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5,994자)

재물 통변 — 돈은 어디로 흐르는가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정우는 공부방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신발도 벗기 전에 통장 두 개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하나는 정우 것, 하나는 할머니 것이었다. 둘 다 오래 써서 귀퉁이가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돈 얘기 하러 왔어요.”

승수는 붓펜으로 공부방 문에 붙일 이름표를 쓰다가 고개를 들었다. 공부방 이름은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름표에는 「공부방」 세 글자만 있었다.

“돈 얘기는 미연 씨가 해요. 오늘은 미연 씨 날이에요.”

“저 출근 첫 주에 반차 내고 내려온 거예요. 인턴이 첫 주에 반차 내도 되는지도 모르고 냈어요.”

미연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서울의 사실 확인 센터에서 기차와 버스로 두 시간 반이었다. 그래도 정우가 어제 문자를 보냈을 때 미연은 바로 반차를 냈다. 생일은 알죠, 시는 몰라요. 그런데 이번엔 이야기를 먼저 하면 안 될 것 같아서요. 통장은 들고 갈게요.

“통장은 치워 둬요. 명식부터 볼 거예요, 통장은 이야기라서.”

정우는 순순히 통장을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공부방 바닥에 앉았다. 의자가 아직 두 개뿐이었다.

정우의 명식은 미연이 반년 넘게 보아 온 것이었다. 도해의 빨간 펜 글씨 밑에서, 오 형사가 접어 들고 다니던 종이 위에서, 마을 단톡방의 캡처 사진 속에서. 피를 볼 팔자라는 네 글자를 지우고 그 명식을 처음부터 읽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辛 戊 壬 ? 巳 戌 戌 ?

“시를 모르니까, 오늘 하는 말 중에 시주가 바꿀 수 있는 건 따로 표시할게요. 그건 조건부예요.”

“네.”

“첫째 줄, 일간은 壬이에요. 큰 물이고, 저랑 같아요. 우리 엄마랑도요.”

“그리고 이장님이랑도요.”

정우가 덧붙였다. 미연은 잠깐 펜을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는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아무렇지 않게 하려고 연습한 사람처럼.

“둘째 줄, 월지는 戌. 늦가을 끝의 마른 흙이에요. 壬한테 戌은 물이 힘을 잃어 가는 계절이에요. 득령 못 했어요.”

“셋째 줄은 관계와 힘이에요. 연간 辛은 나를 낳는 쇠, 음양이 달라서 정인. 월간 戊는 나를 누르는 흙, 음양이 같아서 칠살.” 미연은 그 칠살 두 글자를 또박또박 썼다. 도해가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던 글자였다. “지지는 지장간까지. 연지 巳 안에 丙, 庚, 戊. 丙은 내가 누르는 불이고 음양이 같으니까 편재, 庚은 편인, 戊는 또 칠살. 월지 戌 안에 戊, 辛, 丁. 칠살, 정인, 그리고 丁은 내가 누르는 불인데 음양이 다르니까 정재. 일지 戌도 똑같아요.”

“뿌리는요?”

승수가 처음으로 물었다.

“없어요. 巳에도 戌에도, 지지에 물이 하나도 없어요. 득지 못 했고, 득세는 연간 辛 하나뿐이라 신약이에요. 다만 시주에 물이 있으면 달라질 수 있으니까 그건 조건부예요.”

미연은 신약이라는 글자 옆에 작게 괄호를 치고 시주 모름이라고 적었다.

“넷째 줄, 격국과 용신이에요.” 미연은 월지 戌을 짚었다. “戌의 주인 글자는 戊. 그 戊가 월간에 드러나 있어요. 칠살격, 편관격이라고도 해요. 이 명식의 한가운데는 나를 누르는 흙이에요.”

정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거봐요. 도해 원장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잖아요.”

“아니요. 지금부터가 원장님이 안 한 말이에요.”

미연은 연간 辛에서 월간 戊로, 戊에서 다시 일간 壬으로 화살표를 그었다. 흙에서 쇠로, 쇠에서 물로.

“칠살 戊는 나를 누르는데, 그 戊가 바로 옆에서 辛을 낳아요. 토생금이에요. 그리고 辛이 나를 낳으니까 금생수고요. 누르는 힘이 쇠를 거쳐서 나를 키우는 힘으로 바뀌는 길이 이 표 안에 있어요. 살인상생이라고 부르는데, 칠살이 인성을 낳고 인성이 나를 낳는다. 칠살이 있는 명식에서 사람들이 제일 반기는 모양 가운데 하나예요.”

정우가 화살표를 한참 내려다보았다.

“그 원장은 칠살만 봤네요.”

“칠살만 봤어요. 그리고 괴강이랑 백호를 갖다 붙였어요. 그건 지난번에 다 따져 봤잖아요. 기준마다 다르고, 다르다는 걸 원장님이 숨겼다는 거.”

“용신은요?”

