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6,052자)
갑목과 을목 — 큰 나무와 덩굴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비가 그친 다음 날, 승수는 거북바위로 오르지 않고 계곡 옆 숲길로 미연을 데려갔다.
밤새 젖은 흙이 발밑에서 부드럽게 꺼졌고, 소나무 껍질에서는 송진 냄새가 비에 씻겨 한층 진하게 올라왔다. 길가 바위에는 이끼가 초록으로 부풀어 있었다. 미연은 다리가 덜 아픈 길이라는 것만으로 승수를 조금 더 신뢰하게 되었다.
“오늘은 나무 수업이라 나무 있는 데로 왔어요.”
“병화 수업 때는 해 보러 가요?”
“그날 비 오면 큰일이지요.”
승수는 길가에 선 소나무 한 그루 앞에서 멈췄다. 줄기가 굵고 곧았으며, 두 팔로 안아도 손끝이 닿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줄기를 칡넝쿨 하나가 칭칭 감고 올라가 있었다. 넝쿨은 소나무의 허리쯤에서 가지 하나를 붙잡고, 거기서 다시 햇빛 쪽으로 잎을 펼치고 있었다.
“둘 다 목이에요. 어느 쪽이 甲이고 어느 쪽이 乙일까요?”
“곧은 게 甲, 감은 게 乙.”
“그렇게 떠올리면 돼요. 甲은 양의 목, 乙은 음의 목이에요. 甲은 하늘로 곧게 오르는 줄기를, 乙은 풀과 꽃과 덩굴처럼 휘고 감기며 자라는 모습을 떠올리지요.”
미연은 공책을 펼쳐 소나무와 칡을 대충 그렸다. 그림 솜씨가 신통치 않아서 소나무는 막대기 같았고 칡은 지렁이 같았다.
“그림은 근거 안 보임 칸에 넣을게요.”
“스스로 넣으니 셀 필요가 없네요.”
승수는 『적천수』라는 책의 한 장을 펼쳤다. 명나라 초 유기가 썼다고 전해지고 청나라 때 임철초가 주석을 달아 널리 읽힌 명리 고전이었다. 그 안의 「천간론」은 열 천간을 하나씩 두어 구절로 그려 놓은 대목이었다.
甲木參天,脫胎要火。
“갑목참천, 탈태요화. 갑목은 하늘을 찌를 듯이 솟고, 태를 벗고 다시 나려면 불이 필요하다는 말이에요.”
“태를 벗는다는 게 뭐예요?”
“어미 배 속에서 나오는 걸 태를 벗는다고 하지요. 나무가 그냥 서 있기만 해서는 아직 나무로 다 된 게 아니고, 불을 만나야 제 쓰임이 드러난다는 그림이에요. 겨울 나무는 볕이 있어야 깨어나고, 큰 나무는 땔감이 되든 집 기둥이 되든 무언가로 바뀌어야 하니까요.”
“나무 입장에선 좀 무섭네요. 불이 필요하다니.”
“그래서 뒤의 사람들은 이걸 더 자세하게 그렸어요. 벽갑인정이라는 말이 있어요. 庚이라는 도끼가 甲을 쪼개 丁이라는 불씨를 붙인다는 뜻이에요. 큰 통나무는 그대로 두면 불이 안 붙으니까, 쇠로 쪼개야 불을 피울 수 있지요.”
미연은 공책에 도끼와 통나무와 불씨를 차례로 그렸다. 이번에는 도끼가 그럭저럭 도끼처럼 보였다.
“그럼 甲한테 庚은 적이에요, 친구예요?”
“둘 다 될 수 있어요. 금극목이니까 庚은 甲을 누르는 글자예요. 그런데 그 누름 덕분에 甲이 다듬어지고 쓰임을 얻기도 해요. 둑이 물을 막던 이야기 기억나지요? 극이 꼭 나쁜 건 아니라는 그 이야기가 여기서 다시 나와요.”
