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5,980자)
외격과 종격 — 모든 물이 바다로 가지는 않는다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서울 강서구, 지하철역에서 십오 분을 걸어 들어가는 골목 끝 원룸 건물의 사층. 김영수는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
알람이 울린 것은 아니었다. 휴대전화가 베개 옆에서 짧게 떨었다. 문자였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 이자분 입금 안 되면 법적 절차 들어갑니다. 그 아래로 같은 번호에서 온 문자가 열한 개 쌓여 있었다. 영수는 화면을 끄지 않고 천장을 보았다. 천장 귀퉁이에 곰팡이가 손바닥만 하게 번져 있었다. 이사 올 때는 동전만 했다.
방은 다섯 평이었다. 싱크대 위에 컵라면 용기 세 개가 포개져 있었고, 냉장고 위에 서류 상자 하나가 얹혀 있었다. 상자 옆면에 매직으로 「현장 정산」이라고 적혀 있었다. 인테리어 사무실을 정리하면서 들고 나온 유일한 상자였다. 사무실 간판을 내린 날, 영수는 이 상자를 끌어안고 지하철을 탔다. 그때 빚이 일억 칠천이었다. 지금은 삼억이었다.
영수는 휴대전화의 통화 목록을 열었다. 손가락이 저절로 목록 맨 아래까지 내려갔다. 10월 12일, 23시 51분. 발신. 119. 통화 시간 0초.
이 줄을 지우려고 영수는 이 주일 동안 매일 밤 목록을 열었다. 길게 누르면 「삭제」 단추가 뜬다는 걸 알았다. 엄지를 그 줄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매번, 누르지 못했다. 지우면 그 밤에 그가 그 번호를 눌렀다는 사실까지 사라질 것 같았다. 그가 끊었다는 사실과 함께.
영수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 냉장고 옆 벽에 액자 하나가 걸려 있었다. 표구된 한지에 붓글씨로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金白水淸. 십 년 전 사무실을 처음 열 때 읍내 도해철학관 원장이 써 준 것이었다. 금백수청, 쇠는 희고 물은 맑으니 귀하게 될 사주라고 했다. 어머니가 그 말을 듣고 밭에서 나온 고추를 팔아 액자 값을 댔다.
초인종이 울렸다. 새벽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
*
문 앞에 선 남자는 쉰 줄이었고, 등산복 차림이었다. 시행사 하청을 맡은 토목 회사의 실장이라고 했다. 영수는 이 사람을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계룡산 아래 식당에서 이장과 셋이, 한 번은 이 원룸 앞에서.
“김 사장님,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실장은 죄송한 얼굴이 아니었다. 문틈으로 방 안을 한 번 훑어보고는 들어오라는 말도 듣지 않고 신발을 벗었다. 영수는 막지 않았다.
“리조트 건 엎어진 거 아시죠. 이장님 일 터지고 나서 본사가 그 부지 손 뗐습니다. 사람 죽은 땅에 리조트 짓는다고 기사 나가면 분양이 안 되거든요.”
“알아요.”
“그럼 저희가 드린 계약금 이천, 돌려주셔야죠. 그거 사장님 어머님 도장 받아 오는 조건으로 드린 돈입니다.”
“그 돈 다 썼어요. 이자 갚았어요.”
“그건 사장님 사정이고요.”
실장은 싱크대에 기대어 서서 컵라면 용기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용기가 넘어지며 남은 국물이 싱크대 바닥으로 흘렀다.
“사장님, 저희가 그 위임장 사본 갖고 있는 거 아시죠. 어머님 도장 찍힌 거. 저희는 그게 진짜인 줄 알고 돈 드렸습니다. 그런데 요즘 경찰이 동네 도장 가게를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들려요.”
영수의 목덜미가 굳었다.
“그 위임장이 가짜면, 저희는 사기를 당한 쪽입니다. 그럼 저희도 고소해야죠. 사장님이 금요일까지 이천 돌려주시면, 저희는 그 사본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정산하자는 겁니다.” 실장이 냉장고 위의 상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현장 정산」. “사장님 업계 말로.”
영수는 실장의 멱살을 잡았다. 잡는 순간 자기가 무엇을 잡았는지 알았다. 두 손이 떨렸다. 계곡의 찬 바위 냄새가 갑자기 콧속을 찔렀다. 그날 밤 이장의 조끼를 잡았던 손과 같은 손이었다. 영수는 손을 놓았다. 실장은 멱살을 털며 한 걸음 물러섰다.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금요일입니다.”
문이 닫혔다. 영수는 문 앞에 주저앉았다. 벽의 액자가 정면에 있었다. 금백수청. 영수는 그 네 글자를 오래 보다가 일어나서 액자를 떼어 냈다. 뒤집어서 벽에 기대 놓았다. 그것도 차마 버리지는 못했다.
*
같은 날 오후, 미연은 정자 마루에 앉아 승수가 내민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결이 녹화기를 경찰에 넘긴 지 엿새째였다. 오 형사에게서는 여전히 아무 연락이 없었다.
