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6,075자)
공망 — 비어 있는 자리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할머니는 반찬통 네 개를 보자기에 싸서 미연 앞에 내밀었다.
“숙자한테 갖다줘.”
미연은 보자기를 받지 못하고 할머니를 보았다. 정숙자. 돌아가신 이장의 아내였다. 대전 사는 딸네로 짐을 옮긴다는 말이 마을에 돈 지 일주일째였다.
“할머니가 가시지…….”
“내가 어떻게 가.”
할머니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할머니는 보자기 매듭을 한 번 더 조이고, 조인 매듭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손등의 핏줄이 도드라졌다.
“사십 년을 같이 살았어, 저 아래 위로. 숙자 시집올 때 내가 이불 꿰매 줬어. 영감 갈 때 숙자 남편이 상여 맨 앞에 섰고. 근데 내 자식이 그 사람을…….”
할머니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대신 보자기를 미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가서 나 대신 고개 숙여. 받아 주면 받아 주는 거고, 안 받으면 들고 와.”
*
그 전날 밤, 사랑방에서 승수는 공망을 가르쳤다.
“천간은 열 개, 지지는 열두 개지요. 甲子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짝을 지어 나가면, 천간이 열 번 만에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지지는 두 개가 남아요. 甲子, 乙丑, 丙寅…… 癸酉까지 열 개. 戌과 亥는 짝 없이 남지요. 그 열 개 한 묶음을 순이라고 하고, 짝을 못 지은 두 지지를 그 순의 공망이라고 해요. 비어 있는 자리.”
“예순 개를 여섯 묶음으로 나누면, 묶음마다 빈 자리가 둘씩.”
“맞아요. 그래서 일주가 어느 순에 속하는지만 알면 공망을 구할 수 있어요. 일간에서 거꾸로 甲까지 세고, 일지도 같은 칸 수만큼 거꾸로 세요. 거기가 그 순의 첫머리예요.”
승수가 자기 일주 癸未를 적었다. 癸에서 甲까지 거꾸로 아홉 칸, 未에서 아홉 칸을 거꾸로 세면 戌. 甲戌순이었다. 甲戌부터 癸未까지 열 개를 적어 내려가니 申과 酉가 남았다.
“내 공망은 申과 酉예요. 내 연지가 酉지요.”
“선생님 연지가 비어 있는 자리예요?”
“그렇게 부르지요.”
미연은 승수가 그 말을 할 때 아주 잠깐 창 쪽을 본 것을 보았다. 무엇을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창밖은 깜깜했다.
미연은 자기 것부터 구했다. 壬子. 甲辰순, 공망은 寅과 卯. 미연의 원국에는 寅도 卯도 없었다.
“저는 빈 자리가 원국 밖에 있네요.”
“그럼 공망이 원국에서 할 일은 없지요. 운에서 寅이나 卯가 들어올 때 다시 보면 되고요.”
미연은 할머니 丙戌, 정우 壬戌, 영수 庚子를 차례로 구했다. 할머니는 午未, 정우는 子丑, 영수는 辰巳. 셋 다 원국에 그 글자가 없었다. 그리고 손이 마지막 명식 위에서 멈췄다. 민병철. 甲辰, 壬申, 壬寅. 壬寅은 甲午순이었다. 공망은 辰과 巳.
연지가 辰이었다.
미연은 펜을 쥔 채 오래 앉아 있었다. 승수는 그 명식이 누구 것인지 묻지 않았다.
“공망이 들면 어떻게 돼요?”
“옛 책은 그 자리의 힘이 빈다고 해요. 연지는 조상이나 어린 시절의 자리로 읽으니까, 그 자리가 허전했다고 풀기도 하지요. 그런데 공망은 풀리는 조건도 많아요. 충을 만나면 풀린다, 합을 만나면 풀린다, 운에서 그 글자가 오면 채워진다. 비었다는 건 없다는 게 아니라 아직 안 채워졌다는 뜻에 가까워요.”
“그럼 그날 일이 거기 있었어요? 이장님 공망에?”
미연은 묻고 나서 스스로 입술을 깨물었다. 승수가 미연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미연 씨는 지금 그걸 찾고 있었어요?”
“……네.”
“찾으면 뭐가 돼요?”
미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찾으면 이야기가 딱 떨어진다. 비어 있는 자리, 계곡의 밤, 끊긴 119. 그 이야기를 만드는 데 일 분도 안 걸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영수가 한 일을 공망이 한 일로 바꿔 놓을 것이었다.
미연은 공책에서 민병철의 공망 옆에 적은 辰巳 두 글자에 줄을 그었다. 지우지는 않았다. 계산은 맞았으니까. 다만 그 옆에 적었다. 계산은 맞음. 이야기는 만들지 않음.
*
보자기를 들고 회관 앞을 지나는 동안, 평상에 앉아 있던 노인 둘이 이야기를 멈추고 미연을 보았다. 박순례네 보자기라는 걸 다들 알아보는 눈치였다. 미연은 걸음을 늦추지 않으려고 보자기 매듭을 꼭 쥐었다.
