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5,845자)

건강 통변 — 몸과 생활의 박자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새벽 다섯 시 반, 할머니 집 부엌에서 냄비 뚜껑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정우의 목소리가 건넌방 문틈으로 넘어왔다.

“할머니! 의사 선생님이 해 뜨기 전엔 나가지 말랬잖아요!”

“해 떴어.”

“안 떴어요. 저건 가로등이에요.”

미연은 이불을 걷어 내고 건넌방 문을 열었다. 서울로 올라간 뒤 처음 내려와 이 방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이었다. 고무장화를 신은 할머니가 호미를 든 채 마당 한가운데 서 있었고, 정우가 그 앞을 두 팔로 막고 있었다. 반년 전 이장에게 가슴팍을 찔리던 그 자세였다. 이번엔 막는 쪽이었다.

“미연이 일어났네. 너 쟤 좀 비켜 보라고 해.”

“미연 씨, 할머니 좀 말려 주세요.”

두 사람이 동시에 미연을 불렀다. 미연은 건넌방 툇마루에서 한 발도 내려서지 못했다.

할머니는 지난겨울 첫눈 오던 날 밭에서 쓰러졌다. 병원에서 일주일을 보내고 돌아온 뒤로 정우는 할머니가 밭에 나가는 시간을 정해 두었다. 해 뜨고 한 시간 뒤부터 점심 전까지. 의사가 그러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 시간표를 냉장고에 붙여 두고 매일 아침 그걸 무시했다.

결국 셋은 평상에 앉았다. 할머니는 호미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였다. 내려놓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너 그 공부방에서 사주 본다며. 내 것도 봐.”

“할머니 거는 지난가을부터…….”

“그때 너 나보고 밭이라 그랬잖아. 기토인가 뭔가. 무 뽑으면서.”

미연의 얼굴이 화끈해졌다. 기억하고 있었다. 할머니가 무를 뽑는 둘을 감독하면서 배추에 물을 주고 점심 약속을 잡던 걸 보고, 미연은 승수에게 저분 기토예요, 하고 물었었다. 생일도 모르면서.

“그거 근거 없이 한 말이었어요.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고. 그래서 진짜는 뭔데.”

정우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할머니 주민등록증 사진이 떠 있었다. 1948년 3월 2일. 시는 할머니도 몰랐다. 새벽에 났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새벽이 몇 시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시를 모르니까 세 기둥만 볼게요. 강약이랑 용신은 조건부예요.”

戊 甲 丙 ? 子 寅 戌 ?

미연은 셋째 칸 윗글자를 보다가 손을 멈췄다.

“할머니, 丙이에요.”

“그게 뭔데.”

“해요. 하늘에 뜬 해.”

할머니가 미연을 빤히 보았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렸다. 호미가 무릎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해? 내가? 우리 영감이 들었으면 배꼽 잡았겠다. 평생 밭고랑에 코 박고 산 사람이 해래.”

“밭고랑에 코 박고 산 건 할머니고, 해는 글자예요. 둘은 달라요.”

미연은 그 말을 하고 나서 놀랐다. 반년 전 승수가 김구의 명식을 두고 한 말과 모양이 같았다. 글자가 한 일과 사람이 한 일을 헷갈리면 안 된다는 말.

“둘째 줄. 월지 寅. 이른 봄이에요. 丙한테 寅은 처음 생겨나는 자리, 장생. 막 떠오르는 해예요.”

“셋째 줄. 관계와 힘. 연간 戊는 내가 낳는 흙, 음양이 같으니까 식신. 월간 甲은 나를 낳는 나무, 음양이 같으니까 편인.” 미연은 지장간을 짚었다. “연지 子 안에 癸, 나를 누르는 물이고 음양이 달라서 정관. 월지 寅 안에 甲, 丙, 戊. 일지 戌 안에 戊, 辛, 丁.”

“뿌리는 寅 안의 丙, 그리고 戌 안의 丁. 나무가 둘이나 불을 키워 주고요. 할머니는 강한 쪽이에요. 시를 모르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세 기둥만 봐도 꽤 분명해요.”

“강한 건 내가 알아.”

“그건 할머니 근거고요. 이건 글자 근거예요.”

할머니가 정우를 보며 턱으로 미연을 가리켰다. 쟤 말하는 것 좀 봐라, 하는 얼굴이었다. 정우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넷째 줄. 격국. 寅의 주인 글자 甲이 월간에 드러나 있어요. 편인격이에요. 용신은, 불이랑 나무가 넘치니까 그걸 덜어 주는 쪽. 연간 戊, 식신이 불의 기운을 받아서 흘려보내요. 그리고 戌 안의 辛, 재성. 다만 쇠는 땅속에 하나밖에 없어요.”

