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6,245자)
월운·일진과 운의 쓰임 — 서울에 가져간 노트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윤지호의 제안은 문자 한 통으로 왔다. 감자를 심고 사흘 뒤, 미연이 할머니 밭둑에서 재 묻은 손을 털고 있을 때였다.
저 다음 달부터 서울로 올라가요. 신문사 여러 곳이 같이 만든 사실 확인 센터에 파견 가요. 거기 인턴 자리가 하나 있어요. 기사나 방송에 나온 말이 맞는지, 근거가 어디 있는지 찾는 일. 4월 5일 월요일부터 여섯 달. 월급은 적어요. 미연 씨 생각나서요.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미연 씨가 귀인 사주 기사 제목 바꿔 놓은 거, 센터장한테 보여 줬어요. 같이 일해 보고 싶대요.
미연은 그 문자를 밭둑에 앉아 세 번 읽었다. 첫 번째는 믿기지 않아서, 두 번째는 월급이 얼마인지 다시 보려고, 세 번째는 여섯 달이라는 글자 때문에. 여섯 달 뒤에는 다시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었다. 지난가을 메일 한 통으로 사라진 채용처럼.
정우가 고랑 끝에서 허리를 펴고 미연을 보았다.
“미연 씨, 왜 그렇게 웃다가 울상이에요?”
“웃었어요?”
“처음엔요.”
*
그날 밤 사랑방에서 미연은 승수에게 문자를 보여 주었다. 승수는 한 번만 읽고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라고 안 하세요?”
“내가 정하는 일이 아니잖아요.”
“알아요. 근데 이번엔 그 말이 좀 듣고 싶었어요.”
승수가 웃었다. 그리고 공책을 가져오라고 했다. 미연이 처음 산 아래 문구점에서 샀던 얇은 공책이었다. 넉 달 반 동안 가방 속에서 귀퉁이가 다 닳았고, 뒷장의 근거 보임과 근거 안 보임 칸에는 줄이 수십 개 그어져 있었다. 남은 장은 몇 장 되지 않았다.
“오늘은 운의 마지막이에요. 대운이 십 년의 계절, 세운이 한 해의 날씨라면, 그 아래에 달과 날이 있어요. 월운과 일진.”
“달에도 기둥이 있어요?”
“해에 기둥이 있듯이 달에도, 날에도 있어요. 달의 기둥은 절기로 바뀌어요. 양력 1일이 아니라. 올해 3월은 경칩부터 癸卯월이었어요. 다음 달은 청명부터 甲辰월이에요. 올해 청명이 4월 5일 아침 여덟 시 십칠 분이고요.”
미연은 펜을 멈췄다.
“4월 5일이요? 인턴 시작하는 날이에요.”
“그러네요.”
“월요일 아침에 달이 바뀌어요. 甲辰월. 壬한테 甲은 식신, 辰은 편관.” 미연은 공책에 받아 적다가 손을 멈췄다. 식신은 내가 낳는 것, 펼치는 것이었다. 첫 출근 날 아침에 식신의 달이 시작된다. 그 문장이 너무 반짝였다.
“지금 뛰고 있지요.”
“네. 근데 이번엔 좀 뛰고 싶어요.”
“뛰어도 돼요. 뛰는 걸 알고 뛰면.”
미연은 웃으면서 내가 뛴 것 목록의 마지막 빈칸에 적었다. 첫 출근 날 식신의 달. 알고 뜀. 그리고 그 옆에 작게 덧붙였다. 센터가 그날 문 여는 건 센터 일정 때문임.
“달의 천간은 어떻게 정해져요? 卯월이면 다 癸卯예요?”
“해의 천간에 따라 달라요. 해가 甲이나 己인 해는 첫 달 寅월이 丙寅으로 시작하고, 乙이나 庚인 해는 戊寅, 丙이나 辛인 해는 庚寅, 丁이나 壬인 해는 壬寅, 戊나 癸인 해는 甲寅. 옛사람들은 호랑이 달을 어디서 시작하는지 외운다고 해서 오호둔이라고 불렀어요. 올해는 丁未년이니까 寅월이 壬寅, 卯월이 癸卯, 辰월이 甲辰. 하나씩 앞으로.”
