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6,006자)

지지 육충 — 충이라는 글자를 겁내다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미연은 그날 밤 할머니 집 건넌방 바닥에 엎드려 금지했던 일을 했다.

공책 맨 뒤에 승수가 처음부터 적어 준 마을 사람들의 표가 있었다. 할머니, 정우, 돌아가신 이장, 그리고 그 아래 김영수의 한 줄. 壬子, 庚戌, 庚子, 己卯. 미연은 그 줄을 두 달 가까이 일부러 읽지 않았다. 사건과 글자를 섞지 않으려고 손으로 가리고 넘겼다. 오늘은 가리지 않았다.

영수의 월지 戌. 이장의 연지 辰.

미연의 손가락이 두 글자 사이에서 멈췄다. 辰과 戌은 원 위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였다. 창고와 창고, 봄의 끝과 가을의 끝. 오늘 승수가 보내 준 공책 사진에서 막 배운 관계, 충이었다.

미연은 그 두 글자 사이에 펜으로 선을 그었다. 그리고 선 옆에 辰戌충이라고 적었다.

그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 화이트보드의 세 가지 색보다, 기지국 영장보다, 이 선 하나가 더 확실해 보였다. 두 사람이 원래 부딪치게 되어 있었다는 것. 미연은 그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 알았다. 장터에서, 도서관에서, 마을회관 앞에서 도해의 얼굴에 떠 있던 것과 같은, 알아냈다는 느낌이었다.

미연은 휴대전화를 들어 공책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승수에게 보냈다. 선생님, 이거 봐요.

답은 오지 않았다. 대신 전화가 왔다.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요?”

승수의 목소리가 처음 듣는 높이였다. 미연은 방바닥에서 일어나 앉았다.

“영수 아저씨랑 이장님이 辰戌충이에요. 원래 부딪치는…….”

“니체는 연지가 辰, 월지가 戌, 일지가 또 辰이에요. 자기 표 안에 辰戌충이 두 겹이에요. 니체가 니체를 죽였어요?”

미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 나라에 戌월생이 몇이고 辰년생이 몇인지 세어 볼래요? 그 사람들을 둘씩 짝지으면 다 원래 부딪치게 되어 있는 사이예요? 미연 씨가 지금 그은 선은 도해 원장이 정우 씨한테 그은 빨간 줄이랑 똑같아요. 방향만 아버지 쪽으로 돌렸을 뿐이에요.”

전화기 너머에서 승수가 숨을 골랐다. 다음 말은 조금 낮았다.

“두 사람 표를 겹쳐서 충을 찾으면, 누구랑 누구든 뭐 하나는 걸려요. 걸리는 게 없으면 이상한 거예요. 미연 씨가 영수 씨를 의심하는 근거는 봉투랑 차랑 전화예요. 그건 근거예요. 이 선은 근거가 아니에요. 근거 옆에 이 선을 같이 놓는 순간, 미연 씨가 모은 근거까지 다 오염돼요.”

미연은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辰戌충, 자기 글씨였다.

“지울게요.”

“지우지 말고 줄을 그어요. 그리고 옆에 적어요. 왜 그었는지.”

미연은 그 선 위에 줄을 두 번 그었다. 그리고 옆에 적었다. 내가 뛴 것. 이번엔 사람을 걸고.

*

다음 날 오후, 카페 구석 자리에서 승수는 어젯밤의 높은 목소리를 다시 내지 않았다. 대신 공책에 원을 그리고 열두 지지를 둘렀다. 원을 정면으로 가로지르는 선 여섯 개. 子와 午, 丑과 未, 寅과 申, 卯와 酉, 辰과 戌, 巳와 亥.

“육합이 나란히 붙은 이웃이었지요. 충은 원 건너편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리예요.”

沖者,六沖也,子午、卯酉之類是也……斜對爲沖,擊射之意也。

“충자, 육충야, 자오, 묘유지류시야. 사대위충, 격사지의야. 충은 육충을 말하니 子午와 卯酉 같은 것이다. 비스듬히 마주 보는 것을 충이라 하니, 맞부딪쳐 쏜다는 뜻이다.”

“쏜다.”

“그래서 사람들이 겁을 내요. 충이 있으면 다치고, 헤어지고, 깨진다고. 그런데 충은 막힌 걸 뚫기도 해요. 고인 걸 흔들어 흐르게 하기도 하고요. 『적천수』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지지를 다룬 대목이에요.”

旺者沖衰衰者拔,衰者沖旺旺神發。

“왕자충쇠쇠자발, 쇠자충왕왕신발. 왕한 것이 쇠한 것을 충하면 쇠한 것이 뽑혀 나가고, 쇠한 것이 왕한 것을 충하면 왕한 것의 기운이 오히려 일어난다.”

미연은 그 구절을 두 번 읽었다.

“약한 쪽이 강한 쪽을 치면, 강한 쪽이 깨어난다는 거예요?”

