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6,165자)

삼합·반합·방합 — 세 글자가 모이는 조건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충청새벽」 편집실의 화이트보드는 원래 다음 주 지면 계획표였다. 윤지호는 그 계획표를 사진으로 찍어 두고 지우개로 싹 지웠다. 그리고 보드 한가운데에 시간을 적을 가로줄을 하나 길게 그었다.

“여기가 그날 오후 다섯 시. 여기가 다음 날 새벽 한 시.”

오 형사는 의자를 거꾸로 돌려 등받이에 팔을 얹고 앉아 있었다. 경찰서 밖에서 기자와 마주 앉는 게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일어서지는 않았다. 미연은 공책을 무릎에 올려놓고 화이트보드 펜 세 자루를 손에 쥐고 있었다. 빨강, 파랑, 검정.

“각자 아는 걸 적어요. 자기 색으로.”

윤지호가 말했다. 오 형사가 코웃음을 쳤다.

“기자 양반, 나는 수사 내용을 신문사 칠판에 적을 생각 없어요.”

“그럼 저희가 아는 것만 적을게요. 형사님은 틀린 데만 지워 주세요.”

오 형사가 대답하지 않았다. 윤지호는 그걸 허락으로 받아들였다.

미연이 파란 펜을 들고 먼저 일어섰다.

오후 다섯 시 사십 분쯤, 할머니 밭에 김영수 씨와 이장님이 검은 승용차로 옴. 서류 봉투를 평상 위에 두고 감. 할머니는 열어 보지 않고 무청 더미 위에 얹음.

다음 날 오후, 같은 평상 위에 봉투 없음.

미연은 두 줄 사이를 펜 끝으로 톡톡 쳤다.

“봉투가 이 사이에 사라졌어요. 할머니는 손 안 댔다고 하셨어요. 정우 씨도 못 봤대요. 면회 때 물어봤어요. 그럼 누가 가져갔을까요?”

“바람.” 오 형사가 말했다.

“무청 더미 위에 얹은 봉투를요? 그날 밤 바람 거의 없었어요. 기상청 기록 찾아봤어요. 초속 일 미터.”

윤지호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 형사는 미연을 오래 보다가 시선을 보드로 돌렸다.

윤지호가 빨간 펜을 들었다.

“저는 시행사 쪽이에요. 팔월 말에 위임장이 팩스로 들어왔고, 구월 초에 계약금 일부, 이천만 원이 김영수 씨 계좌로 갔어요. 그리고 시월 첫째 주, 시행사 담당자가 이장님한테 전화로 따졌대요. 할머니가 매각에 동의한 적 없다고 마을에 소문이 돈다고. 위임장이 진짜 맞느냐고.”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시행사 막내 직원이 지난주에 퇴사했어요. 술 한잔 샀지.”

오 형사가 처음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직원 연락처 나 줘요.”

“드릴게요. 대신 형사님 것도 하나 적어 주세요.”

오 형사는 한참 보드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검은 펜을 집었다. 시간 줄 위, 아홉 시 삼십사 분에 작게 적었다. 이장 휴대전화 → 김정우, 마지막 통화. 정우가 위조가 뭐냐고 되물었다는 그 전화였다. 그건 이미 다 아는 것이었다. 그다음 오 형사의 펜이 멈췄다. 한참을 멈춰 있다가 바로 옆, 아홉 시 사십칠 분 자리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이장 사무실 유선 → 김영수 휴대전화, 3분.

편집실이 조용해졌다. 옆 책상의 다른 기자가 이어폰을 뺐다.

“그동안 이장 휴대전화만 봤어요. 사무실 전화는 안 봤지. 사무실이 마을회관 이층이라, 다들 이장이 그날 저녁 회관에 들렀다 계곡에 간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거기서 서울로 전화를 걸었더라고요. 서울에 있다는 사람한테.”

“그 시간에 서울에 있었어요?”

