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6,034자)
세부 조건으로 다시 읽기 — 스승의 명식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밤새 눈이 왔다. 아침에 사랑방 문을 여니 마당이 하얗게 덮여 있었고, 장독대 뚜껑마다 눈이 소복하게 얹혀 있었다. 승수는 이미 등산화 끈을 매고 있었다.
“거북바위 가요.”
“이 눈에요? 선생님 무릎으로요?”
“오늘은 거기서 해야 할 이야기예요.”
미연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께 사랑방에서 승수가 「다음에 이야기해요」라고 했던 연지의 빈자리가 떠올랐다. 미연은 아이젠을 두 켤레 빌리러 정우 방문을 두드렸고, 정우는 자다 깬 얼굴로 아이젠과 함께 보온병을 내주었다. 할머니가 끓여 둔 생강차라고 했다.
산길은 처음 오르던 날보다 길었다. 눈 밑에 숨은 돌을 밟을 때마다 미연은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고, 세 번째로 엉덩방아를 찧었을 때 승수가 돌아보았다.
“끈기의 사람.”
“그 자기소개서 아직 기억하세요?”
“미연 씨가 첫날 세 번 지우고 다시 썼다고 했잖아요. 머릿속으로.”
미연은 눈을 털고 일어나 다시 걸었다. 엉덩이가 젖어 차가웠다. 그래도 웃음이 났다. 넉 달 전에는 세 걸음마다 멈추던 다리가 이제 눈길에서도 승수를 따라가고 있었다. 승수가 오히려 자주 멈췄다. 오른쪽 무릎을 짚는 횟수가 늘었다.
거북바위는 눈을 이고 있었다. 승수는 장갑 낀 손으로 바위 한쪽의 눈을 쓸어 내고 그 자리에 방석 두 개를 깔았다. 첫날 승수가 앉아 있던 자리였다. 미연이 잔돌을 밀어 굴렸던 자리.
“내 명식, 처음부터 다시 읽어 봐요. 이번엔 세부까지 다.”
*
미연은 공책을 펼쳤다. 손가락이 곱아 펜이 잘 안 잡혔다. 己酉, 庚午, 癸未, 乙卯. 넉 달 가까이 들여다본 여덟 글자였다. 처음 이 표를 받던 날에는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도 몰랐다.
“첫째 줄, 일간 癸. 음의 물, 비와 이슬. 둘째 줄, 월령 午. 한여름 한가운데. 한여름의 비라서 쉽게 마르고, 계절의 힘을 못 받아요. 득령 못 함.”
“셋째 줄.”
“월간 庚이 정인이에요. 쇠가 물을 낳으니까 일간을 도와요. 연지 酉도 금이라 같은 쪽이고요. 연간 己는 편관, 일간을 누르는 쪽. 시간 乙은 식신, 일간이 낳는 쪽. 일지 未는 지장간에 乙·丁·己가 들어 있어서 물의 뿌리가 안 돼요. 그래서 1차로는 신약, 庚과 酉가 소중한 명식이라고 썼어요. 그게 지난번 거예요.”
미연은 공책을 몇 장 넘겨 처음 승수의 명식을 풀었던 날의 페이지를 찾았다. 그날 승수는 처음으로 틀렸다고 단호하게 말했었다. 미연은 그 단호함에 상처받았고, 다음 날 승수는 바위에 오지 않았다. 그 페이지 귀퉁이에 미연이 그날 밤 적어 둔 글씨가 있었다. 선생님은 왜 화를 냈을까.
“이제 세부요.”
미연은 하나씩 짚었다. 이번에는 처음 배운 순서대로, 다섯째 줄의 도구들을 하나씩 꺼냈다.
“합. 시간 乙과 월간 庚이 乙庚합이에요. 그런데 사이에 일간 癸가 끼어 있어서 떨어진 합. 정인 庚이 식신 乙 쪽으로 마음이 끌리는 그림이지만, 떨어져 있으니 묶여 버리진 않아요. 午未합은 월지랑 일지가 붙어 있고요. 午와 未는 둘 다 불기와 마른 흙이라, 합하면 여름이 더 뜨거워지는 쪽.”
“충은?”
“연지 酉와 시지 卯가 卯酉충. 연주랑 시주라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어요. 멀리서 부딪치는 거. 그리고 운성. 癸를 음간 역행으로 보면, 卯가 장생, 酉가 병, 未가 묘, 午가 절이에요.”
“절이 어디에 있지요?”
“월지요. 계절 자리.” 미연은 잠깐 펜을 멈췄다. “절이 끊어진다는 이름이라서, 예전 같으면 저 여기서 뛰었을 거예요. 근데 운성은 이름이지 일어난 일이 아니에요. 한여름에 비가 마른다는 것과 같은 말을 다른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승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연은 마지막 항목으로 넘어갔다.