“오늘은 격에서 하나 더 나가요. 지금까지 배운 격은 다 안쪽의 격이었어요. 월령을 보고, 일간이 강한지 약한지 따져서 넘치면 덜고 모자라면 채우는 격. 이걸 내격이라고 불러요. 그런데 이 셈이 통하지 않는 명식이 있어요.”
“어떻게 통하지 않아요?”
“일간이 너무 약하거나 너무 강해서, 모자란 걸 채워 봐야 소용이 없는 경우요. 그럴 때는 일간이 자기를 버리고 큰 흐름을 따라간다고 봐요. 따를 종 자를 써서 종격이라고 해요. 바깥의 격이라는 뜻으로 외격이라고도 하고요.”
승수가 종이 한 장을 펼쳤다. 이름은 가려져 있지 않았다. 대신 위쪽에 창작 비교 명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丙 乙 壬 丙 午 未 午 午
“이건 실제 사람이 아니에요. 1966년 7월 22일 정오에 태어난 가상의 사람이라고 놓고 계산한 명식이에요. 종격을 설명하려고 만든 표예요. 실존 인물 표에서는 이렇게 분명한 예를 못 찾았어요.”
“일간 壬이에요. 저랑 같은 물.”
미연은 순서표대로 짚어 나갔다.
“월지 未. 늦여름이에요. 그리고 午가 셋. 丙이 둘. 乙이 하나.” 미연의 손가락이 멈췄다. “물이 하나도 없어요. 지장간까지 봐도요. 午 안에 丙 己 丁, 未 안에 丁 乙 己. 쇠도 없어요. 물을 낳아 줄 쇠가 하나도 없어요.”
“이 壬은 어떤 물이에요?”
“한여름 한낮, 불바다 한가운데 떨어진 물 한 방울이요.”
“그 물한테 물을 부어 주면 어떻게 될까요?”
미연은 대답하려다 멈췄다. 지금까지 배운 셈대로라면, 약한 일간에게는 같은 편과 낳아 주는 편을 붙여야 했다. 모자란 것을 채운다. 그런데 한 바가지 물을 부어 봐야 이 표의 불은 조금도 줄지 않을 것 같았다. 오히려 불이 물을 만나 더 사납게 끓어오를 것 같았다.
“소용없을 것 같아요. 아니, 더 나빠질 것 같아요.”
“옛사람들도 그렇게 봤어요. 이런 명식은 물이 불을 따라간다고 봐요. 일간에게 불은 재성이니까, 재성을 따라간다고 종재격이라고 불러요. 이 명식에서는 오히려 불이 쓰임이고, 물을 부으면 거스르는 거예요.”
“자기를 버리고 따라가는 게 사는 길이라고요?”
“이 셈에서는요.”
미연은 그 말이 이상하게 무서웠다. 종이 위의 壬이 자기 일간과 같은 글자라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큰 물이라고 배운 글자가 바다로 가지 못하고 불 속으로 사라지는 그림이었다.
“그럼 이걸 어떻게 알아봐요? 약한 건지, 따라가는 건지.”
“그게 이 공부에서 제일 어렵고 제일 위험한 판단이에요. 약한 걸 종격으로 잘못 읽으면, 채워야 할 사람한테 버리라고 말하게 돼요. 종격을 약한 걸로 잘못 읽으면, 따라가야 할 사람한테 억지로 버티라고 말하게 되고요. 둘 다 그 사람을 다치게 해요.”
“그래서 진짜 종격하고 가짜 종격이 있어요?”
“진종과 가종이라고 불러요. 이 표처럼 뿌리 하나 없이 완전히 따라가는 게 진종이에요. 뿌리가 조금 남아 있는데도 대세를 따르는 걸 가종이라고 하고요. 가종은 사람마다 판단이 많이 갈려요. 그래서 옛 책들도 종격은 함부로 붙이지 말라고 거듭 말하지요.”
미연은 자기 공책을 펼쳐 자기 명식을 슬쩍 그 옆에 놓았다. 甲申, 癸酉, 壬子, 丁未.
“선생님, 혹시 저도 종격일 가능성은요?”
“왜요?”
“종격이면 큰 흐름을 따라가는 게 사는 길이라면서요. 그럼 엄마 말 따라 노량진 가는 게 제 팔자일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엄마랑 안 싸워도 되고.”
승수가 미연의 표를 들여다보는 척했다. 아주 오래 들여다보는 척했다.
“가을 한가운데 태어나서 쇠가 낳아 주고, 일지에 제 뿌리가 깊고, 옆에 같은 물까지 떠 있는 壬이에요. 지난주에 미연 씨가 직접 신강이라고 썼지요.”
“……네.”
“이런 물을 종격이라고 하면 옛날 책 쓴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요.”
