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5,914자)
같은 순서, 다른 결론 — 승수의 원국을 풀다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영수는 그 뒤로 나타나지 않았다.
병원 주차장의 검은 승용차는 사흘 동안 지붕에 눈을 인 채 서 있다가, 나흘째 아침에 견인차에 실려 갔다. 오 형사가 압수했다고 했다. 영수의 휴대전화는 꺼져 있었고, 서울 강서구 원룸 문 앞에는 우편물이 쌓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오 형사는 그 이상은 미연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말해 주지 않는 얼굴이 전보다 무거웠다.
할머니는 아직 병원에 있었다. 오른손에 힘이 덜 돌아와서, 숟가락을 왼손으로 쥐는 연습을 했다. 미연은 매일 오후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가서 할머니가 숟가락 쥐는 걸 지켜보았다. 할머니는 미연이 숟가락을 대신 들어 주려 하면 손등을 때렸다. 왼손이었는데도 아팠다.
아침에는 산에 올랐다. 12월 중순의 거북바위는 이제 하루 종일 하얬다. 승수는 바위 위에 방석 두 개와 돗자리 한 장을 깔아 두었고, 그 위에 또 우산을 펴고 앉았다. 미연은 아이젠을 신고 올라가서 승수 옆에 앉았다. 둘은 그렇게 영수가 없는 며칠을 버텼다.
“오늘은 제가 해 볼게요.”
미연이 그 말을 한 건 영수가 사라진 지 엿새째 되는 날이었다.
“뭘요?”
“선생님 거요. 처음부터 끝까지. 병원에서 제 걸 했으니까, 이번엔 선생님 걸로요. 같은 순서로.”
승수가 미연을 보았다. 그리고 우산을 조금 들어 미연 쪽으로 기울였다.
“해 봐요.”
*
미연은 공책을 펼쳤다. 밤새 쓴 것이 아니었다. 영수가 사라진 엿새 동안, 병원 오가는 버스 안에서 조금씩 쓴 것이었다. 제목은 승수. 처음부터 끝까지. 1차.
“첫째 줄, 일간. 癸예요. 음의 물. 비, 이슬, 스미는 물. 계수지약, 달어천진. 지극히 여리지만 하늘 나루까지 닿는 물.
둘째 줄, 월령. 午월이에요. 한여름 한가운데, 해가 제일 높은 때. 午 안에 丙 己 丁. 불이 물을 말리는 계절이니까 선생님은 계절을 잃었어요. 실령.
셋째 줄, 관계와 힘. 지지 넷, 酉 午 未 卯. 지장간까지 다 봐도 물이 하나도 없어요. 제 기운의 뿌리가 없어요. 선생님을 낳아 주는 쇠는 월간 庚하고 연지 酉 안의 庚 辛. 선생님을 누르는 흙은 연간 己, 午 안의 己, 未 안의 己. 선생님 힘을 빼 가는 나무는 시주 乙卯 둘, 未 안의 乙. 불은 午하고 未 안에 있고요. 돕는 쪽보다 빼 가고 누르는 쪽이 훨씬 무거워요. 신약.
넷째 줄, 격국과 용신. 午 안의 己가 연간에 드러났어요. 己는 癸를 누르는 같은 음의 흙이니까 편관, 칠살격이에요. 칠살은 거친 쓰임이라 다스려 써야 해요. 이 표에서는 庚이 다스려요. 己가 庚을 낳고 庚이 선생님을 낳으니까, 누르는 힘이 낳아 주는 힘으로 바뀌어요. 살인상생. 그리고 억부로 봐도, 조후로 봐도, 통관으로 봐도 庚. 그래서 용신은 庚이에요.”
미연은 거기서 숨을 골랐다. 여기까지는 지난번 바위 위에서 승수와 같이 짚은 데였다. 다음 장부터가 미연 혼자 쓴 것이었다.
“그리고 이 구절을 찾았어요.”
미연은 승수가 빌려준 『연해자평』 복사본에서 표시해 둔 장을 펼쳤다. 「오언독보」라는 다섯 글자짜리 운문의 맨 앞이었다.
有病方為貴,無傷不是奇;格中如去病,財祿兩相隨。
“유병방위귀, 무상불시기. 격중여거병, 재록양상수. 병이 있어야 비로소 귀하고, 다친 데가 없으면 기이하다 할 수 없다. 격 안에서 병을 없애면, 재물과 녹이 함께 따른다.”
미연은 승수를 보았다.
“선생님 표의 병은 己예요. 약한 癸를 누르는 칠살. 그런데 庚이 그 병을 받아서 약으로 바꿔요. 병이 있는데 그걸 다스리는 글자가 바로 옆에 있어요. 이 구절대로면, 선생님 표는 병이 있어서 오히려 귀한 표예요.”
미연은 마지막 장을 넘겼다. 거기는 병원 버스에서 쓴 글씨라 흔들려 있었다.