“신살하고 공망. 癸 일간이면 시지 卯에 천을귀인이랑 문창이 같이 있어요. 그리고 일주 癸未는 甲戌순이라서 申과 酉가 공망이에요. 연지 酉가 비어 있어요.”
미연은 거기서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니까 연주에 편관 己랑 공망 든 酉가 같이 있어요. 일간을 누르는 글자랑, 일간을 돕는 글자인데 비어 있는 자리. 연주는 어린 시절이나 집안의 자리로 읽고요. 그 자리를 卯가 멀리서 충으로 치고 있어요.”
미연은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다음 문장이 혀끝까지 와 있었다. 어린 시절에 엄한 무언가가 있었고, 도와줘야 할 것이 비어 있었다. 그 문장은 그럴듯했다. 너무 그럴듯했다.
“여기서 더 가면 뛰는 거죠.”
“아니요.” 승수가 말했다. “거기까지는 근거예요. 미연 씨는 지금 글자가 말하는 데까지 정확히 갔어요. 그다음은 글자가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말할게요.”
*
승수는 보온병 뚜껑에 생강차를 따라 두 손으로 감쌌다. 김이 승수의 얼굴 앞에서 흩어졌다.
“나는 서울에서 철학관을 했어요. 스물다섯 살부터 이십 년 가까이. 손님이 많았어요. 잘 맞힌다는 소문이 났거든요. 도해 원장 같은 사람이었어요. 아니, 도해 원장보다 더 잘했어요. 그 사람보다 말을 잘했으니까.”
미연은 승수를 보았다. 승수는 미연을 보지 않고 눈 덮인 능선을 보고 있었다.
“2014년 봄에 한 어머니가 왔어요. 열아홉 살 아들 사주를 들고. 아들이 고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집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산다고 했어요. 아버지랑 몇 번 크게 부딪쳤고. 어머니는 그게 무슨 팔자냐고 물었어요.”
승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한참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주에 살이 겹쳤다고 했어요. 괴강이 있고, 백호가 있고, 양인이 있다고. 이 아이는 집에 두면 부모를 친다고. 떨어져 살아야 아이도 살고 집도 산다고. 그때 나는 그게 근거라고 믿었어요. 표에 다 있었으니까. 어느 표인지, 무슨 기준인지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야기를 먼저 다 들었고, 들은 이야기에 맞는 글자가 다 보였으니까.”
미연의 손이 무릎 위에서 굳었다. 피 볼 살 둘. 살 낀 놈이 집안에 들어오면. 회관 앞마당의 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아들을 지방의 기숙 학원에 보냈어요. 재수 학원. 집에 오지 말고 거기서 공부하라고.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그해 겨울에, 학원에서 나와 혼자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다가 차에 치였어요. 집에 가려고 했대요. 크리스마스 전날이었어요.”
눈 위로 바람이 지나갔다. 소나무 가지에서 눈 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장례식에 갔어요. 가면 안 되는 걸 알았는데 갔어요.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와서,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어요. 선생님 말대로 집에 안 뒀어요.”
승수는 거기서 말을 멈췄다. 승수의 눈에서 눈물 한 줄이 흘러내렸다가, 찬바람에 금방 식었다. 승수는 그걸 닦지 않았다.
미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첫날 이 바위에서 승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맞는 글자만 고르면 설명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 말은 남에게 하는 경고가 아니었다. 승수가 자기한테 하는 말이었다.
“그 어머니가 원망했어요?”
“아니요. 원망했으면 차라리 나았을 거예요. 그 어머니는 끝까지 내 말을 믿었어요. 믿었으니까 아들을 보냈고, 보냈으니까 그렇게 됐는데, 그래도 내 말이 맞았다고 믿었어요. 살이 그만큼 셌다고. 내가 아니었으면 더 일찍 더 나쁘게 됐을 거라고.”
승수가 처음으로 미연을 보았다.
“그게 이름이 하는 일이에요. 한번 붙으면 사람이 다 사라질 때까지 안 떨어져요.”
*
승수는 철학관을 그해 겨울에 닫았다고 했다. 그리고 십 년 동안 원전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연해자평』, 『자평진전』, 『적천수』. 같은 문장을 읽어도 전에는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이 책들이 신살보다 격국을, 이름보다 관계를, 결론보다 순서를 먼저 말하고 있다는 것. 그동안 자기는 그 책들을 들고 정반대로 일했다는 것.
“그 뒤로 누구를 가르치든 처음에 약속을 해요. 근거 안 보임 셋이면 그만둬도 된다. 그 아이 어머니한테 나는 근거를 하나도 안 보여 줬으니까. 하나라도 보여 줬으면, 그 어머니가 물어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게 어느 책에 있어요, 하고.”
“다른 제자들은요? 셋 센 사람 있었어요?”
