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6,551자)

채우고 덜어 내기 — 내려가는 길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문자는 기차에서 내리기 전에 와 있었다.

미연은 대전역 플랫폼에서 한 번,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한 번 더 읽었다. 사실 확인 센터의 센터장이었다. 인턴 기간 수고가 많다는 인사가 맨 앞에 있었고, 주말 잘 쉬라는 말이 맨 끝에 있었다. 그 사이에 한 줄이 끼어 있었다. 하반기에 정규직 채용 공고가 나갈 예정이니 지원해 보라는 줄이었다.

붙여 주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미연은 그 차이를 한참 곱씹다가, 지난가을 같은 정류장에서 받았던 메일을 떠올렸다. 그때는 문 하나가 닫혔고, 오늘은 문 하나가 열릴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는 데서 미연은 생각을 멈추고 화면을 껐다. 정해지지 않은 걸 정해지지 않았다고 두는 일이, 이제는 조금 덜 무서웠다.

하지가 지나고 첫 토요일이었다. 감자 캐는 날이었다.

*

할머니 집 뒤 밭에는 아침부터 사람이 많았다. 정우가 쇠스랑으로 고랑을 뒤집으면 흙 속에서 감자가 줄줄이 딸려 나왔다. 동그란 것, 길쭉한 것, 쌍둥이처럼 둘이 붙은 것. 흙 묻은 껍질이 햇빛을 받아 연한 금빛으로 보였다. 비린 듯 달큰한 흙냄새가 밭 전체에서 올라왔다. 지난가을 미연이 무를 뽑다가 처음 맡았던 바로 그 냄새였다.

할머니는 해 뜨고 정확히 한 시간 뒤에 밭에 나왔다. 정우가 휴대전화 시계를 보여 주자 할머니는 그 화면을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알아. 냉장고에 붙어 있잖아.”

냉장고 문에는 이제 자석이 셋이었다. 의사 시간표, 미연이 고쳐 쓴 해 지기 전에 들어오기, 그리고 대전교도소 소인이 찍힌 봉투. 봉투가 열렸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할머니는 그 봉투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다만 봉투가 붙은 뒤로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그 자석을 손가락으로 한 번씩 눌렀다. 떨어질까 봐 그러는지, 다른 까닭이 있는지는 정우도 몰랐다.

한결은 밭둑에 접이식 탁자를 펴고 반찬통을 늘어놓았다. 일꾼 밥이라고 했다. 장조림, 멸치볶음, 무말랭이, 그리고 오늘 처음 내놓는 감자조림. 감자조림 통 옆에는 미연 엄마가 서 있었다. 엄마는 첫 기차를 타고 내려와 밭에 들어가기도 전에 감자조림 간부터 보았다.

“이거 누구 레시피야.”

“제 거예요. 처음으로.”

한결이 차렷 자세로 대답했다. 엄마가 한 조각을 집어 먹고 천천히 씹었다. 밭에서 감자를 줍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반년 사이 이 마을 사람들은 엄마가 무언가를 씹을 때 조용해지는 법을 배웠다.

“……레시피 팔아.”

한결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번에는 진짜로 앉아 버렸다. 엄마는 못 본 척 장조림 통으로 넘어갔다. 장조림은 아직이라고 했다.

수아는 할머니가 빌려준 고무장화를 신고 왔다. 사월에 돌려주러 왔다가 할머니가 다시 안겨 준 장화였다. 다음에 또 올 거니까 네가 갖고 있으라고. 수아는 대전의 청소년 진로센터에서 석 달째 일하고 있었다. 면접에서 퇴근 시간을 물었더니 계열사 면접관은 웃었고, 진로센터 면접관은 여섯 시라고 대답했다. 수아는 그 대답 하나로 골랐다고 했다.

“애들이 나보고 쌤은 왜 맨날 여섯 시 땡 하면 가냐고 물어.”

“뭐라고 해?”

“조명 끄러 간다고.”

