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6,047자)
대운 — 여덟 글자 옆에 놓이는 시간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첫 공판은 입춘 이틀 전, 2월 2일 오전 열 시였다.
법정은 생각보다 작았다. 나무 의자가 다섯 줄씩 두 갈래로 놓였고, 앞쪽 높은 자리에 판사 셋의 의자가 비어 있었다. 미연은 할머니와 정우 사이에 앉았다. 할머니는 아침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우는 무릎 위에 놓은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통로 건너편 맨 앞줄에 정숙자가 있었다. 옆에 서른 남짓한 여자가 앉아 정숙자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 대전에 산다는 딸이었다. 정숙자는 이쪽을 보지 않았다. 할머니도 그쪽을 보지 않았다. 둘 사이의 통로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너비였다.
방청석 뒤쪽 끝에는 윤지호가 수첩을 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 두 칸 건너에 짙은 회색 개량 한복이 있었다. 도해였다.
미연이 그쪽을 보는 걸 정우도 보았다.
“저 사람이 왜 와요?”
“모르겠어요.”
열 시 정각에 옆문이 열렸다. 교도관 둘 사이에서 영수가 걸어 나왔다. 짙은 남색 스웨터 차림이었고, 넉 달 전 밭둑에서 서류 봉투를 들고 서 있던 사람보다 십 년은 늙어 보였다. 머리가 반쯤 하얗게 세어 있었다. 영수는 피고인석에 앉으며 방청석을 한 번 훑었다. 어머니에서 멈췄고, 아들에서 멈췄고, 통로 건너 정숙자에서 멈추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의 손이 미연의 손등 위로 올라왔다. 차가웠다.
*
검사가 공소장을 읽었다. 낭독은 길었다. 미연은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머릿속에서 쉬운 말로 바꿨다. 승수에게 배운 버릇이었다. 낯선 말은 그 자리에서 풀어야 한다.
피고인은 2026년 10월 12일 밤, 계곡 쉼터에서 피해자 민병철과 말다툼 끝에 피해자를 밀어 바위 아래로 떨어뜨렸다. 피해자가 머리를 크게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가 끊었다. 피해자가 그대로 두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떠났다. 피해자는 그날 밤 숨졌다. 검사는 이것을 살인이라고 했다. 죽이려고 마음먹은 건 아니어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도 그냥 둔 마음. 법은 그걸 미필적 고의라고 불렀다. 그리고 피고인은 그보다 두 달 앞선 8월, 어머니의 도장을 몰래 새겨 땅 매각 위임장을 만들고 그것을 시행사에 냈다.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변호인이 일어섰다. 쉰 줄의 남자였다.
“피고인은 위조 사실은 모두 인정합니다. 피해자를 밀친 사실도 인정합니다. 다만 피고인에게 피해자를 죽게 해도 좋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겁에 질려 판단을 잃은 것입니다. 살인이 아니라, 다치게 했는데 그 결과로 사람이 죽은 상해치사로 보아야 합니다.”
판사가 고개를 끄덕이고 받아 적었다. 그다음 변호인이 서류 한 묶음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양형에 참고하실 자료로, 피고인이 처해 있던 상황을 보여 주는 의견서를 제출합니다. 피고인의 정신적 상태에 관한 것으로, 역학 전문가의 소견입니다.”
미연은 그 단어에서 몸이 굳었다. 역학. 사주를 점잖게 부르는 말이었다. 방청석 뒤쪽에서 도해가 허리를 폈다.
판사가 서류를 넘겼다. 첫 장을 읽고, 둘째 장을 읽다가, 안경을 고쳐 썼다.
“변호인, 이건 사주 풀이 아닙니까?”
“피고인이 2023년부터 극도로 불리한 시기에 놓여 있었다는 전문가 의견입니다. 피고인의 일간이 庚인데 丙辰 대운이 들어와 편관, 이른바 칠살의 운에 놓였고, 감당할 수 없는 압박이……”
“변호인.”
판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그날 밤 무엇을 했는지 판단합니다. 피고인의 운이 무엇이었는지는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 자료는 증거로도 양형 자료로도 채택하지 않겠습니다.”
방청석 어딘가에서 누가 작게 웃었다. 정숙자의 딸이었다. 웃음이 아니라 숨이 터진 소리였다. 변호인은 서류를 거두어 자리에 앉았다. 영수는 그 서류가 오가는 내내 고개를 들지 않았다.
미연은 할머니를 보았다. 할머니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미연은 그게 무슨 말인지 들었다.
못난 놈.
*
휴정 시간, 법원 복도. 자판기 커피를 뽑던 미연 앞에 도해가 섰다. 도해는 웃고 있었다.
“아가씨, 또 보네.”
“원장님이 쓰신 거예요? 그 의견서.”
“변호사가 부탁해서. 돈도 받았지. 숨길 것 없어.”
“지난번엔 정우 씨가 피 볼 팔자라고 하셨잖아요. 이번엔 영수 아저씨가 운이 나빠서 그랬대요. 사람이 한 일은 언제 나와요? 원장님 표에서는요?”