“통신사 기지국으로 보면.” 오 형사가 펜 뚜껑을 닫았다. “그건 아직 못 적어요.”

미연이 공책을 넘겼다. 한결이 넘긴 CCTV에서 확인된 시각. 22시 41분, 서울 번호판 검은 승용차가 등산로 입구로 들어옴. 23시 58분, 나감.

미연은 파란 펜으로 그 두 시각을 시간 줄에 적었다. 아홉 시 사십칠 분의 검은 줄과, 열 시 사십일 분의 파란 줄 사이에 오십사 분이 비어 있었다. 서울에서 계룡산까지는 그보다 오래 걸렸다.

윤지호가 보드 앞으로 다가섰다.

“서울에 있던 사람이 아니네.”

“가까이 있던 사람이에요.” 미연이 말했다. “그날 오후에 할머니 밭에서 떠나고, 서울로 안 갔어요.”

오 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미연은 화이트보드의 세 가지 색을 내려다보았다. 빨강은 돈, 파랑은 봉투와 차, 검정은 전화. 하나씩 따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봉투는 바람이 가져갔을 수 있었고, 차는 다른 일로 왔을 수 있었고, 전화는 땅 얘기였을 수 있었다. 셋이 같은 판에 올라가자 다른 그림이 되었다.

미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승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금 선생님 수업이 필요해요. 오늘 배울 거 미리 알려 주세요. 오 분 뒤 공책 한 장을 찍은 사진이 답으로 왔다. 열두 지지가 둥글게 적혀 있었고, 그 안에 삼각형 네 개가 겹쳐 그려져 있었다.

申子辰, 亥卯未, 寅午戌, 巳酉丑.

사진 아래 승수의 문자가 이어졌다.

삼합이에요, 세 글자가 모여서 한 기운의 판을 이뤄요. 申子辰은 물, 亥卯未는 나무, 寅午戌은 불, 巳酉丑은 쇠. 삼각형 꼭짓점마다 하나는 계절이 시작되는 글자, 하나는 한가운데 글자, 하나는 끝나는 글자예요. 시작과 한복판과 끝이 다 모여야 한 판이 돼요.

미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申은 시작하는 네 글자 가운데 하나였고, 子는 한가운데 네 글자, 辰은 창고 네 글자였다. 시작, 한복판, 끝.

이어서 온 문자는 한문이었다. 『자평진전』의 같은 편, 지난번 육합을 읽은 대목 바로 앞이었다.

會者,三會也,申子辰之類是也……三方爲會,朋友之意也。

회자, 삼회야, 신자진지류시야. 삼방위회, 붕우지의야. 회는 삼회를 말하니 申子辰 같은 것이다. 세 방향에서 모이는 것을 회라 하니, 벗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한 줄이 더 붙어 있었다.

조심할 것, 이 책은 申子辰을 삼회라고 불러요. 요즘은 申子辰을 삼합이라 부르고, 삼회나 방합은 寅卯辰처럼 같은 계절 세 글자가 모인 걸 가리켜요. 이름이 책마다 달라요. 원문을 요즘 말로 몰래 고쳐 읽으면 안 돼요.

미연은 문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윤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벗이라. 이웃 다음엔 벗이네.”

“육합은 담 하나 둔 이웃이고, 이건 세 방향에서 모이는 벗이래요.”

“그럼 둘만 있으면?”

미연이 승수에게 그대로 물었고, 금방 답이 왔다.

반합이라고 해요, 셋 중 둘이요. 한가운데 글자가 끼어 있으면 그 기운이 반쯤 선다고 보고, 한가운데 없이 시작과 끝만 있으면 더 약하게 봐요. 그리고 같은 계절 세 글자, 寅卯辰이나 申酉戌 같은 건 방합이에요. 셋이 다 있어야 한 계절이 통째로 일어나요.