미연은 손가락을 꼽아 보았다. 맞았다. 숫자 놀이 같았다. 그런데 그 숫자 놀이를 처음 만든 사람들은 달마다 무엇을 심고 거둘지 이 글자로 셌을 것이다.
“일진은요?”
“날의 기둥이에요. 예순 개가 하루씩 돌아가요.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만세력에 다 나와요. 옛날 사람들은 이걸로 날을 받았어요. 이사하는 날, 혼인하는 날, 장 담그는 날.”
“한결 씨가 가게 접을 날 받아 달라고 했던 것처럼요.”
“그때 내가 왜 안 받아 줬는지 기억나요?”
“날이 정해 주면 그날까지 아무것도 안 할 거라서.”
승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진은 날씨예요. 비 오는 날 우산 챙기듯이, 그날이 어떤 날인지 알고 준비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날씨가 소풍을 갈지 말지 정해 주지는 않아요. 비 와도 가는 사람이 있고, 맑아도 안 가는 사람이 있어요.”
“한결 씨는 그날 안 접었잖아요. 수요일.”
“도해 원장이 받아 준 길일이었지요. 그날 한결 씨는 CCTV를 넘겼어요.”
미연은 그 날을 기억했다. 길일에 접으라던 가게가 그날 정우를 꺼냈다.
*
떠나기 전날 오후, 미연은 쉼표에 들렀다. 한결이 진열장 너머에서 반찬통 하나를 비닐봉지에 싸 내밀었다.
“장조림이요. 어머님께 갖다드리세요. 원조한테 검사받아 오세요.”
“알고 계셨어요? 엄마 레시피인 거.”
“택배 상자에 레시피 적힌 메모가 같이 왔잖아요. 맨 아래에 무단 판매 금지라고 써 있었어요. 웃음 표시까지 붙여서.”
미연은 그 메모를 상상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엄마다운 메모였다.
“그 수요일 기억나요? 도해 원장이 받아 준 길일.” 한결이 계산대에 기대 섰다. “그날 제가 가게 접었으면 지금 이 장조림도 없고, 정우 씨도 아직 거기 있었을지 몰라요. 길일은 길일이었네요. 원장 생각이랑 다른 쪽으로.”
“그것도 지난 일에 대 보는 거예요. 다 맞는 거.”
“알아요. 그래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오늘은.”
미연은 장조림 봉지를 받아 들었다. 봉지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
미연은 토요일에 서울로 올라갔다. 마을버스 첫차를 타러 정류장에 나갔더니 승수가 먼저 와 있었다. 낡은 승용차로 대전역까지 태워 주겠다는 걸 미연이 사양했다. 버스를 타 보고 싶었다. 버스는 십 분 늦게 왔다. 비도 안 오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승수가 점퍼 주머니에서 공책 하나를 꺼냈다. 산 아래 문구점의 그 얇은 공책이었다. 새것이었다.
“끝까지 쓴 사람한테 주는 거예요.”
“아직 몇 장 남았는데요.”
“서울 가는 기차에서 다 쓰겠지요.”
미연은 새 공책을 받아 가방에 넣었다. 헌 공책 옆에 나란히. 버스가 오자 승수가 손을 들었다. 미연도 손을 들었다. 첫날처럼 팔을 내밀지 않는 사람이었다. 미연은 혼자 버스 계단을 올랐다.
3월 27일, 乙巳일이었다. 기차 안에서 미연은 공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만세력을 열었다. 壬에게 乙은 상관이었다. 엄마한테 말하러 가는 날 상관이라니. 윗사람에게 대드는 글자라고들 하는 그 상관이었다. 미연은 혼자 웃음이 터져 앞자리 사람이 돌아보았다.
서울 집 현관 비밀번호는 그대로였다. 문을 열자 김치찌개 냄새가 났다. 엄마는 부엌에서 미연을 돌아보았고, 놀라지도 반가워하지도 않는 얼굴로 냄비 뚜껑을 덮었다. 미연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기차표를 끊자마자 문자를 보냈으니까.