도해의 웃음이 조금 얇아졌다.
“운을 보는 게 죄야? 명리에 대운이 있는 거 아가씨도 배웠을 거 아냐. 庚 일간에 丙辰이면 칠살이 덮친 거야. 그건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야.”
“칠살이 덮쳤으면 그 운에 든 庚 일간 사람들은 다 사람을 밀었어요? 2023년부터 丙辰 대운 든 庚 일간이 이 나라에 몇 명인데요.”
도해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복도를 지나던 사람 몇이 둘을 돌아보았다. 정우가 저쪽 끝에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원장님, 작년 7월에 한정식집에서 영수 아저씨한테 귀인 사주라고 하셨잖아요. 천을귀인 끼고 땅 팔면 귀인이 붙는다고. 그때 아저씨는 칠살 대운 한가운데였어요. 원장님 계산대로면요. 그때는 왜 칠살 얘기 안 하셨어요?”
도해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도해는 자판기 쪽으로 몸을 돌려 동전을 넣었다. 버튼을 누르지 않고 한참 서 있었다.
“아가씨는 사람 마음을 몰라. 사람은 좋은 말 들으러 와. 땅 팔까 말까 할 때 좋은 말 해 주고, 죄짓고 무너졌을 때 네 탓 아니다 운 탓이다 해 주는 게 내 일이야. 그게 위로야.”
“그 위로 때문에 정우 씨는 두 달 넘게 갇혀 있었어요.”
도해는 대답하지 않고 커피를 뽑아 들고 갔다. 마시지 않은 커피를 든 채 계단을 내려갔다. 미연의 손에 쥔 종이컵이 어느새 식어 있었다.
점심은 법원 앞 국밥집에서 먹었다. 할머니는 숟가락을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국물만 몇 번 떠먹었다. 정우는 국밥을 반쯤 먹고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할머니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미연에게 물었다.
“미연 씨, 아까 그거요. 칠살 운. 그거 진짜 있는 거예요?”
“대운 계산은 있어요. 원장이 계산은 맞게 했을 거예요.”
“그럼 아버지가…… 운이 나빠서 그런 거면요.”
정우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미연은 정우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았다.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 나쁜 계절에 있었던 사람이길. 두 달 넘게 자기를 거기 두고 입을 다문 사람이 아버지가 아니라 운이었길.
미연은 국밥 그릇을 옆으로 밀었다.
“정우 씨, 넉 달 전에 원장이 정우 씨한테 피 볼 팔자라고 했을 때, 그 말 믿고 싶었어요?”
“아니요.”
“왜요?”
“제가 안 했으니까요.”
“아버지는 하셨어요. 본인이 법정에서 인정하셨어요. 밀었다고, 전화 끊었다고. 그걸 운이 했다고 하면, 정우 씨가 안 한 걸 원장이 정우 씨가 했다고 한 거랑 똑같은 짓을 거꾸로 하는 거예요.”
정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가 난 건지 울려는 건지 미연은 알 수 없었다. 정우는 한참 숟가락만 내려다보다가, 국밥 그릇을 다시 끌어당겨 남은 걸 다 먹었다. 꾸역꾸역, 한 숟가락씩.
“아버지가 한 거면, 아버지가 갚아야죠.”
국밥 그릇 바닥이 보였을 때 정우가 그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화장실에서 돌아와 빈 그릇을 보고는, 정우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묻지 않았다.
공판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오 형사가 증인석에 섰고, 한결이 증인석에 섰다. 한결은 CCTV 저장 장치를 포맷하려다 멈춘 날 이야기를 하면서 두 번 말을 더듬었다. 판사가 다음 공판 날짜를 불렀다. 그리고 선고는 3월 중순으로 잡혔다.
*
그날 밤 사랑방에서 승수가 『자평진전』을 펼쳤다. 운을 논한다는 편이었다.
“오늘 법정에서 대운이라는 말이 나왔다면서요. 그럼 오늘 배워요. 제대로.”
論運與看命,無二法也。看命以四柱干支,配月令之喜忌。而取運則又以運之干支,配八字之喜忌。
“논운여간명, 무이법야. 간명이사주간지, 배월령지희기. 이취운즉우이운지간지, 배팔자지희기. 운을 논하는 것과 명을 보는 것은 두 가지 법이 아니다. 명을 볼 때는 사주의 간지를 월령의 희기에 맞춰 보고, 운을 볼 때는 운의 간지를 팔자의 희기에 맞춰 본다.”
승수가 한 줄을 더 읽었다.
故運中每運行一字,即必以此一字,配命中八字而統觀之,爲喜爲忌,吉凶判然矣。
“고운중매운행일자, 즉필이차일자, 배명중팔자이통관지, 위희위기, 길흉판연의. 그러므로 운에서 한 글자가 올 때마다, 반드시 그 한 글자를 명 속의 여덟 글자와 맞춰 함께 보아야 한다. 그래야 기쁜 것인지 꺼리는 것인지, 길흉이 분명해진다.”