정숙자의 집은 마을회관 바로 뒤에 있었다. 대문 기둥에 붙었던 상중이라는 종이는 떼어졌지만, 떼어 낸 자리의 테이프 자국이 네모나게 남아 있었다. 마당에는 이삿짐 상자가 반쯤 쌓여 있었다.
정숙자는 마당 수돗가에서 그릇을 씻고 있었다. 예순 언저리의 작은 여자였다. 고무장갑을 낀 손이 미연을 보고 멈췄다.
“누구?”
“박순례 할머니가 보내셨어요.”
정숙자는 고무장갑을 벗지 않았다. 미연이 내민 보자기를 한참 보았다.
“순례 언니가 보냈어? 자기가 오지.”
“못 오시겠대요. 대신 고개 숙이라고 하셨어요.”
미연은 고개를 숙였다. 오래 숙였다. 수돗가의 물이 계속 흘렀다. 정숙자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들어와. 마당에 세워 놓으면 동네 사람들이 또 말해.”
거실은 반쯤 비어 있었다. 텔레비전이 놓였던 자리에 먼지 자국만 남았고, 벽에는 액자를 뗀 못 자국이 줄지어 있었다. 떼지 않은 액자 하나가 소파 위에 걸려 있었다. 젊은 이장이 마을회관 앞에서 버스 앞에 서서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버스 앞 유리에 종이가 붙어 있었다. 마을버스 첫 운행.
정숙자는 보자기를 풀지 않고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미연 맞은편에 앉았다.
“아가씨가 그 산에서 사주 배운다는 애지? 회관 앞에서 같은 일주 어쩌고 한.”
“네.”
“그날 나도 있었어. 맨 뒤에.”
미연은 그날 회관 앞을 떠올렸다. 화이트보드, 도해, 주민들. 맨 뒤에 누가 서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아가씨가 우리 남편 사주 뽑아 봤다고 했지. 그런데 말하지 않겠다고. 우리 남편은 글자가 아니라 사람이라서.”
“네.”
“고마웠어. 그 말은. 혜진이도 그랬대. 집에 오는 차 안에서 그 얘기만 했어.” 정숙자가 식탁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었다. “근데 그다음부터 아무도 우리 남편 얘기를 안 해. 신문에는 피 볼 팔자라던 청년 얘기, 귀인 사주라던 아들 얘기, 철학관 원장 얘기. 아가씨 얘기도 나오더라. 산에서 사주 배운 아가씨가 마을을 바꿨다고. 우리 남편은 맨날 그냥 숨진 이장이야. 이름도 안 나와. 민 아무개 씨, 62세.”
미연은 무릎 위에서 손을 맞잡았다. 할 말이 없었다. 신문을 다 읽었는데, 정숙자의 말이 맞았다. 미연도 공책에 민병철을 「이장」이라고만 적어 왔다. 명식 옆에도, 사건 메모 옆에도.
“당신들은 우리 남편 얘기는 안 하잖아.”
정숙자의 목소리는 높아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우리 남편, 서른 살에 이장 했어. 그때 마을에 버스가 하루에 한 번 들어왔어. 군청에 열몇 번을 찾아가서 네 번으로 늘렸어. 저 사진이 그날이야. 분교 문 닫는다고 할 때도 교육청 앞에서 사흘을 앉아 있었고. 결국 닫았지만. 순례 언니 영감 돌아가셨을 때 상여 메자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 남편이 동네 청년 남은 셋 끌고 와서 맨 앞에 섰어.”
정숙자가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리조트도 그래. 젊은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까. 리조트 들어오면 일자리 생기고, 애들 돌아오고, 버스도 늘고. 그 사람은 그렇게 믿었어. 그러다 도장값에 눈이 멀었지. 영수가 위조한 거, 우리 남편도 알았어. 나도 알아. 경찰이 다 말해 줬어. 우리 남편 잘못한 거 맞아.”
정숙자가 일어나 안방에서 수첩 하나를 들고 나왔다. 손바닥만 한 갈색 수첩이었다. 표지 귀퉁이가 닳아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이거 봐.”
수첩 안에는 이름과 날짜가 빼곡했다. 박순례 3월 2일. 김정우 10월 26일. 한결 6월 14일. 마을 사람 이름이 가나다순도 아니고 집 순서대로 적혀 있었다. 날짜 옆에는 떡, 국수, 귤 한 상자 같은 말이 붙어 있었다.
“이장 하는 동안 동네 사람 생일을 다 적어 놨어. 사주 보려고 그런 게 아니야. 생일날 떡 돌리려고. 혼자 사는 노인네들한테는 국수 사 들고 가고. 삼십 년을 그랬어.”
미연은 수첩에서 정우의 이름을 보았다. 10월 26일. 도해가 단톡방에 올린 명식과 같은 날짜였다. 한 사람은 그 날짜로 피 볼 팔자를 적었고, 한 사람은 그 날짜 옆에 떡이라고 적었다.