수아가 감자를 바구니에 던져 넣으며 웃었다. 바구니가 금방 찼다.

오 형사도 왔다. 사복 차림에 무릎 보호대를 하고. 본청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다음 달부터 관할 경찰서의 피해자 지원 업무를 맡는다고 했다. 사건이 끝난 뒤에 남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라고. 승진은 아니었다.

“형사님 시간표대로 하신 거예요?”

“丁이 辛을 누르는 해라며. 그래서 칼 내려놨어요.”

“그건 형사님이 뛰신 거예요.”

“알아요. 알고 뛰었어요.”

오 형사가 웃으며 감자 바구니를 들어 올렸다. 무릎이 소리를 냈다. 평상에 앉아 있던 승수가 그 소리를 듣고 자기 오른쪽 무릎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승수는 아침부터 평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할머니가 그 양반은 거기 그냥 앉아 있으라고 했고, 승수는 정말로 앉아서 사람들이 들고 오는 바구니의 감자를 세었다. 하나, 둘. 백을 넘기면 정우가 큰 소리로 고랑 번호를 불렀고, 승수는 그 번호를 공책에 적었다. 얇은 공책이었다.

“선생님, 몇 개예요?”

“오백 몇 개요. 정확히는 몰라요. 중간에 수아 씨가 말 걸어서.”

“처음부터 다시 세세요.”

“아니요. 수아 씨 탓을 할 수 있으니까 이어서 세요. 그게 편해요.”

미연은 그 말에 웃다가,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리고 웃음을 멈췄다. 지난가을 거북바위 위였다. 마흔둘까지 셌는데 돌이 굴러왔다고. 마흔셋부터 하면 된다고. 미연은 그때 그 말을 근거 안 보임 칸에 제일 먼저 적었다.

*

정오가 되기 전에 정우가 제일 굵은 감자만 골라 상자 하나를 채웠다. 흙을 털지 않았다. 할머니가 흙째 가져가야 오래 간다고 했다.

정우는 그 상자를 들고 마을 위쪽 끝의 기와집으로 걸어갔다. 미연이 반 걸음 뒤에서 따라갔다. 대문 옆 기둥의 「이장」 팻말은 이제 없었다. 떼어 낸 자리만 네모나게 색이 달랐다.

마당에 정숙자가 있었다. 그 옆에 젊은 여자 하나가 서 있었다. 혜진이었다. 선고 날 법원 계단에서 할머니와 맞섰던 이장의 딸. 혜진은 정우를 보자 팔짱을 꼈다. 정우는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턱 앞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하지 감자요. 약속한 거.”

정숙자가 상자 쪽으로 걸어왔다. 쪼그려 앉아 흙 묻은 감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 위에서 한참 굴렸다.

“크네.”

“올해 첫 감자예요.”

“네 할머니 밭 감자는 원래 달아. 우리 양반이 그랬어.”

정숙자는 그 감자를 상자에 도로 넣지 않고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일어서서 상자를 혜진 쪽으로 밀었다. 혜진은 한참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팔짱을 풀고 상자를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우를 보지도 않았다. 그냥 들고 부엌 쪽으로 들어갔다.

정숙자가 정우를 보았다.

“고맙다는 말은 안 할 거야.”

“네.”

“내년에도 갖고 와.”

“네.”

대문을 나서서 한참 걷다가 정우가 걸음을 멈췄다. 미연은 정우의 등이 떨리는 걸 보았다. 미연은 팔을 내밀지 않았다. 정우가 스스로 다시 걸을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 밭 쪽에서 할머니가 점심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났다.

*

점심을 먹고 나서 승수가 미연을 불렀다. 평상에 앉은 채였다.

“오늘은 미연 씨가 올라가요.”

“어디를요?”

“바위요. 나는 무릎 핑계 대고 여기서 마저 셀게요.”

미연은 승수를 보았다. 승수는 감자 바구니를 무릎 앞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하나, 둘. 정말로 세기 시작했다.

“왜요?”