“없었어요. 다들 둘에서 멈추더라고요. 내가 무서워서인지, 미안해서인지. 미연 씨가 처음이에요. 그것도 엄마 앞에서.”
미연은 웃지 못했다. 웃을 자리가 아니었는데, 승수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다. 그 갑목 농담 하나에 걸려 있던 무게를 미연은 그제야 알았다.
“첫날 여기서 생각이 많아서 앉아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그 아이 기일 무렵이었어요. 매년 그때는 여기 와요.”
“정우 씨 일 때 그렇게 단호하셨던 것도…….”
“그 아이랑 같은 말을 들었으니까요. 피 볼 살, 집안을 친다. 표만 다를 뿐이었어요.”
승수가 점퍼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맨 안쪽 칸에서 네 번 접힌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종이는 접힌 자리마다 닳아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승수는 그 종이를 펴지 않고 미연에게 내밀었다.
“그 아이 명식이에요. 그때 내가 쓴 거.”
미연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펴려고 엄지를 접힌 자리에 대었다가, 멈췄다.
“읽어도 돼요?”
“읽지 말아요.”
승수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나는 그때 읽었어요. 그 아이 얼굴은 한 번도 안 보고, 그 종이만 읽었어요. 그 아이는 그 종이가 아니었는데.”
미연은 종이를 펴지 않았다. 네 번 접힌 그대로 승수에게 돌려주었다. 승수는 그걸 지갑 맨 안쪽 칸에 다시 넣었다.
그 종이가 지갑 속으로 사라지자, 미연 안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랐다. 슬픔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화였다.
“그럼 처음부터 말하셨어야죠.”
승수가 미연을 보았다.
“정우 씨 일 터졌을 때요. 형사가 왔을 때, 회관 앞에서 제가 화이트보드에 일주 적을 때. 선생님은 맨 뒤에 서 있기만 했잖아요. 저 혼자 떨면서 말하는 거 보면서. 선생님이 그때 이 얘기를 했으면, 철학관 하던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했으면, 사람들이 훨씬 빨리 들었을 거예요.”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왜 안 했어요? 창피해서요?”
“그것도 있어요.”
승수는 피하지 않았다. 그게 미연을 더 화나게 했다.
“그럼 저는 뭐예요? 저 가르치는 거, 그 아이한테 갚는 거예요? 저는 그 빚 갚는 데 쓰이는 거예요?”
말을 뱉고 나서 미연은 숨을 몰아쉬었다.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승수는 한참 대답하지 않다가, 아주 천천히 말했다.
“처음엔 그랬을 수도 있어요. 첫날 미연 씨가 날짜를 달라고 했을 때, 그 어머니 얼굴이 겹쳤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 미연 씨는 내가 못 한 걸 하고 있어요. 나는 이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할 용기가 없었어요. 미연 씨는 근거만 들고 그 앞에 섰고요. 그건 빚 갚는 게 아니라, 미연 씨 거예요.”
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는 그대로였는데, 그 화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눈 위에서 맴돌았다. 미연은 일어나 방석을 털었다. 탁탁 터는 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컸다.
*
내려가는 길에는 미연이 앞장섰다. 내리막에서 승수의 오른쪽 무릎이 자꾸 꺾였다. 미연은 몇 걸음마다 멈춰 승수가 따라오기를 기다렸다. 첫날 승수가 미연에게 그랬던 것처럼, 팔을 내밀지는 않았다. 승수가 스스로 나뭇가지를 짚을 때까지 기다렸다.
중턱쯤에서 미연이 물었다.
“그 일을 변명 안 하시네요. 그때는 다들 그렇게 했다든가, 어머니가 원해서였다든가.”
“변명하면 그 아이 자리가 또 비니까요. 내 이야기가 되고, 그 아이 이야기가 아니게 되니까.”
미연은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이틀 전 정숙자가 한 말이 겹쳐졌다. 당신들은 우리 남편 얘기는 안 하잖아.
“그 아이 이름이 뭐였어요?”
승수가 걸음을 멈췄다. 한참 뒤에 이름을 말했다. 세 글자였다. 미연은 그 이름을 공책에 적지 않았다. 대신 소리 내어 한 번 따라 불렀다. 눈 덮인 숲에서 그 이름이 아주 작게 울렸다가 사라졌다.
산 아래에 닿았을 때 할머니 집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대문 앞에서 정우가 눈을 쓸다가 둘을 보고 빗자루를 흔들었다. 승수가 그쪽을 보고 손을 들었다.
그날 밤 미연은 공책의 승수 명식 아래에 세부까지 더한 풀이를 다시 적었다. 연지 酉 공망, 편관 己와 같은 기둥. 卯酉충. 그리고 그 아래 한 줄을 띄우고 적었다. 글자는 여기까지 말한다. 나머지는 선생님이 말했다.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건 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스스로 말하기로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