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6,000자)

세운 — 같은 해, 다른 자리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2월 4일 아침 아홉 시 사십육 분, 승수가 사랑방에서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지금 해가 바뀌었어요.”

미연은 아랫목에서 고개를 들었다. 창밖은 어제와 똑같았다. 마당 장독대에 얼음이 끼어 있었고, 정우가 언 수돗가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었다.

“무슨 해요? 1월 1일은 한 달 전에 지났고, 설날은 모레잖아요.”

“명리에서 해가 바뀌는 건 입춘이에요. 봄이 들어서는 절기. 올해는 오늘 아침 아홉 시 사십육 분이었어요. 방금 2026년 丙午가 끝나고 2027년 丁未가 시작됐어요.”

“그럼 저 지금 나이 한 살 먹은 거예요?”

“나이는 나라에서 정한 대로 먹어요. 해의 기둥이 바뀐 거지.”

“나라에서는 만 나이로 바꿨잖아요. 그럼 나이는 생일에 먹고, 해는 입춘에 바뀌고, 떡국은 설날에 먹고.”

“떡국은 할머니가 정하지요.”

미연은 웃으며 공책 새 장을 펼쳤다. 맨 위에 丁未라고 크게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작게 지난해를 적었다. 丙午. 산에서 승수를 처음 만난 해, 채용 메일이 사라진 해, 이장이 계곡에서 돌아오지 못한 해였다.

“세운이에요. 해마다 들어오는 한 해의 기둥. 대운이 십 년의 계절이라면, 세운은 그 계절 안의 한 해 날씨예요. 원국 여덟 글자 옆에 대운 두 글자, 그 옆에 세운 두 글자를 나란히 놓고 같이 봐요.”

“지난번에 운의 글자 하나를 여덟 글자랑 같이 보라고 했던 거.”

“그 원칙 그대로예요. 해가 바뀌어도 읽는 법은 안 바뀌어요.”

*

미연은 丁未를 아는 사람들의 일간 옆에 하나씩 놓아 보았다. 이것도 이제는 거의 놀이였다. 다만 놀이가 될수록 미연은 더 조심했다. 이름을 붙이는 놀이는 쉽게 이름을 붙이는 버릇이 되니까.

“저는 壬이니까, 丁은 정재. 未는 정관. 그리고 丁이랑 壬은…….”

미연이 펜을 멈췄다. 나중 목록 맨 위에 오래 적혀 있다가 지난겨울에야 지운 글자가 떠올랐다.

“丁壬합이에요. 원국 시간에도 丁이 있는데, 올해 해에도 丁이 와요. 일간 壬 옆에 丁이 둘.”

“합이 둘이면 어떻게 읽는다고 했지요?”

“다투는 합. 한 글자에 짝이 둘이면 묶이는 힘이 흩어진다. 그러니까 좋다고만 할 수도 없고, 나쁘다고만 할 수도 없어요. 여덟 글자랑 대운이랑 같이 봐야 해요.”

“잘했어요.”

미연은 승수의 것을 놓았다. 癸에게 丁은 편재, 未는 편관. 할머니 丙에게 丁은 겁재, 未는 상관. 정우 壬에게는 미연과 같이 정재와 정관이었다. 엄마 壬도 그랬다. 정우는 올가을 乙未 대운까지 들어오니 원국 밖에서 未가 둘이 되는 해였다.

그리고 영수. 庚에게 丁은 정관이었다.

미연은 그 두 글자에서 펜을 멈췄다. 정관. 관청, 법, 벌. 옛 풀이에서 관을 그렇게 읽는다는 걸 미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영수 아저씨에게 법의 해가 온다. 그 문장이 혀끝까지 와 있었다. 다음 달이 선고였다.

“지금 뭐 하고 있어요?”

“뛰려고 했어요.” 미연은 펜을 내려놓았다. “영수 아저씨한테 정관이 와요. 선고가 다음 달이고. 딱 맞잖아요.”

“딱 맞지요.”

“그래서 안 쓸래요. 아저씨가 재판받는 건 2027년이 정관이라서가 아니라, 2026년 10월에 그 계곡에서 그렇게 했기 때문이에요. 해가 丙午였어도 丁未였어도 재판은 받았을 거예요.”

승수가 고구마 껍질을 벗기던 손을 멈추고 미연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그리고 다시 껍질을 벗겼다. 칭찬하지 않았다. 미연은 그게 칭찬이라는 걸 알았다.

*

그날 오후 수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미연아, 나 작년이 내 해였대. 丙午년. 내 일주가 丙午잖아. 해랑 내 일주가 똑같으면 대박 나는 해래. 유튜브에서 그러던데?”

“너 작년에 회사 그만뒀잖아.”

“그러니까. 대박은커녕 퇴직금도 쥐꼬리였어. 근데 오늘부터 丁未래. 이건 뭐래?”

미연은 수화기를 어깨에 끼우고 수아의 명식을 펼쳤다. 甲申, 己巳, 丙午, 壬辰.