“미연 씨가 정해요. 올라갈지 말지.”

미연은 웃음이 났다. 그 말을 반년 넘게 들었다. 처음에는 얄미웠고, 그다음에는 무서웠고, 지금은 그냥 승수의 말버릇이었다.

“그럼 올라갈게요. 해 지기 전에 내려올게요.”

“그건 할머니 근거예요.”

“알아요. 근데 이제 제 근거이기도 해요.”

*

거북바위까지 오르는 길은 짧았다. 지난가을 세 걸음마다 멈추던 다리는 이제 쉬지 않고 올라갔다. 그래도 바위에 닿았을 때는 숨이 찼다. 미연은 바위 한쪽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바위는 볕을 오래 받아 미지근했고, 갈라진 틈마다 마른 솔잎이 끼어 있었다. 지난가을과 똑같았다. 바위는 반년 동안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바뀐 건 바위 위에 앉는 사람이었다.

미연은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승수가 정류장에서 건네준 얇은 공책이었다. 벌써 절반을 썼다. 맨 뒷장에는 새로 그은 칸이 셋 있었다. 근거 보임, 근거 안 보임, 그리고 세 번째 칸. 이름을 붙이지 못해 비워 둔 칸이었다. 엄마가 머리 위로 흔든 손, 정숙자의 앞치마 주머니에 들어간 감자 하나, 할머니가 누르는 냉장고 자석. 그런 것들이 그 칸에 적혀 있었다.

미연은 공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손을 무릎에 얹었다. 생각이 많았다. 정규직 공고, 하반기, 여섯 달 뒤. 그래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셌다. 하나, 둘.

마흔둘까지 셌을 때 아래쪽에서 잔돌이 굴렀다.

미연은 눈을 떴다. 바위 아래 비탈에 누가 서 있었다. 스물몇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등산복이 아니라 구겨진 정장 바지에 구두를 신고 있었다. 넥타이는 풀어서 손에 감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다가 미연과 눈이 마주치자 굳었다.

“죄송해요.”

“괜찮아요.”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 생수병 뚜껑을 여는데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뚜껑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천천히 마셨다. 다시 눈을 감을 줄 알았던 사람이 그대로 앉아 있자, 남자는 괜히 남의 일을 끊어 놓았다는 얼굴을 했다.

“명상하셨어요?”

“네.”

“생각 안 하는 거예요?”

“오늘은 생각이 많아서 앉아 있었어요.”

남자는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미연 쪽으로 내밀었다.

“요즘은 물어보면 답이 다 나오잖아요. 이것 좀 보세요.”

화면에는 사주 풀이를 해 준다는 앱이 떠 있었다. 당신은 단단한 쇠의 기운입니다. 2027년 하반기, 귀인을 만나 직장운이 크게 오릅니다.

“태어난 시간 넣었어요?”

“모름 눌렀어요. 귀찮아서.”

“그런데도 이만큼 썼네요.”

남자가 미연을 보았다. 오늘 면접을 보고 왔다고 했다. 세 번째 최종 면접이었고, 면접관이 마지막에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직무라 채용 규모가 줄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떨어진 건지 아닌지 아직 몰랐다. 그래서 정장 차림 그대로 산에 올라왔다고.

“혹시 귀인이세요?”

미연은 대답하려다 멈췄다. 웃음이 먼저 나왔다. 지난가을 자기가 이 바위에서 한 질문이었다. 그때 승수는 무릎이 아픈 사람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감자 캐다 올라온 사람이에요.”

남자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미연의 운동화를 보았다. 흙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무슨 일 하세요?”

“남이 한 말이 맞는지 확인하는 일이요. 그리고 명리 공부를 해요. 아직 배우는 중이에요.”

“사주요?”

“네.”

남자의 눈이 앱 화면과 미연 사이를 한 번 오갔다.

“그럼 제 생일 알려 드리면, 언제 붙을지 아세요?”

“그 날짜부터 듣고 싶어요?”

