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7,598자)
사주팔자·천간지지·음양오행·상생상극 — 네 기둥과 여덟 글자
소설로 배우는 사주팔자 · 이수
다음 날 미연은 산 아래 문구점에서 얇은 공책을 샀다. 계산대 옆에 두꺼운 공책이 할인 중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손을 대지 않았다. 어제 들은 말에 근거가 너무 분명했다.
문구점을 나서는데 대화방이 울렸다. 수아였다. 대학 동기 가운데 미연과 가장 오래 같은 회사들에 원서를 넣어 온 아이였다.
나 붙었어!!! 최종!!!
그 아래 합격 화면을 찍은 사진이 붙어 있었고, 사진 아래로 축하한다는 말들이 줄줄이 쌓였다. 미연은 길가에 멈춰 서서 자판을 눌렀다. 와 수아야 진짜 축하해. 썼다가, 진짜라는 말이 어쩐지 진짜가 아닌 것처럼 보여서 지웠다. 축하해!! 느낌표 둘. 느낌표가 둘이면 너무 애쓰는 것 같아 하나를 지웠다. 그러다 어제 받은 채용 중단 메일이 떠올라 손가락이 멈췄다. 결국 보낸 건 꽃다발을 든 곰 이모티콘 하나였다. 곰은 미연보다 훨씬 기뻐 보였다.
문제는 다리였다. 어제 세 걸음마다 멈추던 다리가 밤사이 돌처럼 굳어서, 계단 하나를 내려설 때마다 허벅지 뒤쪽이 비명을 질렀다. 거북바위까지 오르는 동안 미연은 끈기의 사람이라는 자기소개서 첫 줄을 두 번 지우고 세 번 다시 썼다. 머릿속으로였다.
승수는 어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눈을 뜨고 있었고, 무릎 위에는 종이 두 장이 놓여 있었다.
“계단에서 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어요.”
“우는 거 아니었어요. 다리가 대화를 한 거예요.”
“무슨 대화요?”
“다신 안 온다고 했는데 왜 또 왔냐고요.”
승수가 웃으며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내려놓았다. 한 장 위쪽에는 승수, 다른 한 장에는 미연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 아래 한자가 몇 줄 늘어서 있었다.
“이게 두 사람의 명식이에요.”
미연은 종이를 받으려다 손을 멈췄다.
“그 전에요. 사주팔자가 정확히 뭐예요? 팔자가 좋다, 팔자가 사납다, 그런 말은 많이 들었는데 뭘 세는 건지는 몰라요.”
“그 말부터 알아야겠네요.”
승수는 미연의 새 공책을 펼쳐 네 칸을 그렸다. 첫 칸에는 해, 둘째 칸에는 달, 셋째와 넷째 칸에는 날과 시간이라고 썼다.
“사주는 네 기둥이에요. 태어난 해의 기둥이 연주, 달의 기둥이 월주, 날의 기둥이 일주, 시간의 기둥이 시주예요. 기둥 하나를 위아래 두 글자로 적으니까 모두 여덟 글자가 되고, 그 여덟 글자를 팔자라고 불러요. 이 글자들을 표로 적어 놓은 것을 명식이라고 하고요.”
미연은 자기 종이의 글자를 위아래 한 쌍씩 세었다. 둘, 넷, 여섯, 여덟.
“팔자가 원래 글자 수였어요?”
“이 표를 가리킬 때는 그래요. 일상에서는 그 말로 한 사람의 운명을 통째로 이야기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먼저 무엇을 적은 표인지부터 갈라 둡시다.”
“그럼 팔자가 사납다는 건 글자가 사납다는 거예요?”
“글자는 안 물어요.”
승수는 종이 두 장의 글자를 공책에 위아래로 나눠 옮겨 적었다. 왼쪽부터 연주, 월주, 일주, 시주 순서였다.
승수의 천간 己 庚 癸 乙 승수의 지지 酉 午 未 卯
미연의 천간 甲 癸 壬 丁 미연의 지지 申 酉 子 未
“천간하고 지지는요?”
“간지라는 오래된 시간 표기법에 쓰는 두 종류의 글자예요. 천간은 열 개, 지지는 열두 개가 있어요. 세로로 적으면 위의 글자가 천간, 아래 글자가 지지예요.”
승수가 미연의 셋째 칸을 짚었다.
“여기서 위의 壬이 천간, 아래 子가 지지예요. 임, 자라고 읽어요. 가로로 붙여 쓰면 임자가 되고요.”
“임자요? 이 물건 임자 있어요, 할 때 그 임자요?”
“소리만 같아요. 이 임자는 날짜 이름이에요. 열 개의 천간과 열두 개의 지지를 차례로 하나씩 짝지으면 예순 개의 짝이 생기는데, 옛사람들은 그걸로 해와 달과 날과 시를 셌어요. 갑자년, 임진년 하는 말 들어 봤지요?”