“신약이니까 억부로는 나를 돕는 쪽. 연간 辛, 정인이에요. 그리고 나와 같은 물, 비겁이고요. 늦가을 마른 흙의 달이라 조후로 봐도 물이 반가워요. 다만 물은 원국에 안 보여요. 시주에 있을지는 모르니 조건부예요.”

“이제 돈 얘기요.”

정우가 재촉했다.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물은 내가 누르는 거예요. 壬한테는 불, 丙과 丁. 정우 씨 표에서 불이 어디 있어요?”

정우가 표를 들여다보았다. 반년 동안 이 공부방 문밖에서 귀동냥을 한 사람이었다.

“천간엔 없고, 巳 안에 丙, 戌 안에 丁. 둘 다 땅속이네요.”

“네. 재가 겉에 안 드러나고 숨어 있어요. 그리고 丁이 들어 있는 戌은.” 미연은 지난가을 할머니 헛간을 정리하던 날을 떠올렸다. “창고 글자, 묘고예요. 계절 끝에 남은 것들을 넣어 두는 곳. 정우 씨 재물은 창고 속에 있다고 볼 수 있어요. 한꺼번에 꺼내 쓰는 돈이 아니라, 열어서 조금씩 꺼내는 돈.”

“그건 비유죠?”

“비유예요. 근거는 戌 안의 丁, 그거 하나.”

“그리고 재물이 생기는 길은 보통 식상에서 와요. 내가 낳는 것, 손으로 만드는 것. 壬한테는 甲이나 乙, 나무예요.” 미연은 표를 다시 훑었다. “없어요. 원국에 나무가 안 보여요. 시주에 있을 수는 있으니 조건부예요.”

“손이 없다는 거예요?”

“원국 일곱 칸에 손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섯째 줄이 중요해요.”

미연은 휴대전화를 열어 미리 계산해 둔 대운을 띄웠다.

“지금 대운은 丙申. 열일곱 무렵부터 십 년. 丙은 편재, 그리고 申은.” 미연이 잠깐 웃었다. “申은 壬이 처음 생겨나는 자리, 장생이에요. 원국에 없던 물의 뿌리가 대운으로 와 있어요. 그다음 대운은 내년쯤부터 오는 乙未예요. 乙은 상관, 내가 낳는 나무. 원국에 없던 손이 대운으로 와요.”

정우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 밑에 흙이 끼어 있었다. 씨감자를 반으로 가르던 손이었다.

“올해는요, 2027년은요?”

“丁未예요. 丁은 정재인데, 정우 씨 일간 壬이랑 丁壬합을 해요. 재물이 다가와서 나를 묶는 모양이에요. 未는 정관이고, 월지·일지 戌이랑 戌未로 형이 걸려요. 부딪치고 어긋나는 글자예요.”

공부방이 조용해졌다. 승수는 붓펜을 내려놓았다. 정우는 점퍼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뺐다.

“일곱째 줄 해요.”

미연은 공책을 넘겨 쓰기 시작했다. 다 쓰고 나서 소리 내어 읽었다.

“정우 씨 명식은 누르는 힘이 한가운데 있고, 그 힘이 쇠를 거쳐 나를 키우는 길이 있어요. 재물은 겉에 드러나 있지 않고 창고 속에 있어요. 손으로 만드는 길은 원국에 안 보이지만, 내년부터 대운이 그 손을 가져와요. 올해는 재물이 다가와 나를 묶는 해로 볼 수 있어요. 그러니 올해 큰돈으로 무언가를 묶는 결정이 온다면, 그 묶임이 정우 씨가 고른 묶임인지 한 번 더 보세요. 이건 처방이 아니에요. 글자가 가리키는 방향만 말한 거예요. 시주를 모르니까, 강약과 용신은 조건부예요.”

정우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점퍼에서 통장 두 개를 다시 꺼냈다. 이번에는 미연도 말리지 않았다. 명식은 다 읽었다.

“밭을 반, 천 평 팔려고 해요.”

미연은 놀라지 않았다. 통장을 들고 온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했다.

“아버지 빚 갚으려고요?”

“아니요. 빚은 아버지 거예요. 할머니가 그건 빌린 놈이 갚는 거라고 했어요. 그게 맞고요.” 정우는 통장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이장님 댁에 드리려고요. 정숙자 아주머니한테요. 판결 때 아버지한테 배상하라는 명령도 같이 나왔는데, 감옥에서 무슨 수로 갚아요. 판결문에 숫자는 있는데 그 숫자가 아주머니 통장에 들어갈 길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하려고요.”

“할머니는요?”

“밭은 이제 내 거니까 내 맘대로 하래요. 근데 그러면서 밤에 헛간에서 혼자 울어요. 제가 다 들어요.”

승수가 붓펜 뚜껑을 닫았다.

“정숙자 씨한테는 물어봤어요?”

“아직요. 오늘 통장 들고 가려고요.”

정우가 미연을 보았다.

“같이 가 줄래요? 아까 그 말, 고른 묶임인지 보라는 말. 그거 확인하러요.”

*

정숙자의 집은 마을 위쪽 끝, 이장 집이라고 불리던 기와집이었다. 대문 옆 기둥에 「이장」이라고 쓴 작은 팻말이 아직 붙어 있었다. 떼어 낼 사람이 없었다.

