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6,275자)

원국 종합 풀이 — 처음으로 끝까지 읽다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오성태 경위는 자정이 조금 넘어 병원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복도 끝 의자에서 일어나 응급실 커튼 앞까지 걸어와서, 영수에게 차 키를 돌려주었다.

“어머님 깨어나셨으니까. 내일 오전 열 시, 경찰서입니다.”

영수는 키를 받아 쥐고 고개를 숙였다. 오 형사는 그 고개를 오래 보다가 돌아섰다. 복도 의자에 앉아 있던 미연 앞을 지나며 형사가 낮게 말했다. 도망갈 사람이었으면 오늘 여기 안 왔겠지. 미연에게 한 말인지 자기한테 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날 밤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여섯 명이 쓰는 방의 창가 자리였다. 영수가 보호자 의자에서 밤을 새웠고, 미연은 복도 대기실 긴 의자에서 패딩을 덮고 잤다. 집에 가 있으라는 영수의 말을 미연은 듣지 않았다. 영수도 두 번 말하지 않았다.

*

아침 일곱 시, 대기실 자판기 옆에 승수가 서 있었다. 어제의 젖은 바지를 갈아입고 왔고, 손에는 편의점 봉지가 들려 있었다. 삼각김밥 둘, 바나나 우유 둘, 그리고 핫팩 한 묶음.

“할머니는요?”

“밤에 두 번 깨셨어요. 물 드시고 다시 주무셨어요.”

“영수 씨는?”

“안에 있어요.”

승수는 그 말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고 봉지를 미연 무릎에 올려놓았다. 미연은 삼각김밥 비닐을 뜯다가 순서를 틀려 김을 다 찢었다. 승수가 자기 것을 뜯어 미연과 바꿔 주었다.

“밤새 뭐 했어요?”

미연은 대답 대신 공책을 펼쳤다. 대기실 형광등 아래에서 밤새 쓴 장이었다. 네 장이었다. 첫 장 맨 위에 제목이 있었다. 미연. 처음부터 끝까지. 1차.

“잠이 안 와서요. 할머니 숨소리 들으면서 그냥 썼어요. 순서표대로요.”

“읽어 줘요.”

“여기서요?”

대기실에는 둘 말고도 서너 사람이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아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승수는 상관없다는 듯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꽂았다.

미연은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

“첫째 줄, 일간. 저는 壬이에요. 양의 물, 큰 강. 이 표를 읽을 때 저를 이 글자에 놓고 나머지 일곱 글자를 봐요.

둘째 줄, 월령. 酉월이에요. 가을 한가운데, 쇠가 제일 단단한 때. 酉 안에는 庚하고 辛이 있고, 쇠가 물을 낳으니까 이 계절은 저를 낳아 주는 계절이에요. 저는 계절을 얻었어요. 그리고 가을 물이라서 차가워요.

셋째 줄, 관계와 힘. 일지 子 안에 壬하고 癸, 연지 申 안에 壬. 저는 제 자리에 뿌리가 깊고, 연주에도 가는 뿌리가 있어요. 월간 癸는 저랑 같은 물이라 제 편이에요. 저를 낳아 주는 쇠는 申하고 酉 안에 가득해요. 반대로 제 힘을 빼 가는 건 연간 甲 하나, 제가 다뤄야 하는 건 시간 丁, 저를 누르는 건 未 안의 己예요. 甲은 未 안의 乙에 가는 뿌리가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어요. 양쪽을 다 달아 보면 돕는 쪽이 무거워요. 그래서 신강이에요.”

미연은 거기서 숨을 쉬었다. 대기실 텔레비전에서 날씨 예보가 나왔다. 오늘도 영하라고 했다.