미연은 공책을 덮었다. 덮으면서 웃었다. 승수도 웃었다. 정자 처마 끝에서 마른 낙엽 하나가 떨어져 미연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럼 엄마랑은 계속 싸워야 하네요.”
“싸우든 안 싸우든, 그건 미연 씨가 정하는 거예요. 종격은 핑계가 못 돼요. 표가 정해 주는 게 아니라 표를 핑계로 쓰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지요. 그 마음은 근거 안 보임 칸에 넣어 둬요.”
미연은 정말로 공책 뒷장을 펼쳐 한 줄을 적었다. 종격이면 엄마랑 안 싸워도 됨. 근거 안 보임. 내 거.
승수가 두 번째 종이를 꺼냈다. 이번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프리드리히 니체.
甲 甲 戊 丁 辰 戌 辰 巳
“산 수업 때 봤지요. 니체. 戊가 戌월에 태어났어요. 흙이 엄청 많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런 표를 보고 흙 하나로 기운이 몰렸다고 해서 흙의 기운을 따르는 특별한 격으로 읽고 싶어 해요. 미연 씨가 판단해 봐요.”
미연은 표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일간 戊, 월지 戌. 辰이 둘, 戌이 하나. 戊의 뿌리가 지지 곳곳에 박혀 있었다. 丁과 巳는 흙을 낳아 주는 불이었다. 흙이 많은 건 맞았다. 그런데 미연의 눈은 계속 맨 왼쪽 위 두 글자에 걸렸다.
“甲이 둘 있어요. 큰 나무 둘. 나무는 흙을 누르는 쪽이잖아요. 그리고 辰 안에 乙이 있으니까 이 나무들은 뿌리도 있어요. 흙만 있는 게 아니에요. 흙을 누르는 게 버젓이 서 있어요.”
“그래서?”
“이건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냥 흙이 강한 거예요. 강한 흙을 甲 두 그루가 누르고 있는 거. 내격이요. 종격 아니에요.”
승수가 웃었다.
“나도 그렇게 읽어요. 이 표를 종격으로 읽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게 틀렸다고 내가 단정할 수도 없고요. 다만 미연 씨는 지금 甲 두 그루를 지우지 않았어요. 종격으로 읽고 싶을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게, 거슬리는 글자를 못 본 척하는 거예요.”
미연은 그 말을 공책에 적다가 펜 끝을 멈췄다. 거슬리는 글자를 못 본 척하는 것. 철학관 원장이 정우의 표에서 한 일이 그거였다. 피 볼 살 둘을 크게 적고, 그 옆의 나머지 글자는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선생님, 사람도 그래요?”
“뭐가요?”
“자기를 버리고 큰 흐름을 따라가는 거요. 그게 사는 길인 사람도 있어요?”
승수는 대답하기 전에 정자 밖을 오래 보았다. 등산로 입구 주차장이 보였다. 카페 「쉼표」의 유리문에는 폐업 안내문 대신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한결은 날짜를 아직 정하지 않았다.
“명식에서는 그런 셈을 해요. 그런데 사람의 일로 옮길 때는 조심해야 해요. 따라가는 것과 휩쓸려 가는 건 달라요. 종격은 따라가도 일간이 사라지지 않아요. 따라간 흐름 안에서 제 일을 하지요. 휩쓸려 간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요. 겉으로는 똑같아 보여요.”
“어떻게 구별해요?”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지 물어보면 되겠지요.”
미연은 창작 비교 명식의 壬을 손가락으로 덮었다. 불 속의 물 한 방울은 자기가 불을 따라간다는 걸 알까. 알고 따라가는 물과 모르고 끓어 없어지는 물. 종이 위에서는 그 둘이 똑같이 생겼다.
*
해가 질 무렵, 오성태 경위는 경찰서 형사과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카페 녹화기에서 뽑아낸 화면 한 장이 확대되어 있었다. 22시 41분. 가로등 아래 검은 승용차의 뒷모습. 번호판 숫자가 하얗게 번져 있었지만 읽을 수 있었다.
오 형사는 조회 창에 그 숫자를 하나씩 쳤다. 엔터를 누르기 전에 잠깐 손을 멈췄다. 안주머니 위에 손을 얹었다. 접힌 종이가 거기 그대로 있었다. 피를 볼 팔자. 오 형사는 그 종이를 꺼내지 않았다.
엔터를 눌렀다.
화면에 차주 정보가 떴다. 차종, 연식, 등록 주소, 그리고 이름. 김영수. 1972년생. 주소는 서울 강서구.
오 형사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사무실 형광등 하나가 깜박였다. 그는 한참 화면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들어 메모 앱을 열었다. 지난주 읍내 도장 가게 장부를 찍은 사진이 있었다. 서울 말씨, 어머니 거라고, 급하다고 웃돈까지. 그 사진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10/12 22:41 입장, 23:58 퇴장. 본인 진술은 19시 서울 귀가.
그리고 그 줄 아래에 하나를 더 적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 아들이 지금 구치소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