“이 수첩 경찰이 가져갔다가 돌려줬어. 아무 단서도 없다고. 맞아. 이건 단서가 아니야.”
정숙자는 거기서 처음으로 숨을 골랐다.
“근데 잘못했다고 계곡에 밤새 버려져도 되는 건 아니잖아.”
미연은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할머니 대신이 아니라 미연 자신 대신이었다.
한참 뒤에 정숙자가 물었다. 아까보다 작은 목소리였다.
“아가씨, 하나만 물어보자. 우리 남편 사주에 그날이 있었어? 그날 그렇게 갈 팔자였어?”
미연은 어젯밤 공책을 떠올렸다. 辰巳에 그은 줄. 계산은 맞음. 이야기는 만들지 않음. 정숙자가 그 이야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미연은 알 수 없었다. 팔자였다고 하면 차라리 덜 억울할지도 몰랐다. 아무도 탓하지 않아도 되니까.
“없어요.”
미연은 정숙자의 눈을 보고 말했다.
“그런 건 없어요. 아저씨 사주에 그날은 없어요. 그날은 사람이 만든 거예요. 아저씨가 계곡에서 다치신 것도, 밤새 거기 계셨던 것도. 팔자가 한 게 아니에요.”
정숙자의 얼굴이 무너졌다. 소리 없이 무너졌다. 정숙자는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연은 그 손에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걸 보았다. 미연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가가지도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고개를 숙이고 오라고 한 자리였다.
*
정숙자는 보자기를 풀었다. 멸치볶음, 장조림, 무생채, 갓김치. 정숙자는 무생채 뚜껑을 열어 냄새를 맡더니 짧게 웃었다.
“순례 언니 무생채는 식초를 너무 넣어. 사십 년째 그래.”
정숙자는 빈 반찬통 하나를 찾아 미연에게 쥐여 주었다. 안에 뭔가 들어 있었다. 마을버스 시간표였다. 코팅된 종이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첫차 일곱 시 십 분, 막차 일곱 시 사십 분.
“우리 남편이 회관 게시판에 붙여 놨던 거야. 떼어 왔어. 버리기 그래서. 정우한테 줘. 그 애 이제 밭 한다며. 읍내 나갈 때 보라고.”
“정우한테요?”
“그 애가 한 거 아니잖아.” 정숙자가 고개를 돌렸다. “순례 언니한테는 이렇게 전해. 그 집 아들이 한 거지 언니가 한 거 아니라고. 근데 당분간은 보지 말자고. 봄 되면 그때 보자고.”
*
돌아오는 길에 미연은 버스 시간표를 몇 번이나 꺼내 보았다. 첫차 일곱 시 십 분. 그 숫자 위에 손가락으로 쓴 듯한 작은 글씨가 있었다. 비 오면 십 분 늦음. 이장의 글씨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대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연이 빈 손으로 오는 걸 보고 할머니의 어깨가 내려갔다.
“받았어?”
“받으셨어요. 무생채는 식초를 너무 넣었대요.”
할머니가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미연은 정숙자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언니가 한 거 아니라고. 근데 당분간은 보지 말자고. 봄 되면 보자고.
할머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미연은 할머니가 사랑방 맞은편, 몇 달째 닫혀 있던 방문을 여는 걸 보았다. 영수가 어릴 때 쓰던 방이었다. 서울로 올라간 뒤로 명절에나 한 번씩 열리던 방이라고 정우가 말했었다. 할머니는 그 방 문턱에 걸터앉아 빈 방을 들여다보았다. 이불은 개켜져 있었고, 책상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
미연은 그 등을 오래 보았다. 비어 있다는 건 없다는 게 아니라 아직 안 채워졌다는 뜻에 가깝다고, 어젯밤 승수가 말했었다. 그 말이 이 방에도 맞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재판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몇 년이 될지, 채워질 날이 올지, 그때 할머니가 이 문턱에 앉아 있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사랑방에 들어서자 승수가 아랫목에서 미연을 올려다보았다.
“어땠어요?”
“그날이 사주에 있었냐고 물으셨어요. 없다고 했어요.”
“잘했어요.”
미연은 버스 시간표를 공책 사이에 끼우고, 승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어젯밤부터 묻고 싶었던 걸 물었다.
“선생님 연지 酉가 공망이라고 하셨잖아요. 연지는 어린 시절이나 조상 자리라고. 선생님은 거기 뭐가 비어 있어요?”
승수는 한참 대답하지 않았다. 아궁이 장작이 탁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다음에 이야기해요. 오늘은 미연 씨가 남의 빈자리를 너무 많이 봤어요.”
미연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공책을 펼쳐, 사건 메모마다 「이장」이라고만 적었던 자리를 하나씩 찾아 이름을 덧붙였다. 민병철. 서른 살에 이장. 마을버스 하루 네 번. 비 오면 십 분 늦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