“넷째 줄, 격국과 용신. 월지 酉의 본래 기운은 辛이고, 천간에 드러난 게 없으니까 정인격이에요. 저를 낳아 주는 게 집의 기둥이에요. 그런데 저는 신강하고, 가을이라 차가워요. 억부로 보면 넘치는 물을 흘려보내거나 써야 하고, 조후로 보면 따뜻하게 해야 해요. 두 길이 다 시간의 丁을 가리켜요. 그래서 1차로는 丁이 용신이에요. 丁을 낳아 주는 甲이 희신이고, 丁을 끄는 癸가 기신이에요. 제 편인데 제 등불한테는 찬물인 글자.”

승수가 빨대에서 입을 뗐다.

“丁 옆에 붙은 건요?”

“丁 바로 옆이 저예요. 일간 壬하고 시간 丁이 붙어 있어요. 이 둘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선생님이 등불 보러 간 날 그랬는데, 아직 안 배웠어요. 나중 목록에 있어요. 그래서 1차에서는 일부러 안 썼어요.”

“좋아요. 모르는 건 모른다고 비워 두는 거, 잘했어요.”

“다섯째 줄, 세부는 아직 못 배웠어요. 여섯째 줄, 운도 아직이에요. 일곱째 줄, 말로 옮기기.”

미연은 마지막 장을 넘겼다. 거기만 글씨가 조금 삐뚤었다. 새벽 네 시쯤 쓴 장이었다.

“제 표는 받아들이는 쪽이 너무 커요. 낳아 주는 쇠가 가득하고, 같은 물이 옆에 있고, 뿌리가 깊어요. 그런데 내보내는 쪽은 작고 멀어요. 甲 하나, 丁 하나. 담기만 하고 흘려보내지 못하면 물이 고여요. 고인 물은 차가워지고요.”

미연은 그다음 문장을 읽기 전에 잠깐 망설였다.

“그래서 저는, 받아들이는 일 말고 내보내는 일을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배우는 것만 넉 달째 하고 있었어요. 원서 쓰고, 자기소개서 고치고, 산에서 배우고. 다 받아들이는 일이에요. 흘려보낸 건 하나도 없어요. 윤지호 씨가 맡긴 확인 일이 처음으로 내보내는 일이에요. 확인한 걸 써서 남한테 넘기는 거니까.”

미연은 공책을 내려놓았다.

“여기까지예요. 마지막 장은 풀이가 아니라 제 생각이에요. 섞이면 안 될 것 같아서 따로 적었어요.”

승수는 바나나 우유 곽을 손안에서 천천히 구겼다.

“처음 바위 위에서 미연 씨가 한 질문 기억나요? 계속 배우고 준비하면 언젠가 제 일이 생기냐고.”

“기억나요.”

“그 질문에 지금 미연 씨가 혼자 대답했어요. 표를 읽고, 표가 말해 주는 것과 미연 씨가 생각한 걸 따로 적고.” 승수가 공책의 마지막 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장은 풀이가 아니에요. 그런데 풀이를 끝까지 한 사람만 쓸 수 있는 장이에요.”

미연은 그 말을 듣고 공책을 덮었다. 덮은 공책 위에 손을 얹었다. 밤새 쥐고 있던 펜 때문에 가운뎃손가락에 빨간 자국이 나 있었다.

승수가 가방에서 『적천수』를 꺼냈다. 아주 짧은 편이었다. 「중화론」.

能識中和之正理,而於五行之妙,有全能焉。

“능식중화지정리, 이어오행지묘, 유전능언. 중화의 바른 이치를 알 수 있다면, 오행의 오묘함에 대해 온전히 능하게 된다.”

“중화가 뭐예요?”

“가운데 중, 고를 화. 치우치지 않고 고르게 어우러진 것. 지난번 통천론에서 다섯 기운이 치우쳤는지 온전한지 보라고 했지요. 그 치우침을 바로잡는 쪽이 중화예요.”

“그럼 다섯 오행을 똑같은 개수로 맞추는 거예요?”