“일곱째 줄, 말로 옮기기. 선생님은 누르는 힘을 배움으로 바꾸는 사람이에요. 庚은 정인이니까, 배우고 가르치는 일. 그래서 선생님은 평생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잘 살아오셨을 거예요. 귀한 사주예요.”
미연은 공책을 내려놓았다. 조금 뿌듯했다. 처음으로 남의 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고, 원전까지 찾아 붙였다. 승수가 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승수는 웃지 않았다.
“틀렸어요.”
승수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런데 단단했다. 처음 만난 날부터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단단함이었다. 꽃집 아인슈타인 앞에서도, 무대의 엘비스 앞에서도, 승수는 근거는 있었네요, 하고 말했었다. 오늘은 그 말이 없었다.
“어디가요?”
“넷째 줄까지는 맞아요. 다섯째 줄과 여섯째 줄을 건너뛰었어요. 세부도 안 보고, 운도 안 보고 일곱째 줄로 갔어요. 그건 괜찮아요. 1차니까. 틀린 건 일곱째 줄이에요.”
“어디가 틀렸는데요?”
“평생 공부하고 가르치면서 잘 살아오셨을 거예요. 그 문장은 어느 글자에서 나왔어요?”
미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庚에서 나왔다고 말하려다가, 庚은 정인이라는 이름까지만 말해 준다는 걸 알았다. 잘 살아왔다는 말은 어느 글자에도 없었다. 그건 미연이 승수를 알고 나서 붙인 말이었다. 산 위에서 원전을 펼치는 사람, 무릎이 아픈 사람, 핫팩을 배운 대로 사 오는 사람. 그 사람을 보고 표에 끼워 맞춘 것이었다.
“그리고 귀한 사주라는 말.” 승수가 공책의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도해 원장이 정우 씨 표에 피 볼 살이라고 쓴 거랑, 미연 씨가 내 표에 귀한 사주라고 쓴 거랑, 뭐가 달라요?”
“그건 좋은 말이잖아요.”
“좋은 말도 이름이에요. 이름을 붙이면 그 사람이 그 이름 안에 갇혀요. 귀한 사주라는 말을 들은 사람이 망하면, 그 사람은 귀한 걸 망친 사람이 돼요. 낙인은 나쁜 이름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그 구절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병이 있어야 귀하다고.”
“그 구절의 병은 사람 몸의 병이 아니라, 명식 안의 막힘이에요. 막힌 데가 있는 표를 그 막힘을 다루면서 읽어야 한다는 거예요. 막힘이 있으니 귀하다고 박수 치라는 말이 아니고요. 그리고 그 구절은 재물과 녹이 따른다고 말해요. 그건 이 책의 주장이에요. 미연 씨는 그걸 빼고 귀하다는 말만 가져왔어요.”
미연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칭찬하려고 쓴 말이 하나씩 근거 없는 말로 무너지는 걸 보는 게, 혼나는 것보다 훨씬 창피했다.
“선생님 표를 칭찬하려고 한 거예요.”
“알아요. 그래서 틀렸다고 하는 거예요. 미연 씨가 나를 좋아하니까 내 표가 좋아 보이는 거예요. 정우 씨를 싫어하는 사람들한테 정우 씨 표가 피 볼 표로 보이는 것처럼.”
바위 위로 바람이 불었다. 우산 위에 쌓였던 눈이 한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미연은 그 눈이 바위 아래로 흩어지는 걸 보았다. 그리고 엿새 동안 영수 없는 병원을 오가며 쌓인 것이 한꺼번에 목까지 올라왔다.
“그럼 선생님은 왜 산에 있어요?”
승수가 미연을 보았다.
“귀하지도 않고 잘 살아온 것도 아니면, 선생님은 왜 이 추운 데 매일 앉아 있어요? 무릎도 아프면서. 처음 만난 날 생각이 많아서 앉아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무슨 생각이요? 넘치는 사람을 더 넘치게 해서 다치게 했다던 사람은 누구예요? 저는 선생님 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는데, 선생님에 대해선 하나도 몰라요. 그래서 끼워 맞췄어요. 모르니까요.”
미연의 목소리가 바위 위에서 갈라졌다. 승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의 핫팩 하나를 떼어 냈다. 손이 떨렸다. 승수의 손이 떨리는 걸 미연은 처음 보았다.
“내 삶을 내 표에 끼워 맞추지 마요.”
승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높아졌다.
“그리고 내 표로 내 삶을 묻지도 마요. 그건 미연 씨가 배운 순서가 아니에요. 표를 읽고 나서 그 사람한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거, 그게 도해 원장이 하는 일이에요. 그게 내가 하던 일이고요.”
마지막 말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승수는 그 말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챈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하던 일이요?”
승수는 대답하지 않고 일어섰다. 무릎이 소리를 냈다. 우산을 접지도 않고 바위 위에 둔 채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젠도 없이 얼어붙은 계단을 내려가는 등이 위태로웠다. 미연은 따라가려다 멈췄다. 따라가면 승수가 더 빨리 걸을 것 같았다.