미연은 자기 명식을 떠올렸다. 申, 酉, 子, 未. 화이트보드 구석에 검정 펜으로 작게 적었다.

申子는 申子辰의 둘, 辰이 없음. 子가 한가운데 글자니까 반합.

申酉는 申酉戌의 둘, 戌이 없음. 방합의 일부.

“너 혼자 뭐 해?” 윤지호가 물었다.

“제 사주요. 물의 판이 반쯤 서 있고, 가을의 판도 반쯤 서 있대요. 근데 둘 다 마지막 하나가 없어요.”

“그럼 모자란 거야?”

“모자란 게 아니라, 아직 판이 다 안 선 거예요. 판이 서려면 마지막 하나가 와야 하는데, 그게 원국에 없으면 운에서 올 수도 있고요.”

오 형사가 갑자기 웃었다. 짧고 마른 웃음이었다.

“학생, 그거 지금 우리 얘기 같네.”

미연은 보드를 보았다. 빨강, 파랑, 검정. 그리고 아직 비어 있는 자리. 영수 휴대전화의 그날 밤 기록. 오 형사가 못 적는다고 한 줄.

“한가운데가 하나 빠졌어요. 형사님 거요.”

“기지국 기록은 영장이 필요해요. 영장은 내가 혼자 못 받고.”

“위에서 안 해 준대요?”

오 형사는 대답 대신 보드의 검은 줄 두 개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펜 자국이 손가락에 묻었다.

*

경찰서 복도는 형광등 하나가 깜박이고 있었다. 오 형사는 미연을 복도 의자에 앉혀 두고 과장실 문을 두드렸다. 문이 덜 닫혀서 안의 목소리가 그대로 새어 나왔다.

“오 경위, 구속된 피의자 있잖아. 지문 있고, 통화 있고, 동기 있고. 다 맞잖아.”

“다 맞는 게 아니라 다 있는 겁니다. 맞는지는 아직 몰라요.”

“아버지를 판다고? 아들 잡아넣고 아버지를 판다고? 기자들이 뭐라고 쓰겠어. 경찰이 부자를 번갈아 잡는다고 쓰지.”

“그 아버지가 어머니 도장을 위조했습니다. 그날 밤 서울에 없었습니다. 이장 사무실에서 그 사람한테 전화가 갔습니다. 그리고 자정 다 돼서 계곡 입구를 빠져나갔습니다. 이걸 덮으면 기자들이 뭐라고 쓰겠습니까.”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깜박이던 형광등이 아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오 경위, 자네 요즘 그 산 사람들이랑 어울린다며. 거북바위 그 양반이랑, 그 아가씨. 사주 보는 사람들이랑 수사를 해?”

“그 사람들은 사주로 범인 찾자고 한 적 한 번도 없습니다. 사주로 범인 찍은 건 읍내 철학관 원장이고, 우리가 그 종이에 끌려다녔지요.”

미연은 복도 의자에서 숨을 죽였다. 서류철 펼치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미연은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처음 거북바위에 올라왔을 때 오 형사가 꺼냈던, 빨간 펜으로 피를 볼 팔자라고 적힌 그 종이. 오 형사는 그 종이를 버리지 않고 사건 서류철 맨 뒤에 끼워 두었다고 했다.

“과장님, 이거 보세요. 우리 처음에 이걸 보고 그 애를 봤어요. 이 종이가 증거는 아니었는데, 이 종이 때문에 그 애 쪽만 봤어요.”

긴 침묵이 흘렀다. 과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기지국 영장 써 와, 내가 본다. 대신 틀리면 자네가 책임져.”

“예.”

문이 열리고 오 형사가 파란 서류철을 옆구리에 끼고 나왔다. 미연과 눈이 마주치자 오 형사는 서류철을 한 번 들어 보였다. 그 종이는 여전히 맨 뒤에 있었다.

“들었어요?”

“문이 열려 있었어요.”

“그 문 원래 잘 안 닫혀요.”

