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6,038자)

적성 통변 — 무엇을 할 때 빛나는가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사월 첫 토요일, 수아는 하얀 운동화를 신고 왔다. 밭에 간다고 미리 말해 두었는데도 그랬다.

“흙 묻는다니까.”

“흙 묻으면 빨면 되지. 나 이거 퇴사하고 산 거야. 회사 다닐 땐 운동화 신을 일이 없었어.”

정우의 밭은 할머니 집 뒤 첫째 고랑부터 시작했다. 겨우내 얼었던 흙이 풀려서 발을 디디면 장화 밑창이 반쯤 빨려 들어갔다. 보름 전에 심은 감자는 아직 싹이 올라오지 않았다. 정우는 고랑을 덮은 검은 비닐 위를 허리 숙여 살피며 걷고 있었고, 할머니는 평상에 앉아 그걸 감독하고 있었다. 감독이라기보다 잔소리였다.

“싹 올라오는 자리 보이면 바로 비닐 뚫어 줘. 안 뚫으면 싹이 비닐 밑에서 삶아져.”

“할머니, 아직 하나도 안 났어요.”

“날 거야. 미리 봐 둬야 해. 네 할아버지는 그거 하루 늦게 뚫었다가 한 고랑 날렸어.”

수아는 그 대화를 듣다가 웃음을 터뜨렸고, 웃는 김에 첫 발을 고랑에 디뎠다. 하얀 운동화가 발목까지 흙에 잠겼다. 수아는 잠깐 그대로 서 있다가, 다른 발도 마저 디뎠다.

“이제 뭐 상관없어.”

승수는 오늘 오지 않았다. 마을회관 옆 빈방에 공부방을 열 준비를 한다며 아침부터 책상을 옮기고 있었다. 미연은 출발 전에 문자를 받았다. 오늘은 미연 씨 혼자 해 봐요. 나중에 공책만 봐요.

혼자 하는 통변은 처음이었다.

고랑 하나를 끝까지 둘러보고 평상에 둘러앉았을 때 할머니가 식혜를 내왔다. 수아는 흙 묻은 손을 바지에 닦고 식혜 그릇을 받더니, 반쯤 마시고 나서 가방에서 접은 종이를 꺼냈다.

“이거. 생일만. 이야기 없이. 너 그때 숙소 앞에서 그랬잖아.”

미연은 종이를 받았다. 2004년 5월 27일 오전 여덟 시, 양력, 서울. 미연은 종이를 받아 들고 잠깐 망설였다. 수아의 이야기를 미연은 너무 많이 알았다. 합숙 연수, 화면에 뜨던 점수, 가로등 밑에서 쏟아 내던 말, 그리고 겨울에 끝내 사표를 냈다는 것까지.

“수아야, 나 네 얘기 너무 많이 알아.”

“그래서?”

“그래서 맞는 글자만 보일 수 있어. 그거 조심하면서 할게. 내가 뛰면 네가 짚어.”

“어떻게 짚는데?”

“근거 뭐냐고 물어보면 돼.”

수아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가 감자 상자를 정리하다 말고 평상 끝에 와 앉았다. 할머니는 식혜 그릇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甲 己 丙 壬 申 巳 午 辰

“첫째 줄. 일간 丙. 해.”

수아가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지난가을 숙소 앞 가로등 밑에서 미연이 해는 다 비춰야 해서 쉬지를 못한다고 말했던 걸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둘째 줄. 월지 巳. 초여름이에요. 丙한테 巳는 건록 자리, 제 힘이 오르는 달이에요. 득령.”

“그거 좋은 거야?”

“힘이 있다는 거야. 좋고 나쁨은 아직 몰라.”

“셋째 줄, 관계와 힘. 천간부터.” 미연은 화살표를 그었다. “연간 甲은 나를 낳는 나무. 음양이 같으니까 편인. 월간 己는 내가 낳는 흙. 음양이 다르니까 상관. 시간 壬은 나를 누르는 물. 음양이 같으니까 칠살.”

