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6,069자)
천간합과 천간충 — 천간도 손을 잡는다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오 형사는 경찰서가 아니라 한결의 카페로 왔다. 경찰서에서 보면 말이 돌아서 안 된다고 했다.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 점퍼도 벗지 않은 채 수첩을 펼쳤다. 한결은 주문도 받지 않고 커피 세 잔을 내려놓고 계산대 뒤로 물러났다. 물러나면서도 귀는 이쪽에 두고 있었다.
“읍내 도장 가게요.” 오 형사가 수첩을 넘겼다. “팔월 말에 막도장 하나를 새겼어요. 이름이 박순례.”
미연은 커피잔을 들다가 내려놓았다. 할머니 이름이었다.
“주문은 전화로 했고, 연락처는 마을 이장 사무실 유선 번호예요. 그런데 찾아간 사람은 이장이 아니래요. 가게 주인이 기억하더라고요. 서울 말씨 쓰는 오십 대 남자. 키가 크고, 검은 승용차.”
“할머니 도장을 새긴 거예요? 할머니 몰래?”
“지금으로선 그렇게 보여요. 그 도장이 찍힌 위임장을 시행사에 냈는지는 확인 중이고요.”
승수가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말이 없었다. 붕대 감은 다리는 옆 의자에 올라가 있었다.
“형사님, 그럼 이제 정우 씨는…….”
“아직이요.” 오 형사가 수첩을 덮었다. “도장 하나 새긴 걸로 사람 죽였다고는 못 해요. 정우 씨 지문이 계곡 쉼터 난간에서 나온 것도, 이장 휴대전화의 마지막 통화 상대가 정우 씨인 것도 그대로예요. 그리고 학생, 하나만 부탁합시다.”
“뭔데요?”
“이 얘기, 정우 씨한테 하지 마요. 면회 가서도. 아버지 얘기를 아들 입에서 먼저 들어야 돼요. 우리가 먼저 흘리면, 그 사람이 나중에 무슨 말을 해도 우리가 심은 말이 돼요.”
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나서야 내일이 면회 날이라는 걸 떠올렸다.
*
구치소 면회 대기실은 의자가 일렬로 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미연 옆에서 보자기에 싼 내복을 무릎에 올려놓고 번호가 불리기를 기다렸다. 넣어 주지도 못할 내복이었다. 영치품 창구에서 이미 한 번 돌려받은 것이었다. 할머니는 그걸 다시 싸 와서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미연의 전화가 울렸다. 승수였다. 무릎 때문에 구치소까지는 못 오고, 대신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수업을 하자고 했다. 미연은 이어폰을 꽂고 공책을 펼쳤다. 맨 뒷장의 나중 목록이 보였다. 丁壬, 乙庚, 고흐. 고흐에는 지난번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
“오늘은 丁壬이랑 乙庚을 지우는 날이에요.”
“드디어요.”
“천간끼리도 짝이 있어요. 甲과 己, 乙과 庚, 丙과 辛, 丁과 壬, 戊와 癸. 다섯 쌍. 이걸 천간합이라고 해요.”
미연은 공책에 다섯 쌍을 적었다. 적다 보니 규칙이 보였다.
“다 양이랑 음이네요. 甲은 양목, 己는 음토. 그리고 다 극하는 사이예요. 목극토, 금극목, 화극금, 수극화, 토극수.”
이어폰 너머로 승수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걸 혼자 봤어요?”
“지금 적다가요.”
“맞아요. 누르는 쪽과 눌리는 쪽이 음양으로 짝이 맞을 때 서로 끌린다고 봐요. 그래서 합은 좋아서 붙는 것만이 아니에요. 묶이는 거예요. 서로 끌어당겨서, 각자 하던 일을 덜 하게 되는 거지요.”
“묶인다.”
“미연 씨 표를 봐요. 일간 壬 바로 옆, 시간에 丁이 있지요.”
미연은 자기 명식의 셋째 칸과 넷째 칸을 보았다. 壬과 丁. 처음 거북바위에서 승수가 동그라미를 칠 때부터 나란히 붙어 있던 두 글자였다.
“壬에게 丁은 뭐였지요?”
“수극화니까 제가 누르는 쪽, 재성이에요. 음양이 다르니까 정재.”
“그 정재가 일간에 바로 붙어서 합을 하고 있어요. 이걸 어떻게 읽는지는 학설마다 갈려요. 내가 손에 쥔 재물이나 일과 단단히 묶인다고도 하고, 그 묶임 때문에 일간이 제 흐름을 덜 탄다고도 하고요. 합이 실제로 성질까지 바뀌는 화(化)가 되려면 조건이 더 필요해요. 월령이 그 기운을 받쳐 줘야 하고, 방해하는 글자가 없어야 하고요.”
“丁壬이 합해서 바뀌면 뭐가 돼요?”
“목이 된다고 해요. 그런데 미연 씨는 酉월, 금이 왕한 가을에 태어났어요. 목이 힘을 받을 계절이 아니지요. 그러니 합은 하되 바뀌지는 않는다고 보는 쪽이 많을 거예요. 묶이기는 하는데 내가 내가 아닌 게 되지는 않는 거지요.”