오 형사가 미연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한참 형광등만 쳐다보다가 중얼거렸다.

“학생, 그 삼합인가 뭔가. 셋이 다 모이면 판이 선다며.”

“네.”

“모이고 나서 그 판이 좋은 판인지 나쁜 판인지는?”

미연은 공책에 받아 적은 승수의 문자를 떠올렸다. 판이 서는 것과 그 판이 일간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또 다른 질문이라고 했다. 물의 판이 서면 물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잔치고, 물에 잠길 사람에게는 홍수라고.

“그건 그 판 앞에 누가 서 있느냐에 달렸대요.”

오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판 앞에는 아버지랑 아들이 같이 서 있네.”

미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복도 끝 창밖으로 눈발이 하나둘 날리기 시작했다. 미연은 그 눈발 속에서 할머니 집 마루를 떠올렸다. 두 사람이 아직 같은 판 앞에 서 있다는 걸 모르는 할머니.

*

밤늦게 할머니 집 건넌방으로 돌아와 미연은 승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두 번 가고 승수가 받았다. 목소리 뒤로 텔레비전 소리가 작게 들렸다.

“오늘 삼합 사진, 경찰서 복도에서 꺼내 봤어요. 형사님이 그거 우리 얘기 같대요.”

“형사님이 그랬어요?”

“셋이 다 모여야 판이 선다니까요. 선생님 표에도 있어요? 삼합.”

“卯와 未가 있지요. 亥卯未에서 亥가 빠졌어요. 한가운데 글자 卯가 있으니 반합이에요. 나무의 판이 반쯤 서 있어요.”

“한여름 이슬비한테 나무가 반쯤 서 있으면요?”

“나무는 물을 빨아들이지요. 癸 입장에서는 기운이 빠져나가는 쪽이에요.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셋째 줄. 알아요.”

승수가 웃었다. 미연은 유명인 표를 펼쳐 손가락으로 훑었다.

“정주영도 있어요. 乙卯, 丁亥, 庚申. 亥랑 卯. 亥卯未에서 未가 빠졌어요. 선생님이랑 반대로 빠졌네요.”

“같은 나무의 판인데 빠진 글자가 달라요. 내 건 시작하는 글자가 없고, 정주영은 끝나는 글자가 없고. 시작이 없는 판과 끝이 없는 판이 같을까요?”

미연은 대답 대신 엄마의 표를 떠올렸다. 庚戌, 己丑, 壬寅. 寅과 戌이었다.

“우리 엄마는 寅이랑 戌이요. 寅午戌에서 午가 빠졌어요. 한가운데가 없어요.”

“그럼 아까 말한 대로 더 약하게 봐요. 시작과 끝만 있고 한복판이 비어 있는 판.”

미연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한참 말이 없었다. 엄마는 늘 시작하라고 다그치고 끝내라고 다그쳤다. 그 사이 한복판에서 미연이 무엇을 하는지는 잘 묻지 않았다. 그게 寅과 戌 때문이라고 말하면 뛰는 거라는 걸 미연은 이제 알았다. 그래도 그 생각은 오래 남았다.

“선생님, 오늘 형사님이 그 종이 또 꺼냈어요. 원장님 종이.”

“아직 갖고 있어요?”

“서류철에 끼워 놨대요. 과장님한테 보여 주면서, 이 종이 때문에 그 애 쪽만 봤다고 했어요.”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텔레비전 소리도 꺼졌다.

“그 종이를 버리지 않은 게 그 사람 근거예요. 자기가 틀렸던 자리를 기억하는 거.”

승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져 있었다. 미연은 그 낮아진 목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몰랐다. 아직 모르는 칸이었다.

그날 밤 미연은 공책 뒷장의 나중 목록 맨 아래에 한가운데 글자라고 한 줄을 새로 적었다. 그리고 그 옆에 날짜를 비워 두었다.

29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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