“칠살? 그거 무서운 거 아냐? 그 동네 철학관 아저씨가 떠들던 거.”

수아가 정우 쪽을 흘끗 보았다. 정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감자 흙을 털었다.

“이름이 무서운 거야. 칠살은 그냥 나를 누르는 글자 중에 음양이 같은 쪽이야. 정우 씨 명식에도 있고, 승수 선생님 명식에도 있어.”

“나는 칠살 있는 거 좀 자랑하고 다녀요.” 정우가 말했다. “그거 하나 갖고 반년을 시달렸으니까.”

할머니가 정우 등짝을 손바닥으로 쳤다. 정우는 피하지 않았다.

“지지요. 연지 申 안에는 庚, 壬, 戊. 월지 巳 안에는 丙, 庚, 戊. 일지 午 안에는 丁, 己. 시지 辰 안에는 戊, 乙, 癸.” 미연은 글자마다 십성을 달았다. “뿌리가 엄청 많아. 巳에 丙, 午에 丁. 그리고 午는 丙한테 제일 센 자리야. 양인이라고 불러.”

“그래서 강해, 약해?”

“강해. 이건 별로 안 갈려. 득령했고, 일지에 제일 센 뿌리가 있고, 연간 甲이 나무로 불을 더 키워 줘. 불이 넘치는 쪽이야.”

수아가 식혜 그릇을 내려놓았다.

“넘친다는 게 나쁜 거야?”

“넘치면 덜어 내야 한다는 거야. 처음 선생님 만난 날 들은 말이야. 모자란 건 채우고 넘치는 건 덜어 낸다.”

“넷째 줄. 격국.” 미연은 월지를 짚었다. “월지 巳가 丙의 건록이에요. 巳 안의 글자 중에 천간에 따로 드러난 게 없어요. 그래서 건록격이라고 불러요. 월지에 내 힘이 있는 명식.”

“용신은?”

이번엔 할머니가 물었다. 미연은 놀라서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시치미를 떼고 식혜를 마셨다.

“이 양반 공부방 귀동냥을 몇 달 했더니.”

미연은 웃음을 참고 시간의 壬을 짚었다.

“불이 넘치니까, 억부로 보면 누르는 물이 반가워요. 계절로 봐도 초여름 해니까 식혀 주는 물이 반가워요. 둘이 같은 글자를 가리켜요. 시간 壬. 그리고 그 壬이 시지 辰 위에 앉아 있어요. 辰 안에 癸가 있으니까, 壬한테는 발 디딜 뿌리가 있어요.”

미연은 거기서 펜을 멈췄다. 지난가을 새벽, 거북바위에서 저수지 수면이 회색에서 금빛으로 뒤집히던 장면이 떠올랐다. 강물과 햇빛이 서로를 비춘다는 말. 그건 승수가 미연의 壬을 두고 한 이야기였다. 그 그림이 지금 수아의 표 안에 있었다. 丙 바로 옆에 壬이.

“수아야. 너 일간 바로 옆에 강이 있어.”

“무슨 소리야.”

“강휘상영이라는 말이 있어. 강물에 해가 비치는 그림. 해만 있으면 뜨거워서 다 타는데, 옆에 강이 있으면 해가 강에 비쳐서 반짝여. 해는 강을 데우고, 강은 해를 식히고.”

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운동화 끈에 묻은 흙을 문질렀다.

“다섯째 줄. 세부. 연지 申과 월지 巳가 붙어서 巳申합이에요. 이건 형으로도 파로도 읽는 사람이 있어서 한 가지로 정하기 어려워. 그리고 일지 午는 아까 말한 양인.”