“손 씻어. 밥 먹고 얘기해.”
미연은 한결의 장조림을 냉장고에 넣으려다 그냥 엄마 앞에 내밀었다. 엄마는 뚜껑을 열고 한 점을 집어 먹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간장이 모자라. 그 총각한테 반 숟갈 더 넣으라 그래.”
“엄마 레시피대로 했대.”
“레시피대로 하면 이 맛이 안 나. 손이 해야지.”
미연은 그 말을 한결에게 그대로 전하기로 했다. 근거가 있는지는 한결이 알아서 따질 것이다.
밥상에는 반찬이 다섯 가지 올라와 있었다. 엄마의 장조림 옆에 한결의 장조림이 나란히 놓였다. 미연이 보기엔 두 접시가 똑같았다. 엄마는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끝까지 자기 쪽 접시만 집었다. 미연은 한결 쪽 접시를 집었다. 간장이 반 숟갈 모자란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밥을 다 먹고 엄마가 상을 치우는 동안 미연은 휴대전화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윤지호의 문자를 띄운 채였다.
엄마는 행주로 손을 닦고 앉아서 문자를 읽었다. 한 번 읽고, 스크롤을 올려 다시 읽었다.
“확인 기자가 뭔데?”
“기사에 나온 말이 맞는지 찾는 사람. 근거가 어디 있는지.”
“그게 직업이야?”
“직업이야. 요즘엔 더 필요해. 기계가 그럴듯한 문장을 하루에 몇만 개씩 쓰니까.”
“인턴이라며. 여섯 달.”
“응.”
“여섯 달 뒤엔?”
미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엄마의 질문은 정확했다. 미연이 밭둑에서 세 번째로 문자를 읽을 때 걸렸던 바로 그 자리였다.
“모르겠어.”
“모르는데 가?”
“모르니까 가. 지난가을에 나는 다 알 것 같은 데 원서를 냈었어. 그 회사가 메일 한 통으로 없어졌어. 다 안다고 생각한 데가 제일 먼저 없어졌어.”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식탁 위의 휴대전화 화면이 꺼졌다. 엄마가 그걸 다시 켜지 않았다.
“엄마는 네가 공무원 했으면 좋겠어. 지금도. 여섯 달짜리 말고, 육십 살까지 가는 거.”
엄마는 꺼진 휴대전화 화면을 손가락으로 한 번 밀어 놓았다.
“아빠가 집을 나간 뒤에 엄마가 제일 무서웠던 게 뭔지 알아? 다음 달이 없는 거. 월급날이 언제 올지 모르는 거. 너하고 네 동생 학원비 봉투를 식탁에 올려놓고, 그다음 달 봉투를 어디서 구하나 밤새 계산하는 거. 엄마는 너한테 다음 달을 주고 싶었어. 그게 다야.”
미연은 그 식탁을 알았다. 지금 앉아 있는 이 식탁이었다. 봉투가 놓이던 자리에는 오늘 한결의 장조림이 놓여 있었다.
“알아.”
“알면서 왜.”
“엄마가 정해 주면, 나는 힘들 때마다 엄마 탓 할 거야. 안 해서 후회할 때도 엄마 탓 할 거고. 그게 싫어. 엄마 탓 하는 내가.”
엄마의 눈이 미연에게 멎었다. 미연은 그 말이 누구한테서 배운 말인지 알았다. 첫날 거북바위에서, 아니, 둘째 날 학원 이야기로 대들었을 때 승수에게 들은 말이었다. 그때는 그 말이 얄미워서 공책을 쑤셔 넣고 산을 내려왔었다.
엄마가 한참 뒤에 말했다.
“그 공책 줘 봐.”