정숙자는 마당에서 고추장을 담그고 있었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엿기름물과 고춧가루가 섞여 붉게 출렁였고, 그 냄새가 대문 밖까지 맵게 번졌다. 정우가 대문 앞에 서자 정숙자의 주걱이 멈췄다.

“왜 왔어.”

“드릴 게 있어서요.”

정우가 통장을 내밀었다. 정숙자는 주걱을 대야에 걸쳐 놓고 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그러나 통장을 받지는 않았다.

“그게 뭔데.”

“밭 천 평 팔려고 내놨어요. 팔리면 이 통장으로 들어와요. 아버지가 갚아야 할 거, 제가 먼저…….”

“네가 뭔데.”

정숙자의 목소리가 낮았다. 크지 않아서 더 무서웠다.

“네가 뭔데 네 아버지 대신 돈을 내. 그 돈 받으면 내가 뭐가 되냐. 네 아버지 용서한 게 되냐? 아니면 우리 양반 값을 받은 게 되냐?”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거야. 돈은 늘 그런 거야.”

정숙자가 대야 앞에 쪼그려 앉았다. 주걱을 다시 들었다가, 젓지 않고 붉은 물만 내려다보았다.

“우리 양반이 나쁜 짓 했다는 거 나도 알아. 네 할머니 도장 판다고 할 때 내가 말렸어. 그거 하지 말라고. 그런데 그 사람이 그거 했다고 계곡에서 밤새 얼어 죽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 그 돈으로 그게 덮이니?”

정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통장을 내민 손이 허공에서 떨렸다. 미연은 그 옆에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묶임이라는 말이 이런 모양일 줄은 몰랐다. 돈이 다가와서 묶는 게 아니라, 돈을 내미는 손이 사람을 묶으려 하고 있었다.

정숙자가 고개를 들었다.

“네 밭 팔지 마.”

“아주머니.”

“팔지 마. 그 밭 팔리면 리조트 놈들 또 들어와. 그럼 우리 양반이 뭘 하다 죽었는지 다들 또 떠들어. 그 밭 그대로 둬.”

정숙자는 주걱으로 고추장을 한 번 크게 저었다. 붉은 물결이 대야 가장자리를 넘을 듯 출렁였다.

“그 대신 감자 나면 한 상자 갖고 와. 우리 양반이 네 할머니 밭 감자를 좋아했어. 마을에서 그 집 감자가 제일 달다고. 내가 그 말 듣기 싫어서 장에서 딴 감자를 사 왔는데, 그 양반이 먹어 보고 귀신같이 알더라.”

정우가 통장을 내렸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오래 숙이고 있었다. 정숙자는 그 정수리를 보지 않으려고 대야만 저었다.

“감자 언제 나.”

“유월이요.”

“유월이면 우리 양반 일 년도 안 됐네.”

“네.”

“그럼 그때 와. 제사상에 올리게.”

*

돌아오는 길에 정우는 통장 두 개를 손에 쥐고 걸었다. 점퍼에 넣지 않았다.

“고른 묶임이었어요?”

정우가 물었다. 미연은 대답 대신 공책을 꺼냈다. 일곱째 줄 아래 빈칸에 한 줄을 보탰다.

정숙자 씨가 고름. 정우 씨는 감자로 묶임.

“그건 근거가 아니잖아요.”

“아니에요. 그래서 처방 아니라고 썼잖아요.”

정우가 웃었다. 오늘 처음으로 쓴웃음이 아니었다.

공부방에 돌아오니 승수는 문 이름표를 다 써 놓고 있었다. 「공부방」 세 글자 앞에 작은 글씨로 근거라는 두 글자가 더 붙어 있었다.

“근거 공부방이요?”

“이름이 안 떠올라서요. 미연 씨가 맨날 하는 말로 했어요.”

“그거 제 말 아닌데요. 선생님 말인데요.”

“그럼 둘 다 거네요.”

정우가 그 이름표를 들고 문에 붙였다. 테이프가 모자라서 한쪽 귀퉁이가 들렸다. 들린 귀퉁이가 바람에 팔랑거렸다. 미연은 그걸 보며 반차를 낸 오후가 아깝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날 밤 정우가 통장 두 개를 내밀자, 할머니는 받아서 장롱 서랍 맨 밑에 도로 넣었다. 왜 안 판 거냐고 묻지도 않았다. 대신 부엌에서 감자 한 알을 꺼내 와 정우 손에 쥐여 주었다. 작년 가을에 캐서 겨우내 헛간에 묻어 둔, 쪼글쪼글해진 감자였다.

“이거 싹 났다. 내일 이것도 심어.”

“이건 먹는 거잖아요.”

“싹 나면 먹는 게 아니라 심는 거야. 네 할아버지가 그랬어.”

정우는 그 감자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쪼글쪼글한 껍질 틈으로 연두색 싹이 손톱만큼 올라와 있었다. 밭 천 평은 다음 날 아침 부동산에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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