미연은 바위 위에 혼자 남았다. 펼친 우산이 바람에 조금씩 돌았다. 우산 아래 방석 두 개 가운데 하나가 비어 있었다.
*
산을 내려와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카페 「쉼표」의 불이 켜져 있었다. 유리문에는 폐업 안내문도 영업 안내문도 붙어 있지 않았다. 미연이 문을 밀자 종이 울렸다. 문에 종이 달려 있는 걸 미연은 처음 알았다. 손님이 와야 울리는 종이었다.
한결은 계산대 뒤에서 작은 원두 봉지 하나를 저울에 달고 있었다.
“형사님한테 커피 한 잔 약속했잖아요. 그 한 잔 때문에 원두를 한 봉지 샀어요. 가게 접을 사람이.”
“그럼 아직 안 접는 거예요?”
“모르겠어요. 날짜는 제가 정하기로 했으니까, 아직 안 정한 거예요.”
한결은 커피를 한 잔 내려 미연 앞에 놓았다. 이번에도 조금 탔다. 미연은 그 쓴맛이 이상하게 반가웠다.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눈가가 뜨거워졌다. 한결이 놀란 얼굴로 휴지를 밀어 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선생님한테 혼났어요. 아니, 제가 대들었어요. 선생님 사주 칭찬하려다가 틀렸다고 혼나고, 그래서 대들었어요. 왜 산에 있냐고.”
한결은 휴지 상자를 하나 더 밀어 놓고 계산대에 팔꿈치를 괴었다.
“미연 씨가 그랬잖아요. 보석은 밖에서 보면 안 반짝이고 닦아야 반짝인다고.”
“그건 한결 씨 얘기였죠.”
“닦이는 거 엄청 아파요. 사포로 문지르는 거니까. 혼나는 게 닦이는 거예요. 저 이 년 동안 맨날 닦였어요. 그래서 요즘 좀 반짝여요.”
미연은 웃음이 터졌다. 터지고 나서 다시 눈물이 났다. 한결은 이번에는 휴지를 밀지 않고, 계산대 아래에서 과자 한 봉지를 꺼내 뜯어 주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지 사흘 된 과자였다. 미연은 그걸 다 먹었다.
*
그날 오후 병원에서 미연은 숟가락 쥐는 연습을 하는 할머니 옆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미연의 얼굴을 몇 번 흘끔거리다가 왼손에 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싸웠냐?”
“네?”
“그 양반이랑.”
미연은 어떻게 알았냐고 묻지 않았다. 할머니는 손자 얼굴에서도 아들 얼굴에서도 늘 그런 식으로 알았다.
“제가 선생님 사주를 봤는데요. 칭찬하려고 했는데, 틀렸대요. 그래서 제가 대들었어요. 선생님은 왜 산에 있냐고.”
할머니가 웃었다. 얼굴 반쪽이 아직 덜 움직여서 웃음도 반쪽이었다.
“그 양반이 처음 이 동네 온 게 언젠지 아냐. 팔 년 전이다. 거북바위에 앉아 있길래 내가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 겨울에도 앉아 있고 여름에도 앉아 있고. 일 년쯤 지나서 내가 밤 한 봉지 갖다줬더니, 그 양반이 울더라.”
“선생님이요?”
“밤 받고 운 사람은 그 양반밖에 없다. 그 뒤로 정우가 해마다 밤 갖다줬어.” 할머니가 다시 숟가락을 쥐었다. 이번에는 한 번에 쥐었다. “사람이 산에 앉아 있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야. 묻는다고 말하는 이유면 산에 안 올라가지.”
미연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할머니가 국을 한 숟갈 떴다. 국물이 반쯤 흘렀지만 할머니는 그걸 닦지 않고 다음 숟갈을 떴다.
*
다음 날 아침, 미연은 일곱 시에 산에 올랐다. 평소보다 두 시간 일렀다. 할머니 헛간에서 꺼낸 아이젠에 고무줄을 덧대 묶고, 주머니에 핫팩 여섯 개를 넣었다. 사과하는 말은 정하지 못했다. 근거 있는 사과가 무엇인지 몰랐다.
거북바위는 비어 있었다.
우산이 어제 그 자리에 펼쳐진 채 서 있었다. 밤새 내린 눈이 우산 위에 두껍게 쌓여 있었고, 우산 아래 방석 두 개는 둘 다 비어 있었다. 돗자리 위에 발자국이 없었다. 어제 승수가 내려간 뒤로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었다.
미연은 우산 아래 자기 방석에 앉았다. 여덟 시가 되었다. 아홉 시가 되었다. 승수는 오지 않았다. 두 시간을 채우고 나서 미연은 핫팩 두 개를 승수의 방석 위에 올려놓고 일어섰다. 내려가는 계단에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바위 위에 우산 하나와 빈 방석 두 개, 그리고 그 위에 핫팩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멀리서 보니 누군가 막 일어나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