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6,387자)

블라인드 통변 — 이름을 가리고 읽다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도해철학관의 간판은 사월 셋째 주에 내려가기로 되어 있었다. 정우가 낸 명예훼손 사건에서 법원이 약식명령으로 벌금을 매긴 다음 날, 도해는 마을 단톡방에 마지막 글을 올렸다.

내 간판 내리기 전에 한판 하자. 그 공부방 아가씨랑. 이름 가린 사주 다섯 장, 누가 더 맞히나. 회관에서 하고, 기자도 불러.

글 아래로 답이 하나도 달리지 않았다. 반년 전 같은 단톡방에 정우의 명식이 올라왔을 때는 삼십 분 만에 답이 백 개를 넘었었다. 미연은 그 빈자리를 한참 내려다보다가 공부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선생님, 이거 봤어요?”

“봤어요.”

“나가야 돼요?”

“미연 씨가 정해요.”

승수는 그 말만 하고 다시 책을 펼쳤다. 미연은 그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도 물어야 할 것 같아서 물었다.

미연은 그날 밤 윤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건을 셋 달았다. 명식은 두 사람 다 고르지 않는다. 윤지호가 미리 봉투에 넣어 와 그 자리에서 뜯는다. 그리고 각자 아는 명식이 나오면, 안다고 밝히고 그 장은 읽지 않는다.

윤지호는 셋째 조건은 원장님이 안 받으실 거라고 했다.

“그럼 저 혼자 지킬게요.”

*

토요일 오후 마을회관은 꽉 찼다. 반년 전 미연이 화이트보드에 같은 일주 쌍을 적어 내려가던 그 회관이었다. 그날 이 자리에서 정우가 수갑을 찼다. 오늘 정우는 맨 앞줄에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무릎 위에 식혜 병을 올려놓고 있었다. 누구 줄 거냐고 물으면 이긴 사람이라고 했다.

오 형사는 비번이라며 문 옆 벽에 기대 서 있었다. 승수는 맨 뒷줄 구석이었다. 앉지 않고 서 있었다. 무릎이 아프다면서도 그랬다.

도해는 정장을 입고 왔다. 반년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그런데 앞에 서자마자 목소리가 회관 끝까지 울렸다. 이십 년 철학관을 지켜 온 목소리였다.

“오늘 내가 이기면 다들 그 공부방 문 닫으라고 해 줘. 내가 지면 나는 내일 간판 내리고 조용히 사라질 테니까.”

“원장님은 어차피 내리시잖아요.”

맨 앞줄에서 정우가 말했다. 몇 사람이 웃었다. 도해는 웃지 않았다.

윤지호가 갈색 봉투 다섯 개를 탁자에 늘어놓았다. 봉투마다 번호만 적혀 있었다. 규칙은 단순해서, 한 장씩 뜯어서 화이트보드에 적고, 두 사람이 각자 종이에 풀이를 쓴다. 한 장에 십 분. 다섯 장을 다 쓰면 이름을 공개한다.

첫 봉투가 뜯겼다.

1번 己 戊 丙 丁 丑 辰 寅 酉

미연은 순서표대로 썼다. 일간 丙, 해. 월지 辰, 늦봄. 천간에 戊 식신과 己 상관이 겹으로 떠 있었다. 내가 낳는 흙이 두텁게 쌓인 해였다. 시간 丁은 겁재, 시지 酉는 정재. 일지 寅은 장생 자리였다. 뿌리는 寅과 시간 丁. 식상이 무거워 해의 기운이 흙으로 많이 빠져나가는 표로 읽었다. 강약은 학파에 따라 중간에서 약간 약한 쪽.

거기까지 쓰고 미연은 펜을 멈췄다. 이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미연은 마지막 줄에 이렇게 적었다. 식상이 두터워 드러내고 쏟아 내는 힘이 많다, 그 힘이 무엇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도해는 오 분 만에 펜을 내려놓았다.

두 번째 봉투가 뜯겼다.