“솔직히요? 네.”

미연은 나무라지 않았다.

“그 마음으로 오는 사람 많아요. 저도 그랬어요. 다만 저는 그 약속을 먼저 하지 않아요.”

“왜요? 이 앱은 해 주는데요.”

“그 앱은 시간을 모르는데도 해 줬잖아요.”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지는 기분이 들 때 질문을 하나 더 하는 쪽인 것 같았다.

“그럼 그 공부는 뭐에 써요? 날짜도 안 알려 주고 귀인도 아니면요.”

미연은 바위 위에 손가락으로 네 칸을 그렸다. 먼지가 앉아 있던 자리에 얕은 줄이 남았다. 반년 전 누군가 이 바위 위에 그었던 것과 같은 자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이 태어난 해와 달과 날과 시를 여덟 글자로 적어요. 그 글자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는지 읽는 거예요. 무엇이 가운데 있는지, 어느 계절에 놓였는지, 무엇이 돕고 무엇이 누르는지. 그리고 그렇게 읽은 근거를 먼저 적고, 말은 나중에 해요.”

“그걸 배우면 뭐가 남아요?”

미연은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반년 동안 쓴 것들이 그 안에 있었다. 꽃집 아인슈타인, 지렁이 같은 칡, 피 볼 살 둘, 근거 확인 못 함, 내가 못 함. 엄마가 사는 쪽. 같은 해, 다른 자리.

“제 경우엔 이거였어요. 나한테 모자란 게 뭔지, 넘치는 게 뭔지 보는 눈. 모자란 건 채우고 넘치는 건 덜어 내야 하는데, 사람은 대개 반대로 해요.”

남자는 한참 미연을 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저한테도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말해 놓고 너무 빨랐다는 얼굴이었다. 이름도 몰랐다. 잠깐 허탈해서 아무거나 붙잡으려는 걸 수도 있었다. 미연도 그걸 아는 얼굴이었을 것이다.

“저는 아직 배우는 사람이라서요. 산 아래에 가르치는 분이 있어요. 무릎이 아파서 오늘은 감자를 세고 계세요.”

“감자를요?”

“오백 몇 개요. 중간에 놓치셨대요.”

남자가 웃었다. 웃으니 아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미연은 공책을 가방에 넣고 일어섰다. 해가 능선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할머니 말대로라면 지금쯤 호미를 놓을 시간이었다.

“내려가요. 해 지기 전에.”

“왜요?”

“해 지고 내려가면 길이 깜깜해요. 그건 근거가 있어요. 칠십 년짜리.”

남자가 일어서다가 굳은 다리에서 잠깐 멈췄다. 미연은 팔을 내밀지 않았다. 남자가 바위 모서리를 짚고 스스로 다리를 펼 때까지 기다렸다.

“조건이 하나 있어요.” 미연이 말했다. “내려가서 그분 만나면, 그분이 하는 말 가운데 근거가 안 보이는 말이 있으면 바로 짚어요. 셋 짚으면 그만둬도 돼요.”

“선생님을요?”

“수업을요. 그분은 계속 거기 앉아 계실 거니까.”

남자는 그 조건을 한참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손에 감고 있던 넥타이를 풀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셋은 너무 적은데요. 저 아까부터 벌써 하나 찾았어요.”

“뭔데요?”

“감자 오백 몇 개. 정확히 모르신다면서요.”

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바위 아래로 굴러 내려갔다.

“그건 인정할게요. 하나.”

둘은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미연이 앞장섰다. 몇 걸음 내려가다 돌아보니, 남자가 바위 위의 네 칸을 한 번 내려다보고 따라오고 있었다. 바람이 먼지를 조금 쓸어 가서 금이 흐려지고 있었다.

산 아래 평상에서는 승수가 아직 감자를 세고 있었다. 미연은 멀리서 그 등을 알아보았다. 남자에게 저기라고 손으로 가리키고, 미연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해는 아직 능선 위에 걸려 있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50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