*
미연은 가방에서 공책을 꺼냈다. 엄마는 그걸 받아 들고 첫 장부터 넘겼다. 생년월일시 네 기둥, 위아래 두 글자씩 여덟 글자. 목생화 화생토, 둥글게 그린 화살표. 풀이 순서표 일곱 줄. 아인슈타인의 꽃집. 엄마가 거기서 짧게 웃었다. 그러고는 계속 넘겼다. 숲에서 그린 지렁이 같은 칡. 이순신과 스탈린의 두 줄. 냅킨에서 옮겨 적은 엄마의 명식 庚戌, 己丑, 壬寅. 그 옆에 미연이 적어 둔 한 줄. 엄마가 사는 쪽.
엄마의 손이 그 장에서 멈췄다. 오래 멈췄다.
그다음은 미연이 엄마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던 장들이었다. 정우의 명식 옆에 적은 피 볼 살 둘, 근거 확인 못 함, 내가 못 함. 민병철이라는 이름 옆에 덧붙인 서른 살에 이장, 마을버스 하루 네 번. 선고 날의 빈 줄. 같은 해, 다른 자리. 엄마는 그 장들을 빨리 넘기지 않았다. 한 장씩, 뒷장에 비친 글씨까지 읽는 사람처럼 넘겼다.
마지막 장은 거의 비어 있었다. 맨 위에 어제 사랑방에서 적은 한 줄만 있었다. 일진은 날씨다. 소풍을 갈지 정해 주지 않는다.
엄마가 공책을 덮었다.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었다.
“다 썼네.”
“거의.”
“너 공책 앞장만 쓰고 버리잖아. 서랍에 그런 거 열 권은 있어.”
“이건 얇은 거라서.”
엄마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묻지 않았다. 공책을 미연 쪽으로 밀어 주고 일어나 싱크대로 갔다. 물을 틀었다. 설거지할 그릇은 아까 다 씻었는데도 엄마는 한참 물을 틀어 놓고 서 있었다.
“가.”
물소리 사이로 엄마가 말했다.
“가 봐. 여섯 달 뒤엔 그때 가서 또 생각해. 생각해 볼게라는 말, 엄마 그거 싫어했는데. 너 그 말 이제 도망가는 말로 안 쓰더라.”
미연은 엄마의 등을 보았다. 싱크대 앞에 선 등이 지난가을 기차역 플랫폼에서 버스 창에 이마를 대던 엄마보다 조금 작아 보였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미연이 눈을 떴을 때 엄마는 집에 없었다. 식탁 위에 쪽지가 있었다. 금방 와.
미연은 창가에 서서 아파트 단지 입구를 내려다보았다. 3월 28일 일요일, 丙午일이었다. 壬에게 丙은 편재. 미연은 그 이름을 떠올렸다가 그냥 흘려보냈다. 오늘은 날씨만 보기로 했다. 맑았다.
단지 입구 편의점에서 엄마가 나오고 있었다. 한 손에 우유, 다른 손에 접힌 종이 뭉치를 들고 있었다. 신문이었다. 엄마가 신문을 사는 걸 미연은 처음 보았다. 이 집에서 종이 신문은 늘 이사 갈 때 그릇 싸는 데나 쓰던 물건이었다.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신문을 식탁 위에 펼쳤다. 종합 일간지였다. 엄마는 돋보기를 끼고 첫 면부터 넘기기 시작했다.
“엄마, 뭐 해?”
“확인 기자 기사 어딨어. 여기도 있을 거 아냐.”
“그건 맨 끝에 작게 나와. 아니면 인터넷에.”
“그럼 맨 끝부터 봐야겠네.”
엄마는 신문을 뒤집었다. 맨 뒷면부터 한 장씩 앞으로 넘겼다. 돋보기 너머로 엄마의 눈이 기사 끝에 붙은 작은 글씨들을 하나하나 짚었다. 미연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 그 모습을 보았다.
미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윤지호에게 답장을 썼다. 할게요. 4월 5일에 뵐게요. 보내기 단추 위에서 엄지가 머물지 않았다. 바로 눌렀다.
그리고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마지막 장을 펼쳤다. 일진은 날씨다, 그 아래 남은 자리에 적었다. 3월 28일, 맑음. 엄마가 신문을 거꾸로 읽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