“임진왜란이요.”
“그 임진이 이 임진이에요. 그 해가 임진년이었으니까.”
미연은 공책 귀퉁이에 임진이라고 적고 그 아래 작게 왜란이라고 덧붙였다. 국사 시간에 외운 이름이 날짜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다 암호 같아요.”
“처음에는 그래요. 오늘 다 외우지 않아도 돼요. 표를 보면서 찾으면 돼요.”
승수는 공책 옆에 다섯 글자를 더 썼다. 木, 火, 土, 金, 水.
“명리에서는 이 글자들을 음양과 오행으로 나눠 읽어요. 오행은 목·화·토·금·수, 다섯 갈래예요. 나무와 불, 흙과 쇠, 물이라는 말이 이해를 돕지만, 그걸로 사람의 성격을 다섯 종류로 나누지는 않아요.”
“음양은 밝고 어두운 거요?”
“그렇게 시작해도 돼요. 볕이 드는 쪽과 그늘진 쪽, 움직임과 고요함처럼 서로 맞서면서 짝이 되는 두 측면을 가르는 틀이에요. 음이 나쁘고 양이 좋다는 뜻은 아니에요.”
미연은 볕이 비치는 공책 위에 드리운 자기 손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바위 위로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와 종이의 결까지 드러냈고, 손을 움직이면 그늘도 따라 움직였다. 승수의 손가락이 다시 글자로 돌아왔다.
“오행마다 음양을 나눠요. 목에는 양목 甲과 음목 乙, 화에는 丙과 丁, 토에는 戊와 己, 금에는 庚과 辛, 수에는 壬과 癸가 있어요. 다섯에 두 개씩이니 천간이 열 개가 되지요.”
승수는 가방에서 제본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청나라 때 심효첨이라는 학자가 쓴 명리 고전 『자평진전』을 옮겨 적은 것이었다. 승수가 「열 천간과 열두 지지를 논함」이라는 편을 펼쳐 한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蓋有陰陽,因生五行,而五行之中,各有陰陽。
“개유음양, 인생오행, 이오행지중, 각유음양. 음양이 있어 오행이 생기고, 오행 안에 다시 저마다 음양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 책이 천간을 열 개로 나누는 까닭을 이렇게 설명해요.”
미연은 자기 표의 甲과 승수 표의 乙을 찾았다.
“둘 다 목인데 하나는 양, 하나는 음. 그래서 글자가 둘로 갈리는 거네요.”
“맞아요. 지지도 음양과 오행으로 나눠요. 내 표 아래쪽의 卯는 음의 목, 午는 양의 화, 미연 씨 표의 酉는 음의 금이에요. 지지는 계절을 읽을 때 특히 중요한데, 그건 뒤에서 따로 배울 거예요.”
미연은 공책에 한 줄을 적었다. 생년월일시 네 기둥, 위아래 두 글자씩 여덟 글자, 천간과 지지, 음양과 오행.
“그런데 관계라는 건 어떻게 읽어요? 목이면 목이고 수면 수인 거 말고요.”
승수는 공책에 다섯 글자를 둥글게 적고, 글자 사이를 차례로 화살표로 이었다. 목에서 화로, 화에서 토로, 토에서 금으로, 금에서 수로, 그리고 수에서 다시 목으로.
“목생화, 화생토, 토생금, 금생수, 수생목.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낳고 길러 주며 이어지는 관계를 상생이라고 해요.”
미연은 마지막 수에서 처음의 목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다시 돌아오네요.”
“옛사람들은 자연이 생겨나고 자라고 변하고 거두어지는 모습을 이런 고리로 읽으려 했어요. 명리도 그 틀 위에서 사람을 살펴요.”
미연이 물병을 들어 보였다.
“물이 나무를 키우는 것처럼요?”
“그렇게 떠올려도 돼요. 마른 나무가 불을 이어 주는 모습도 그렇고요. 다만 다섯 관계를 전부 물건끼리의 반응으로만 읽으면 좁아져요. 흙이 쇠를 낳는다는 건 실험실에서 확인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계절이 넘어가고 기운이 이어지는 순서를 말하는 틀이니까.”
“흙에서 쇠 캐잖아요. 광산.”
“그것도 한 그림이에요. 하나만 정답으로 붙들지만 않으면 돼요.”
“그럼 다 서로 도와주는 거예요?”
“관계가 하나 더 있어요.”
승수는 그 아래에 별 모양으로 다른 순서를 그렸다. 목에서 토로, 토에서 수로, 수에서 화로, 화에서 금으로, 금에서 다시 목으로.
“목극토, 토극수, 수극화, 화극금, 금극목. 이건 상극이에요. 누르고 제한하는 관계지요.”