“해의 기둥이 일주랑 똑같이 겹치는 걸 복음이라고 불러. 같은 소리가 두 번 울린다는 뜻이야. 대박이라는 말은 어느 책에서도 못 봤어. 그리고 丙한테 丁은 겁재야. 나랑 같은 불, 음양만 다른 불. 옆에 경쟁자가 하나 서는 그림이라고들 하는데…….”

“경쟁자? 나 이제 회사도 없는데 누구랑 경쟁해?”

“그러니까 그 말은 너한테 아직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아. 네가 올해 뭘 하느냐에 따라 그 丁이 뭐가 될지 정해지는 거야.”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가, 수아가 한숨처럼 웃었다.

“너 요즘 말하는 게 그 선생님 같아.”

“칭찬이야?”

“몰라. 생각해 볼게.”

전화를 끊고 나서 미연은 생각해 볼게라는 말이 넉 달 전 엄마한테 자기가 보낸 문자와 똑같다는 걸 알았다. 이번에는 그 말이 도망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

설날 아침, 할머니 집 부엌에서 떡국 냄새가 났다. 할머니는 새벽부터 사골을 고았고, 정우는 떡을 썰다 손가락을 베어 반창고를 붙였고, 승수는 지단을 부치다 두 장을 태웠다. 미연은 김을 굽다가 할머니에게 혼났다. 김은 불에 대는 게 아니라 불을 스치는 거라고.

엄마에게서 영상 통화가 왔다. 화면 속 엄마는 서울 집 부엌에서 혼자 떡국을 끓이고 있었다. 미연은 할머니 집에 남겠다고 했고, 엄마는 그러라고 했다. 대신 반찬 상자가 사흘 전에 택배로 도착해 있었다. 이번 상자에는 장조림 대신 전이 들어 있었다.

“거기 할머니한테 인사드려.”

미연이 화면을 돌리자 할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고 화면 앞으로 왔다. 둘은 처음 보는 사이였다. 할머니가 고개를 숙였다.

“딸 잘 키우셨어요. 김은 못 굽지만.”

화면 속에서 엄마가 웃었다. 미연이 들어 본 적 없는 웃음이었다.

떡국을 먹는 동안 아무도 영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상 한쪽에 수저 한 벌이 남아 있었다. 할머니가 놓은 것이었다. 아무도 그걸 치우지 않았고, 아무도 그걸 보지 않으려 애썼다. 정우가 떡국을 두 그릇 먹고 세 그릇째를 떴다. 할머니가 정우 그릇에 고기를 얹어 주다가, 남은 수저 쪽으로 잠깐 손이 갔다가 멈췄다.

*

선고 날 아침, 할머니는 정우의 흰 셔츠를 다렸다. 다리미가 없어 냄비에 끓인 물을 스테인리스 그릇에 붓고, 그 그릇 바닥으로 셔츠 깃을 눌렀다. 영감이 장에 갈 때마다 그렇게 다려 줬다고 했다. 정우는 그 셔츠를 입고 아침상 앞에 앉았지만 밥을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다. 할머니도 뜨지 않았다. 둘이 나란히 앉아 식은 국을 내려다보는 걸 보고, 미연은 수저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승수만 밥 한 공기를 천천히 다 비웠다. 그리고 빈 그릇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은 오래 서 있어야 해요. 다들 한 숟가락씩만 먹어요. 할머니가 그 말에 숟가락을 들었고, 정우가 따라 들었다.

선고는 3월 16일 오후 두 시였다.

법정은 첫 공판 때보다 붐볐다. 방청석 뒷줄에 기자들이 서 있었고, 마을 사람 몇이 와 있었다. 한결도 가게 문에 휴업 쪽지를 붙이고 왔다. 도해는 오지 않았다. 윤지호는 맨 뒤에서 수첩을 펴고 있었다.

정숙자와 딸 혜진은 첫 공판 때와 같은 자리에 앉았다. 통로를 사이에 두고 할머니와 정우, 미연이 앉았다. 그 통로 너비가 그날보다 넓어 보였다.

영수가 들어왔다. 스웨터 대신 회색 점퍼였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와 어머니 쪽을 한 번 보았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고 아들을 똑바로 보았다. 정우는 아버지를 보지 않고 자기 손을 보았다.

판사가 판결문을 읽었다. 이번에도 길었다. 미연은 모르는 단어를 하나씩 쉬운 말로 바꾸며 들었다.

먼저 위조였다. 어머니의 도장을 몰래 새겨 위임장을 만든 것, 그것을 시행사에 낸 것. 유죄.

그다음이 그날 밤이었다. 판사는 검사가 살인이라고 한 부분부터 짚었다. 피고인이 피해자를 밀친 것은 인정된다. 피해자가 머리를 다쳐 쓰러진 것을 보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가 끊고 떠난 것도 인정된다. 그러나 피고인이 그때 피해자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 죽음을 받아들였다고까지 보기에는 증명이 부족하다. 그래서 살인은 무죄.