“그렇게 읽는 사람이 많은데, 아니에요. 다섯 개가 다 두 개씩 있어도 한겨울 표면 추워요. 개수가 아니라 쓰임이 고른 거예요. 넘치는 데서 덜어 모자란 데로 흘러가는 것. 미연 씨가 마지막 장에 쓴 게 그거예요. 받아들인 걸 흘려보내는 것.”

미연은 그 짧은 한문 한 줄을 오래 보았다. 산에서 처음 만난 날 승수가 했던 말이 겹쳐졌다. 모자란 건 채우고, 넘치는 건 덜어 낸다. 사람은 대개 반대로 한다.

“선생님은 이걸 언제 알았어요?”

“늦게요.”

승수는 그 말만 했다. 대기실 구석에서 신문을 보던 할아버지 하나가 신문을 내리고 이쪽을 보았다. 아까부터 미연의 낭독을 다 듣고 있었던 얼굴이었다.

“학생, 사주 보는 거여? 나도 좀 봐 줘. 우리 마누라가 저 안에 누워 있는디.”

미연은 당황해서 승수를 보았다. 승수는 바나나 우유만 마셨다. 미연이 공책 뒷장을 한 장 찢어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생일만 적어 주세요. 이야기 없이요.”

할아버지는 볼펜을 받아 들고 진지하게 숫자를 적었다. 그리고 숫자 밑에 이어서 쓰기 시작했다. 마누라가 지난달에 넘어져서, 아들놈은 미국에 있고, 며느리는.

“할아버지, 이야기는 빼 주셔야…….”

“이게 다 생일이랑 관계가 있는 거여.”

할아버지는 종이 앞뒤를 빼곡히 채워 미연에게 돌려주었다. 생일은 맨 위 한 줄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이야기였다. 미연은 그 종이를 받아 들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정중하게 접어 공책 사이에 끼웠다. 승수가 우유 곽 뒤에서 어깨를 떨었다.

“다음에 제가 다 배우면 읽어 드릴게요.”

“그려. 근디 학생, 빨리 배워. 나 팔십여덟이여.”

할아버지가 다시 신문을 펼쳤다. 미연은 웃음을 참느라 삼각김밥을 목에 걸릴 뻔했다. 밤새 굳어 있던 어깨가 그제야 조금 풀렸다.

미연은 더 묻지 않았다. 며칠 전 서리 앉은 바위 위에서 들은 말, 넘치는 쪽을 더 넘치게 해서 사람을 다치게 했다던 그 낮은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다.

*

오전 열 시가 지났다. 미연은 대기실 벽시계를 보다가 병실 쪽을 보았다. 영수는 나오지 않았다. 열 시 반이 지났다. 영수의 휴대전화가 울리는 소리가 병실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가 끊겼다.

미연은 병실 앞 복도로 갔다. 문이 한 뼘쯤 열려 있었다. 창가 침대의 커튼은 반쯤 쳐져 있었고, 그 틈으로 할머니가 침대 등받이를 세우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 반쪽이 조금 처져 있었다. 영수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엄마, 의사가 무리하지 말래.”

“앉아.”

“엄마.”

“앉으라고.”

영수가 의자에 앉았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느렸고, 발음이 조금 뭉개졌다. 그런데도 밭에서 쩌렁쩌렁하던 그 높이는 그대로였다.

“너 그날 밤 서울 갔냐?”

“갔어. 엄마, 내가 몇 번을 말해.”

“형사가 너를 왜 기다리냐?”

“그 사람들은 다 의심해. 정우도 그렇게 잡아갔잖아.”

“정우는 아니야.”

“나도 아니야, 엄마!”

영수의 목소리가 커졌다. 옆 침대의 환자가 커튼 너머에서 기침을 했다. 영수는 목소리를 낮췄다. 낮춘 목소리가 더 떨렸다.