“여섯째 줄. 운.” 미연은 휴대전화로 계산해 둔 대운을 보았다. “지금 대운은 丁卯야. 열여덟 무렵부터 십 년. 丁은 불, 卯는 나무. 불을 키우는 글자들이 와 있어. 그다음 대운도 丙寅, 또 불이랑 나무. 올해 2027년은 丁未. 丁은 또 불, 未는 흙이고 午랑 묶여.”

“그러니까 계속 뜨겁다는 거네.”

“응. 당분간은 네 쪽에서 물을 찾아야 할 거야. 운이 물을 갖다 주지 않으니까.”

미연은 공책을 한 장 넘겼다. 일곱째 줄. 승수가 없는 일곱째 줄.

미연이 쓰는 동안 수아는 자꾸 미연의 펜 끝을 넘겨다보았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공책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그래서 나 어디 가?”

미연이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말할게. 나 지금 두 군데서 연락 왔어. 하나는 전에 다니던 회사 계열사. 연봉 그대로, 직급 하나 올려 준대. 사람들이 나 연수 때 일등 한 거 기억한대. 하나는 대전 청소년 진로센터 계약직. 애들 앞에서 진로 수업하는 거. 월급은 반 토막이야. 다음 주 수요일까지 답해야 돼. 네가 골라 줘.”

미연은 그 손바닥 밑의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수요일. 반년 전 한결이 받아 왔던 폐업 날짜도 수요일이었다. 그리고 미연에게도 월요일이 있었다. 엄마가 등록한 학원 첫날.

“나는 못 골라.”

“왜? 너 지금 다 봤잖아. 강이 어쩌고 해가 어쩌고.”

“그러니까 못 골라. 내가 골라 주면, 너 거기 가서 힘들 때마다 내 탓 할 거야. 안 가서 후회해도 내 탓 하고.”

말해 놓고 미연은 놀랐다. 반년 전 거북바위 위에서 승수가 한 말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하고 있었다. 그때 미연은 그 말이 얄미워서 발소리를 크게 내며 산을 내려갔었다.

수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너도 똑같아졌구나. 그 사람이랑.”

“응.”

“나 진짜 급해서 온 거야, 미연아. 엄마는 계열사 가래. 아빠는 아무 말 안 해. 근데 나 그 회사 건물 앞에 서면 숨이 안 쉬어져. 근데 진로센터 가면 연봉 반 토막이라고 다들 비웃을 거고. 그래서 네가 정해 주면 그냥 거기 가려고 했어. 그럼 적어도 내가 고른 건 아니니까.”

평상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할머니가 식혜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가 났다. 정우는 감자 상자 뚜껑을 닫다 말고 손을 멈췄다.

미연은 수아의 손을 공책에서 들어 올려 수아 무릎에 돌려놓았다.

“그 대신 이건 해 줄 수 있어. 어디로 가라는 말 말고, 네 표가 어떤 방식으로 일할 때 덜 타는지는 말해 줄 수 있어. 직업 이름이 아니라 일하는 방식으로.”

수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연은 그걸 허락으로 받았다.

“네 표는 불이 넘쳐. 드러나고, 앞에 서고, 사람들 앞에서 빛나는 힘이 많아. 연수 때 일등 한 거, 나는 그게 놀랍지 않아. 그리고 월간 己가 상관이야. 내가 낳는 것, 말하고 표현하고 가르치는 쪽으로 풀어 볼 수 있어. 근데 그 힘이 넘칠 때 너를 살려 주는 게 시간의 壬이야. 누르는 물. 이걸 일하는 방식으로 옮기면.”

미연은 쓰던 문장을 그대로 읽었다.

“켜고 끄는 스위치가 있는 무대. 조명이 언제 꺼지는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일. 끝나는 시간과 기준이 바깥에 분명하게 있는 일. 그게 네 壬이야. 반대로 하루 종일 꺼지면 안 되는 조명, 점수가 끝없이 화면에 뜨는 데서는 불이 불을 부르고, 물이 들어올 틈이 없어.”

“그게 어느 회사인데.”

“그건 네가 물어봐야지. 두 군데 다 가서. 조명이 언제 꺼지냐고.”