미연은 그 말을 그대로 받아 적었다. 묶이되 바뀌지는 않는다.
“乙庚은요? 선생님 거.”
“내 표는 월간에 庚, 시간에 乙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이 일간 자리에 내 癸가 앉아 있지요. 『자평진전』에 이런 대목이 있어요. 「열 천간이 합하되 합하지 못하는 것을 논함」이라는 편이에요.”
이어폰 너머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승수가 천천히 읽었다.
十干化合之義,前篇既明之矣,然而亦有合而不合者,何也?蓋隔於有所間也,譬如人彼此相好,而有人從中間之,則交必不能成。
“십간화합지의, 전편기명지의, 연이역유합이불합자, 하야? 개격어유소간야, 비여인피차상호, 이유인종중간지, 즉교필불능성. 열 천간이 합해 바뀌는 뜻은 앞 편에서 밝혔다. 그런데 합하되 합하지 못하는 것도 있으니 왜인가? 사이에 무언가가 끼어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는데 누가 그 사이에서 끼어들면 사귐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과 같다.”
미연은 대기실의 일렬 의자를 둘러보았다.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누구는 아들을, 누구는 남편을 기다렸다. 유리 너머와 이쪽 사이에는 늘 무언가가 끼어 있었다.
“그럼 선생님 乙庚은 합을 못 해요?”
“책이 드는 예는 甲과 己 사이에 庚이 끼어 甲을 누르는 경우예요. 내 경우는 끼어 있는 癸가 庚에게서 생을 받고 乙을 생해 주니까 같은 그림은 아니에요. 그래도 떨어진 합은 붙은 합보다 약하다고 보는 게 보통이지요. 서로 좋아하는데 멀리 있는 거예요.”
“선생님 乙이랑 庚, 연애 못 하는 사이네요.”
“그런 말은 공책에 쓰지 마요.”
미연은 이미 쓰고 있었다. 이어폰 너머에서 승수가 한숨을 쉬었다. 미연은 웃으며 공책 뒷장으로 넘어가 나중 목록의 丁壬과 乙庚에 줄을 그었다. 이제 고흐 줄 아래 두 줄이 더 지워졌다.
“합이 있으면 충도 있어요?”
“천간에도 충이 있어요. 甲과 庚, 乙과 辛, 丙과 壬, 丁과 癸. 같은 음양끼리 정면으로 누르는 사이예요. 戊와 己는 가운데 흙이라 충에 넣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미연은 자기 표를 다시 보았다. 월간 癸, 시간 丁.
“제 丁이랑 癸가 충이네요. 그런데 멀리 있어요.”
“그래요. 미연 씨 丁은 한쪽에서는 壬과 손을 잡고, 다른 쪽에서는 멀리 있는 癸와 부딪쳐요. 글자 하나도 이렇게 여러 관계에 걸려 있어요. 합이면 좋고 충이면 나쁘다고 하면 이 丁은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둘 다요.”
“그러니까 둘 다 아니에요. 관계를 다 적고, 그다음에 힘을 따지는 거예요.”
미연은 공책 사이에 끼워 둔 유명인 표를 꺼내 무릎 위에 펼쳤다. 대기실 형광등 아래서 한자들이 조금 흐릿했다. 丁과 壬이 붙어 있는 표를 찾아 손가락을 내려가다가 한 줄에서 멈췄다.
“선생님, 헬렌 켈러요. 庚辰, 壬午, 丁亥, 戊申. 일간 丁 바로 옆 월간에 壬이 있어요. 저랑 똑같은 丁壬합이에요.”
“순서가 거꾸로지요. 미연 씨는 壬이 나고 丁이 붙은 쪽, 헬렌 켈러는 丁이 나고 壬이 붙은 쪽.”
“丁한테 壬은…… 수극화니까 저를 누르는 쪽, 관성이에요. 음양이 다르니까 정관.”
“같은 丁壬합이라도 미연 씨에게는 내가 쥔 재물과 일이 붙은 거고, 헬렌 켈러에게는 나를 다스리는 틀이 붙은 거예요. 합이라는 이름 하나로 둘을 같이 읽으면 안 되는 이유지요. 누가 일간이냐에 따라 같은 끈이 다른 끈이 돼요.”
“헬렌 켈러는 앞을 못 보고 못 들었잖아요. 그런데도 평생 강연을 다녔고요. 나를 다스리는 틀이랑 묶였다는 게…….”
“지금 뛰려고 하지요?”
미연은 입을 다물었다. 대기실 건너편 의자의 아주머니가 이어폰 낀 채 혼잣말하는 미연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미연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말했다.
“안 뛰어요. 묶였다, 거기까지만요.”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는 그 사람 삶에 있어요. 정관이 붙어서 강연을 다닌 게 아니에요. 그건 어린 헬렌 켈러에게 손바닥에 글자를 써 가며 말을 가르친 가정교사 앤 설리번과, 헬렌 켈러 자신이 한 일이에요.”