2번 己 癸 丙 壬 巳 酉 寅 辰

회관에 웅성거림이 일었다. 셋째 칸이 1번과 똑같이 丙寅이었다. 미연은 그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손에 땀이 났다. 丙寅일, 연간 己. 그 짝이 누구와 누구인지 미연은 화이트보드 앞에서 이미 적어 본 적이 있었다. 반년 전 이 회관에서.

미연은 펜을 쥔 채 손을 들었다.

“말씀드릴 게 있어요. 1번이랑 2번 셋째 칸이 같은 丙寅이에요. 이 일주를 가진 사람 둘을 제가 알아요. 지난가을 이 회관에서 적었어요. 그런데 어느 쪽이 1번이고 어느 쪽이 2번인지는 몰라요. 연주까지 다 외우진 않았어요. 그래서 계속 쓸게요. 다만 짐작이 섞일 수 있다는 걸 미리 말씀드려요.”

윤지호가 수첩에 그 말을 적었다. 도해가 코웃음을 쳤다.

“짐작이 섞인다니. 그럼 그게 무슨 블라인드야.”

“그래서 미리 말씀드린 거예요.”

미연은 2번을 읽었다. 일간 丙, 월지 酉. 가을 한가운데의 해였다. 월간 癸 정관, 시간 壬 칠살. 나를 누르는 물이 천간에 둘, 관살혼잡. 연간 己는 상관. 뿌리는 연지 巳와 일지 寅. 가을 해에 물이 둘 떠 있으니 해의 힘이 약한 쪽으로 읽었다. 미연은 마지막 줄에 적었다. 누르는 힘이 많고, 그 힘을 버티는 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이 가지만, 짐작은 근거가 아니어서 적지 않는다.

세 번째 봉투에서 미연은 아무것도 몰랐다.

3번 庚 壬 丁 戊 辰 午 亥 申

일간 丁, 등불. 월지 午, 한여름. 등불에게 가장 힘이 오르는 달이었다. 월간 壬은 정관이고, 일간 丁과 바로 붙어 丁壬합. 미연은 그 두 글자를 보며 자기 시주를 떠올렸다. 자기 표에서도 丁과 壬이 붙어 있었다. 일지 亥 안에는 壬과 甲. 등불이 물 위에 앉아 있었다. 시간 戊는 상관, 연간 庚과 시지 申은 재성. 여름 등불이 물 위에 앉아, 정관과 손을 잡고 있는 표. 미연은 거기까지만 적었다.

네 번째 봉투가 뜯기는 순간, 미연은 손을 들었다.

4번 甲 甲 戊 丁 辰 戌 辰 巳

“이건 제가 아는 명식이에요. 처음 배울 때 이름을 가리고 읽었다가 나중에 이름을 들었어요. 그래서 이 장은 안 쓸게요.”

도해가 비웃으며 말했다.

“아는 거면 맞히기 쉽겠네. 그걸 왜 안 써.”

“맞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서요. 아는 걸 모르는 척하고 쓰면, 그건 거짓말이에요.”

회관이 잠깐 조용해졌다. 할머니가 식혜 병을 무릎 위에서 고쳐 잡았다.

다섯 번째 봉투가 뜯겼다. 윤지호가 화이트보드에 글자를 적는 동안 미연의 등이 굳었다. 여덟 글자를 다 보기도 전에 알았다. 반년 동안 매일 들여다본 표였다.

5번 己 庚 癸 乙 酉 午 未 卯

미연은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한 번 숨을 골라야 했다.

“이것도 알아요. 안 쓸게요.”

도해는 미연을 흘끗 보고 마지막 장을 다른 장보다 훨씬 길게, 한참 썼다.

*

윤지호가 두 사람의 종이를 거두어 차례로 읽었다.