미연은 소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곧은 줄기가 한참 위에서 가지를 펼치고 있었다. 저 줄기가 기둥이 되려면 누군가 베어야 했다.
“사람으로 옮기면요?”
“이 작품에서 쓰는 비유로 말할게요. 고전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건 아니에요. 갑목은 방향을 세우면 꾸준히 밀고 가는 모습으로 풀어 볼 수 있어요. 잘 쓰이면 기둥처럼 사람을 받치고, 지나치면 자기 방향만 고집해서 꺾이지도 휘지도 않으려 하지요.”
“乙은요?”
승수가 칡넝쿨을 손으로 가리켰다.
乙木雖柔,刲羊解牛。
“을목수유, 규양해우. 을목은 비록 부드럽지만 양을 가르고 소를 해체한다.”
“덩굴이 소를 잡아요?”
“글자 그대로는 이상하지요. 여러 풀이가 있는데, 부드러운 것이 곧 약한 건 아니라는 데는 대체로 같은 말을 해요. 저 칡을 봐요. 소나무보다 가늘지만, 그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 결국 더 높은 데서 볕을 받잖아요.”
미연은 칡이 소나무 가지를 붙잡은 자리를 들여다보았다. 넝쿨이 감긴 자리마다 소나무 껍질이 조금씩 패어 있었다.
“얘가 소나무 조르고 있는데요?”
“그것도 乙이에요. 등라계갑이라는 말이 있어요. 덩굴이 갑목에 얽혀 올라간다는 뜻이에요. 乙이 甲을 만나면 기댈 데를 얻어 높이 오르지요. 대신 기대는 쪽도 기대어지는 쪽도 조금씩 대가를 치러요.”
“생활로 옮기면, 乙은 기대서 올라가는 사람?”
“그렇게 한쪽으로 몰면 안 돼요. 을목은 조건에 맞춰 길을 찾는 끈기로 풀어 볼 수 있어요. 막힌 곳을 돌아서도 자라는 거지요. 지나치면 주변에 너무 맞추다 자기 뜻을 놓치고요. 그리고 乙은 丙을 반겨요. 꽃은 해가 있어야 피니까.”
그때 미연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엄마라는 글자가 떴다. 미연은 잠깐 망설이다 받았다.
“어, 엄마. 응, 아직 산이야. 아니, 등산만 하는 건 아니고. 공부해. 무슨 공부냐면…….”
미연의 눈이 승수를 향했다. 승수는 소나무 껍질의 이끼를 보는 척했다.
“사주. 아니, 무당 되려는 거 아니야. 명리라고, 글자 읽는 거야. 아니, 돈 안 냈어. 진짜야. 아니, 사이비 아니라니까. 그분 무릎 아픈 사람이야.”
승수의 어깨가 조금 떨렸다. 미연은 등을 돌려 몇 걸음 떨어진 데로 갔지만, 엄마 목소리는 휴대전화 밖으로 새어 나올 만큼 컸다.
“그래서 월요일에 올라와, 안 와?”
“엄마, 그건 아직…….”
“아직? 석 달 치 낸 거 알지? 환불도 안 돼. 엄마가 너 위해서 한 거야.”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낸 거잖아.”
“물어보면 네가 정해? 넌 맨날 생각해 볼게잖아. 생각만 하다 스물두 살 됐어.”
미연은 소나무 줄기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거친 껍질이 손금에 박혔다.
“엄마는 맨날 정해 놓고 물어봐. 물어보는 척만 하고.”
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이 고함보다 오래 이어졌다. 엄마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엄마가 니 나이 때 아무도 안 정해 줘서 이렇게 살아. 그러니까 정해 주는 거야.”
전화가 끊겼다. 미연이 끊은 건지 엄마가 끊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연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가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소나무에서 손을 떼자 손바닥에 송진이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한참 뒤에 승수 쪽으로 돌아왔을 때 승수는 여전히 이끼를 보고 있었다. 들었으면서 못 들은 척하는 데에 아주 서툰 사람이었다.