수아가 미연을 빤히 보았다. 그러다 웃었다. 우는 것처럼 웃었다.

“면접에서 퇴근 시간 물어보라는 거야?”

“응. 근거 있어. 壬.”

“그거 물어보면 떨어져.”

“떨어지면 그 회사가 네 조명 끌 생각이 없다는 근거고.”

할머니가 박수를 쳤다. 한 번, 크게. 다들 할머니를 보았다.

“그 말은 맞다. 우리 영감도 해 지면 호미 놨어. 해 졌는데 밭에 있는 놈은 바보라고.”

정우가 그 말을 받아 웃었다. 웃다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날 밤 해 진 뒤에 이 평상까지 서류 봉투를 가지러 왔던 사람이 자기 아버지였다는 걸, 정우는 재판정에서 처음 들었다. 할머니가 그 얼굴을 보고 정우의 손등을 두 번 두드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연은 공책 일곱째 줄을 다시 읽었다. 승수가 없는 일곱째 줄이었다. 근거를 하나씩 짚어 보았다. 넘치는 불, 근거 午와 巳와 甲. 상관 己, 근거 월간. 누르는 물 壬, 근거 시간과 辰. 운의 불, 근거 丁卯와 丁未. 스위치가 있는 무대, 근거는 壬과, 수아가 가로등 밑에서 했던 말이었다. 하루 종일 무대 조명 밑에 서 있는 거.

마지막 근거는 글자가 아니었다. 미연은 그 줄 옆에 작게 적었다. 이건 수아 말. 처방 아님.

*

수아는 저녁 버스를 탔다. 하얀 운동화는 비닐봉지에 넣어 들고, 할머니가 빌려준 고무장화를 신고 탔다. 장화 앞코에 감자밭 흙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장화 언제 돌려줘?”

“다음 주 수요일 지나서. 답하고 나서 올게.”

“어디로 답할 건데?”

“몰라. 퇴근 시간 물어보고.”

버스 문이 닫혔다. 수아가 창문에 이마를 대고 손을 흔들었다. 반년 전 엄마는 창에 이마를 대고도 손을 흔들지 않았었다. 미연은 그 차이를 공책에 적지 않았다. 근거로 쓸 수 없는 것들이 요즘 자꾸 늘었다.

저녁에 마을회관 옆 공부방에 들렀을 때, 승수는 책상 다리 밑에 접은 종이를 끼워 넣고 있었다. 책상 하나가 계속 기우뚱거린다고 했다. 미연이 공책을 내밀자 승수는 일곱째 줄부터 읽었다. 첫째 줄부터가 아니었다.

다 읽고 나서 승수는 공책을 덮었다.

“수아 씨가 골라 달라고 했지요?”

“네.”

“뭐라고 했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한 말 그대로요. 한 글자도 안 틀리고.”

승수가 웃었다. 그 웃음이 오래 갔다.

“그날 미연 씨가 발소리 크게 내고 내려갔잖아요.”

“수아는 장화 신고 내려갔어요.”

“그럼 나보다 낫네요.”

승수는 미연의 공책을 돌려주며 마지막 장을 가리켰다. 거기, 미연이 버스 정류장에서 무심코 적어 둔 한 줄이 있었다. 근거로 쓸 수 없는 것들이 늘었다.

“그건 지우지 마요.”

“근거가 아닌데요.”

“그러니까요. 그걸 구별할 줄 알게 된 게 오늘 공부예요.”

기우뚱거리던 책상은 접은 종이 덕분에 이제 흔들리지 않았다. 미연은 책상 다리 밑으로 삐져나온 종이 귀퉁이를 보았다. 철학관 이름이 찍힌 영수증 같은 글씨가 반쯤 보였다. 승수는 그게 무엇인지 말해 주지 않았고, 미연도 묻지 않았다. 다만 책상은 이제 똑바로 서 있었다.

42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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