1번에 대한 도해의 풀이는 이랬다. 봄 해에 식상이 두텁고 정재가 시지에 있으니 덕이 높고 사람을 품는 그릇이다. 종교인이나 성인의 사주. 많은 사람이 따른다. 미연의 풀이는 짧았다. 식상이 두터워 드러내고 쏟아 내는 힘이 많다, 그 힘이 무엇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2번에 대한 도해의 풀이는 이랬다. 관살이 겹쳐 권력을 쥐는 상. 칠살이 시주에 있으니 말년에 칼을 부른다. 전쟁을 일으키거나 사람을 많이 해칠 사주. 미연의 풀이는 이랬다. 누르는 힘이 많고 그 힘을 버티는 해. 짐작은 근거가 아니어서 적지 않는다.

윤지호가 1번 봉투 안쪽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1번, 아돌프 히틀러. 1889년 4월 20일, 오스트리아 브라우나우 출생. 독일 나치당을 이끌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유대인 육백만 명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독재자.”

회관이 얼어붙은 사이 윤지호가 2번을 읽었다.

“2번.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1869년 10월 2일, 인도 포르반다르 출생. 폭력을 쓰지 않는 저항으로 인도 독립운동을 이끈 사람.”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가 황급히 입을 막았다. 그 웃음이 회관 여기저기로 번졌다. 도해의 얼굴이 하얘졌다가 붉어졌다.

“둘 다 丙寅이야. 원래 둘 다 큰 인물이 될 사주라고. 내가 틀린 게 아니라.”

“원장님은 히틀러한테 성인이라고 쓰셨어요.”

정우가 말했다. 크지 않은 목소리였다. 도해가 정우를 보았다. 반년 전 빨간 펜으로 정우의 명식에 동그라미를 치던 사람이, 처음으로 정우의 눈을 피했다.

3번은 헬렌 켈러였다. 1880년 미국 앨라배마에서 태어나 생후 열아홉 달에 열병으로 시력과 청력을 잃고도 글을 배워 작가이자 사회운동가가 된 사람이었다. 도해는 3번에 여름 불이 세서 무대에 서는 연예인이라고 썼다. 미연은 여름 등불이 물 위에 앉아 정관과 손을 잡았다고 쓰고 거기서 멈췄다.

“세 장 중에 원장님은 하나도 못 맞히셨네요.” 윤지호가 정리했다. “미연 씨는 맞힌 게 없고요. 맞히려고 하지를 않았으니까.”

도해가 탁자를 손바닥으로 쳤다.

“그래서 누가 이긴 건데. 모르겠다는 말만 늘어놓은 게 이긴 거야? 사람들이 오만 원 내고 철학관에 와서 듣고 싶은 게 모르겠다야? 다들 답 들으러 와. 답을 줘야 철학관이야. 이 아가씨는 그걸 몰라.”

그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몇몇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기도 했다. 반년 전 미연도 날짜를 달라고 산에 올랐었다.

미연이 일어섰다.

“맞아요. 저도 답 들으러 산에 갔어요. 취업 날짜 알려 달라고. 근데 안 알려 줘서 화내고 내려왔어요.” 미연은 숨을 한 번 골랐다. “그래서 저는 돈을 안 받아요. 답을 못 주니까. 원장님은 답을 주셨어요. 정우 씨한테 피 볼 팔자라고. 할머니한테 여든다섯이라고. 그 답 때문에 정우 씨는 석 달을 갇혔고, 할머니는 해 뜨기 전에 밭에 나갔어요. 모르겠다는 말은 아무도 안 가둬요.”

할머니가 식혜 병을 무릎 위에서 꽉 쥐었다. 오 형사가 벽에서 등을 뗐다.

“그럼 5번은.” 도해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5번 읽어 봐, 내 풀이.”

윤지호가 도해의 마지막 종이를 읽었다.

“5번. 한여름 비, 외로운 빗물. 홀로 떨어져 스며들 뿐 어디에도 고이지 못한다. 연지가 비어 있어 뿌리를 잃었다. 큰 상실을 겪은 사람. 자식 같은 이를 잃었다.”

회관 맨 뒤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돌아보니 승수가 서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있었다.

윤지호가 5번 봉투의 이름을 읽기 전에 승수가 먼저 말했다.