“다 들으셨죠.”
“어머니 목소리가 갑목이더라고요.”
미연은 웃지 않으려 했는데 웃음이 먼저 새어 나왔다. 웃고 나니 눈가가 뜨거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생일도 모르면서요.”
“그러니까 지금 근거 안 보임 셋째를 세도 돼요.”
“안 세요. 그거 세면 선생님 그만두잖아요.”
미연은 소나무와 칡을 번갈아 보았다. 곧게 선 줄기와, 그 줄기를 감고 올라간 넝쿨.
“선생님. 저는 엄마 말대로 곧게 가야 해요, 아니면 휘어서 돌아가야 해요? 甲처럼, 아니면 乙처럼요.”
“저 칡이 처음부터 감고 올라가기로 정했을까요?”
“……아니겠죠.”
“옆에 소나무가 있었으니까 감은 거예요. 소나무가 없었으면 땅을 기었겠지요. 곧게 갈지 휘어 갈지는 나무가 혼자 정하는 게 아니라, 어느 계절에 어디에 섰는지를 보고 정해져요. 그래서 일간 다음에 바로 월령을 보는 거예요.”
“그럼 제 월령은요? 酉월이요. 가을.”
“그 가을이 미연 씨한테 무엇을 하라고 하는지는 셋째 줄을 배워야 읽혀요. 오늘은 하나만 알아 둬요. 어머니는 소나무고, 미연 씨는 칡이 될지 소나무가 될지 아직 안 정했어요. 둘 중 뭐가 되든 틀린 건 아니에요.”
미연은 송진 묻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문질러도 끈적함이 가시지 않았다. 엄마가 전화 끝에 한 말이, 아무도 정해 주지 않아서 이렇게 산다는 말이, 그 끈적함처럼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승수는 숲길 옆 평평한 바위에 종이 두 장을 꺼내 놓았다. 이름 칸은 또 포스트잇으로 가려져 있었다.
가 甲 丁 甲 丙 戌 丑 申 寅
나 庚 丁 甲 戊 辰 亥 戌 辰
“둘 다 갑목이에요. 순서표 첫째 줄과 둘째 줄을 해 봐요.”
미연은 송진 묻은 손가락을 바지에 닦고 종이를 들었다.
“가는 일간 甲, 월지 丑. 丑은 겨울이죠? 나는 일간 甲, 월지 亥. 亥도 겨울.”
“丑은 한겨울이 끝나 가는 때, 亥는 겨울이 막 시작되는 때예요. 둘 다 언 땅의 나무지요.”
“그럼 탈태요화. 불이 필요하겠네요.”
“이 두 표에서 불을 찾아봐요.”
미연은 천간 줄을 훑었다. 가의 표에는 丁과 丙이, 나의 표에는 丁이 있었다.
“둘 다 불이 있어요. 가는 둘이나 있고.”
“잘 찾았어요. 겨울 나무 옆에 불이 떠 있는 거예요. 그 불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는 나중에 셋째 줄에서 따질 거고요.”
미연은 손을 들어 포스트잇 쪽으로 가져가다가 멈췄다.
“이번엔 꽃집 안 차려요. 직업은 안 맞힐 거예요.”
“그럼 뭐라고 말할래요?”
미연은 잠깐 생각했다.
“둘 다 추울 때 태어난 큰 나무고, 둘 다 옆에 불이 있다. 거기까지요.”
“그게 지금 할 수 있는 정확한 말이에요.”
승수가 포스트잇을 차례로 떼었다. 가는 엘비스 프레슬리, 1935년 1월 미국 미시시피주 투펄로에서 태어나 로큰롤의 왕이라고 불린 가수였다. 나는 이소룡, 1940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나 홍콩 무술 영화를 세계에 알린 배우였다.