“길흉이 분명해진대요.”
“이 책은 그렇게 말해요. 그 말은 그대로 읽고, 앞부분을 붙들어요. 운의 글자 하나를 혼자 보지 말고 여덟 글자와 함께 보라는 거. 庚 일간에 丙이 오면 칠살, 거기서 멈추면 안 되고 그 사람의 여덟 글자 전체에서 그 丙이 무엇을 하는지 봐야 한다는 거. 도해 원장은 그 앞부분을 건너뛰었어요.”
승수가 공책 새 장에 표를 그렸다.
“대운은 십 년마다 바뀌는 큰 계절이에요. 월주에서 출발해서 한 칸씩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요. 앞으로 가는 걸 순행, 뒤로 가는 걸 역행이라고 하지요. 남자이면서 태어난 해의 천간이 양이거나, 여자이면서 해의 천간이 음이면 순행. 그 반대면 역행.”
“저는 여자고 연간이 甲, 양이니까 역행.”
“월주가 癸酉니까, 뒤로 한 칸씩.”
“壬申, 辛未, 庚午, 己巳.”
“첫 대운이 언제 시작하는지가 대운수예요. 역행이면 태어난 날에서 거꾸로 바로 앞의 절기 들어온 날까지, 순행이면 앞으로 다음 절기 들어온 날까지 날수를 세요. 사흘을 한 해로 쳐요.”
미연은 휴대전화로 만세력을 열어 확인했다. 계산 앱은 일곱 해 일곱 달 남짓을 내놓았다. 만으로 여덟 살을 앞둔 봄, 2012년 무렵에 첫 대운 壬申이 들어왔고, 2022년 무렵에 辛未로 바뀌었다. 지금 미연은 辛未 대운의 다섯째 해쯤에 서 있었다.
“영수 아저씨도 해 볼게요. 법정에서 나온 거 맞는지.”
영수의 연간은 壬, 양이었고 남자였다. 순행. 월주 庚戌에서 앞으로, 辛亥, 壬子, 癸丑, 甲寅, 乙卯, 丙辰. 대운수는 한 살이 채 안 됐다. 그러면 丙辰 대운은 2023년 가을 무렵부터였다.
“맞아요. 庚 일간한테 丙은 편관이고요. 계산은 원장이 맞게 했어요.”
“계산은 맞았지요. 그다음이 틀렸고.”
미연은 정우의 것도 해 보았다. 연간 辛, 음이고 남자라서 역행. 월주 戊戌에서 뒤로, 丁酉, 丙申, 乙未. 시를 몰라 대운수에 몇 달 오차가 있었지만, 지금의 丙申 대운이 올가을쯤 乙未로 바뀐다는 건 흔들리지 않았다.
“정우 씨는 올해 대운이 바뀌어요.”
“그 말을 정우 씨한테 할 거예요?”
미연은 펜을 멈췄다. 할 수 있었다. 올가을에 큰 계절이 바뀌어. 정우는 아마 그 말을 붙들 것이다. 오늘 법정에서 영수가 붙들려던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안 할래요. 물어보면 할게요. 그리고 그때는 여덟 글자랑 같이요.”
“그거면 돼요.”
그때 사랑방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군고구마 접시를 들고 들어왔다. 법정에서 돌아온 뒤 처음 입을 연 것이었다.
“그 대운이란 게 뭐야. 영수 변호사가 그거 들고 와서 판사한테 혼났잖아.”
“십 년마다 바뀌는 큰 계절 같은 거예요. 할머니 것도 뽑아 드릴까요?”
할머니가 고구마 접시를 내려놓고 미연 옆에 앉았다. 고구마 껍질을 벗기면서 한참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됐다. 나는 계절은 밭이 알려 줘. 언제 얼고 언제 녹는지. 그거 보고 칠십 년 살았어.”
할머니가 껍질 벗긴 고구마를 반으로 갈라 미연과 승수 손에 하나씩 쥐여 주었다.
“근데 영수는 밭을 안 봤어. 그래서 그래.”
할머니는 일어나 나갔다. 미연은 뜨거운 고구마를 손바닥 사이로 옮기며 그 말을 곱씹었다. 승수도 고구마를 들고 한참 먹지 않았다.
미연은 자기 대운표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辛未. 壬 일간에게 辛은 정인, 未는 정관이었다. 좋은 이름 둘이었다. 그 이름 위로 지난 넉 달이 지나갔다. 채용 중단 메일, 엄마의 학원 영수증, 회관 앞 화이트보드, 구치소 면회실 유리, 정숙자의 고무장갑. 그 어느 것도 정인이나 정관이라는 이름에 담기지 않았다.
미연은 표 아래에 적었다. 대운은 계절이다. 그 계절에 무엇을 했는지는 표에 없다. 그리고 그 아래 한 줄을 더 적다가 멈췄다. 영수 아저씨의 칠살 계절에도 밀지 않는 길이 있었다. 미연은 그 줄을 지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