“싸우는 거네요.”
승수가 손가락으로 토극수를 짚었다.
“흙으로 쌓은 둑이 물길을 막는 모습을 생각해 봐요. 막는 게 언제나 나쁜 일일까요?”
“장마 때는 막아야죠.”
“그런 조절의 뜻도 같이 읽는 거예요. 반대로 너무 막으면 물이 썩겠지요. 생도 마찬가지예요. 물이 나무에 필요하다고 끝없이 부으면 어떻게 될까요?”
“뿌리 썩어요. 저 선인장 그렇게 죽였어요. 사랑을 너무 줬어요.”
“그 선인장이 오늘 수업의 절반을 했네요.”
미연은 웃다가 물병 뚜껑을 닫았다.
“상생은 좋고 상극은 나쁘다고 외우면 안 되겠네요.”
“어느 관계가 필요한지, 얼마나 작용하는지를 봐야 해요. 『자평진전』 바로 다음 편인 「음양의 생과 극을 논함」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然而有生又必有尅,生而不尅,則四時亦不成矣。尅者,所以節而止之,使之收斂,以爲發洩之基,故曰「天地節而四時成」。
승수가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연이유생우필유극, 생이불극, 즉사시역불성의. 극자, 소이절이지지, 사지수렴, 이위발설지기, 고왈 천지절이사시성.
그리고 미연이 멈춘 글자마다 뜻을 풀었다. 낳아 주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누르는 것도 있어야 하고, 낳기만 하고 누르지 않으면 사계절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름은 절제하고 멈추게 해서 거두어들이게 하고, 그것으로 다시 펼쳐 나갈 바탕을 삼는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절제하여 사계절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자라는 것만 생각하면 멈추고 거두는 때를 놓친다는 거네요.”
“이 문장은 그 둘을 같이 보게 해요. 가을에 열매가 맺히려면 여름의 무성함이 한 번 꺾여야 하니까.”
미연은 상생의 동그라미와 상극의 별을 번갈아 보았다. 어제 승수가 했던 말, 모자란 건 채우고 넘치는 건 덜어 낸다는 말이 두 그림 위에 겹쳐졌다.
“이걸 제 사주에도 쓰는 거예요?”
승수가 다시 두 명식을 끌어왔다.
“내 표의 庚은 금, 癸는 수예요. 금생수의 관계를 볼 수 있지요. 미연 씨 표의 壬은 수, 甲은 목이니까 수생목이고요.”
미연은 승수의 표를 들여다보다가 맨 왼쪽 위 글자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선생님 표에 己도 있네요. 아까 토라고 했죠? 그럼 癸하고는 토극수예요?”
“맞아요. 방금 두 글자 사이의 생극을 혼자 찾아냈어요.”
“제가요?”
“네. 다만 그 작용이 이 명식에서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계절과 다른 글자까지 함께 봐야 알아요. 오늘은 찾아낸 것까지만.”
미연은 처음 적은 문장 뒤에 한 줄을 붙였다. 글자를 음양오행으로 나눈 뒤, 그 사이의 생과 극을 읽는다.
“근데 여덟 글자가 다 서로 관계가 있으면요, 누구 쪽에서 봐야 해요? 甲 입장에서 보면 壬이 엄마고, 壬 입장에서 보면 甲이 자식이잖아요. 그럼 다 엄마고 다 자식이에요.”
“좋은 질문이에요. 이제 읽기의 중심을 찾을 차례예요.”
승수가 미연의 셋째 칸 윗글자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이 글자부터 봐요. 날의 기둥, 일주의 천간이라서 일간이라고 불러요. 명리는 이 글자를 나로 놓고, 나머지 일곱 글자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읽어요.”
승수는 자기 종이의 같은 자리에도 동그라미를 그렸다.
“미연 씨 일간은 壬, 양의 물이라 임수라고 불러요. 내 일간은 癸, 음의 물이라 계수고요.”
미연은 동그라미 친 글자를 오래 보다가, 갑자기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어제 그 앱 화면이 그대로 떠 있었다.
“잠깐만요. 이 앱이 저보고 큰 바다의 물이라고 했거든요. 임수가 큰 물이면, 이거 맞힌 거 아니에요?”
“맞힌 게 아니라 계산한 거예요.”
“네?”
“일주는 태어난 날만 있으면 나와요. 시간을 몰라도 날짜만 넣으면 壬子는 계산돼요. 달력에 오늘 날짜가 적혀 있는 것과 같아요. 미연 씨가 모름을 눌러도 이 글자는 안 흔들려요.”
미연은 화면의 두 줄을 다시 읽었다. 큰 바다의 물, 그리고 하반기의 귀인.
“그럼 하반기 귀인은요?”
“그건 지금 우리가 배운 걸로는 어디서 나왔는지 안 보여요. 근거가 보이는 문장 하나, 안 보이는 문장 하나.”