“그렇게 읽어요. 그래서 충 하나로는 아무것도 말 못 해요. 누가 왕하고 누가 쇠한지, 계절은 어떤지, 둘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 다 봐야 해요. 이름 하나 붙이고 끝내는 게 아니라.”

“제 표에는 충이 없어요.”

“원국 안에는 없지요. 申, 酉, 子, 未. 마주 보는 짝이 없어요. 내 표에는 卯와 酉가 있어요. 연지 酉, 시지 卯. 멀리 떨어져서 마주 보지요. 이순신은 일지 午 바로 옆 시지에 子가 붙어서 子午충을 해요. 엘비스는 일지 申과 시지 寅이 붙어 寅申충이고요.”

“이순신은 午 위에 앉은 庚이었잖아요. 불 위의 쇠. 그 午를 子가 바로 옆에서 친다면…….”

미연은 거기서 말을 멈췄다. 이번에는 스스로 멈췄다. 승수는 말없이 기다렸다.

“불을 물이 친다. 거기까지만 할게요. 그게 노량에서 무슨 일이 됐는지는 이순신이 한 일이에요.”

승수가 처음으로 웃었다. 어젯밤 이후 처음이었다.

“어제 그 선 그은 사람 맞아요?”

“그러니까 오늘은 안 그어요.”

*

할머니는 사흘 전 병원에서 퇴원했다. 아직 밭에는 못 나가고 마루에 앉아 하루를 보냈다. 그날 오후 미연이 건넌방에서 나왔을 때 할머니는 마루에 상자 하나를 끌어다 놓고 있었다. 영감의 농사일기가 든 상자였다. 선산에 다녀오던 날 미연이 들고 내려온 그 공책들.

할머니는 그중 한 권을 꺼내 미연에게 내밀었다. 갈피에 편지 봉투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봉투 겉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영수라고만 적혀 있었다.

“이거 영수한테 갖다줘라.”

“할머니, 그건 형사님한테…….”

“형사한테 줄 거면 내가 줬지. 영수한테 주라는 거야. 전화를 안 받아. 문자도 안 읽어. 나는 서울까지 못 간다. 다리가 이래서.”

미연은 일기장을 받아 들지 못하고 할머니 얼굴을 보았다. 할머니의 눈은 젖어 있지 않았다. 병원에서 깨어나 영수야, 너 거기 있었지, 하고 물었던 그날부터 할머니는 울지 않았다.

“할머니는 다 아세요?”

“에미가 자식을 모르냐.”

그 말이 근거인지 아닌지 미연은 따지지 않았다. 따질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카페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하자 승수가 목발을 짚고 일어섰다.

“혼자 가지 마요.”

“심부름이에요. 일기장이랑 편지만 주고 올게요.”

“심부름이라고 생각하는 건 미연 씨고, 그 사람한테 미연 씨는 경찰이랑 같이 다니는 아가씨예요. 빚이 삼억이고, 전화를 끄고 있는 사람이에요. 형사님한테 말해요. 말 안 하고 가면 나 오늘 수업 안 해요.”

“지금 협박하시는 거예요?”

“근거 있는 협박이에요.”

미연은 오 형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형사는 한참 말이 없다가, 어차피 오늘 서울에 영장 서류 들고 올라가는 길이라고 했다. 태워 줄 테니, 문 앞에서 일 분 넘게 있지 말라고 했다. 들어가지도 말라고 했다.

*

서울 강서구의 그 골목은 지하철역에서 한참 걸어 들어가야 했다. 오 형사는 골목 입구에 회색 승용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원룸 건물의 사층 창문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다.

“일 분이에요. 문 열면 주고, 안 열면 문고리에 걸고 와요.”

미연은 계단을 올라갔다. 사층 복도는 형광등이 반쯤 나가 있었고 어디선가 라면 냄새가 났다. 문 앞에 섰다. 일기장을 가슴에 안고 숨을 한 번 쉬었다. 그리고 문을 두드렸다.

한참 뒤 문이 조금 열렸다. 체인이 걸린 문틈으로 얼굴 반쪽이 보였다. 밭둑에서 보았던 얼굴보다 훨씬 늙어 있었다. 수염이 자라 있었고 눈 밑이 검었다.

“누구야.”

“할머니 심부름이에요. 미연이요. 밭에서 무 뽑던.”

영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억해 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너 그 형사랑 다니는 애지.”

“할머니가 이거 전해 달래요.”

미연은 일기장을 문틈으로 내밀었다. 영수는 받지 않았다.

“형사 밑에 있어? 그 기자 놈 밑에 있어? 나 뭐 캐러 왔어? 엉?”

목소리가 커지면서 체인이 걸린 문이 덜컹 흔들렸다. 미연은 한 걸음 물러설 뻔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일기장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저씨 아버지 일기장이에요. 할머니 편지도 들어 있어요. 저는 이거 주고 갈 거예요.”

영수의 눈이 일기장 표지에 닿았다. 낡은 비닐 표지. 거기 영감의 글씨로 1987년 농사라고 적혀 있었다. 영수의 숨이 멎는 소리가 들렸다.