미연은 표 위의 丁亥 옆에 작게 적었다. 같은 합, 다른 끈. 그리고 그 아래에, 이건 앤 설리번 거.
번호가 불렸다. 할머니가 보자기를 끌어안고 먼저 일어났다. 미연은 이어폰을 뺐다. 승수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합은 화목이 아니에요. 그것만 기억해요. 손을 잡는다는 게 무슨 짓을 하려고 잡는지는 글자가 안 알려 줘요.”
*
유리 너머의 정우는 지난번보다 말라 있었다. 머리를 짧게 깎았고, 수의 소매가 손등을 반쯤 덮었다. 할머니가 수화기를 들자마자 울기 시작해서 첫 오 분은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다. 정우는 그 오 분 동안 유리에 손바닥을 대고 있었다.
할머니가 수화기를 미연에게 넘겼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했지만 미연은 할머니가 대기실 의자에 가서 울 거라는 걸 알았다.
“미연 씨.”
“밥은 먹어요?”
“네. 생각보다 맛있어요. 할머니한테는 맛없다고 했어요. 맛있다고 하면 서운해하실까 봐.”
미연은 웃음이 나오려다 목에 걸렸다.
“변호사님이 그러는데요, 이번 주에 경찰이 뭘 새로 찾았대요. 그게 뭔지는 안 알려 주고요. 미연 씨는 알아요?”
미연은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어제 카페에서 오 형사가 한 부탁이 떠올랐다. 아버지 얘기를 아들 입에서 먼저 들어야 돼요.
“나도 다 몰라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 아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동안 미연은 정우의 눈을 보지 못했다. 정우가 그걸 알아챘다.
“뭔가 알긴 하는구나.”
“정우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그날 밤에요. 아버지가 서울 가신 거, 확실해요? 직접 들은 거예요?”
정우의 얼굴이 굳었다. 유리에 대고 있던 손바닥이 떨어졌다.
“왜요.”
“그냥, 그날 일을 시간 순서대로 맞춰 보는 중이라서…….”
“미연 씨.”
정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교도관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보았다.
“우리 아빠 그런 사람 아니에요. 우리 아빠가 할머니 도장 받으러 다닌 건 맞아요. 이장님이랑 붙어 다닌 것도 맞고요. 근데 그건 빚 때문이에요. 아빠 사업 망해서. 그게 다예요. 미연 씨까지 그러지 마요. 마을 사람들이 나한테 그러는 것처럼, 미연 씨가 우리 아빠한테 그러지 마요.”
미연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얼어붙었다. 마을 사람들이 나한테 그러는 것처럼. 그 말이 가슴 한복판을 정확히 찔렀다. 피 볼 살 둘. 미연이 두 달 동안 싸워 온 그 빨간 글씨를, 지금 자기가 정우의 아버지에게 쓰고 있는 건 아닌가.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요. 그냥 그런 거 묻지 마요.”
정우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면회 시간은 아직 칠 분이 남아 있었다. 정우는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고, 고개만 숙인 채 앉아 있었다. 미연은 그 칠 분 동안 유리 이쪽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
돌아오는 버스에서 할머니는 잠이 들었다. 보자기에 싼 내복을 끌어안은 채였다. 미연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겨울 논을 보다가 승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정우 씨한테 아버지 얘기 물어봤어요. 소리 질렀어요. 제가 마을 사람들이랑 똑같대요.
답은 금방 왔다.
똑같았어요?
미연은 한참 그 네 글자를 들여다보았다. 정직하게 답하려고 애썼다.
아니요. 저는 근거를 가지고 물어봤어요. 도장 가게, 봉투. 그런데 정우 씨한테는 그 근거가 안 보였을 거예요. 안 보이는 근거로 의심받으면 낙인이랑 똑같이 느껴지겠죠.
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었다.
그걸 알면 됐어요. 오늘 배운 합 기억나요? 정우 씨는 아버지랑 묶여 있어요. 묶인 사람한테 그 끈을 먼저 끊으라고 하면 안 돼요. 끈은 정우 씨가 풀어요.
미연은 휴대전화를 무릎에 내려놓았다. 옆에서 할머니가 잠결에 보자기를 더 꽉 끌어안았다. 내복이 든 보자기였다. 구치소에서 받아 주지 않아 두 번이나 다시 싸 온 것.
미연은 그 보자기를 보며 오늘 승수가 마지막에 한 말을 떠올렸다. 손을 잡는다는 게 무슨 짓을 하려고 잡는지는 글자가 안 알려 준다. 할머니가 끌어안은 보자기도 손을 잡은 거였다. 아무도 받아 주지 않아도 놓지 않는 손.
버스가 마을 입구에 섰다. 할머니가 눈을 떴다.
“다 왔냐.”
“네.”
“정우가 맛없다더냐. 밥.”
미연은 정우의 말을 떠올렸다. 맛있다고 하면 서운해하실까 봐.
“맛없대요. 할머니 밥이 먹고 싶대요.”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거짓말 하나는 근거 안 보임 칸에 적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