“다섯째 줄, 세부요. 월지 寅이랑 일지 戌은 寅午戌, 불로 모이는 세 글자 가운데 둘이에요. 가운데 午가 빠져 있어서 원국 안에서는 완성이 아니에요. 세 글자가 다 모여야 국이 선다고 배웠으니까요.”

미연은 펜 끝으로 빈자리를 톡 쳤다. 午가 들어갈 자리였다.

“그리고 이 불들을 식혀 줄 물은 연지 子 하나예요. 제일 바깥, 제일 먼 자리에 있어요. 子는 할머니를 누르는 정관인데, 너무 멀어서 寅이랑도 戌이랑도 손이 안 닿아요.”

“멀리 있는 물이라.” 할머니가 중얼거렸다. “우리 영감이 물 끌어 온다고 고생 많이 했지. 이 밭, 원래 물이 멀었어.”

정우가 할머니를 보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얼굴이었다. 미연은 그 이야기를 공책에 적지 않았다. 할머니 근거였다.

미연은 거기서 공책을 한 장 넘겼다. 오늘 할머니가 들으려는 건 건강이었다. 정우가 문자로 미리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자기 몸이 어떻게 될지 물을 거라고.

“이제 몸 얘기 할게요. 그 전에 하나 먼저 말할게요.”

미연은 승수에게 배운 말을 꺼냈다. 지난가을 새벽 거북바위에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오행마다 몸을 하나씩 붙이는 옛날 분류가 있어요. 목은 간, 화는 심장, 토는 위장, 금은 폐, 수는 신장. 그런데 이건 분류표지 진단표가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할머니 어디가 아프다, 어디가 약하다는 말은 안 할 거예요. 그건 의사 선생님이 하는 거예요.”

할머니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뭘 봐.”

“박자요. 할머니 표가 어떤 박자로 움직일 때 덜 무리하는지.”

“그딴 거 말고.” 할머니가 호미 자루를 탁 쳤다. “나 몇 살까지 살아.”

평상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정우가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정우를 보지 않고 미연만 보았다.

“그건 못 말해요.”

“왜 못 해. 도해는 말해 주던데. 여든다섯이라고. 작년 봄에 오만 원 주고 물어봤어.”

정우가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 그 사람한테 그런 걸 물어봤어요?”

“네 아버지 일 터지기 전이야. 그땐 그 사람이 용하다 그랬어.”

미연은 숨을 골랐다. 도해가 팔았던 건 낙인만이 아니었다. 숫자도 팔았다. 여든다섯. 할머니는 올해 일흔아홉이었다. 그 숫자가 할머니한테 육 년이라는 시간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해 뜨기 전에 호미를 드는 거였다. 남은 날을 세는 사람의 박자였다.

“할머니. 그 숫자는 근거가 없어요.”

“네가 어떻게 알아.”

“수명은 글자에 없어요. 저는 반년 넘게 배웠는데, 사람이 몇 살에 죽는지 계산하는 방법은 못 배웠어요. 그런 걸 말하는 사람은 있어요. 근데 그 사람들도 근거를 대라고 하면 못 대요. 도해 원장이 정우 씨한테 피 볼 팔자라고 했던 거랑 똑같은 거예요. 할머니는 그 말이 거짓말이었던 거 알잖아요.”

할머니의 손이 호미 자루 위에서 멈췄다.

“그럼 그 여든다섯도 거짓말이야?”

“근거 없는 말이에요. 여든다섯보다 일찍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어요. 그건 아무도 몰라요. 할머니가 혈압약 잘 드시고, 의사 선생님 말 들으시면 늦어질 확률이 높다는 건 의사 선생님이 아시고요.”

할머니가 한참 미연을 보았다. 그리고 호미를 평상에 내려놓았다. 처음으로.

“그럼 박자인지 뭔지 말해 봐.”

미연은 일지 戌을 짚었다.

“할머니 일지가 戌이에요. 丙한테 戌은 묘라는 자리예요. 해가 지는 자리, 해를 거둬 넣는 창고. 그리고 월지 寅은 해가 처음 떠오르는 자리고요. 할머니 표 안에 해가 뜨는 자리랑 지는 자리가 같이 있어요.”

“그래서.”

“그래서 이건 처방이 아니라, 글자가 가리키는 방향이에요. 할머니 표는 해가 뜨고 지는 박자를 따라 움직일 때 무리가 덜한 쪽으로 읽어요. 해 뜨기 전에 나가는 게 아니라, 해가 뜨면 나가고. 해 지기 전에 들어오고.”

미연은 거기서 멈추고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가 지난달 수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영감도 해 지면 호미 놨어. 해 졌는데 밭에 있는 놈은 바보라고.

“할머니가 그때 수아한테 그러셨잖아요. 해 지면 호미 놓는 거라고. 영감님이 그랬다고. 그건 제 근거가 아니라 할머니 근거예요. 근데 할머니 글자도 같은 쪽을 가리켜요.”