방청석 통로 건너편에서 숨이 멎는 소리가 났다. 혜진이었다.

판사는 계속 읽었다. 다만 피고인은 피해자를 밀어 다치게 했고, 그 다침 때문에 피해자가 숨졌다. 사람을 다치게 했는데 그 때문에 사람이 죽은 죄, 상해치사로 유죄. 그리고 판사는 형을 정한 이유를 읽었다. 다친 피해자를 차가운 계곡에 두고 떠났다. 구조를 부를 기회가 있었는데 스스로 끊었다. 그 뒤로 두 달 넘게 아들이 혐의를 받고 구속되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피해자의 가족은 지금까지 용서하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 찾아와 범행을 털어놓았고, 위조와 그날 밤의 일을 모두 인정했다.

“피고인을 징역 7년에 처한다.”

법정이 조용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조용함 속에서 미연은 자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겼다는 느낌은 없었다. 정우가 풀려난 날 같은 숨통 트임도 없었다. 무언가가 끝났다는 느낌조차 없었다. 그냥, 숫자 하나가 정해졌다.

영수가 교도관 사이에서 일어섰다. 나가기 전에 몸을 돌려 방청석을 보았다. 어머니를 보고, 아들을 보고, 통로 건너편을 보았다. 이번에는 거기서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정숙자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오래 숙였다. 교도관이 팔을 건드릴 때까지.

정숙자는 그 인사를 받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그냥 앉아 있었다.

*

법원 앞 계단에서 혜진이 할머니 앞을 막아섰다.

“칠 년이요?”

혜진의 목소리가 계단 아래까지 울렸다. 기자들이 돌아보았다. 할머니는 계단 중간에 멈춰 섰다. 정우가 할머니 앞으로 나서려 했고, 할머니가 손으로 정우를 막았다.

“칠 년 지나면 그 사람은 나와요. 우리 아빠는요? 우리 아빠는 그 계곡에서 밤새 혼자 있었어요. 밤새 삼 도까지 떨어졌대요. 다친 사람한테는 그게 얼음이래요. 살인은 무죄래. 죽을 줄 몰랐대. 그럼 우리 아빠는 누가 죽였어요?”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할머니는 계단 위에서 천천히, 무릎을 굽혀 혜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일흔여덟 살의 허리가 거의 반으로 접혔다.

“내 자식이 했어. 내가 잘못 키웠어.”

혜진의 얼굴이 무너졌다. 무너지면서도 혜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할머니가 사과하지 마세요. 할머니가 한 거 아니잖아요. 그 사람이 해야죠. 그 사람이 평생 해야죠.”

정숙자가 계단을 내려와 딸의 팔을 잡았다. 딸을 끌고 가면서 정숙자는 할머니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 눈에 무엇이 있는지 미연은 읽을 수 없었다. 원망도 용서도 아니었다. 봄 되면 보자던 사람의 눈이었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숙인 허리를 혼자 펴지 못했다. 정우와 미연이 양쪽에서 팔을 잡았다. 할머니의 팔이 놀랄 만큼 가벼웠다.

계단 아래에서 윤지호가 미연에게 다가왔다. 수첩을 들고 있었지만 펜 뚜껑은 닫혀 있었다.

“한마디만 해 줄 수 있어요? 처음부터 이 사건 지켜본 사람으로서.”

미연은 정숙자와 혜진이 사라진 쪽을 보았다. 그리고 할머니의 가벼운 팔을 떠올렸다.

“오늘은 확인할 게 없어요. 판결문에 다 있어요. 제가 보탤 말이 있으면, 그건 다 이름이 될 거예요.”

윤지호는 한참 미연을 보다가 수첩을 덮었다.

“그 말 좋네요. 그것도 안 쓸게요.”

*

그날 밤 미연은 공책에 그날의 일진을 적었다. 3월 16일, 甲午일. 계묘월. 정미년. 그리고 그 아래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甲午가 영수에게 무엇이고, 할머니에게 무엇이고, 혜진에게 무엇인지 적을 수 있었다. 그건 모두 계산이 되는 일이었다.

미연은 대신 혜진의 말을 적었다. 그 사람이 평생 해야죠. 그리고 정숙자의 눈을 적으려다 적을 말을 찾지 못해 빈 줄로 남겨 두었다.

승수가 아랫목에서 그 빈 줄을 넘겨다보았다.

“같은 해, 같은 날이에요. 그런데 법정에 있던 사람마다 그날은 다른 날이었어요.”

“세운이 그래서 같은 글자로 다 다르게 읽히는 거예요?”

“글자는 같아요. 그 글자를 받는 사람의 여덟 글자가 다르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가 달라요. 그리고 그 자리는 글자가 만든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 거고요.”

미연은 빈 줄 옆에 작게 적었다. 같은 해, 다른 자리. 그리고 공책을 덮었다. 사랑방 밖에서 할머니가 영수의 방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설날 아침 상 위에 남아 있던 수저 한 벌이, 그 방 책상 위에 놓여 있다는 걸 미연은 알고 있었다.

3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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