체인이 풀리고 문이 열렸다. 영수는 미연이 아니라 일기장을 보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일기장을 받았다.

갈피에서 편지 봉투가 떨어졌다. 영수가 그것을 주웠다. 봉투를 열고 접힌 종이를 폈다. 할머니가 볼펜을 꾹꾹 눌러 쓴 글씨가 문틈의 형광등 아래 비쳤다. 미연은 읽지 않으려 했지만, 몇 글자는 저절로 들어왔다.

영수야 너 거기 있었지 엄마는 안다

영수가 문틀을 짚었다. 그리고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 현관 바닥에 주저앉았다. 편지가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일기장도.

“아가씨.”

목소리가 아까와 달리 갈라져 있었다.

“나 빚이 삼억이야. 사업 망하고, 사무실 날리고, 집 날리고. 그 밭 아니면 방법이 없었어. 엄마는 혼자 거기서 늙어 가고. 내가 모셔 오려고 그런 거야. 진짜야. 처음엔 진짜 그랬어.”

미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자리가 아니었다. 복도 끝 계단참에서 오 형사가 올라오는 발소리가 났다가 멈췄다. 일 분이 지난 모양이었다.

“이장이 그날 밤에 두 배를 달라고 했어. 안 주면 위조한 거 다 불겠다고. 나는 그냥…… 그냥 밀었어. 그 사람이 넘어졌어. 바위 아래로.”

영수가 일기장을 가슴에 끌어안자 등이 굽었다. 쉰 넘은 남자가 현관 바닥에서 아이처럼 몸을 웅크렸다.

“살아 있었어. 소리를 냈어. 나 119 눌렀어. 눌렀다가 끊었어. 끊고 차 타고 왔어. 그리고 다음 날 정우가 잡혀갔다는 소리를 들었어. 내 아들이. 그 애가 그날 이장이랑 먼저 만났다는 걸 그때 알았어. 그런데도 나는…….”

영수가 고개를 들었다. 젖은 눈이 미연을 보았다.

“정우는 내 아들이야. 내가 걔를 거기 넣었어. 두 달 동안. 내가.”

미연은 그 자리에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말을 들으려고 화이트보드에 색을 칠했고, 시간 줄을 그었고, 어젯밤에는 辰戌충까지 그었다. 그런데 막상 그 말이 현관 바닥에 쏟아지자 미연의 손이 떨렸다. 이긴 기분이 아니었다. 할머니 편지의 삐뚤삐뚤한 글씨만 눈앞에 있었다.

방 안 벽에 액자 같은 것이 뒤집힌 채 기대어 있었다. 뒷면에 테이프로 붙인 영수증에 도해철학관, 표구비라고 적혀 있었다.

계단참의 오 형사가 천천히 다가왔다. 영수가 오 형사를 보았다. 놀라지 않고, 알고 있었다는 얼굴이었다.

“형사님.”

“김영수 씨.”

“오늘은 말고요. 내일 내가 갈게요. 엄마 편지 끝까지 읽고. 내일 아침에 내 발로 가요. 정우 있는 데로.”

오 형사는 한참 영수를 내려다보았다. 미연은 오 형사가 무슨 말을 할지 몰랐다. 지금 데려가도 되는 사람이었다. 들은 것이 있었다.

“아침 아홉 시. 경찰서로 오세요. 아홉 시 일 분이면 내가 다시 올라옵니다.”

“예.”

*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오 형사는 라디오를 켜지 않았다. 고속도로의 불빛이 차창을 하나씩 지나갔다. 한참 만에 오 형사가 말했다.

“학생, 오늘 일 분 넘었어요.”

“죄송해요.”

“사과받으려고 한 말 아니에요.” 오 형사가 핸들을 쥔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 번 두드렸다. “도망갈 수도 있어요, 그 사람. 내일 안 올 수도 있고.”

“그럼 왜 두고 오셨어요?”

“편지 끝까지 읽는다잖아요.”

미연은 창밖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산줄기가 희미하게 지나갔다. 오늘 승수가 읽어 준 구절이 떠올랐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치면, 강한 것이 오히려 일어난다. 할머니의 삐뚤삐뚤한 편지 한 장이 쉰 넘은 남자를 현관 바닥에 주저앉혔다. 그리고 그 남자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났다. 그게 무엇인지 미연은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승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무사해요?”

“네.”

“일 분 넘었어요?”

“……형사님이 그것도 말했어요?”

“미연 씨 목소리가 그래요.”

미연은 웃으려다 울음이 먼저 나왔다. 오 형사가 말없이 휴지 상자를 조수석 쪽으로 밀었다. 미연은 휴지를 뽑아 얼굴을 덮었다. 차창 밖으로 계룡산 이정표가 지나갔다.

“선생님, 충이 막힌 걸 뚫는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요.”

“뚫리는 게 이렇게 아픈 줄 몰랐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승수는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나도 그거 늦게 알았어요.”

30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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