“그건 내 거예요.”

도해가 처음으로 승수를 정면으로 보았다. 한참을 보다가, 무언가를 알아보는 얼굴이 되었다.

“……서울 신촌, 승수 철학관.”

승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이 그 승수야? 이십 년 전에 줄 서서 기다리던 데. 나 그때 당신 책 베껴서 공부했어. 당신 갑자기 문 닫고 사라졌다고 다들 그랬지.”

“닫았어요.”

“왜.”

승수가 회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오른쪽 무릎이 꺾였다. 미연은 일어서려다가 멈췄다. 승수는 팔을 내밀어 주길 바라는 사람이 아니었다.

“원장님 풀이 맞아요. 나는 자식 같은 아이를 잃었어요.” 승수가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열아홉 살짜리였어요. 그 아이 어머니가 사주를 들고 왔고, 나는 그 아이한테 살이 겹쳤다고 했어요. 집에 두면 부모를 친다고. 어머니는 아이를 멀리 보냈고, 아이는 그해 겨울 집에 못 돌아오고 죽었어요. 원장님이 정우 씨한테 한 말을, 나는 십삼 년 전에 했어요.”

회관에 아무 소리도 없었다. 할머니가 정우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원장님 풀이는 맞았어요. 그런데 맞힌 게 아니에요.” 승수가 도해를 보았다. “쉰 넘은 사람한테 큰 상실이 있었다는 말은 누구한테나 맞아요. 여기 앉은 분들 중에 잃은 사람 없는 분 있어요? 그 말은 내 글자에서 나온 게 아니라, 사람이 사는 게 원래 그래서 맞는 거예요. 그걸 글자가 맞혔다고 하면, 다음 사람한테도 그 말을 하게 돼요. 나도 그랬고요.”

도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손에 쥔 펜이 미세하게 떨렸다.

승수가 미연 쪽을 돌아보았다.

“미연 씨는 왜 내 거 안 썼어요?”

“아는 거라서요.”

“알면 맞힐 수 있었잖아요.”

“알아서 못 써요. 선생님 거는 이름 가려도 선생님 거예요.”

승수가 웃었다. 회관에서 처음 나온 웃음이었다.

*

판정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윤지호는 누가 이겼다고 쓰지 않겠다고 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회관을 나갔다. 나가면서 몇몇은 미연에게 고개를 숙였고, 몇몇은 도해 쪽을 한 번 보고 아무 말 없이 지나갔다.

할머니가 식혜 병을 들고 일어섰다. 미연 쪽으로 오다가 방향을 틀었다. 도해 앞에 섰다.

“이거 마셔.”

도해가 할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이긴 사람 준다면서요.”

“이긴 사람 없어. 거짓말 안 한 사람은 둘이고.” 할머니가 미연과 승수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 둘은 안 마셔도 돼. 너는 목 탈 거 같아서.”

도해는 그 병을 받아 들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뚜껑을 열었다. 마시지는 않고 그냥 쥐고 있었다.

미연은 공책 뒷장의 「내가 뛴 것」 목록을 펼쳤다. 오늘 날짜를 적고 그 아래를 비워 두었다. 처음으로 비어 있는 날이었다. 비어 있는 줄 옆에 작게 덧붙였다. 2번에서 뛸 뻔함. 손 들고 말함.

회관 밖으로 나오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승수가 계단 난간을 짚고 천천히 내려왔다. 미연은 한 칸 아래에서 기다렸다. 이번에도 팔을 내밀지 않았다.

“선생님, 그 이야기 사람들 앞에서 처음 한 거죠.”

“처음이에요.”

“왜 오늘 했어요?”

승수가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다.

“미연 씨가 내 걸 안 써서요. 미연 씨가 쓰지 않은 자리는 내가 채워야 할 것 같았어요.”

해가 능선에 걸렸다. 할머니 말대로라면 지금 호미를 놓아야 할 시간이었다. 회관 창 안에서 도해가 아직도 식혜 병을 쥐고 혼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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