로 혼자 운전하고 오시면, 돌아오는 길에 아무도 옆에 없잖아요. 할머니 쓰러지신 날처럼.”
승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책상 서랍에서 자동차 열쇠를 꺼내 미연 앞에 내려놓았다. 열쇠고리에 칠이 벗겨진 작은 거북 모양 장식이 달려 있었다.
“면허 있어요?”
“있어요. 장롱 면허요.”
“그럼 내가 운전할게요.”
*
다음 주 토요일, 경기도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 앞 작은 공원이었다. 승수는 아침 일찍 계룡에서 차를 몰고 올라와 서울역 앞에서 미연을 태웠다. 미연은 승수의 낡은 승용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창문을 반쯤 내렸다. 공원 벤치까지는 오십 걸음쯤이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들리지 않는 거리에 차를 세워 달라고 미연이 부탁했다.
승수는 벤치 앞에 서 있었다. 앉으라는 손짓을 받고도 한참 서 있다가 앉았다. 벤치 반대쪽 끝에 예순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회색 카디건을 입었고, 무릎 위에 작은 종이 상자를 올려놓고 있었다.
미연은 그 둘을 오래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눈이 자꾸 갔다. 여자는 처음 십 분 동안 승수를 보지 않았다. 공원 놀이터만 보았다. 승수는 여자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멈추고, 다시 말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승수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가 말을 시작했다.
여자가 승수 쪽으로 몸을 돌린 건 삼십 분쯤 지나서였다. 무릎 위의 종이 상자를 벤치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승수가 그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열지는 않았다.
한 시간 뒤 승수가 차로 돌아왔다. 운전석에 앉아 한참 핸들을 잡고 있었다. 시동은 걸지 않았다. 미연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기로 출발 전에 정했다.
승수가 먼저 말했다.
“그분이 그러시더라고요. 선생님 말 때문에 보낸 거 아니라고. 자기가 보낸 거라고. 아이가 방문 잠그고 있는 게 무서워서, 내 말을 핑계로 삼았다고. 그런데 핑계를 준 사람도 밉다고. 십삼 년 동안 둘 다 미웠다고. 자기도, 나도.”
미연은 창밖의 공원 벤치를 보았다. 여자는 아직 앉아 있었다. 종이 상자는 다시 여자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 상자는요?”
“생일 케이크래요. 오늘이 그 아이 생일이에요. 나랑 만나는 날을 일부러 오늘로 잡았대요. 해마다 혼자 케이크를 사서 납골당에 갔는데, 올해는 그 전에 나한테 보여 주고 싶었대요. 그 아이가 서른두 살이 됐다고.”
승수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핸들을 쥔 손등 위로 무언가가 떨어졌다. 한 방울이었다. 승수는 그걸 닦지 않았다.
“생일을 알려 주셨어요. 사주 보라는 게 아니라. 생일 축하해 달라고.”
미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조수석 창문으로 사월의 바람이 들어왔다. 아파트 화단의 철쭉이 그 바람에 한꺼번에 흔들렸다.
승수가 시동을 걸었다. 공원 쪽을 한 번 더 보았다. 벤치의 여자가 일어서고 있었다. 종이 상자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여자는 차 쪽을 보지 않고 아파트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계룡으로 내려가는 고속도로에서 승수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미연은 그날 밤 할머니 집 건넌방에서 자고 다음 날 첫차로 올라가기로 했다. 미연도 말하지 않았다. 휴게소에 들렀을 때 미연은 편의점에서 작은 조각 케이크 하나를 샀다. 초는 하나만 달라고 했다. 차로 돌아와 승수에게 내밀었다.
“제가 근거 없는 거 하나 해도 돼요?”
승수가 케이크를 보았다. 그리고 미연을 보았다.
“그 아이 이름, 저 한 번 불러 봤잖아요. 산에서.”
승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연은 라이터를 빌려 초에 불을 붙였다. 휴게소 주차장의 바람에 불꽃이 휘청였다. 꺼지지 않았다. 심지는 그대로였다.
승수가 그 불을 오래 보다가 아주 작게 그 이름을 불렀다. 세 글자였다. 그리고 생일 축하한다고 했다. 십삼 년 만에, 처음으로.
미연은 그 불을 끄지 않았다. 승수가 끌 때까지 기다렸다. 승수가 숨을 내쉬자 불꽃이 한 번 크게 기울었다가 사라졌고, 가는 연기 한 줄이 휴게소 저녁 하늘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