“엄마, 나 서울 있었어. 그날 밭에서 엄마랑 싸우고, 기분 나빠서 바로 올라갔어. 휴게소에서 우동 먹었어. 영수증도 있을 거야.”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 옆 서랍에 손을 뻗었다. 손이 잘 안 움직여서 서랍 손잡이를 두 번 놓쳤다. 영수가 대신 열어 주려 하자 할머니가 그 손을 쳐 냈다. 세 번째에 서랍이 열렸다. 할머니는 그 안에서 낡은 공책 하나를 꺼냈다. 표지가 누렇게 바랜, 줄 공책이었다.

미연은 그 공책을 알았다. 선산에 가기 전날 밤 할머니가 상자에서 꺼내 안방 불 밑에서 읽던 영감의 일기장 가운데 한 권이었다. 선산에서 영수에게 밭은 정우 몫이라는 줄을 내밀었던 바로 그 공책이었다. 이번에 할머니가 펼친 건 다른 장이었다. 할머니가 구급차에 실려 갈 때 몸빼 주머니에 들어 있던 것이 휴대전화만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공책 한 장을 펼쳐 영수 앞에 내밀었다.

“네 아버지 글씨다. 읽어.”

영수는 공책을 받지 않았다. 할머니가 공책을 영수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영수는 무릎 위의 공책을 내려다보았다. 미연이 서 있는 자리에서는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영수의 어깨가 한 번 크게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네 아버지가 그랬다. 영수는 착한데 겁이 많다고. 겁나면 거짓말부터 한다고. 어릴 때 남의 집 유리창 깨고도 사흘을 숨겼다고. 사흘째 되는 날 울면서 다 말했다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거기서 끊겼다.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오늘이 며칠째냐, 영수야?”

영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공책을 덮고 일어섰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엄마, 쉬어. 나 담배 한 대만 피우고 올게.”

영수가 커튼을 젖히고 나왔다. 문 앞에 선 미연과 눈이 마주쳤다. 영수의 눈이 빨갰다. 영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연을 지나쳐 복도 끝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 문을 밀었다. 문이 닫혔다.

미연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병실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 눈을 감고 있었다. 무릎 위의 공책은 영수가 덮어 놓은 그대로였다. 미연은 침대 발치에 서서 기다렸다. 십 분이 지났다. 이십 분이 지났다.

미연은 병원 정문으로 내려갔다. 승수가 편의점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미연을 보고 일어섰다.

“영수 씨 나갔어요. 택시 타고.”

“언제요?”

“이십 분 전에요. 담배 피우는 줄 알았는데, 길가로 나가서 손을 들더라고요.” 승수가 주차장 쪽을 가리켰다. “차는 저기 그대로 있어요.”

미연은 주차장을 보았다. 서울 번호판의 검은 승용차가 지붕에 밤새 쌓인 눈을 인 채 서 있었다. 오 형사가 어젯밤 돌려준 키로 시동을 걸 수 있는 차였다. 영수는 그 차를 두고 갔다. 22시 41분에 계곡 주차장으로 들어갔던 그 차를.

미연은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 형사의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는 동안 병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육 층 창가, 커튼 너머로 할머니의 침대가 있을 자리였다.

“형사님, 미연이에요. 아저씨가 병원을 나갔어요. 택시로요. 차는 두고요.”

전화 너머에서 오 형사가 오래 숨을 내쉬었다.

“차를 두고 갔다고요?”

“네.”

“그럼 도망이 아니라.” 형사가 말을 멈췄다. “아니, 모르겠네. 알았어요. 학생은 어머님 옆에 있어요.”

전화가 끊겼다. 미연은 병실로 돌아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영수가 밤새 앉아 있던 의자였다. 아직 온기가 조금 남아 있었다. 할머니가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어 무릎 위의 공책을 더듬었다. 미연은 그 공책을 집어 할머니 손에 쥐여 드렸다. 할머니는 공책을 가슴에 얹었다.

“사흘이면 말했는데.” 할머니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이번엔 오래 걸리네.”

23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