미연은 공책 맨 뒷장을 펼쳐 칸을 두 개 그었다. 근거 보임, 근거 안 보임. 첫 칸에 큰 바다의 물, 둘째 칸에 하반기 귀인을 적었다. 그러다 앞장으로 돌아와 다른 줄을 하나 더 적었다.
어제 마흔둘까지 셌다는 말. 근거 안 보임. 하나.
승수가 그 줄을 넘겨다보고는 한숨처럼 웃었다.
“그건 아직도 세고 있었네요.”
“셋 짚으면 그만둬도 된다면서요. 저 기록하는 사람이에요.”
미연은 공책을 덮지 않았다. 일간 두 글자, 壬과 癸가 동그라미 안에서 마주 보고 있었다. 둘 다 물이었다.
그 동그라미를 보고 있으니 어젯밤 엄마의 문자가 다시 떠올랐다. 월요일까지 나흘이었다. 미연은 공책을 승수 쪽으로 밀었다.
“그럼 이걸로 하나만 봐 주세요. 엄마가 공무원 학원을 등록해 놨어요. 석 달 치요. 월요일부터 가래요. 저 가야 해요, 말아야 해요?”
“그건 내가 정할 수 없어요.”
“사주에 안 나와요? 공부운 같은 거. 시험운.”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아요.”
“선생님은요?”
“나는 미연 씨 대신 정하지 않아요. 그걸 정해 주면 미연 씨는 학원에 가서 힘들 때마다 내 탓을 하고, 안 가서 후회할 때도 내 탓을 할 거예요. 미연 씨 일은 미연 씨 손에 있어야 해요.”
미연은 공책을 도로 끌어왔다. 어제부터 근거, 근거 하던 사람이 정작 제일 급한 질문 앞에서는 손을 뗐다. 목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그럼 이걸 왜 배워요? 글자 이름 외우고 화살표 그리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저 지금 월요일까지 나흘 남았어요. 엄마는 돈까지 냈고요.”
“오늘 배운 걸로는 아직 아무것도 안 달라져요.”
승수는 변명하지 않았다. 그게 더 얄미웠다. 미연은 공책을 가방에 쑤셔 넣고 일어섰다. 굳은 다리가 또 비명을 질렀지만 이번에는 무시했다.
“오늘은 먼저 내려갈게요.”
“조심해서 가요.”
붙잡지도 않았다. 미연은 바위를 내려서며 일부러 발소리를 크게 냈다. 잔돌이 또 굴렀다. 승수는 그 돌을 보지 않았다.
내려가는 길은 오를 때보다 길었다. 화가 가라앉자 그 자리에 부끄러움이 들어왔고, 부끄러움이 가라앉자 다시 화가 났다. 중턱쯤 왔을 때 아래쪽에서 누가 올라오고 있었다. 커다란 비닐 포대를 어깨에 멘 젊은 남자였다. 어제 마을회관 앞에서 이장에게 가슴팍을 찔리던 그 사람이었다.
남자가 길을 비켜 주려다 미연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어제 회관 앞에 계셨죠? 거북바위 그분이랑.”
“네.”
“할머니가 그분 드리라고 해서요. 햇밤이에요.” 남자가 포대를 조금 들어 보였다. “그분한테 배우세요?”
“배우다가 싸우고 내려오는 길이에요.”
남자가 웃었다. 웃으니 어제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그분이랑 싸우기 어렵잖아요. 말을 안 받아 주셔서.”
“그러니까요.”
남자는 포대를 반대쪽 어깨로 옮기며 잠깐 망설이더니, 미연을 보지 않고 물었다.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배우시는 분이니까. 제 사주에 피 볼 살이 둘이나 겹쳤다는 거, 그거 진짜 있는 말이에요?”
미연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어제 승수에게 똑같이 물었던 질문이었다. 그런 이름을 붙이는 사람은 있고, 근거를 붙이는 사람은 드물다. 그 대답을 그대로 옮길 수는 있었다. 그런데 그건 승수의 근거였고, 미연의 것이 아니었다.
“모르겠어요. 아직 거기까지 못 배웠어요.”
“그렇구나.”
남자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산을 올라갔다. 포대 속 밤송이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한참 들렸다.
미연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모르겠다고 말하는 일이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다. 저 사람은 마을 사람들 앞에서 이미 이름이 붙어 버렸는데, 그 이름이 맞는지 틀린지 말해 줄 사람이 산 위에 한 명밖에 없었다.
미연은 가방을 열어 공책을 꺼냈다. 뒷장의 근거 안 보임 칸 아래에 한 줄을 적었다. 피 볼 살 둘. 근거 확인 못 함. 내가 못 함.
그리고 내일도 올라가기로 했다. 학원 때문이 아니었다.