“해 뜨면 나가는 건.”

“그건 의사 선생님 근거요. 해 뜨고 한 시간 뒤.”

정우가 끼어들었다.

“냉장고에 붙어 있는 거요.”

할머니가 정우를 흘겨보았다. 정우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섯째 줄도 할게요. 운이요.” 미연은 휴대전화를 열었다. “할머니 지금 대운은 丙午예요. 일흔아홉 무렵부터 십 년. 할머니랑 같은 丙, 비견이고 午는 불이라 겁재예요. 아까 비어 있던 그 午가 대운으로 와 있어요. 원국의 寅이랑 戌에 대운 午가 더해지면 寅午戌이 다 모여요. 원래 강한 표에 불이 국을 이뤄서 와요. 그리고 작년이 丙午년이었어요. 대운도 丙午, 해도 丙午.”

“작년 겨울에 쓰러졌는데. 그래서 그런 거야?”

“그건 제가 말 못 해요.” 미연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나간 일에 운을 갖다 대면 맞는 것처럼 보여요. 그건 이순신 장군 명식 볼 때 배웠어요. 임진년에 전쟁 났다고 그 해 글자가 전쟁을 낸 게 아니라고. 할머니 쓰러진 건 첫눈 오는데 밭에 나가서, 혈압이 높아서, 그날 아무도 옆에 없어서예요. 글자 때문 아니에요.”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정우의 손을 잡았다. 그날 할머니 옆에 없었던 손이었다. 정우는 그날 구치소에 있었다.

“올해는 丁未예요. 丁은 불, 겁재. 未는 흙, 상관이고 일지 戌이랑 戌未로 부딪쳐요. 불이 또 오고, 흙이 흔들려요. 그러니까 일곱째 줄은 이거예요.”

미연은 공책에 쓴 것을 읽었다.

“할머니 표는 해예요. 원래 강하고, 지금 대운과 올해가 불을 더 가져와요. 넘치는 쪽이니까 덜어 내는 박자가 필요해요. 해 뜨면 나가고, 해 지면 들어오고, 점심엔 쉬고. 몇 살까지 사는지는 글자에 없어요. 그건 혈압약이랑 정우 씨가 지켜요.”

마지막 문장에서 정우가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는 미연이 쓴 종이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미연이 공책에서 그 장을 찢어 건넸다. 할머니는 그 종이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 자석이 철판에 붙는 소리가 났다.

할머니가 마당으로 돌아왔다.

“붙였다. 의사 시간표 옆에.”

“네.”

“근데 이거 하나만 고쳐.” 할머니가 미연을 보았다. “해 지면 들어오고, 그거. 해 지기 전에 들어오고로.”

“왜요?”

“해 지고 들어오면 늦어. 우리 영감이 늘 그랬어. 해 지는 거 보고 호미 놓으면 집에 오는 길에 깜깜하다고. 해 지기 전에 놔야 해 지는 걸 마당에서 본다고.”

미연은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 앞에 섰다. 자석 두 개 아래 종이 두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왼쪽은 정우의 글씨로 쓴 의사 시간표였다. 해 뜨고 한 시간 뒤 외출, 점심 전 귀가, 혈압약 아침 여덟 시. 그 위에 할머니가 연필로 그어 놓은 줄이 몇 개 있었다. 오른쪽은 방금 미연이 찢어 준 종이였다. 미연은 볼펜을 꺼내 「해 지면 들어오고」에 줄을 긋고, 그 위에 「해 지기 전에 들어오고」라고 고쳐 썼다. 고친 자리 옆에 작게 덧붙였다. 근거, 영감님.

마당으로 돌아오니 할머니는 하늘을 보고 있었다. 동쪽 능선 위로 해가 막 올라오고 있었다. 가로등이 그 빛에 밀려 저절로 꺼졌다.

“이제 해 떴다.”

“한 시간 뒤예요, 할머니.”

정우가 말했다. 할머니는 정우를 흘겨보고 평상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미연에게 식혜 그릇을 내밀었다. 아침부터 식혜였다.

“품삯이야.”

“식혜가요?”

“해라고 해 준 값.”

미연은 그 그릇을 받아 들었다. 할머니가 해라고 말한 건 미연이 아니라 글자였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걸 미연이 해 준 거라고 했다. 미연은 그 차이를 바로잡지 않았다. 바로잡지 않아도 되는 차이도 있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해가 능선을 완전히 넘었을 때, 정우가 시계를 보고 말했다.

“사십 분 남았어요.”

할머니는 대답 대신 호미를 다시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사십 분 동안 그 자리에 앉아 해를 보았다. 해가 떠오르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서 보는 건, 할머니 말로는 칠십구 년 만에 처음이었다.

45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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