“엘비스하고 이소룡이 둘 다 갑목이에요?”
“둘 다 겨울 갑목이고, 둘 다 옆에 불을 두었지요.”
“둘 다 몸으로 무대에 선 사람들이잖아요. 불이 드러낸 건가?”
미연은 말해 놓고 스스로 입을 막았다. 승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뛰었어요.”
“알아요. 이름 보고 뛰었어요.”
“그 차이를 알면 충분해요. 이름을 알고 나면 맞는 글자만 눈에 들어와요. 그래서 이름을 가리고 먼저 읽는 거예요. 하나 더 있어요. 이 두 사람은 태어난 시각이 시주 경계에 걸려 있어요. 엘비스는 새벽 네 시 반쯤, 이소룡은 아침 일곱 시를 조금 넘긴 때라서, 몇십 분만 어긋나도 시주가 바뀌어요. 그래서 오늘은 시주를 빼고 읽은 거예요.”
미연은 두 표의 시주에 작은 물음표를 그렸다.
“乙도 있어요?”
“있어요.”
승수가 포스트잇 붙은 종이 두 장을 더 내밀었다. 미연은 이번에는 받자마자 셋째 칸부터 짚었다.
다 乙 己 乙 丙 亥 丑 丑 戌
라 庚 丙 乙 乙 辰 戌 酉 酉
“다는 일간 乙, 월지 丑. 한겨울 끝의 풀이에요. 라는 일간 乙, 월지 戌. 늦가을 덩굴.”
“乙이 반기는 건 뭐였지요?”
“丙. 꽃은 해가 있어야 피니까.” 미연은 천간 줄을 훑었다. “다는 시주에 丙이 있고, 라는 월주에 丙이 있어요. 둘 다 해가 떠 있네요.”
“라의 표는 아래도 봐요.”
“酉가 둘이에요. 일지랑 시지. 酉는 음의 금이랬으니까…… 금극목. 덩굴이 칼 위에 앉아 있어요?”
“칼 위에 앉은 덩굴이 어떻게 살아남는지가 이 사람 명식의 큰 질문 가운데 하나예요. 그건 셋째 줄에서 다시 꺼낼게요.”
승수가 포스트잇을 떼었다. 다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1756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작곡가였다. 라는 존 레논, 1940년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나 비틀스를 이끈 가수였다.
미연은 입을 열었다가 닫고, 다시 열었다.
“둘 다 음악가예요. 그런데 을목이 음악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거죠?”
“엘비스도 음악가였어요. 갑목이었고요.”
“……아.”
미연은 네 장의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甲 둘과 乙 둘, 네 사람 중 셋이 노래를 했다. 글자가 같아서 같은 길을 간 게 아니었고, 글자가 달라서 다른 길을 간 것도 아니었다. 일간 하나로는 아무것도 맞힐 수 없다는 걸, 승수는 말로 하지 않고 종이 네 장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숲길을 되짚어 내려오는 동안 미연은 자기 명식을 떠올렸다. 연주의 천간에 甲이 있었다. 승수의 시주 천간에는 乙이 있었다.
“제 표에도 甲이 있어요. 일간은 아니지만.”
“壬 입장에서 甲은 뭘까요?”
“수생목이니까, 제가 키우는 나무요.”
“그 나무가 연주에 서 있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십성과 궁위를 배울 때 말할게요. 오늘은 미연 씨 표에도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다는 것까지만.”
“선생님 표의 乙은 시주에 있으니까, 선생님한테도 덩굴이 있네요.”
“그 덩굴이 뭘 감고 올라갈지는 나도 아직 궁금해요.”
계곡 아래로 내려오자 아까 그 소나무가 멀리 보였다. 칡넝쿨은 여기서 보니 소나무의 일부처럼 보였다. 어디까지가 소나무고 어디부터가 칡인지 미연은 끝내 가려낼 수 없었다. 손바닥에 묻은 송진은 산 아래까지 지워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